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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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닌 살아오는 동안 행복하셨어요? (...)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나요? 이를테면 어떤 그림이나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거나 책 속의 어느 한 구절을 읽으면서 세상이 갑자기 팽창하는 느낌, 그러면서 동시에 완벽하리만큼 순수한 어떤 핵으로 응축되는 그런 느낌을 맛보신 적이 있었나요? 제 말뜻을 아시겠어요? 모든 것이 갑자기 딱 들어맞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예컨대, 우리의 오타와 집 정원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런 느낌 같은 것. 제 말은 어머니의 인생이 충분한 것이었느냐는 거예요. 어머닌 준비가 되셨나요? 아니면 겁이 나시나요? 제가 뭘 해드리면 좋죠? " (p432)

 

 

 

캐럴 실즈의 대표작이자 퓰리처상 수상작인 「스톤 다이어리」는 데이지 굿윌 플렛이란 여인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여정을 다룬 소설이다.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스토너」를 연상시키는 책이었지만 감상은 조금 달랐다. 스토너의 삶이 슬픔과 위안을 동시에 주었다면 데이지의 삶을 통해선 공허와 쓸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1905년에 태어나 구십여 해의 짧지 않은 생을 살았던 데이지는 탄생의 순간을 비롯해 비극적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어떤 면으로는 안정적인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이 공허한 느낌은 무엇일까.. 불행이든 행복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긴 생애를 볼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일들로 채워진 소설이었지만,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던 현실성 때문인지 마음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 같은 불편한 여운이 오랫동안 가시질 않았다. 리뷰를 쓰기엔 내 마음의 에너지가 부족한 것 같았고, 쓰지 않고 넘어가기엔 체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소설이어서 며칠 동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데이지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총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은 장마다 대략 십 년 정도의 삶이 담겨 있는데 그 내용을 이루는 형식들이 다채롭다.

 

 

 

"인생이란 끝없는 증언의 연속이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치스러운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간에, 우리의 상태는 목격될 필요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남들에게 관심받기를 원한다. 우리 자신의 추억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 다른 설명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식들, 탄생과 사랑, 죽음 같은 의식들은 누구에게든 그리고 소용이 있든 없든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얼마나 우연하고 일시적인 일인가? " (p64)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데이지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선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목소리들이 필요했다. 한 사람의 삶이란 어느 날 갑자기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삶으로부터 연결될 뿐만 아니라 생의 순간들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마치 돌조각을 하나씩 쌓아 올려 탑을 만들어 가듯 저마다의 위치에서 볼 수 있었던 면면들이 모이고 모여 입체적인 구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전체의 모습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또한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숨겨진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존재는 누군가에겐 선명한 페이지로 기록되지만 그것 역시 어느 한 면일 뿐이며, 대개는 읽다만 페이지가 되거나, 뜯겨져나간 페이지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겐 해독 불가한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워 봉인해 놓은 페이지들도 있다.

 

 

 

"모든 인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게 마련이다. " (p159)

 

 

 

소설 속 데이지의 삶은 곧은 선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해서 마치 우리들의 실제 기억을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데이지의 내면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부가 가려져 있거나 텅 비어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일생을 그린 소설임에도 타인에 의해서만 묘사되는 손님처럼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는데 실제로 한 사람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것들이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언가로 늘 분주했던 삶이지만 정작 그 안에 자신은 없었던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 또는 나 자신을 보는 것도 같았다. 그저 주변의 필요에 의해 그에 맞는 조각처럼 살았던, 그래서 몸이든 마음이든 쉼 없이 움직여야 했던, 공허를 마주하기 싫어서 더 분주했지만 그럴 때마다 또 다른 공허를 찾아내어 갈수록 텅 비워지고, 결국엔 공백이 되어버리고 마는 그들처럼 말이다.

 

 

 

"그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야. 그 속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 (p474)

 

 

 

그래서 또다시 몰두할 무언가를 찾게 되는 것 같다. 데이지는 우울했던 시기를 힘겹게 넘기고 맞이하게 된 노년의 평온했던 어느 때에도 자신이 아니라 두 분의 아버지(돌아가신 친정아버지와 생존 여부를 모르는 시아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나이 차이가 많던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장성한 자식이 셋이나 있었고, 손자와 손녀들도 여덟이나 있었지만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것에는 무게가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즈음엔 미래에선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과거에 매달려 끊임없이 되새김질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있던 연결고리들을 찾아내고, 그 연결 속에서 또 다른 공허를 찾아냄으로 가슴 아픈 퇴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고독일지도 몰랐다. 인생 그 자체의 불행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엄습하는 고독감 말이다. " (p41)

 

 

 

"데이지 굿윌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영상들에서 이상한 점은 그녀가 언제나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사람 그림자라든가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다.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용기 있는 순간이든 부끄러운 순간이든 적어도 한 사람의 증인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플렛 부인은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이 일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그 일을 견딜 수 없었다. 여든 살이 된 지금 이 순간에도. " (p451)

