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5029~30

˝무서워하지 말아요. 당신이 만약 영원히 상실된다 해도,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않을 거예요. 내 마음속에서 당신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거 하나는 꼭 잊지 말아요.˝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다. 그의 에세이 보다는 소설을,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는 팬이다. 같은 작품의 개정판이 나오면 사모으는 것도 좋아하는 팬이다. 하루키의 장편 시리즈는 2~5회 사이로 재독한 팬이다.


그 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특히 의미있는 작품이다. 왜냐면 내가 대학교때 하루키의 첫 책으로 읽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사상사 구판(알라딘에서 검색도 되지 않는다...), 민음사 합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이렇게 세가지 버젼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애정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쥐 3부작 이후 나온 작품으로, 환상적인 모험을 보여주는 하루키 스타일이 시작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교훈? 감동?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스토리 자체가 정말 재미있고 구성도 탄탄하다. 게다가 하루키 주인공 특유의 쿨함이 잘 담겨 있어서 유쾌하고, 두꺼운 분량에 비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우편함에는 우편물이 한 통도 들어 있지 않았다. 전화기에도 녹음된 메시지는 없었다. 아무도 내게는 볼일이 없는 것 같았다. 상관없다. 나 역시 아무에게도 볼일이 없다.]  P.111(1부)




정직한 제목처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두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는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닿을듯 말듯 하면서 평행하게 진행되나, 결국 닿지는 못한다. 왜냐면 ‘세계의 끝‘은 내 머리속에 존재하는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비정한 현실의 이야기니까.

[˝그게... 어떤 세계죠?˝ 나는 박사에게 물었다. ˝그 불사의 세계 말입니다.˝, ˝평온한 세계예요. 자네 자신이 만들어 낸 자네 자신의 세계이지. 자네는 그곳에서 자네 자신일 수 있어.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고 또 모든 것이 없어. 자네는 그런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겠나?˝]  P.121(2부)




주인공인 ‘나‘가 비정한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살아가는 동시에 ‘나‘의 머리속에는 ‘나‘가 인지하지 못하는 또다른 자아인 ‘세계의 끝‘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후 ‘원더랜드‘의 ‘박사‘는 나에게 ‘셔플링‘이라는 것을 진행하고, 이 ‘셔플링‘에 의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미묘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나‘에게 심어진 죽음의 스위치도 함께 켜진다.

[˝그러나 자네는 그 세계에서, 자네가 여기에서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자네가 잃어버린 것과 잃어 가고 있는 것들을.˝]  P.103(2부)




‘셔플링‘ 때문인지 ‘나‘는 ‘세계의 끝‘에서 ‘문지기‘에 의해 ‘그림자‘를 잃게 된다. ‘문지기‘는 ‘박사‘의 ‘셔플링‘효과를 의미하고, ‘그림자‘는 현실세계인 ‘원더랜드‘‘‘의 추억 또는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나‘는 더이상 현실세계를 살아갈 수 없다.

[˝두려워할 일은 없어. 이건 죽음이 아니야. 알겠나? 영원한 삶이지. 그리고 그곳에서 자네는 자네 자신이 되는 거야. 그에 비하면, 지금 이 세계는 겉보기만 그럴듯한 환영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걸 잊지 말게나.˝]  P.127(2부)




‘나‘에게 남은 시간은  단 하루,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현실인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의 죽음이냐, 아니면 내 머리속의 무의식인 ‘세계의 끝‘에서의 불멸 중 하나에서 말이다. 과연 ‘나‘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일까?

[˝그렇게 멋진 세계인지 어떤지는 나도 몰라.˝ 그림자가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적어도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야.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도 있고. 너는 그곳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거기에서 죽어. 네가 죽으면 나도 사라져.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야.˝]  P.308(2부)




오랜만에 다시 읽은 이 작품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즐거움 보다는 쓸쓸함이었다. 주인공인 ‘나‘는 쿨해 보이지만 사실은 소중한걸 잃어버린, 아니 소중한게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소중한게 없는 사람에게 삶이라는게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현실인 ‘원더랜드‘에서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한건지도 모른다. 그나마 ‘나‘의 자아의 세계인 ‘세계의 끝‘에서는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을 발견하는데, 그곳에서나마 ‘쿨함‘을 벗어 던지고 쓸쓸하지 않게 살아가길 바래본다.

