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계승범 교수님이 2014년 쓰신 16세기 중종 당시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조선의 유교화 과정 (Confucian transformation)을 다룬 책입니다.

제가 두번째로 읽은 계승범 교수의 책입니다.
첫번째는 ‘정지된 시간(2011, 서강대 출판부)’로 19세기 고종말까지 이어진 조선의 ‘대명사대의식’에 대해 기술한 책입니다.

이 책은 ‘정지된 시간’에서 보여준 극단적 대명사대의식이 언제 누구로부터 왜 시작되었는지를 밝히는 책입니다.
그러면서 조선전기 (15-16세기) 정치사와 조선의 성리학 수용과정을 살핍니다.

몇가지 중요한 논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조선이 유학을 정치원리로 삼아 건국하였지만, 조선의 정치현실은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고, 왕권의 권위가 없고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태조에 대한 태종의 왕위찬탈, 단종에대한 세조의 왕위찬탈이 일어났고, 중종도 사실상의 왕위찬탈로 보위에 오릅니다. 17세기 인조 역시 왕위찬탈로 왕위에 오릅니다.

왕위찬탈(王位簒奪)이란 왕이 될 수 없는 자가 왕이 된다는 말로 특히 유교국가의 근본이 어느정도 정립된 이후에 일어난 세조의 단종폐위와 욍위찬탈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끊임없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후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신하가 임금을 폐하고 중종을 즉위시킨 중종반정(中宗反正)도 반정으로 포장되었으나 신하가 욍을 폐위시키고 유배시켰고 죽이기까지 한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15세기 조선은 명을 중원을 통치하는 대국으로 보았지만 절대적인 천하(天下)의 중심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즉 고려말부터 유학 특히 성리학이 정치권에 영향을 미쳤지만 명을 절대적으로 보고 사대(事大)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정치사상운동으로 사림(士林)이 등장하고 유교적 덕목인 의리(義理)의 가치를 절대시하게 되자, 조선은 스스로 천자인 중국의 번국 (藩國)으로서 명에대한 사대를 단순 외교관계이상의 부자관계, 천륜관계로 절대화합니다.

이는 이후 일어나는 임진왜란으로 대명사대관계가 더욱 절대시되고 인조때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처한 현실과 극심한 모순으로 들어나게 됩니다.

셋째, 기존의 조선전기 학설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저자가 강단역사학의 주류인 서울대 역사학과 출신이 아니고 미국의 한국사를 주도하는 워싱턴 대학(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공부를 하신 이력이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단 사학에서는 그리고 교과서에서 사림은 지방에서 은거하던 유학자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해서 조선의 정치에서 영향을 준 것으로 설명을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즉 편의적으로 조선의 사대부를 훈구(勳舊)와 사림으로 나누어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지배계층으로 설명하지만 이 이론의 역사적 근거가 없고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도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기록과 족보를 봤을 때 사림과 훈구는 서로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얽혀있고 무엇보다 공신이나 훈구세력으로 분류된 인사들 중 사림에 우호적이거나 최소 묵인하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한 사림의 출신지는 지방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한양이었고, 심지어 고려이래 명문거족의 자제나 공신의 자제 등 훈구세력으로 불려도 무방한 자제들이 사림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사람은 훈구와 지향점이 다른 같은 사대부이자 조선의 지배층으로 한양을 중심으로 중앙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세력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림을 훈구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획계층 또는 새로운 계급으로 봐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16세기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유교적 의리를 절대시하면서 각종 물질적 가치를 폄하하고,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절대시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적 성리학으로 바뀝니다.

이때 유교화 과정에서 일어난 이런 의리 중심의 가치 절대화는 성리학적 사대부가 대지주이자 지배층으로 무한한 권력을 누리지만 경제와 군사에 힘을 쏟지 않는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부실한 군사문제로 일본의 침략을 받은 전쟁이 임진왜란이고, 왜란 후에도 군비증강에 손을 넣고, 절대적 대명사대주의에 빠져 청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다가 공격을 받은 전쟁이 병자호란입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의리만 중시하고 경제적 이익이나 군사문제는 군자(君子)의 일이 아니며 격이 낮은 소인(小人)이나 하는 일이라며 폄하했습니다.

조선 지배계층의 이런 절대주의적 성리학적 시각을 감안할 때, 두번의 전란을 겪고도 나라가 거의 망할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변하지 않는 사대부들에게 불만이 쌓이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선은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명을 섬기는 지금 입장에서 이해할 수없는 의식을 19세기 말까지 이어온 겁니다.

끝으로 ‘유교화 과정(Confucian Transformation)’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즉 조선이 고려 당시의 불교국가에서 유교국가로 바뀐다는 말인데, 이책에서는 조선이 점진적으로 시간을 가지고 변화했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1388)이라는 극적인 정변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화는 계기가 되었지만 조선의 건국은 고려의 지배계층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실 혁명(Revolution)의 요소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고려 말 성리학이 송나라로부터 전해진 이래 고려의 지배층이 성리학을 정치지배원리로 받아들였고, 점차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 사회로 퍼져나가 16세기 중종 때 조선에 정치원리이자 사회통치원리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유교화 과정’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읽었던 ‘한국의 유교화 과정(2013)’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책은 정치과정보다 조선사회의 기반인 가족(家族), 친족(親族), 결혼제도가 고려이후 어떻게 변했는지를 관찰한 책입니다.

유교사회에서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보다 중요한 천륜(天倫)으로 이해되는 만큼 유교의 종법(宗法)과 관련된 분야를 살피는 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한 가계의 족보가 부계(父系)를 따라 정리되고 남자가 가는 장가가 여자가 오는 시집으로 바뀌는 것 모두 조선의 유교화 영향으로 그 이전에 없던 현상이라는데 주목합니다.

인류학적 방법론을 쓴 위의 책이나 각종 사료를 분석하고 장기사 (長期史)의 관점에서 조선전기 유교화 과정의 원인 결과를 추적한 이 책 모두 조선이 어느날 갑자기 유교국가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조선사 자체가 교과서에서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관련해 해방이후 처음 조선전기의 역사를 훈구-사림의 대립구도로 설명한 이병도( 李丙燾1896-1989)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병도씨의 이력을 보면 일본 유학후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이력이 있습니다. 그후 서울대애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습니다. 아무튼 이후 이병도의 훈구-사림 대립구도는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고,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하지만 이 설명은 가설에 지나지 않고 사료들이 증명하는 바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훈구-사림은 지향이 다른 같은 지배층으로 한양의 중앙정치무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사대부계층일 뿐이고, 조선의 지식유통단계로 보더라도 중국과 직접 교류가 쉬운 한양이 성리학의 최신 사조를 더 쉽게 접할 수 있지 지방에 사림이 근거한다는 설명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최근 제도권 밖에서 활동하는 역사가들이나 비주류를 자처하는 학자들 중에서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도 않고, 사료에서 증거도 찿을 수 없는 과거의 이론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자의 양심의 문제이지 주류와 비주류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병도씨의 이론이 도그마(dogma)가 되어 새로운 시각의 이론을 배격한다면 이는 작게는 한국의 학계에 그리고 넓게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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