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나면, 벌록 씨는 뒤쪽에 있는 거실에 있다가, 페인트칠이 된 카운터 뒤의 먼지낀 유리문을 열고 황급히 가게로 나왔다. 그의 눈은 그렇게 타고난 것처럼 무거워 보였고, 옷을 입은 채 흐트러진 침대에서 하루 종일 빈둥거린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 P12
그는 모종의 끔찍한 위협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침착하면서도 뻔뻔스러운 눈길을 하고,손님이 지불하는 돈에 비해 너무 형편없는 물건들을 카운터 너머로 팔았다. - P13
그리고 충혈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 아니고서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는, 런던 특유의 태양이 이러한 모든것들을 골똘히 응시하면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태양은 어김없고 온화한 경계 자세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하이드 공원 위에 떠 있었다. - P20
그에게는 기술자가 아무리 부정직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습득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악과 어리석음, 인간의 저질적인 공포를 이용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것은 도박장이나 매음굴의 업주들, 사설탐정과 흥신소 직원들, 주류 판매상, 정력에 좋다는 전기 벨트 판매업자들, 사이비 특허약품 발명가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도덕적 허무주의의 분위기였다. - P21
"이 나라 속담에 예방이 치료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 그건 우둔하기 짝이 없는 말이야. 예방엔 끝이 없는 법이야. 그러나 그런 것이 이 나라의 특징이지. 이 나라는 결정적인 것을 싫어한단 말이야. 당신, 너무 영국식이 돼가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 돼. 특히 이경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 악은 이미 여기에 존재하고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방이 아니라 치료야." - P35
"지랄하고 자빠졌군. 결혼을 했다고! 그러고도 당신이 무정부주의자야? 이게 무슨 염병할 헛수작이야? 그냥 해보는 소리겠지. 무정부주의자는 결혼하지 않는 법이야. 그건 누구나 아는 소리잖아. 할 수가 없는 거야 그건 배반이야." - P47
그는 토론을 잘하지 못했다. 토론이 그의 신념을 흔들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고통스럽게 쩔쩔매고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물이 없는 사막보다도 더 메마른 정신적인 고독 속에서 그렇게 숱한 세월 동안,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응수도 하지 않고 긍정도 하지 않는 가운데 자기 혼자만 키워왔던 생각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고통스러울 정도로 흔들려버리는 것이었다. - P57
"나한테는 나를 치명적인 존재로 만드는 수단이 있소. 그러나 당신도 알겠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오. 효과적인 것은 사람들이 내가 그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데 있소. 이것이 그들이 받는 인상이오 완벽하지. 따라서 나는 치명적인 존재인 것이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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