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된 시간 -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서강학술총서 27
계승범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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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부터 1907년까지 약 200여년의 조선후기 시기 대보단((大報壇)이라는 제단에서 명의 삼황제에게 의식을 올리던 조선 지배층들의 의식의 변천사를 연구한 책입니다.

서강대 사학과 계승범 교수께서 2011년 쓰신 책입니다.

이책의 핵심적인 단어 하나만 고르라면 바로 존명의리(尊明義理), 즉 명나라를 존경하고 의리를 지킨다라는 말입니다.

다른말로 제조지은 (再造之恩)이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이말의 뜻은 (임진왜란으로부터) 명나라가 조선을 지켜준 은혜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역사를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기보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수긍하는 편이지만, 오늘의 주제는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려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 후기 양반지식인들의 두 믿음은 사실 ‘이상하다’ 내지 ‘병적이다’라는 평가말고 다른 어떤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대보단의 의미도 (이미 망한) 명나라에게 큰 보답 (大報)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라는 의미입니다.

1704년 중국의 중원은 이미 만주족의 대청국(다이칭구룬; 大淸國)이 지배하고 있었고, 조선은 병자호란의 패배로 이미 청에게 삼전도에서 항복(1637)을 했습니다. 명나라는 청에 의해 1644년 멸망했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불 때, 아무리 명나라의 은혜로 나라를 구원받아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1644년 망한 명나라를 60년이나 지난후부터 조선의 궁궐인 창덕궁에 제단을 만들고 왕이 친히 200여년이나 제사를 지내고, 더구나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침탈이 시작되고 만국공법(萬國公法)이 도입되는 시기까지 이 제사가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계승범 교수께서도 이런 제사는 세계사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이런 이례적 의례의 정치적 함의는 왜 이 책의 제목이 ‘정지된 시간’인지 알려줍니다 .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 양반들은 명에대한 화이론(華夷論)과 존주론 (尊周論)적 대외관계론과 세계관이라는 관념적 세계에서 단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체 1644년 이후 그대로 멈춰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지된 시간’입니다. 이미 현실은 1664년 이후 오랑캐인 만주족이 중국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이전 병자호란의 결과 삼전도에서의 항복으로 청과도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수립하고 중국의 왕조로서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하고 있었는데도 조선의 지배층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사대부 지배층은 이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그들의 ‘무능’을 검증받은 셈이었습니다.

무능한 사대부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머리 속의 관념에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희의 유학인 성리학만을 신성시하며 유학의 다른 유파인 양명학조차 경원시하던 양반 사대부들은 사실상 호위호식하며 아무 생산활동도 안 한체 모든 부담을 양민들과 농민들에게 지우고 있었습니다.

같은 양반이라도 기호지방이나 영남출신만 출사의 기회를 가졌고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은 지역적 차별을 받았습니다.

무인을 천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니 생산성이 올라갈 리 없고 국방력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평양으로 의주로 달아가기 바빴고 심지어 명나라에 망명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일본과 명은 조선의 통치력 부재를 틈타 조선의 분할을 가지고 외교교섭까지 벌였습니다.

조선이 명에게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국방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국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양반들은 임진왜란에서 명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나라를 지킨 은혜 ( 재조지은, 再造之恩)’라고 명을 다시 떠받드는 어처구니 없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특히 성리학의 노론(老論)계통이 이런 생각을 교조적으로 밀어붙인 장본인들입니다.

조선시대 송자(宋子)로 불린 송시열(宋時烈)이 현대에 와서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런 황당한 믿음과 생각을 조선지배층에게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노론 성리학자들의 폐단은 단지 17-18세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정조 사후 19세기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주역이 되어 조선의 정치 경제를 망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순조이후 임금들이 사실상 척족세력에 휘둘려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19세기에 수많은 민란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노론 성리학 지배층들이 국정을 100여년간 농단했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의 사익을 위해 국가의 통치구조를 와해시키고 공권력을 가지고 사익추구를 했으니 국정농단 말고 다른 말을 찿기 힘듭니다.

즉 이들은 교조적이고 완고한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조선을 세계에서 고립시키고 국가의 통찰력을 사적으로 이용해 본인들 배를 불린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국가가 힘이 없고 군사력이 약하면 어떻게 이를 양성하고 더 강하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아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런 실질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명나라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고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실제 청으로부터 국왕의 책봉을 받은 외교현실을 그들이 오랑캐라는 아유 하나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조선이 20세기 초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미 16세기 임진왜란때부터 그 씨앗이 있었고 병자호란 이후 더 확고해졌다고 확인하는 건 참 씁쓸합니다.

일단 조선의 사대부가 결국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들을 더 알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리 의리가 중요하다고 해도 타국에서 망한 나라의 제사를 자그마치 200여년간 지내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이상한 것이고 성리학자들이 와 병적으로 이런 행위에 집착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심없이 조선의 지배층을 바라보려 해도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허우적거리면서도 기득권은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계몽절대군주로 알려진 정조는 사실 과거와 존명의리에 집착한 보수적 절대군주였다는 주장입니다. 정조는 성리학적 지식에 통달한 성리학적 철인군주이만 계몽적 절대군주는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하십니다.

서양사에서 계몽주의 (enlightenment)의 영향을 받은 동유럽 지역의 절대군주를 뜻하는 계몽절대군주라는 개념은 성리학적 전제군주인 정조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정조시대를 과장되게 근대의 길목으로 보는 건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조가 존명의리(尊明義理)를 철저히 숭상하고 대보단의 의례를 국가의례로 확립했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정조 때 일어난 북학 (北學)파는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을 하는 일군의 학자들인데 저자는 그들이 소수였다고 주장하십니다. 저도 여기 동감합니다.

명이 멸망한지 100년이 넘도록 ‘재조지은’과 ‘존명의리’를 핵심적 세계관으로 믿고 있는 주류 사대부들이 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북학을 반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이후 북경에서 많은 서양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고 사행(使行)을 통해 일부 양반들이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할 수 있었지만 교조적이고 완고한 성리학자들은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하게 망한 명나라와의 의리만을 지키는 행보를 지속했습니다.

이책은 조선 양반지배층의 세계관이 현재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상당히 병리적 (病理的,pathological)인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반들이 지배층이면서도 통치의 기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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