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44년의 비원 - 새로 읽는 고종시대사
장영숙 지음 / 너머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책은 총 12장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약 380쪽의 분량과 미주가 같이 책 뒷쪽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고종의 재위기간 44년을 망라해 그의 개화 근대화 정책에 대한 전개와 인재등용, 당시 일어났던 정치적 격변, 즉 운요호 사건, 강화도조약,임오군란,갑신정변, 갑오경장, 청일전쟁, 러일전쟁, 을미사변,아관파천,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그리고 고종 독살설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다룹니다.
각각 책 한권이상이 될 주제를 다루다보니 너무 겉핥기 식으로 지나가 실망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조선을 ‘망국(亡國)으로 이끈 군주로 알려져 있고 따라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조선의 임금입니다.
그가 이루려고 했던 조선의 부국 강병책이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재위기간동안 일제에 의한 조선병햡이 이루어져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조, 숙종과 더불어 가장 오랜기간 재위에 있었던 군주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고종재위기간 중 일제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맺어지고 을사늑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조차 ‘망국’에 가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고종 당시 중요한 정치가로 흥선대원군과 민비가 있지만 이 책애서는 그저 조연으로만 다루어집니다.

흔히 극렬한 수구 정치인으로 알려진 두 인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책에서 흥선대원군이 정권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과연 그런 인물인지는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고종은 강고한 유교사회인 조선을 그래도 나름대로 근대화시키고 강한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한 군주이기도 합니다.

다만 충효를 기반으로 덕치를 강조하는 유교정치와 근대적 입헌정치 사이에서 방향을 잡지 못한체 자신이 생각했던 근대화와 부국강병책울 이루어보지 못한 체 생을 마친 비운의 군주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도 여러번 언급했듯,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조선이 대처를 못한 것은 정조 사후 만연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의 악영향이 컸습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 반남박씨 등 소수의 세도가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농단(壟斷)하며 부정축재를 일삼고 군사력을 기르는데 소홀히 한 영향이 큽니다.

사실 조선 유림 중 척화세력들은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전쟁의 패배와 국치를 당하도록 내버려 둔 댓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이미 멸망한 명을 사대(事大)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이후 발생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본인들의 무지로 전란을 초래해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했으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기존의 철학을 무시하고 새로운 철학을 찿는 것이 일반적인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일반적이라고 할텐데, 조선의 사대부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명이 멸망하고 만주족과 몽골족의 연합 왕조인 대청제국이 들어섰지만, 조선의 사대부 특히 보수 척화론자들은 화이론(華夷論)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체 유교적 의리만 강조하며 망해 없어진 명에 대한 사대만을 강조하고 조선에 굴욕을 안긴 청나라를 무시하는 국제정세상 일어날 수 없는 인식을 계속 고수했습니다.

군신의 도리가 의리를 저버리면 안된다고 하면서 백성들은 철저하게 저버렸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대청제국은 17세기 강희제 재위기간 동안 몽골의 서쪽 준가르제국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였고 러시아 제국과 국경선을 확정짓는 등 동아시아 맹주로서의 영향력을 강화했으나 조선은 이들이 오랑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당시 북경에 들어왔던 서양의 문물에 대해 백안시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무시의 결과가 위기로써 고종재위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따로 군사를 키우지 않고 농민들을 차출해 병력으로 차출하던 조선이 재대로 된 군사력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고, 19세기 서구 제국 열강들과 일본은 근대화된 육상병력과 대양해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유교적 전제군주로서 주권이 강화되기 위해 군주권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근대적 정치행정제도를 도입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유교적 전제군주인 고종에게 독립협회에서 요구한 의회의 설립요구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요구였고, 이미 지식인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알고 이를 실현해 보려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어 정치적 불안정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이유도 전제군주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지키려하는 고종 앞에서 ‘입헌군주제’를 요구했고 고종은 이런 요구를 왕권에 대한 쿠데타로 규정하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등을 참살하게 됩니다.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와 서구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자신의 전제군주권이 약화되는 건 볼 수가 없었던 고종은 따라서 개혁 자체가 흐지부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서구적 근대화와 봉건적 전제군주제는 서로 맞지 않는 짝이니 말이죠.

두번째는 군사력 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외세에 의존한 점입니다.

