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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평점 :
잘라내고, 쳐내고, 압축해 놓은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은 최소한의 형태만 갖추어 놓은 조각 작품을 보는 듯했다. 더 이상 축약할 것이 없다 싶을 만큼 깎아내고 연마해놓아 응시하는 대상을 향해 수직으로 파고드는 시선을 만들어 준다. 마치 소리 내고 싶은 음을 정확히 한 음씩만 연주하는 것처럼 집중하고, 음미하고, 기대하게 했다..
"난 혼자 있을 필요가 있었거든. 지금도 그렇고. 내 인생에서, 내 삶의 본질 안에서, 혼자이고 싶다는 욕구를 느껴. " (p28)
"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주리라. " (p95)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형의 글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글의 볼륨을 줄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금만 작게 말해주세요.., 그래도 다 들리거든요.. '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 말이다. 문장의 밀도가 아니라 문장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의 차이인 것 같은데 카메라를 의식하는 배우의 연기처럼 강요하고 설득하려는 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나에게 가장 설득적인 글은 독자가 아닌 스스로를 이해시키려는 글이다. 높이높이 쌓아올리는 방식보단 좀 더 깊고 깊게 파고드는 글.. 파스칼 키냐르의 글엔 적절한 공백과 침묵이 흐르고 있어 생각 속으로 고요히 침잠할 수 있었다. 한 음, 한 음을 내리누르는 듯한 단조의 여운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연히 그곳으로 달려간다. 어떤 것이 내게 결여된 그곳에서 내가 헤매고 싶어지리라는 느낌이 든다. " (P123)
"길을 잃으려 했고, 길을 잃는 게 좋았고, 마침내 길을 잃었다. " (P134)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길을 잃기 위해서인 것 같다. 선호하는 책들은 문장이 간결하든, 복잡하든 모두 그런 유형이었다. 낯선 장소에 홀로 있을 땐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최대한 보고, 듣고, 기억하게 된다. 낯섦에 반응하는 나를 통해 새삼 나라는 존재를 예민하게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시선을 지닌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기도, 새로운 가능성이나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방향성이 뚜렷해 오직 그 길로만 가야 할 것 같은 글보단 이곳저곳을 방황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좋다. 그 방황조차도 강압이나 강요 없이, 작가 스스로 먼저 탐색하기 시작한 길을 관찰하듯 따라가는 게 좋다. 먼저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내게 맞는 길을 찾아보며 말이다. 길을 잃고 나서야 나를 되찾을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발밑에서 도로의 모래가 밟혀 서걱거리는 소리 덕분에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던 기억이 나요. " (P273)
떠나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으로, 생각으로 늘 떠나야 하는 사람들. 홀로 있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 정적이 필요한 사람들 말이다. 머무는 동안엔 보지 못 했던 새로운 시선을 얻어 나의 발밑에서 서걱거리는 그 불안의 실체를 직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방향성은 섣부른 확신이 아니라 발끝의 예민한 감각으로 그 서걱거림을 알아차릴 때 돌연 깨닫게 된다. 떠날 수 있어야 공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떠나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틀 안에 갇혀 늘 같은 시선으로, 같은 생각으로 머무는 것은 공생이 아닌 착취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중간에서 만나려면, 그것도 즉각적으로 만나려면 항상 그 자리에서 숨 막히도록 머물지만 말고 잘 떠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공생 관계에서는 각자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상대방을 사정없이 착취한다. 만일 하나가, 우연히, 상대방을 과도하게 착취하는 경우, 그로 인해 파트너는 질식한다. 상대방이 그를 굶주리게 하면, 그 자신도 죽게 된다. 공생 관계를 균형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극도로 불안정한 대립이다. " (P318)
자신의 음을 잘 아는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 나는 동시에 나의 음을 연주하게 된다. 자신에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몰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로가 동시에, 타인과 나의 세계를 연주하다 보면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화음을 만들어 낸다. 이 책도 그런 책이었다. 의례적인 말없이 같은 공간에서 머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게 낯섦은 없었다. 기대감을 안고 멀리 떠날 짐을 꾸렸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안 이덴이 빌라 아말리아를 발견했을 때, 그곳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이미 익숙한 장소에 다다른 것 같았다. 혼란스러움 대신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더 깎아내리다 보니 마침내 골조만 남겨 놓은 텅 빈 건물이 된 듯 말이다. 하지만 좀 가벼워진 느낌이다. 삶을 제대로 만나기 위한 '떠남'은 잘 견디는 힘을 만들어 준다. 모든 장식을 제거한 나라는 구조물을 발견하게 해주고, 나에 대한 환상이 없어질수록 타인에게도 관대해지게 된다. 작가들은 이런 글을 쓰고 나면 어떤 느낌일까.. 후련한 기분일까, 아니면 공허할까.. 어쩌면 키냐르는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을 연주한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다. 파스칼 키냐르의 「빌라 아말리아」는 음악가이기도 한 작가의 개성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키냐르의 다른 책들은 어떤 느낌일지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