 

 

 

한 사람의 생이란 홀로 존재하는 순간을 증언할 수 없다. 글이나 영상으로 남긴다 해도 그것을 읽고, 봐줄 사람이 없다면 그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소설 속 데이지의 시아버지처럼 무려 백십 세가 넘은 장수의 삶을 누렸던 사람일지라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톨이로 살아가던 사람의 생은 목격한 사람도, 증언해줄 목소리도 없기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공허하다. 그분의 존재는 데이지가 자신의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었던 것이다. 나의 누군가들 역시 적어도 내게 있어서 만큼은, 내가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 존재감이란 더없이 무력하다. 어쩌면 나 역시도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나라는 존재를 되새김질하기 위해 읽고 쓰는 것일 테니 말이다.

 

 

 

"나로서는 단 한 번도 소멸된 시간을 이해해본 적이 없다. (...) 이러한 일들은 우리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무력하다는 것과, 우리 인생의 태반이 낭비되고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53)

 

 

 

우리 모두에겐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모든 생은 그 최후의 어둠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매일매일은 비슷한 듯 달랐으며 비통했거나 행복한 순간들도 분명 있었지만, 다만 언제 태어났고, 누구누구의 누구였으며, 언제 사망했다는 몇 줄로 요약되고 만다. 데이지의 삶만을 보더라도 그녀 혼자서 페이지를 모두 채우는 경우는 없었다. 구십여 년을 살았음에도 데이지의 것이라곤 서랍 하나에 담긴 흐트러진 몇 가지의 물건들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 시간들은 어느 곳으로 소멸되는 것일까..

 

 

 

"돌이 만들어내는 기적은, 단단하고 무감각한 물체를 땅속에서 꺼내어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 (p163)

 

 

 

책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나는 '머시 스톤 굿윌'을 생각했다. 주인공 데이지의 어머니였던, 스톤월의 고아원 출신이었기에 '스톤'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으며 무지로 인해 데이지를 낳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임신한 줄조차 몰랐던 그녀를 말이다. 평생 동안 이방인이었던 머시 스톤은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데이지를 세상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데이지의 탄생은 곧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상실을 경험했던 데이지는 자신에겐 어떤 '결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에게 없는 것은 바로 확실성의 핵이며, 내면의 값진 보석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더욱 삶에 밀착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인생에 달라붙으려면 상상력의 활동으로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스톤 다이어리」라는 책의 제목처럼 데이지가 펼쳐가는 삶은 어머니의 안쓰러운 삶을 연장시키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데이지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테고, 실제로 데이지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머니를 낳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는 그 대상이 나였을 때를 포함해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서야 증명되는 것 같다.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 서로의 무게를 전달해 줌으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밋밋한 돌에 광채를 만들어 영원성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결국 언젠가는 바람이 빠지듯 소멸되어 버리고 말 인생일지라도 나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주세요. " (p434)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며 쓸쓸했던 이유는 한 사람의 전 생애를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며, 언제고 닥칠 이별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은 미풍에도 흔들리기 쉬운 우리들의 삶을 알고 있기에, 가장 힘든 순간엔 어쩔 수 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들이기에, 그래서 데이지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했던 마지막 말 역시 나의 것이란 걸 알기에..,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조금이나마 더 고민하며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읽자마자 별 네 개를 클릭했지만 묵직한 돌 하나를 올려놓은 것 같은 긴 여운 때문에 다시 다섯 개를 눌러 본다..)

 

 

 

"난 평온하지가 못해.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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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 2016-03-13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

물고기자리 2016-03-14 09:3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한수철 2016-03-1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문득(핀트에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이승우의 소설 `부재증명`이 생각나네요. (제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나 자신이, 나의 부재(혹은 존재)를 증명하는 데 아무 소용도 닿지 않는 상황 같은 거요.

수많은 혀끝이 나 자신을 손쉽게 죽여가도, 나를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 그런, 어떤.

아무튼 소개해 주신 책을 읽어봐야겠구먼요.^^

물고기자리 2016-03-14 09:34   좋아요 0 | URL
존재의 증명도 그렇지만 부재증명이라니 어쩐지 더 서글픈 것 같아요..

사람이란 자신의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직접 실감하지도 못하며 사는 걸 보면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눈길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소한 중요한 순간만큼은 목격당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요. 서로를 위해서 말이죠.. 어쩌면 서로의 뒷모습을 지켜봐 주는 게 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요.ㅎ

저도 이 소설은 작년쯤엔가 아이리시스 님의 페이퍼에서 보고 읽어야지.. 마음먹고 있던 건데 이제야 읽은 거예요.ㅎ

저는 한수철 님이 어떤 책을 언급하시면 되게 궁금해져요^^

서니데이 2016-04-04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4-05 12:14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접속했는데 다정한 서니데이 님이 다녀가셨군요^^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점심 맛있게 드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