[좀 더 젊었던 시절, 나는 그런 슬픔을 어떻게든 언어로 환치해 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언어를 늘어놓아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는 없었고, 나 자신에게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의 언어를 닫고, 나의 마음을 닫았다. 깊은 슬픔이라는 것은 눈물이라는 형태조차 띨 수 없다.]  P.318(2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야 말로 비정한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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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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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27

˝당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은 당신에게 그 가치를 되돌려 준다. 그것은 오직 당신만의 것이고, 그렇기에 곧 당신 자신이 된다.˝


내가 보뱅을 좋아하는걸 플친들은 대부분 아실거다. 왜 보뱅이 좋냐고 하면 주변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 한사람을 향한 순정,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가벼운 마음, 그 무엇도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이 글에서 그대로 느껴져서 이다. 요즘 시대에 이런 글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비슷한 느낌의 국내작가로 김연수 작가님이 떠오른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른 이의 시선과 생각이라는,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 절망했던 푸르른 섬들에 다다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녀처럼 사랑하는 것은 더욱 감미로운 일이다. 부재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사랑.] P.51



하지만 이전에 출판된 보뱅의 <마지막 욕망>을 읽고 좀 당황했었다. 내가 생각하던 보뱅의 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우울하고 너무 흑화되어서 읽는게 힘들었다. 보뱅도 이렇게 우울함을 느끼는구나, 보뱅이 쓰는 문장과 다르게 그도 속마음으로는 힘들구나 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앞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좋지도 않았다... 기존에 국내에 출판되었던 작품들의 개정판이 나오는걸 보고 이제 국내에 출판할만한 보뱅의 다른 좋은 작품은 없겠구나 라고도 생각 했다. 이제 마지막이라니.....



그래서 <빈 자리>가 출판되었을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좋은 작품이었으면 아마 진작에 출판되었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예전 같았으면 발매되자마자 바로 구매했겠지만, <빈 자리>는 몇주 지나서 구매했다.(그래봤자 한달 안에 구매함 ㅋ) 그런데 다 읽고 나서... 늦게 구매한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할 수 밖에 없었다. 보뱅은 보뱅이었다. 보뱅이 보뱅했다. 이건 너무 좋아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지친다. 그래도 ‘그것‘ 그 초목의 잎, 그 빛, 그 이름이 있다. 때때로 당신은 그것을 마땅히 그래야 하듯, 그것이 요구하는 대로 따로 떨어져 고요 속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이 낡지 않고 변치 않았음을 보게 된다. 당신이 선택했던 처음 그날처럼 빛나고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그것이 당신을 선택했고, 당신을 비추며, 당신을 그 자리에 머무르도록 붙잡고 있음을.] P.70



누군가의 ‘빈 자리‘를 이렇게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누군가의 부재를 슬퍼하기 보다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추억이라고,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보뱅 이고 이 책 <빈 자리>가 바로 그 증거다.

[그것 외에는 쓸 것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인생에서 노래할 것은 삶 속에서 사라진 사랑뿐이니까 그 사랑을 붙잡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죽어가는 꽃의 향기를 모으듯 글을 쓴다. 치유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꽃잎 위의 갈색 반점, 곧 사라질 젖니에 깨물린 흔적 같은 자국, 지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기다림 외에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82



<빈 자리>는 소설이 아닌 에세이다. 하지만 한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소설식으로 리뷰하자면 이런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알게 되고 그 여자를 마음에 품는다. 하지만 그 여자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단지 옆에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남자는 곁에 있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좋았다. 어느날 그녀는 죽는다. 존재하던 빈자리에서, 부재하는 빈자리가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그녀를 추억하고, 그림속에서 책속에서 일상속에서 그녀를 떠올린다. 그녀의 빈자리는 슬픔이 아닌 짧은 내 인생의 축복이었다.‘



보뱅을 의심한 내 자신을 다시한번 반성하며, 봄이라는 계절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힘든 시기를 견뎌낸 봄과, 지고지순한 사랑과, 보뱅의 아름다운 문장은 많이 닮아보인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슬픔 까지도 말이다.

[당신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늦장 부리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술도 한 잔 마신다. 그러고는 말하지 않은 한 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삶에서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일 년은 한번 짓는 미소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십 년은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당신에게 남겨지는 것은 단 하나의 행운, 단 하나의 축복뿐임을 생각한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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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3-30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리뷰 참 따뜻하네요.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더 확실해 졌어요.

