한국을 대표하는 고전학자 중 한분인 정민교수님의 한국천주교회사 책을 읽었습니다.

한국 한문학(漢文學)관련된 책을 여러권 내신 분인데도 여태 인연이 닿지 않아 이분의 책을 한권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2022년 내신 이 책을 드디어 완독했습니다.

교회사는 물론이고 인문학 책을 통틀어서 근래 나온 국내 저자의 책 중에 본문만 778쪽에 달하는 책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본문이외 주석과 참고문헌 그리고 색인까지 포함하면 이책은 총 901쪽에 달합니다.

총 12부로 이루어진 본문은 각각 8개장으로 이루어져 총 96장으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최근에 보기 힘든 ‘벽돌책’이라서 책의 체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꺼운 책이지만 이 책은 조선 정조때 조선에 전해진 서학( 西學), 즉 천주교의 조선포교에 대한 글이며 특히 초기1780년대부터 정조가 죽은 이후 순조원년인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까지만 다룹니다.

따라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아주 초기부분만 다룹니다. 범위가 이렇게 특정된 이유는 저자인 정민교수님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을 연구하시는 분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조선의 18세기, 특히 정약용을 비롯해 주로 남인(南人) 중심의 조선의 후기 지성사를 연구하신 분이기 때문에 정조 재위 당시 남인과 얽혀 있던 초기 조선 천주교의 연구까지 이르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주로 19세기 후반과 일제강점기를 보면 저도 덕분에 그 전반기인 18세기 말 세도정치 전야에 벌어진 조선 지식층의 동요와 서학의 영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용을 다 말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고 몇가지 사항만 간추립니다.

첫째, 한국 천주교에서 최초의 영세자라고 추앙(推仰) 받는 이승훈(李承薰)이라는 인물은 문제적입니다. 첫 영세자이면서도 천주교를 버린다는 배교(背敎) 선언을 세번이나 합니다. 석연치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둘째, 정약용은 초기 조선 천주교의 핵심이었지만 정조의 총애와 본인의 천재성 그리고 배교선언으로 신유박해에서 목숨을 건졌지만 천주교와 인연을 끊지 않았고 최초로 조선에 온 청나라 신부 주문모의 도피를 돕는 등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활약했습니다. 정약용의 강진 유배는 그가 정치적으로 패배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정조가 당시 중용한 남인 재상 채제공( 蔡濟恭)과 남인 세력에게 천주교는 관리를 해야하는 중요한 대상이었습니다. 반대파인 노론(老論)은 물론이고 남인 내에서도 천주교를 배격하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천재라고 불리던 정약용을 비롯해 황사영(黃嗣永) 뿐만 아니라 노론의 정통가문 출신으로 17세기 병자호란 당시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노론의 거물 김상헌( 金尙憲)의 후손인 김건순(金健淳)까지더 천주교를 믿게된 것입니다.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과 김건순은 천주교를 떠나서도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초기 조선천주교의 이론적 기반을 만들어 놓습니다.

넷째, 천주교가 조선을 파고든 이유는 조선의 사회구조의 모순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정조 사후의 세도정치기로 가는 길목으로 사대부 양반들이 평민을 착취하는 구조가 점점 공고해지는 시기로 19세기 민란의 시기를 앞둔 시점입니다. 공고한 신분질서로 사람대접을 못받았던 평민 노비 계층이 천주교에 호응이 있었고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죽어서 천당을 갈 수 있다는 교리가 하층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천주교는 더구나 국가전복을 기도하던 정감록(鄭鑑錄)과 접점을 가지면서 폭발력이 더욱 커졌습니다.

정조라는 임금은 흔히 개혁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자신 다른 유학자들을 압도하는 학자군주로서 대단히 보수적인 성리학자입니다. 그가 체제공으로 대표되는 남인을 중용해서 그의 재위 당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크지 않았을 뿐 그가 천주교를 용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체포하기 위해 비밀리에 일을 진행했는데 청나라와 외교문제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순조의 수렴첨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척사의
기치를 내걸고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킵니다. 초기 조선천주교 지도부들은 대부분 참수(斬首)를 당해 죽었습니다.

이들이 참수당한 이유는 공고한 성리학적 지식체제와 조선후기의 신분제를 그 기반부터 흔들리게 할 수 있었던 폭발력때문이었습니다. 부모를 섬기는 예를 최고로 아는 근본주의적 보수 성리학자들 입장에서 돌아가신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기를 거부하는 천주교도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400 여년을
이어온 조선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흔들수도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황사영이 백서를 써서 서양의 군함을 불러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한 일이 폭발력을 가진 것은 왕권에 외세를 불러들여 도전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대역죄(大逆罪)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되어 참수가 아니라 능지처참( 陵遲處斬)에 처해지게됩니다.

조선의 보수적 성리학적 질서는 이미 청나라에 16세기부터 예수회 신부를 비롯한 서양인들이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도 19세기가 다 되도록 소중화(小中華)인식에 깊이 침잠해 조산에서 활동하던 천주교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경제적인 기득권과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공고히 결합된 것입니다.

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사료비판에 대해 언급합니다.

주목할 것은 천주교에서 금과옥조로 받들어지는 이승훈이 쓴 것으로 알려진 ‘만천유고’이 위서(僞書)라는 사실과 초기 천주교 지도자 이벽이 쓴것으로 알려진 ‘성교요지(聖敎要旨)‘가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 F Martin, 1827-1916)이 쓴 상자쌍천(常字雙千)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입니다.

자료의 대조를 통해 검증한 것이므로 논란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천주교계를 둘러싼 과거사료의 집착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기본적으로 천주교에서 쓰는 용어들이 기독교에서 쓰는 용어들로 근거없이 바뀌어 있는데도 선학이 자료를 오독내지 오해했거나 무지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상황을 상식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19세기에 산 미국인의 책이 18세기에 죽은 조선 천주교 지도자의 책으로 바뀐 것이니 더이상의 설명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이 책에 나온 인물 중 김건순과 관련하여 이 인물에 얽힌 또 다른 선비 강이천에 대한 책을 소개합니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2011)

이책은 ‘정감록’과 천주교의 영향 뿐만 아니라 문체(文體, Style)을 둘러싼 보수적 철학군주 정조와 천재 김건순 그리고 강이천의 문화투쟁을 다룬 글입니다.

재미도 있고 정민교수도 이책을 실제로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정조의 경우 한동안 개혁군주로서 조선의 후기 문화를 꽃피운 임금으로 서술되다가 보수적 철학군주로 그리고 서도세자의 아들로서의 면모가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가 지니치게 뛰어난 성리학적 철학군주였기 때문에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때문에 후대 임금들이 외척의 세도정치에 밀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조는 본인만이 감당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어 놓았지 본인보다 못한 임금은 감당이 안되는 제도적 결함을 만들어 놓은 체 죽은 겁니다.

최근에 읽은 정조의 통치에 대해서는

정조평전 (민음사,2018)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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