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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ㅣ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박연정 외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평점 :
N22084
독서 슬럼프는 아니었지만 바빠서 최근에 독서를 거의 못했다. 게다가 읽고 있던 책이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이다 보니 진도를 나가기 힘들었다. 아직도 읽는 중...
(트레버의 문장은 여백이 많아서 깊게 생각하면서 읽어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더라...)
그러던 와중에 동네 서점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쏜살문고 책이 몇권 있길래 이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소년>을 구매했고, 너무 재미있어서 읽기 시작하자 마자 바로 다 읽었다.
<소년>에는 <문신>, <소년>, <작은왕국> 등 세 단편이 실려있는데, 세 단편 모두 정말 재미있다. 교훈 같은 걸 생각하지 않고 재미 측면에서만 보자면 별 다섯개를 주고 싶다. 하지만 다소 변태(?)적인 내용 때문에 별 한개는 뺐다. 이 중 두편의 줄거리를 소개해 보자면,
<문신>
'세이키치'는 각종 문신대회에서 호평을 받는 문신사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에게나 문신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살갗과 골격을 가진 사람만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문신을 받는 사내들의 신음소리에 쾌락을 느끼는 약간 변태적인 취향이 있었다.
그의 오랜 숙원은 광채나는 미인의 살갗에 자신의 문신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준에 있어서 미인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그는 발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그리고 그를 반하게한 흰 발을 가진 여인을 드디어 발견한다. (얼굴은 못봤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녀를 놓치게 되고 이후 5년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 여인의 발은 고귀한 살갗으로 이루어진 보석처럼 느껴졌다. 엄지에서 시작해서 새끼로 끝나는 가지런한 다섯 발가락의 섬세함, 에노시마 해변에서 연한 선홍빛 조개에도 뒤지지 않을 발톱의 색감과 구슬과도 같은 발뒤꿈치의 완곡미, 그리고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는 맑은 샘물이 항시 발치를 씻어 내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윤기. 바로 이 발이 머지않아 사내의 생피로 살을 찌우고, 그 사내의 몸을 짓밟을 발이리라. 그리고 이 발의 인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여인 중 가장 이상적인 여인일 것이었다.] P.11
그런데 5년 후 거짓말처럼 그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소녀에게 '비료'라는 한폭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 그림은 너의 미래를 그림으로 표현한 거라는 알수 없는 말을 한다. 그러고 나서 마취제를 이용하여 소녀를 기절시키고, 그의 숙원이었던 아름다운 여인의 등에 거미 문양의 문신을 한다.
[비료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그림 한가운데는 젊은 여인이 벚나무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아래에 쓰러져 켜켜이 쌓인 수많은 사내의 시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인의 주변에서 승리의 함성인 양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은 새의 무리, 그 여인의 눈빛에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희열과 긍지가 흘러넘쳤다. 전투 후의 풍경일까, 봄날 꽃밭의 풍경일까? 소녀는 그림을 보며 어느새 자신의 마음 저 깊숙이 감춰져 있던 무언가를 찾아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P.14
그런데 마취에서 깨어난 소녀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문신을 통해 거미의 영혼이 그녀에게 스며든것처럼 소녀의 나약함은 더이상 없었고,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세이키치'는 소녀의 첫번째 비료가 된다.
[“나리, 저는 이제 예전의 제 나약한 마음을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나리는 맨 처음으로 제 비료가 되셨네요.” 소녀의 눈동자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의 귓가에는 승리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더 그 문신을 보여 다오.” 세이키치의 말에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옷을 벗었다. 때마침 아침햇살이 문신을 비추었고 소녀의 등은 찬란하게 빛났다.] P.19
발 패티쉬즘(?)도 다소 특이했지만 문신할때의 그 아픔을 묘사한 문장들과 색감에 대한 강렬한 표현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변태같은 소재지만 아주 매력적인 작품.(범죄다 범죄...) <문신>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데뷔때부터 이런 대담한 작품을 쓸 수가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소년>
그런데 <문신>보다 더 쇼킹한 작품이 <소년> 이었다. 아직 청소년인 주인공 '하기와라'는 어느날 같은반이자 부잣집 도련님인 '신이치'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놀러가게 된다. 학교에서는 내성적인 '신이치' 였지만 집에서는 전혀 딴사람이 되어 폭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복누나 '미쓰코'와 하인의 아들인 '센키치'와 함께 다채로운 역할놀이를 한다
주로 괴롭히는 역할은 부잣집 도련님인 '신이치'가 하고, 나머지 세사람은 괴롭힘을 당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주인공인 '하기와라'는 왠지 모르게 '신이치'의 괴롭힘에 알 수 없는 쾌락을 느낀다.
[촉촉한 입술과 날름대는 미끌미끌한 혀끝이 간지럽게 코를 핥아 내리는 그 기괴한 감각에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 매혹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으며 나중에는 쾌감마저 느껴졌다. 결국엔 왼쪽 옆얼굴부터 오른쪽 뺨에 이르기까지 얼굴이 온통 짓밟혔고 코와 입술은 신발 바닥의 진흙으로 짓이겨졌지만, 그조차도 짜릿했다. 어느새 내 몸과 마음 모두가 신이치의 꼭두각시가 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P.40
그들의 역할 놀이는 점점 더 강도가 쎄지고 점점 폭력적으로 변한다. 게다가 '신이치' 뿐만 아니라 '하기와라'와 '센키치' 역시 여자인 '미쓰코'를 육체적으로 괴롭힌다. 아무리 첩의 딸이라고는 하지만 '미쓰코'는 주인집 딸이었고 나이도 가장 많았다. 결국 참다 못한 '미쓰코'는 '하기와라'와 '센키치'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에이짱, 평소에 우리가 아가씨를 너무 심하게 괴롭혀서 오늘 밤 복수를 당하는 거야. 난 이미 아가씨한테 완전히 항복했어. 너도 빨리 사과하지 않으면 호되게 당할걸…………”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촛농은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듯 센키치의 이마에서 속눈썹으로 거침없이 줄줄 흘러내렸고 그는 또다시 눈을 감은 채 굳어 버렸다.
“에이짱, 이제부터는 신이치 말 듣지 말고 내 부하가 되지 않을래? 싫다고 하면 저기 있는 인형처럼 네 몸을 온갖 뱀들로 휘감을 거야?" ] P.64
이 책의 표지는 <소년>의 마지막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건데, 단편 <소년>은 표지의 이미지 처럼 음침한 미궁에 빠진듯한 기분이 들게하는 작품이었다. 특히 얼굴을 덮는 촛농(?)에 대한 문장은 이미지가 너무 선명하게 그려져서 소름끼쳤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 질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즐기는 인간의 심리란 어떤걸까? 사악 그 자체인 작품.
단편집 <소년>을 읽으면서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라는 생각과 함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래도 아주아주 재미있게 읽었다.아침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계속 보는 이유가 이런거랑 비슷한걸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은 이번이 세번째로 읽은 책인데, 지금까지의 느낌으로는 문장들이 화려하고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는 당연히 재미있고... 자극적인 내용때문에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색다른(?) 작품을 찾는 분에게는 아주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Ps. 저번주 요일에 다 읽었는데 오늘에서야 리뷰를 썼다 ㅜㅜ 오늘부터 다시 열독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