새파랑 2025-03-3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뱅 정말 좋습니다~! 곰돌이님 후회하지 않으실거에요 ㅋ 조만간 보뱅 책탑 리뷰를 한번 써보겠습니다~!!

페넬로페 2025-03-30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뱅은 읽어야 할 숙제 같은 작가인데 아직 입니다. 빈 자리도 기대되네요^^

새파랑 2025-03-30 18:33   좋아요 1 | URL
보뱅은 페넬로페님 취향이실거라 확신합니다~!! 가끔 매운 작품 읽다가 순한 작품 생각나실때 읽으시면 좋을거 같아요~!!

희선 2025-04-01 0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보다 먼저 나온 책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 책은 살지 말지 하다가 샀군요 그래도 아주 늦게 사지 않았네요 이 책은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군요


희선

새파랑 2025-04-01 10:12   좋아요 0 | URL
완전 마음에 듭니다. 너무 좋습니다~! 역시 살까말까 망설일때는 사는게 답인거 같아요~!!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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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26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작년 한강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되었을 시간에 나는 한 카페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청춘을 읽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하루하루 소모가 반복되던 날들 중 그래도 나름 의미가 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뭐 이후에는 계속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기는 했지만...


나는 2024년에 한강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거라고 예상은 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 작가가 나온다면 한강작가님이 받을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당시에 내가 읽은 한강 작가님 작품은 <채식주의자>, <희랍어시간>, <작별하지않는다> 단 세편이었지만 이 작품들은 모두 인상적이었고, 특히 시적인 문장과 기존 한국문학에서 느끼기 힘든 특유의 깊은 어둠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알라딘 우주점에 가서 안읽은 중고책을 하나둘 모으고 있었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지만 더이상 못읽는 와중에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신 것이다. 개인적으로 유행타는걸 선호하지 않아서 한강작가님 신드롬이 한창일때는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그동안 못읽고 있었다가, 이제 유행이 좀 가라 앉아서 다시 읽으려고 마음을 잡고 선택한 작품이 <소년이 온다>였다.


사실 이 작품이 한강 작가님의 대표작인건 알고 있었지만 손이 가질 않았다. 역사배경의 소설을 선호하지 않고, 5월 광주에 대해서는 많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게 나의 독서 인생 가장 큰 실수였다. 바로 <소년이 온다>를 이제야 읽었다는 것. 만약 이 책을 한강 작가님의 첫 작품으로 읽었더라면 나는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이전에 작가님의 모든 책을 구매하고 읽었을거라 확신한다. 아 바보같이 나는 왜 이제서야 <소년이 온다>를 읽은 것일까.


내가 지금까지 읽은 한국 문학중 단 하나, 최고의 작품을 말하라고 하면 <소년이 온다>를 고를 것이다. 왜 한림원에서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추천했는지 알 것 같다.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번을 쉬지 않고 무겁고 아프게 느껴지는 작품은 처음이었다. 텍스트 만으로 이렇게 깊은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니, 문장 문장하나가 마치 실제 장면처럼 그려질 수 있다는게 너무 놀라웠다. 영상으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을것 같은 감정의 깊이. 이게 바로 문학의 힘,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소년이 온다>는 6개의 장과 마지막 에필로그로 그성되어 있는데, 1장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독립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어느 장 하나 빠지지 않고, 이야기는 촘촘히 이어진다.




<1장> 어린 새 : 동호

2인칭 시점으로 화자가 주로 관찰하는 대상은 이 책의 주인공인 아직 중학생인 소년 ˝동호˝다. ˝동호˝는 친구인 ˝정대˝와 함께 시위대가 행진하던 광장에 있었지만, 군인들의 총격에 강제로 해산되고, ˝정대˝가 옆구리에 총을 맞는것을 본다. 이후 ˝동호˝는 ˝정대˝를 찾기 위해 사망자들이 안치되어 있는 상무관으로 가고, 그곳에서 이후 이아기의 주인공들인 ˝은숙˝, ˝선주˝, ˝진수˝를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P.17


˝동호˝는 친구 ˝정대˝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게다가 ˝정대˝의 누나인 ˝정미˝도 실종되었다. 이제 곧 무장한 군인들이 이곳 상무관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동호˝는 친구와 누나를 찾아서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자신까지도.] P.45.




