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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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56

"그때 떠오른 것이 고향이었다. 십수 년 동안 돌아갈 생각을 품어보지 않았던 고향이었는데, 막상 하행선에 오르자 정환의 마음은 설레었다. 때는 봄이었다. 정환의 고항은 종착역이었으므로 다소 방심한 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고향의 변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강작가님 작품 읽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첫 단편집인 <여수의 사랑> 이다. 첫 단편집인 데다가 제목 때문에 최근 작품들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작가님은 첫 작품때부터 이미 본연의 색깔이 있었었다. 이 작품 역시 우울 그 자체였다.


한강작가님 단편의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 단편집 역시 단 한사람의 불행한 인생이 아닌, 서로 연관이 없는 여러사람의 불행을 그린다. 그런데 그 불행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 이어진다. 우리의 인간관계처럼.


표제작 포함 총 여섯편의 작품 모두 좋았었는데, 특이하게도 이 작품집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고향과 가족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 고향과 가족이 우리 자신의 출발점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뭔가 암시하는 메세지가 있는 듯 하다.


여섯편의 단편중 특히 인상깊었던 두 작품을 소개해 보자면,


1. 여수의 사랑

두명의 상처입은 사람이 등장한다. 한명은 어린시절 아버지와 동생의 동반자살에서 살아남은 '나'이고, 한명은 친부모에게서 버려진 자흔이다. 자취방을 함께 쓸 사람을 구하던 '나'는 우연히 자흔을 만난다. 그리고 함께 살게 된다. 첫 만남 당시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알지 못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 P.33


게다가 두 사람은 전혀 성향이 전혀 달랐다. 나는 심하게 결벽증이 있었고, 반대로 자흔은 무던했다. 아니 무던하기 보다는 어떤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함부러 다뤘다. 어느날 나의 고향이 여수라는걸 알게 되자 자흔은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여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나쁜기억 때문에 여수를 싫어했고 자흔과 여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흔은 여수에 대한 사랑을 나에게 표현했다.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러는 걸까?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P.44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자흔이 떠난 후 나는 자흔이 너무 사랑했던, 자흔이 고향이라 믿었던 여수행 기차를 타고 떠난다. 나에게는 불행 그 자체였던 여수지만, 이번 방문을 통해 나의 불행한 과거를 조금은 지워낼 수 있을까? 나도 여수를 사랑으로 떠올릴 수 있을까?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있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결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있이요. 저 정다운 하들,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이요....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P.56




2. 야간열차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딘가로 떠날 곳을 정한 사람의 마음은 어떤걸까? 술에 취한 동걸은 청량리에서 동해로 떠나는 야간열차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동걸이 실제로 타본적은 없는 야간열차.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동걸과 함께 야간 열차를 타기로 한다. 하지만 약속한 당일에 동걸은 나타나지 않는다. 왜그랬던걸까?

[동결은 그 영동ㆍ태백선 통일호가 서는 역의 이름을 모두 꿰고 있었다. 태백선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추전역사를 지날 때 차창 밖에 일렁이는 어둠과, 묵호역과 옥계역을 잇는 광막한 해안선을 묘사할 때면 그의 눈은 이상스런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P.147


동걸은 홀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평소에는 열심히 생활해서 완벽해 보이는 동걸이지만 술을 마시기만 하면 어딘지 모르게 외로운 모습을 보인다. 술에 취할 때마다 야간 열차를 타고 떠나겠다고 말하는 동걸, 하지만 한번도 야간열차를 타본적이 없는 동걸, 어떤 사연이 있는걸까?

["나는 야간열차를 타고 떠나겠어"라고 말하는 동걸의 취한 얼굴에는 녀석답지 않게 무언가 사는 일을 귀찮아하는 듯한 그늘이 어려 있었다. 밤 열한 시에 기차에 오르면 그만인 것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환청으로까지 열차 소리를 들으면서 왜 떠나지 못하는가] P.152


동걸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까? 동걸이 입에 달고 살던 야간열차를 이제는 내가 타고싶어 하게 되었다. 동걸과 달리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 삶에 대한 별다른 열정이 없던 나는 제대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동걸을 찾아가 함께 술을 마신다. 나는 동걸에게 야간열차를 기억하냐고 물었지만 동걸은 다 잊었다고 한다. 그날밤 나는 동걸의 집에서 자게 되고, 동걸에게 쌍둥이 남동생이 있다는걸 알게 된다. 친구에게도 숨긴 남동생의 존재,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 상태의 남동생 동주가 동걸의 아픔이었고, 동걸이 야간열차를 타고 떠나고 싶어했던 이유였던 것이다.

