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 장소를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어린 동생을 누가 돌봐주냐는 것이다. 물론 어머니가 계셨지만, 4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감당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고 돈도 누군가가 벌어야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계속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를, 가족들은 걱정하지마. 우리들이 너의 가족들을 보살펴줄게."

환청인가, 하고 무시했지만 점점 더 또렷이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의해 카를은 걱정을 떨쳤다. 그리고 재빨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엄마, 미안해요. 동생들아, 미안. 형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고 떠날께."

이렇게 중얼거리던 카를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쌌다. 그의 상하 옷 3벌, 호밀빵 2개, 그리고 양가죽주머니에 우유를 넣어 허리춤에 매고, 아버지의 유언장을 넣어두었다. 그리고 카를은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챙겼다. 아버지가 항상 그를 지켜주노라고 한 루비 반지였다. 카를은 아버지가 어떻게 그 것을 구하였는지는 몰랐지만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그 반지만은 팔지 않았다.

밤 몰래 출발한 카를은 계속 죄책감이 시달렸다.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그 죄책감을 억눌렀다. 다시 힘찬 마음으로 걷던 카를은 내일이 보름달이라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서둘러야 했다. 아버지가 말한 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부터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를이 아무리 튼튼한 발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헐렁한 신발을 신고서 그 먼 길을 걷는 것은 무리이고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몇 번이고 되새기면서 이를 악무르고 걸었다. 그러던 도중 카를은 어느 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옆에 큰 논밭이 펼쳐져 있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먹을 것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환희에 가득찬 카를은 곧장 온 힘을 다해 마을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제일 먼저 보였던 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빈 집인가?'

다시한번 두드려 보았을 때는 그제서야 발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 앞에서 골똘히 기다리던 카를은 갑자기 문이 열리자 무척 놀랬다. 할머니였다.
"아니, 자네같은 청년이 왜 우리집에 찾아오는게야?"


할머니의 크고 화난 듯한 목소리에 카를은 움츠러들었다.

"아.. 아니, 먹을 것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해서요..."

"먹을 것이라고? 옆집 가봐. 나 먹을 것도 없으니."

괴팍한 할머니는 카를을 쫓아내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터덜터덜 걷던 카를은 옆집 문을 두드렸다. 바로 문이 열렸다. 온화해 보이는 부부였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 집에는 왜 찾아오셨는지?"

"아, 그냥 먹을 것만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해서요..."

활짝 웃던 부부는 카를을 안으로 들이며 의자에 앉혔다.

"마침 식사중이었습니다. 따끈한 수프에 바게뜨와 함께 드시면 매우 맛있으실 겁니다."

그들은 카를이 흑인이라고 차별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카를은 감사하다고 여러번 말하며 수프와 빵을 해치웠다. 무척 맛있고 달콤한 식사였다. 특히 수프에 뿌려진 후추가 기가 막혔다. 카를은 졸음이 밀려왔다. 꾸벅꾸벅 졸던 그는 결국 잠에 들었다. 부부는 킬킬거리며 웃고, 쓰러진 카를을 다락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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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3 1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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