<2장> 검은 숨 : 정대

2장은 군인이 쏜 총을 맞아 사망한 ˝정대˝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망한 다수의 시민과 함께 군인들에 의해 포개져 방치된 ˝정대˝의 영혼은 자신의 육신을 떠나지 못한다. 썩어가는 시신들에 대한 묘사는 너무 사실적이서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머리속에 그려지는 그들의 육신, 나의 심장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고통. ˝정대˝의 영혼은 친구 ˝동호˝의 죽음을 느낀다.

[어디선가 누나의 혼도 어른거리고 있을 텐데, 그곳이 어딜까, 이제 우리한텐 몸이 없으니 만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을텐데. 하지만 몸 없이 누나를 어떻게 만날까. 몸 없는 누나를 어떻게 알아볼까.] P.51


5월 광주의 잔혹한 참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이 2장이라 생각한다. 아무 잘못도 없이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들, 그들의 빼앗긴 인생을 누가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을까? 단지 그곳에, 광주의 광장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억울한 혼은 아직 여기에 있다. 지금도 남아 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7




<3장> 일곱개의 뺨 : 은숙

3장 부터는 5윌 광주 이후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가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3장의 주인공은 당시 고3 여학생이었던 은숙이다. 그녀는 계엄군이 상무관을 무장진압하기 직전에 시민군들과 대학생 ˝진수˝의 배려로 그곳을 빠져나온다. 함께 싸우고 싶었던 마음과 함께 살아남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은숙.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았다.] P.89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출판사 직원이 되어, 5월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한 책을 만드는 일을 한다. 하지만 국가의 지속적인 감시와 검열 때문에 그 책 내용의 대부분은 삭제되고 만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은 연극으로 상영된다. 삭제된 부분은 소리로 전달되지 않고 단지 입술의 모양으로만 표현된다. 하지만 이 책의 원고 교정을 했던 은숙은 이들이 말하려는 내용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연극 속에서 소년을 본다, 그리고 동호를 떠올린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른지 못 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꽃은 양초 불꽃들이.] P.102




<4장> 쇠와 피 : 진수

4장은 그날 이후 살아남았던 대학생 ˝진수˝에 대한 이야기로, 그와 함께 고문을 당하고 감금된 나의 회고로 진행된다. 당시의 비인간적인 고문은 작가님의 문장을 통해 그 아픔과 비참함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정말 인간이 인간을 저렇게 괴롭히는게 가능한걸까? 사실이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증거니까.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럽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P.114


˝진수˝는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형량은 무의미했다. 국가에서 그들을 특사로 석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가는 그들에게 사죄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감옥 밖에서 형량을 사는것과 다르지 않았다. 5월의 아픔과 감옥에서의 치욕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매일 매일 술로 버티던 ˝진수˝는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된다. 죽음밖에는 답이 없었던 살아남은 자의 아픔. 결국 국가가 그에게 선고한건 7년형이 아니라 사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아니, 그런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던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던 걸 증명한 거야.] P.130




<5장> 밤의 눈동자 : 선주

5월 광주에서 시민군에 가담해 저항하다 옥살이를 한 ˝선주˝가 주인공이다.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한 사회단체에서 묵묵히 일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날의 아픔과 치욕속에서 쥐죽은듯이 조용히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윤˝이라는 사람에게 연락이 온다. 5월 이후 몇십년만에 말이다. 그는 당시 여성으로 구속된 그녀에게 증언을 부탁한다. 하지만 그 고통을 그녀 스스로 증언하는게 가능하긴 한 걸까? 악몽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뿐인데 말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있다고 중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살아남기 위하여] P.167




<6장> 꽃 핀 쪽으로 : 동호 어머니

6장은 이제는 늙은 ˝동호˝의 어머니가 ˝동호˝에게 쓴, 보낼 수 없는 편지다. 너무 그리워서 그랬는지 어머니는 ˝동호˝를 본 것 같았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는 ˝동호˝라고 믿는다.

