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박물관 : 백제 어린이 박물관 3
국립부여박물관 지음, 오정택 그림 / 웅진주니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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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mom] 
백성이 즐겁게 따른 나라였다던 백제, '어린이 박물관 백제'에서 찬란했던 그 문화와 조우할 수 있었다. 역사를 알기 위해 실제 장소를 가보는 것은 아이들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일이다.  하여 가기 전 후 그 곳을 이해하기 위해 책과의 만남은 꼭 필요함을 두말할나위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한 사람들이 허리에 장식했던 말 모양 장신구, 베개에 장식한 금 꾸미개, 귀걸이등을 점토로 만든 후 말려서 색칠하고 반짝이풀로 마무리해서 만들었다.

 
(유리로 만든 굽은 옥까지)
 
                 (기와로 탁본 체험해 보았었다 -경남 진주 국립박물관에서)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이었던 온조가 세운 나라인 백제.  그러므로 백제의 시작은 고구려와 마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이 원래 부여의 왕자였고, 백제를 세운 온조가 동명성왕의 아들인 것을 보자면 부여의 이름 속에는 우리 역사 속의 부여와 고구려, 백제가 모두 담겨 있는 셈이라는 문구가 가슴에 와닿았다.   

부여 부소산송과 함께 궁녀 3천 명이 뛰어내렸다는 부소산 바위도 우리가 익히 이야기로만 들은 그 곳을 이 책으로 먼저 만나 볼 수 있었다. '꽃이 떨어진 바위'란 뜻으로 불리는 바로 그 낙화암. 660년 의자왕 20년에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인해 벌어진 참극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안압지보다 먼저 세워진 백제의 궁남지는 땅을 파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정자를 만든 왕실의 정원으로 백제의 정원을 연구하는 데 귀한 자료로 부여 동남리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일찍이 안압지를 직접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눈에 선한 그 아름다운 광경은 우리 조상의 지혜를 한 번 더 떠올리게 했다.  

< 용산 국립 박물관에서- 백제 예술미의 절정이라고 불리는 백제금동대향로앞에서>

백제 사람들은 강과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에 자리잡아 일찍이 농경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다양한 농기구와 각종 그릇들, 무덤등을 보면 백제 사람들의 소박하고도 수준 높은 삶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백제가 있던 땅에서는 논밭을 개간하는 데 사용했던 삽이나 괭이, 쇠스랑, 호미, 낫, 살포 같은 농기구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오늘날 농촌에서 사용하는 재래식 농기구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다.  김제 벽골제는 비류왕 때인 330년에 쌓아 원성왕 때인 790년에 증충한 저수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라고 한다.  평탄한 땅에 길이가 3미터에서 4.3미터에 달하는 제방을 쌓아 만들었다고 하니 백제의 측량 기술과 토목 건축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보여주는 일예인 것이다. 

< 용산 국립 박물관에서>  
 

                                                     < 뜯어만들기세상으로 만든 움집>
백제 사람들은 대부분 풀로 지붕을 이은 움집이나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귀족 등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 기와집에서 살았으며 왕족들은 물론 궁궐에서 살았다.  일반 백성들이 살던 움직은 선사시대의 움집과 모양은 비슷했지만 훨씬 발달한 집이었다.  일단 깊이가 얕았고 화덕과 함께 온돌, 부뚜막 굴뚝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장고, 부엌과 방 등 다양한 공간이 있어 땅 위에 지은 초가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매장 문화와 함께 모양은 단순하지만 실용성을 살린 그릇으로 단순한 듯 하면서도 한껏 기교를 뽐내고 있는 그 모습등을 보면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백제 사람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문화재를 만들어보는 것 중에서 점토놀이만큼 좋은 것이 없는 듯 하다.  점토를 주자 장신구를 만들어보겠다며 열심히 점토만 주물러대며 노는 아이들을 보며 많이 웃었다. 우리 문화재를 세세히 책으로 먼저 만나며, 그 시대의 백제와 마주서기 위해 국립부여박물관에 갈일이 몹시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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