[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줄 야간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욕들에게도 그는 무신경할 수 있었다.] P.175


그날 밤 나는 동걸 대신 동해행 야간열차를 탄다. 많은 불행을 짊어진 동걸과 다르게 아무것도 하는것 없이 그냥저냥 살아온 나. 동걸의 불행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 불행했다. 삶의 목표가 없었기에, 인생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에 말이다. 야간열치를 타고 돌아오면 나의 불행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동걸도 야간열차를 타고 떠날 수 있을까?

[아버지를 비롯하여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미래를 걱정했다. 니는 남들이 하는 취직 공부나 학점 관리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P.184




다른 작품도 다 인상적이었다.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고향을 떠나와서 독립했지만 고향언니인 인숙언니에게 사기를 당해 독하게 살기로 한 나와, 교통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고나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명환의 어둠을 평행하게 보여주고,

<질주>에서는 어릴적 동네아이들에게 맞아 죽은 동생 진규로 인해 그를 구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평생 살아온 인규와 잊으로고 했지만 언제나 마음속의 아픔으로 간직했던 어머니의 불행을 대비해서 보여준다.

<진달래 능선>에서는 가족을 버리고 고향에서 몰래 도망쳤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환과 심장병으로 죽은 딸아이를 그리워 하며 매일 딸이 좋아하는 나무를 태우는 황씨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붉은 닻>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로 인해 괴롭게 살아가는 동영 동식 형제와 어머니의 상실과 치유를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무게는 다르겠지만 아픔을 느끼는건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아픔을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 아픔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갈 이유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함께 살아가야 하나보다. 나의 아픔과 당신의 아픔은 결코 다르지 않고 결국 이어진다.

이렇게 우울한 내용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는 작가님의 질문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것 같다. 한강작가님의 이 단편집 너무 좋다.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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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6-20 1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울한 내용 중에도 희망을 볼 수 있어 한강 작가의 글을 좋아해요.
세상을 워낙 깊게 들여다보는 작가라
내용이 우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새파랑 2025-06-21 18:50   좋아요 1 | URL
제가 좀 우울한걸 좋아해서 ㅋ 한강작가님 작품 읽다보면 깊이가 느껴집니다~!! 아직도 안읽은 한강작가님 책이 많아서 너무 좋습니다!
 

급류보다 좋았다. 위픽 시리즈 가볍게 읽기 좋다.

무엇보다 나를 회계팀 백선화 대리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꼈다. - P9

"결국 우린 모두 왔다가 돌아가는 여행자들 아닌가요."
그 미소는 당신과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듯한 미소, 모든 공격성을 무화시키는 여유롭고 너그러운 미소였다. - P14

눈을 피하지 마세요. 이탈리아에서는 건배할 때 상대방 눈을 쳐다보지 않으면 7년간 운이 없다고 해요. - P15

여름의 눈부신 풍경들, 동성을 사랑하게 된 엘리오에게 편견 없이 축하하고 응원해주는 아버지의 태도가 너무 좋았다고 했다. - P17

"왜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일이 응원받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 P18

"외로워서요." 그는 담백하게 말했다. 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외로움을 그렇게 부끄럽지 않게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 P23

실은 내가 그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데도 결혼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남들처럼 해야해서. 대학 입학, 취업, 그다음은 결혼이라는
과업대로 살아온 내게. - P26

정해진 경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은 게 꼭내 몸에 갇힌 기분이었어요. - P28

이탈리아에 왔는데 의무처럼 로마를 가지 않는다는 것, 관성으로 남들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속이
후련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그걸 선택했을 때 느끼는 드문 쾌감이었다. - P38

한은 상대방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욕망하는 시늉을 해야 할 때마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억지로 무대에 올라 자신에게 맞지 않는 역할을 연기하던 순간처럼 느껴지고 고통스러웠다. - P50

만지는 것보다 만져지는 걸 좋아해요. 세상이 정한 성 역할이 아니라 둘만의 사랑이 하고 싶어요. - P55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왜 남들의 인정을 받아야지만 겨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인지. - P73

한순간의 선택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종종 놀라곤 한다. - P83

일상에서 얼굴을 알고 지내는데 내 글을 전혀 읽지 않는 지인들보다, 제 문장을 읽는 이름 모를 독자분들이 휠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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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끝. 너무 좋다. 우울과 상실을 너무 잘 그린 작품.






내 모든 것은 끝장나게 만들어놓았으니, 인숙언니의 인생도 끝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숙언니와 함께 보낸 몇 달이 모조리 배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하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 인간에게 살의를 느꼈다. - P87

나는 그녀로 인해 내가 잃은 것이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 P115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없어."
명환의 음성은 불분명하게 잦아들어갔다.
"너도 마찬가지야. 나를 도울 수 없어." - P135

동결은 그 영동ㆍ태백선 통일호가 서는 역의 이름을 모두 꿰고 있었다. 태백선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추전역사를 지날 때 차창 밖에 일렁이는 어둠과, 묵호역과 옥계역을 잇는 광막한 해안선을 묘사할 때면 그의 눈은 이상스런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 P147