[네가 나한테 한번 와준 것인디,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한번 보여 줄라고 온 것인디, 늙은 내가 너를 놓쳐버렸어야. 시장통 좌판 사이로, 골목골목으로 한시간을 뒤지고 댕겨도 없어야. 무릎 속이 쑤시고 어질어찔 골이 흔들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이.] P.179


자식을 먼저 보낸, 그것도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식을 둔 부모님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 자식잃은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이 세상에 없다. 어머니는 그때 ˝동호˝를 상무관에서 데리고 나오지 못할걸 아직도 후회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억속에 ˝동호˝는 여전히 어린아이다, 그시절 그대로. 어머니의 시간은 여전히 1980년 5월 광주에 멈춰있다.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끝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P.192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에필로그는 작가님이 이 책을 쓴 계기와 다짐이 실려있는 장이다. 난 여지껏 이렇게 비장한 에필로그는 본적이 없다. 1980년 1윌 작가님은 서울로 이사오고, 이후 친척들로 부터 5월 광주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르 듣게 되며, 우연히 당시의 참상이 담긴 사진집을 보게 된다. 이후 작가님은 5월 광주의 흔적을 찾아간다. 그리고 ˝동호˝의 이야기를, 5월 광주의참상을 쓰겠다는 다짐을 한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서아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씨주세요.] P.221






그 날 이후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다 다르지만 그들이 겪은 아픔은 모두 이어진다. 과거 그들이 겪은 아픔은 한강 작가님의 펜을 통해 현재 우리의 아픔으로 이어진다. 이런게 문학의 힘이자 역할이라 본다. 역사는 단절될 수 없는 것이다.과거는 단지 과거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95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참상의 아픔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책의 뒷면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 이라고. 격하게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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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3-19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빠져나오기가 힘들죠
한강 작품은 다 그런거 같아요 ㅠㅠ
전 아직 리뷰 못 쓰고 있어요.

새파랑 2025-03-19 21:50   좋아요 1 | URL
저도 이 뛰어난 작품을 리뷰 쓰는게 부담이 되긴 했는데 그래도 왠지 기록하고 싶어서 써봤습니다 ㅜㅜ 리뷰 쓴다고 다시 읽는데도 너무 우울하네요 ㅜㅜ

명작입니다~!!

페넬로페 2025-03-20 0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읽다가 몇 번이나 멈추었던 기억이 납니다. 새파랑님께서 한강을 뛰어넘는 작품이라고 하시니 저도 재독해야 할 것 같아요^^

새파랑 2025-03-20 14:54   좋아요 1 | URL
독보적이다는 느낌이 듭니다 ㅋ 단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몰입감도 좋고 ~! 이런 작품을 원어로 읽을 수 있다니 너무 좋습니다~!!

거리의화가 2025-03-20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도 여운 있게 읽으신 것 같아 좋네요. 특히 이 작품은 제가 처음으로 읽었던 한강 작품인지라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아프지만 꼭 읽어야 할 소설이에요^^

새파랑 2025-03-20 08:00   좋아요 0 | URL
역사 전문가 화가님 ㅋ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읽었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희선 2025-03-24 0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오고 열해가 넘었군요 저도 아직 못 봤네요 언젠가 보기는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때 일을 경험한 사람은 그걸 잊지 못할 듯합니다 경험하지 않았다 해도 잊지 않아야 하는 일이군요


희선

새파랑 2025-03-26 21:04   좋아요 0 | URL
이 작품 희선님은 완전 좋아하실거 같아요. 감정이 점점 고조되기 보다는 처음 부터 끝까지 계속 강렬한 아픔을 주는 작품입니다. 이제 읽으셔야 합니다 ㅋ

페크pek0501 2025-03-27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읽었지만 리뷰를 쓸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새파랑 님은 꼼꼼히 잘 쓰셨네요. 이 소설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는데 한강 작가는 더욱 아파하며 소설을 썼을 거라는 걸 예측할 수 있었죠. 아파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 같았으니까요. 등장인물들의 분신이 되어 쓴다고나 할까... 저도 5 18에 대한 소설, 영화를 많이 봐서 더 이상 안 봐도 될 것 같아서 노벨문학상 수상이 없었다면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 듯해요. 위대한 쾌거예요.^^
 

최근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인 <남아 있는 나날> 과 <나를 보내지마>를 재독했다. 민음사 모던클래식으로 나왔었던 작품들인데, 리커버판으로 다시 나와서 일단 구매를 해놓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다시 읽었다. 재독한 감상은 ˝역시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감탄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쓰여있는데,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가장 큰 특징은 가장 주관적인 서술이라고 본다.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나의 주관으로 쓰기 때문에, 옆에서 관찰하고 쓰는 3인칭 시점이나, 모든 걸 다알고 쓰는 전지적 시점 보다는 객관적일 수 없지만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진실함이 잘 전달된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주인공의 시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고 실제 감정을 추측하는 재미도 있다. 간단히 리뷰를 해보자면...




