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강원대 장경호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입니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1896.2-1897.2)만큼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고종은 재위시 경운궁에 기거하면서 경운궁 주위의 외국 공관 특히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많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힘없는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때로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때로는 본인의 신변 안전을 위해 외국 공사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사실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과는 1871년 발발한 신미양요( 辛未洋擾)를 통해 적대적인 관계로 처음 접했고, 그 이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가 1866년 대동강에서 평양군민에게 불탄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쇄국정책 시기 조선은 미국을 양이(攘夷)로 인식하고 결코 미국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청의 주일 참사관이었던 황준헌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전한후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영토확장 야심을 보인다고 본 청의 외교관은 먼 곳에 있는 미국은 아시아에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보았으며 중립적이고 평화적인 나라로 보았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과 구미국가 최초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을 체결합니다.
1880년대까지 러시아의 동진과 러시아의 연해주 식민지 추진은 청에게도 일본에게도 안보 상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해양세력인 신흥국 미국과 연대해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공사관이 설치된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처음엔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으나 점차 친일로 기울게 됩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진주하게 되고 심지어 일본군은 경복궁에 군사를 둘러싸고 사실상 고종을 경복궁에 가두어 버린 일이 발생합니다 ( 경복궁 점령사건,1894).
청과의 텐진조약에 따라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러 온 청군과 함께 조선땅에 온 일본군은 무단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무력시위를 하며 침략을 본격화합니다.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대해서는 단독 저서가 있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푸른역사,2002)
아무튼 일본의 무력시위에 위협을 느낀 고종의 신하들은 고동을 경복궁에서 피신시키기 위해 춘생문 사건(1895)을 일으켰지만 탈출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이 미국공사관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주장은 사실 직접적 정황이나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후 일어난 아관파천의 전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도피 이후 친일내각을 구성했던 김홍집이 군중에 살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고 친러파와 친미파가 득세하게 됩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불행하게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아관파천 이후에도 특히 미국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지속하고 조선의 중립화 방안에 대해 미국의 거중조정(居中調停)을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위 제 1조인 미국의 거중조정 조항을 고종은 진심으로 대하고 낙관적으로 해석한 것이었으나 미국은 단지 의례적 조항으로 보았습니다.
1898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 isolationism)에서 벗어나 점차 아시아의 이권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미 아관파천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조선이 들어가게 된 것을 안 미국은 조선이 중립화를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자 이를 반대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일본과 더 밀착하게 됩니다.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1890년대 당시 모두 조선에서의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이후 더욱더 일본과 밀착되었고 사실상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게 되고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의 이권이 개입된 중국을 전쟁터로 하지 않기로 일본과 외교적 합의를 하는 치밀한 전략을 추진합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권은 중국에서 더 크고 조선은 크지 않아 조선 땅이 전쟁터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인종주의자로 알려진 대통령으로 조선은 미개하고 일본은 선진적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하등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제국주의적 대통령이었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의 종전을 위해 포츠머츠 회담을 주선하고 협정을 추진하여 철저한 친일로 일관했습니다.
고종이 미국을 너무 선의(善意)로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 결국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고종 당시 조선에 와 있던 미국인들은 모두 이 미지의 나라에서 철저히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은 특히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하고 청국에서의 이권을 담보하기 위해 평안도의 의주와 용암포의 개항을 요구하였고, 러일전쟁 와중에 고종은 이를 허가합니다. 평안도에는 미국이 운영하는 운산 광산을 비롯해 많은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미 19세기 말부터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고종이 미국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이용해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인들의 이런 성향은 기본적으로 2023년 현재도 변함이 없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특히 구한말의 중요한 친한인사로 구분되어 온 미국 선교사이자 외교관 알렌 ( Horace Allen)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애서 나온 인용으로 봐서 그는 철저하게 미국 국무부의 지침을 따르는 미국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외교관일 뿐입니다. 결코 친한인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 한국의 직업 외교관들이 국가이익에 철두철미하게 봉사하는 이 미국 외교관의 모습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현재 한국 외교관들이 정말 국익을 위하는 건지 의심이 됩니다. 대통령부터 국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을 두둔하고 있어 이해가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