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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정의 기판이 ㅣ 푸른도서관 34
강정님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다. 자신이 태어난 그 푸르른 장소. 하지만, 어릴 적부터 전쟁을 겪고 황폐해진 시골을 바탕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그런 푸르른 고향이 없을지도 모른다. 밤나무정의 아이들도 초등학생 때 한국 전쟁을 겪었다. 어느 날 북한의 기습적인 습격으로 터진 6.25 전쟁. 또한 일제시대의 징용으로 인해 그들은 어려서부터 아주 친한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기판이의 세대가 딱 그런 시대였다. 게다가 기판이는 극성스러운 어머니 안골댁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소심하게 자라야만 했다. 그렇게 바라던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 우악스러운 어머니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아들을 위해 쏟아부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어울려 뛰어놀지 못해 체력이 약해서 몇 백 년 묵은 산삼을 먹이고, 다른 아이들에게 없는 것은 모두 사주었다. 그러다보니 기판이는 자연히 아이들 사이의 가녀린 풀같은 존재가 되었고, 두복이를 중심으로 따돌림과 구타 등을 일제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는 밤나무정의 패거리 중 일원이 되어, 귀자와 방자라는 두 여학생을 만나게 되어 잠시동안 여학생과의 시간이라는 추억을 갖게 되고, 이들은 곧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서로 엇갈리게 된다. 공업고등학교에 가게 된 기판이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게 되었는데, 두복이는 이 꼴을 보다 못해 결국 그의 자전거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기판이는 이성을 잃고 철근같은 두복이에게 덤벼든다. 신은 없는 것일까? 두복이의 동생 두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형이 밀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주병으로 기판이의 머리를 내려치고, 기판이는 그 상태로 뇌에 이상이 생겨 더이상 옛날의 순하고 착한 기판이의 모습을 잃게 된다.
기판이는 결국 광주 읍내에서 떠돌다가 우연히 만난 조직과의 잘못된 인연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의 삶이 정녕 남을 위한 삶이었다고 볼 수도 없고, 또한 열광적으로, 불빛을 쫓아가는 나방처럼 열심히 살아보지도 못했던 그였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허무했고, 그가 구해준 소년을 그는 결국 찾지 못한 채 죽어가야 했다.
기판이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만약 마담이 없었다면, 기판이는 조직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깡치가 없었다면, 그를 죽일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두복이가 없었다면? 그는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만약 그의 어머니 안골댁이 없었다면? 그는 소심하게 자라지도 않았었을 것이다. 운명이란 그러하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작은 요인 하나하나가 변하기만 했다면, 그의 인생을 바꿀 커다란 사건이란 없었을 것이다. 밤나무정의 기판이가 겪은 슬픈 삶의 장난이 내 가슴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