N25024 <남아 있는 나날>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디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예전에 읽었을 때는 너무 무미건조해서 조금 답답하게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와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직업의식이란 이런거다 라고 말해주는 작품이었다.


과거 영국인 ‘달링턴‘경을 모셨지만 이제는 미국인 ‘패러데이‘를 모시게 된 집사 ‘스티븐슨‘은, 과거 ‘달링턴 홀‘에서 28명의 직원을 거느린 최고의 집사였지만 지금은 4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구시대의 집사이다.


그는 새주인 ‘패러데이‘의 배려로 그동안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6일간의 휴가를 얻게 된다. 그리고 품위 때문에, 책임감 때문에, 마음은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과거의 부하직원인 ‘켄턴‘양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여정을 떠나면서 지난날의 영광과 아쉬움을 회상한다.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평화를 위해 물밑에서 일한 정치가 ‘달링턴‘경을 모시는 집사였던 그는, 주인의 업적을 위해 보고도 못본척, 듣고도 못들은척 하며 ‘달링턴홀‘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달링턴홀‘이 최고의 저택이라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인생 내내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바친다.


그러면서 그는 제대로 된 휴가나 여행도 못가고,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도 전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걸 묵묵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집사라는 책임감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그는 사적인 모든 걸 내려놓았다.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에게는 ‘달링턴홀‘의 명성과 ‘달링턴‘경의 성공이 전부였다.


하지만 독일 나치에 대한 ‘달링턴‘경의 정치적 선택은 결국 잘못된 것이었고, 이 선택으로 인해 ‘달링턴‘경은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며 ‘달링턴홀‘의 명성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스티븐슨‘은 다른사람들로부터 왜 ‘달링턴‘경‘의 정치적 선택을 말리지 못했는지 추궁당하기도 하고, 집사로서의 입지도 줄어들게 된다. 이후 ‘달링턴홀‘의 주인은 미국인 ‘패러데이‘로  바뀌지만 ‘스티븐슨‘은 ‘달링턴홀‘의 집사로 남게 된다.


나치와 협조한 ‘달링턴‘경의 정치적 선택은 분명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스티븐슨‘은 ‘달링턴‘경의 정치적 선택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독자에게 호소하며 주인의 몰락을 대단히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집사인 자신이 설사 주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주인의 선택을 막을수는 없었다고 변명하며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사적인 것을 포기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그는 무려 20년만에 ‘켄턴‘양을 만난다. ‘스티븐슨‘은 그녀에게 과거에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전할수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품위 때문에 망설일까? ‘스티븐슨‘은 더이상 위대한 집사도 아니고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섰지만, 지금부터라도 남아 있는 나날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

[어쨌거나 때늦은 깨달음에 의지해 과거를 뒤져 보노라면 그러한 ‘전환점‘들이 도처에서 눈에 띄게 마련이다. 우리의 저녁 모임을 중단하기로 한 나의 결정뿐 아니라 그전에 내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도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얼마든지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그녀가 꽃병을 들고 들어왔던 그날 저녁에 만약 내가 약간 달리 반응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P.268




이 책의 초반부는 무미건조하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스티븐슨‘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조금씩 드러내면서 이야기의 몰입감은 점점 켜져가고, 결말부분에서는 감탄을 자아낸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회한과 포기해야 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란 이런거구나 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어느 누가 위대한 집사 ‘스티븐슨‘의 삶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게 인생이다, 그리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나만은 인정해 줘야 하는게 인생이다.


(추가로 이 책 뒤에 있는 역자 해설은 공감하기 힘들었다. 나는 역자와는 반대로 ‘스티븐슨‘의 고백에 설득당했고 공감했다. 나 역시 ‘스티븐슨‘ 처럼 직업이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월급쟁이 이기 때문에...)