고종은 대원군 섭정기를 지나 친정을 시작한 이후 유선 일본에 도움을 요청해 신식 군대를 만듭니다. 그리고 구식군대를 차별하고 냉대하는 바람에 군사반란이 일어납니다( 임오군란).

국가의 재정이 빈약한 가운데 아무 대책없이 신식군대 양성부터 하다보니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게 되고 이 두나라가 조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고종은 임오군란을 통해 통치권의 위기를 경험한 이후 신식군대 양성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이후 명성황후의 외척인 여흥 민씨 세력과 오로지 왕권 강화에만 몰두 합니다.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난 이후에도 변변한 군대가 없던 조선은 청나라애게 군대를 요청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청의 노골적 내정 간섭이 시작되고 청과 일본간의 탠진조약에 따라 청순과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게 됩니다.

수백년간 소중화를 자처하며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하던 사대부 양반들의 사대부의는 19세기 말 청의 노골적 내정간섭을 초래했습니다.

북양대신 이홍장과 원세개는 조선이 오랜기간 중국을 숭앙해오던 속국이라면서 완전한 속국으로 정치에 간섭하겠다고 하자 손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실제 개화파 양반인 김윤식, 어윤중 같은 이들은 청의 이런 요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500년 사대의 결과가 어처구니없이 나타난 겁니다.

저는 이 상황을 되짚어 보고, 조선 내내 중국에 사대를 했어도 ‘사실상(de facto)’ 조선이 독립국이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말장난인지 실감합니다.

고고한 유교 도덕정치 한다고 조선 내내 사대부와 조선 지배층은 군사력을 키우는데 소홀했습니다.

더구나 16세기 임진왜란, 17세기 병자호란을 당해 국토가 절단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사대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후기로 갈수록 군대도 안가고 백성들애게 과도하게 세금을 물리고 재물을 빼돌려 부정축재를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앉아 ‘덕치’를 해야 한다면서 자신들이 저지르는 일과 정반대의 주장을 했습니다.

위선적입니다.


결국 국력의 근간인 군사력이 없는 조선은 청과 일본이 동학농민항쟁을 빌미로 조선에서 전쟁(청일전쟁)을 할때도 속수무책이었고, 러시아와 일본이 동해에서 해전을 벌이고 일본이 경의선과 경부선 철도부설권을 요구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100만명에 달하는 반면 고종이 겨우겨우 양성한 조선의 군대는 겨우 3만 뿐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은 사대부가 의사결정하던 전제군주제 국가이므로 19세기 말 조선의 이런 참혹한 국력의 상황은 전적으로 사대부와 국왕의 잘못입니다.

너무 명백해서 논란조차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대로 된 군대가 있었으면 청일전쟁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고 고종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러시아 영사관으로 파천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19세기 조선사를 읽으면 유학이라는 학문체계가 서양의 물리적 힘을 당해낼 수 없는 허황된 체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조선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주자의 유학은 사람의 내면은 보는지 몰라도 삶의 조건 따위는 너무나 무관심했습니다.

지금 이런 저의 평가는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니 이런 단점이 보이는 것이지만 유교가 전부였고 어설프게 서양을 알던 19세기 말의 조선에서는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가 무너지는 절망감과 황당함을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소수의 양반들이 책임을 방기한 체 의무만 짊어진 다수의 백성들의 생산력에 빌붙어 살던 시대가 조선시대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물질적인 것을 만들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우대하지 않고 착취하면서 고담준론만 이야기 하던 일하지 않던 양반들이 상층을 이룬 사회가 조선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19세기 조선이 왜 ‘민란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 그 원인을 고종시대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며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고종시대사 관련 저서 몇가지 소개합니다.

고종시대의 한러관계사 관계해서 감영수 교수의 책 2권을 주목합니다.

미쩰의 시기(경인문화사,2012)- 을미사변을 일본 자료 뿐만 아니라 러시아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한 책입니다. 명성황후가 기존의 해석대로 과연 수구파만을 대변한 봉건세력이었는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100년전의 세계일주(EBS Books,2020)- 친러파이자 근왕세력이었던 민영환이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참석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을 요청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사료가 인용되었고 당시의 기록인 ‘해천주범(海天秋帆)’을 기반으로 재해석 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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