"그렇지만 동걸 오빠는 언제라도 우리를 버리고 떠날 꺼예요." - P172

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줄 야간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욕들에게도 그는 무신경할 수 있었다. - P175

다만 떠나는 것이 간단하다는 점만은 같았다. 나에게는 떠나는 일이나 머무르는 일이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세상이야 달라질 것이 없었다. - P177

나는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저 여자를 만나기 위헤 내가 이 열차를 탄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있디. 막연히 그 알지 못하는 여자가 그리워졌다. - P181

아버지를 비롯하여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미래를 걱정했다. 니는 남들이 하는 취직 공부나 학점 관리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P184

그때 떠오른 것이 고향이었다. 십수 년 동안 돌아갈 생각을 품어보지 않았던 고향이었는데, 막상 하행선에 오르자 정환의 마음은 설레었다. 때는 봄이었다. 정환의 고항은 종착역이었으므로 다소 방심한 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고향의 변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 P240

언제나 깜박 잠이 들 무렵이면 녀석이 거기 서 있는 거요. 아부지 여긴 춥구 니무 한 그루 없어요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말이오. 그때마다 난 말하오, 그래 보내주마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 한 번도 그 사이로 뛰어다니지도 못한 네 나무들을 보내주마 하고. - P259

"제가 동영이 아버지를 주정뱅이리고 했이요. 정신이 나가서 물이 술인 줄 알고 뛰어든 거라구요. 저희 엄마 아빠도 그러시던걸요." - P288

동식은 어머니의 목마른 시선이 닿은 곳으로 성급히 몸을 돌렸다. 불타는 닻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한 사내의 검붉은 그림자가 그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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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좋다. 이런 일관된 단편집이라니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 P28

그녀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무엇이 젊은 그녀에게서 미래를 지워내버린 것인지, 아무런 희망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게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자흔이 지쳤다는 것. 이십몇 년이 아니라 천 년이나 이천 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 - P33

그리고..... 열차표가 한 장 들었어요.
어디로 가는 푭니까?
...여수 - P41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 P44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있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결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있이요. 저 정다운 하들,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이요....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 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 오게 하고 싶었어요. - P56

"넌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하지? 좋은 방향만, 아주 잘되어 나갈 것들만 말이야. 하지만 난 달라, 난 언제나 나쁜 쪽만 생각해. 내 인생도!"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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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5-06-09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단편집, 좋죠♡
전 한강의 초기 단편이 좋더라고요!
<노랑무늬영원>도 좋아요.

새파랑 2025-06-10 10:13   좋아요 0 | URL
곧 노랑무늬영원도 만나보겠습니다~!!!
이책 완전 좋아요^^

초록비 2025-06-10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인용문 중 하나를 읽고 또 읽고 그것도 모자라 수첩에 적어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새파랑 2025-06-10 10:12   좋아요 1 | URL
아직 밑줄을 다 못적었어요~! 재독하고 있는데 너무 좋습니다. 역시 한강작가님~!!
 

테니스 너무 즐겁다.

날씨 핑계 대지 말 것 - P27

공을 끝까지 보세요 - P42

언제 어떻게든 공은 날아온다. 공이 라인 근처에 애매하게 떨어지고 있다면 일단 준비하자. 공을 칠까 말까 할 땐 치는게 차라리 낫다. 라인은 생각보다 두껍다. 그리고 라인 위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두꺼운 라인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코트 위에 선 자의 문이다. 그 선택이 인생에서 어떤 포인트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삶이라는 코트에서 조금씩 이기는 유일한 방법 같다. - P70

제3의 장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공간의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중립적인 성격을 지니며, 대화가 중심이 된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개개인을 존중해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 휴식과 재충전이 가능하다. 올든버그는 제3의 장소가 근본적으로 집과 다르지만, 심리적인 편안함과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집의 성격과 흡사하다고 덧붙였다. - P87

테니스를 같이 치는 건 상황에 따라 이루기 쉽기도, 어렵기도 하다. 우선 코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 시간을 맞춰야 한다. 여기에 실력이 비슷해야 원만한 게임이 가능하다. 누군가 테니스 동호회(이하 클럽)에 속해 있고 그 클럽이 손님을 받는다면 상대를 정기 모임에 초대할 수도 있다. 하나라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 한번 밥 먹어요"처럼 지나가는 말이 되어버린다. - P95

달리기나 수영 같은 건 자기 혼자 못하거나 천천히 해도 괜찮아. 테니스는 상대가 없으면 못 쳐. 본인이 못 치면 상대가 잘 안 해주려고 들어. 우선 랠리가 돼야 하니까. 공 한 번씩 넘기고 끝나면 재미없잖아. 세 번, 다섯 번 넘기고 또 열 번씩 넘기고 그래야 홍도 나고 재미가 있지. 그럴 때 희열을 느낀단 말이야.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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