N25025 <나를 보내지마>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을 다른 생명과 구별짓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작품의 배경은 인간복제와 장기이식이 가능한 미래의 영국이다. 어떻게 보면 SF 소설이라고도 할수도 있지만 SF 느낌이 나진 않는다. 단지 소재만 SF적인 요쇼를 가져왔을뿐 이야기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런데 인간적이란게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은 주인공인 ‘캐시‘가 ˝간병사˝로 일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헤일셤‘이라는 기숙학교에서 보낸 시절과 성인이 된 이후의 상황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대적 배경 자체는 완전히 다르지만 이야기의 구성 자체는 <남아 있는 나날>과 대단히 비슷하다. 초반만 잘 지나가면 중반부터 몰입부는 엄청나며, 작가가 조금씩 흘리는 힌트속에서 비밀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이  책의 주요 등장인물은 세명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캐시‘,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루스‘, 마지막으로 ‘루스‘의 연인었다가 마지막에는 ‘캐시‘의 연인이 되는 ‘토미‘가 바로 그들이다. 세명은 모두 ˝클론˝, 즉 복제인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체인 ˝근원자˝가 누군지도 모른채 ˝헤일셤˝이라는 곳에서 자란다. 그들은 가족과 집만 없을 뿐이지 일반 청소년처럼 ˝헤일셤˝이라는 학교에서 지내면서 정상적으로 학습하고 친구들과 서로 교감하면서 성장한다. 일반 인간과 크게 다를바 없이.


그러나 ˝헤일셤˝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기원이 누구인지,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일을 하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확실한건 없었다. 자신들의 존재의 목적을 궁금해 하는 것 자체가 금기인것처럼 서로서로 조심하면서 말을 아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왠지 모를 낙관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헤일셤˝을 졸업하고 자신들의 직업을 학습하는 곳으로 보이는 ˝코티지˝라는 곳으로 옮겨간다. 그곳에서는 개인이 희망하면 외출을 하기도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왜 그들은 그곳에서 도망가지 않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추측컨데 아마 그들은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세뇌받은게 아닐까 싶다.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위해 자의든지 타의든지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의 인생도 이와 다를바 없다.


그들은 ˝코티지˝에서 자신들의 모체인 ˝근원자˝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일반적인 사람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사랑하고 걱정하고 찾듯이, 그들 역시 부모와 같은 ˝근원자˝를 궁금해하며, 찾아나서기 까지 한다. 그들은 자신의 ˝근원자˝가 근사한 사람이길 기대하지만, 그들은 안다, 자신의 근원자는 사회의 하층민이었다는 것을, 대부분의 ˝근원자˝는 장기기증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후 ˝클론˝인 그들의 존재 목적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들은 ˝회복센터˝라는 곳에서 ˝클론(기증자)˝을 돌보는 ˝간병인˝으로 일하다가,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장기를 떼어주는 ˝기증자˝로 바뀌게 되고, 4번의 장기기증까지 하게 되면 거의 죽게되는 운명이다. (아마 4번째의 기증이 심장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대부분은 4번의 장기기증까지 가기도 전에 죽는다. 한마디로 그들 ˝클론˝은 인간의 생명연장을 위한 소모품이었다. 희생을 위해 태어난 생명체, 그럼에도 인간과 똑같은 몸과 마음을 가진 생명체.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거나,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같은 ˝클론˝끼리 서로 도와주고 걱정하고, ˝간병인˝으로 근무하면서 ˝기증자˝를  마지막까지 보살펴주며 이별에 진심으로 아파한다. 4번쨎기증을 앞둔 남자주인공 ‘토미‘는 자신의 ˝간병인˝이자 사랑하는 사람인 ‘캐시‘에게 자신의 죽어가는 마지막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멀쩡한 지금의 모습만을 ‘캐시‘가 기억해주길 원해서 먼저 이별을 고한다.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 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서로 헤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P.482




˝클론˝인 그들 역시 사랑하고 미워하고 걱정하고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실제 사람 보다도 더 감정의 깊이가 깊은, 그래서 어떤면에서 보면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인간이었다. 이러한 ˝클론˝이 사람과 다를게 뭐가 있는가, 아니 오히려 더 사람답다고 느껴지는건 왜일까? 감정이 매말라버린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걸까? 사람다움,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다. 사람이 동물인 이유는 본능이고, 사람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감정이다.






