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대한제국 연구서를 읽었습니다.

여지껏 보아오던 국가론적 입장이나 기존의 정치사 입장에서 고종의 통치와 대한제국을 보았던 연구와 달리 이 책은 ‘극장국가(Theater State)’라는 관점에서 고종과 대한제국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퍼포먼스 (Performance)에 초점을 맞춰 대한제국의 성립과 몰락을 조명했습니다.

분석의 틀인 ‘극장국가’라는 개념은 약간의 추가설명이 필요합니다.

극장국가는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 (Clifford Geertz)가 1981년 저술한 인도네시아 발리의 국가의례를 분석한 저서에서 최초 소개된 개념입니다.

즉, 극장국가는 국가의례나 국가공식행사와 같은 과시적 스펙터클의 극적 효과를 통해 국가의 효력을 유지한다(p16)는 점입니다.

바꿔 말하면 극장국가의 보여지는 스펙터클의 극적 효과가 사라지면 국가의 효력 역시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경우 고종이 을미사변을 겪고 사실상 일본이 그를 경복궁에 감금시키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을 단행하고 이후 경운궁(덕수궁)으로 이어(移御)하고 정동의 구미대사관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로 칭합니다.
청일전쟁으로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던 청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일본이 들어오자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잠시 물러나게 한 상태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겁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힘이 없었던 고종은 자신의 황제즉위, 명성황후의 장례 등을 기획하고 주연을 맡으며 신민들에게 황제가 실제한다는 스펙터클을 제공한 것입니다.

그 프로젝트의 일부로 청과의 사대관계를 상징하던 영은문(迎恩門)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건설하는 퍼포먼스도 벌인 것이죠.

책의 3장은 이러한 정치적 퍼포먼스의 배경으로서 추진된 한성도시개조사업이 소개됩니다. 어쩌면 현재의 서울공간의 개발에 대한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사업으로 친미파로 최초 미국 워싱턴 공사관에서 일을 했던 박정양과 이채연이 주도하여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상의 근대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 사업으로 현재 종로2가에 위치한 탑골공원이 조성되었고, 교보빌딩 앞의 고종즉위 40쥬년 칭경기념비전이 만들어집니다.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이었지만 한성도시개조사업에 대한 존재자체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만큼 고종이 행한 행적에 대해 대중은 대체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이 생소한 도시계획에 대해 언급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고종이 행한 황제로서의 정치적 퍼포먼스는 절대주의적 전제군주로서 제국의 신민(臣民)들에게 황제의 존재를 보여줄 수 있었을 뿐이고 그 기간도 10여년에 불과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제했고, 이후 남산에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고종이 생각했던 한성의 근대도시계획은 틀어지게 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최초의 실내극장이었던 협률사(協律社)의 발생 기원을 추적하면서 실외에서 이루어진 대한제국의 황제의 거둥(擧動), 황제의 초상화인 어진(御眞)봉안행렬등이 모두 사라지게 되어 이런 스펙터클이 보여주는 극적 효과도 사라져 대한제국의 현실 (reality)을 신민들이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현실과 허구가 서로 엉켜있던 스펙터클이 사라지고 허구적인 퍼포먼스가 모두 실내의 극장 무대로 집중되자 현실이 눈에 보이게 된 것입니다.

본문 349쪽으로 적당한 크기의 연구서입니다만 상세한 주석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책과 몇가지 관련 연구서를 추가적으로 소개합니다.

Geertz, Clifford.,Negara: The Theatre State In Nineteenth-Century Bali(Princeton,1981)

Takeshi, Fusitani, Splendid Monarchy: Power and Pageantry in Modern Japan (California,1998)

두 책 모두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으며, 두번째 책은 일본 메이지시대의 국가의례에 대한 연구서입니다.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 앞에서 직접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전제권이 강한 권력일수록 더욱더 의례에 집착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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