두 작품은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 하기에는 너무 다른 주제를 다룬다. 전자는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역사소설이라면, 후자는 인간복제를 다룬 SF 소설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다 그리움이고 추억이라는 것처럼 지나간 기쁨과 슬픔들을 차분히 뒤돌아본다. 너무나 담담해서 더 울림이 있는 이야기들. 이런게 바로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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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3-15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고 싶은 책도 정말 많은데, 좋은 신간이 또 나오니 책은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것 같아요 ㅠㅠ

새파랑 2025-03-16 08:26   좋아요 1 | URL
전 요즘 확 읽고 싶은 신간이 없어서 그런지 예전에 읽은 책들 중 좋았던 책들을 다시 읽고 싶더라구요~ 하지만 백수린 작가님 신간은 읽고 싶습니다~!!

은하수 2025-03-16 0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에서 이 두 작품이 가장 좋았어요.
말씀대로 너무도 담담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읽고 있는 저보다 오히려 담담해서 더 와닿았던 거 같아요!

새파랑 2025-03-16 08:29   좋아요 1 | URL
은하수님도 그러시군요. 너무 담담해도 담담한 작가님이였습니다 ㅋ 두 작품 모두 영화도 있다고 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작은 언제쯤 나올려나요 ㅜㅜ

희선 2025-03-18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을 한다고 해도 자기 삶도 생각하면 좋을 텐데, 스티븐슨은 그러지 않았네요 그렇게 사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예전에 읽은 거 이번에 또 만나셨군요 작가는 달라도 조금 다른, 이야기가 다르고 아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람 이야기...


희선

새파랑 2025-03-18 08:53   좋아요 1 | URL
일중독자 스티븐슨 입니다 ㅋ 노벨상은 괜히 주는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울림이 있는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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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23

역시 김연수 작가님이라는 감탄이 나오는 단편집이었다. 이전에 발표한 단편집인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나 <내가 아직 아이였을때>와는 다르게 모든 단편들이 좋지는 않았지만...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한 단편 안에서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사연들이 결국은 연결되는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구성을 보여준 작품들 중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세계의 끝 여자친구>,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 편이 좋았다.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작가)과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통역사)은 ‘상실 후 그리움‘으로 연결되고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내가 아는 나의 얼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웃음을 머금은 케이케이의 눈동자에 비친 얼굴이었다. 양쪽 눈동자에 하나씩, 모두 두 개의 얼굴.] P.10



메타세쿼이아 한그루를 통해 과거 시인의 편지와 현재 나의 망설임은 ‘전하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으로 연결되며 (˝세계의 끝 여자친구˝),

[누군지는 끝내 알 수 없게 됐지만,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도 당신만을 생각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영영 말해줄 수 없게 됐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도 알게 되겠죠. 시인이 한때 이런 시를 썼다는 거. 그 메타세쿼이아가 두 사람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곳이었다는 거.] P.80



어머니가 죽던 날 내가 본 노을과 사진작가가 찍은 흑두리미의 노을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연결된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 순간만은 그 누구라도 내가 바라본 노을을 그러니까 엄마가 죽던 날의 노을을 바라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고통을 오직 진통제만이 이해했듯이 내 슬픔은 그 노을만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통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슬픔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P.178




이러한 구성을 통해 김연수 작가님은 ˝개인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라고 말하려던게 아니었을까?


개인의 이야기는 어떻게든 연결된다. 그래서 당신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외롭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Ps. 다음번에는 김연수 작가님 책탑을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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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15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간이 나올 때도 된 거 같은데 말이죠. 음 그러고 보니 저는 이 소설은 읽지 않았네요!

새파랑 2025-03-15 13:31   좋아요 0 | URL
이 단편집 좋습니다~!! 다른 단편집들에 비해 세련된(?) 느낌이 있어서 수이님은 좋아하실거 같아요~!!

페크pek0501 2025-03-15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탑을 기대합니다!!!

새파랑 2025-03-15 17:25   좋아요 0 | URL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들을 모아봐야 할거 같습니다~!!

은하수 2025-03-16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님~~~
요즘의 책보다 오래전의 작품들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는....
저도 김연수 작가님 책탑 구경하고 싶어요^^

새파랑 2025-03-16 08:24   좋아요 0 | URL
작가님 스타일이 예전이랑 지금이랑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ㅋ 전 둘다 좋아요~!

자목련 2025-03-1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작가!
신나는 책탑 올려주세요^^

새파랑 2025-03-17 10:59   좋아요 0 | URL
넵 ㅋ 지금까지 읽은 연수작가님 책도 정리해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