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 역사학자 33인이 추천한 역사 인물 동화 14
이영호 지음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오봉초 4학년 최 상철
2006. 8. 1

아무 일정도 없이 한가하게 책읽게 된 날, 책장속에  꽂혀있는 공민왕책을 꺼내었습니다.
TV에서도 인기있던 신돈으로 공민왕이 알려졌는데, 그분의 일생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공민왕은 고려의 제 31대 왕으로 이름은 ´전´입니다.

12세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약소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글을 익히고 문물을 배웠습니다.

거기서 위왕의 딸 노국 대장공주와 결혼하고, 1351년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이 되자 원나라 왕실과 인척을 맺고 횡포를 부리던 기철의 일족을 없애고, 영흥 이북땅을 되찾았다. 또 원나라식 연호와 관제를 고치는 한편 내정 개혁에도 힘썼습니다.  그러나 만년에는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져 최만생·홍윤일당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천산대렵도>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궁금증을 풀어줍시다!

<노국 공주는 누구인가?>

노국 공주 인덕황후는 원나라 종실 위안의 딸이며 본명은 보탑실리입니다.
공민왕이 원 나라에 입조한 1351년에 공민왕에게 시집을 왔으며 그해 10월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12월에 공민왕과 함께 개경으로 왔습니다.

<당시 개혁이 가능 하게 한 원의 사회상황>

공민왕이 즉위할 당시 원나라는 홍건적의 난 등으로 국력이 쇠퇴하자 이 틈을 타 공민왕은 자주 개혁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후원자,노국 공주>

그런데 노국 공주는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반대하기는 커녕 자신이 고려에 시집왔으니 자신은 고려인이며 마땅히 고려의 풍속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노국 공주는 공민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공민왕은 노국 공주와 결혼한지 8년 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은 1359년에 후궁을 선택할 것을 건의하였고 공주도 이에 동의하여 이제현의 딸을 궁중으로 맞이하였습니다.

<노국 공주의 죽음,그 파장>

하지만 공주는 혜비 이씨(이제현의 딸)에 대하여 심한 질투를 느껴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습니다. 이 때문에 궁녀들과 내관들이 노국 공주를 비방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노국 공주가 어렵사리 임신을 하여 1365년 2월의 만삭의 몸이 되었고 공민왕은 이에 기뻐하여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난산으로 인해 노국 공주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공민왕은 노국 공주를 잃고 너무나 슬퍼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노국공주의 명복을 빌기위해 공주의 초상화를 모신 대궐을 짓고 3년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만큼 노국 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큰 슬픔을 나겨주었습니다.
1365년 4월 대신들은 그녀에게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라는 칭호를 올렸고 이듬해 원나라에서 노국휘익대장공주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이 시호는 공민왕의 명에 따라 노국휘의대장공주로 고쳐졌습니다.
능은 운암사 동쪽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습니다.

<신돈의 등장,개혁>

당시 공민왕을 걱정한 김원명이란 신하는 공민왕에게 신돈이란 중을 소개해주었고 신돈을 만나본 공민왕은 예전의 총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신돈이 무리하게 개혁을 하여 권문세족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신돈이 제거된 후 공민왕의 행동은 예전같지 않았습니다.
즉위 초의 개혁적인 성향을 찾아볼 수 없었고 자주 술에 취해있거나 노국 공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미행을 나가는 일이 잦았습니다.
공민왕은 원래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성품이라 별궁출입은 거의 하지 않았으나 항상 노국 공주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여 급기야 정신병적 증세를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물에 대한 비평.

<신돈>

신돈은 절에서 일하다가 큰 꿈을 가지고 공민왕과 함께 큰 개혁을 이루기로 한 위인입니다. 물론 그의 개혁으로 인해 많은 백성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신돈도 악한 마음을 억누를 힘이 없었던 것일까요? 권력으로 나라를 거의 자기 마음대로 한 간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좋다고 칭송하다가 이제는 욕하는 인물 신돈.  

역시 모든 사람은 뭐든지 다 완벽하지 못합니다.

<공민왕>

저는 나름대로 공민왕이 나라에 많은 발전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노국 공주에 대한 지나친 그리움과 개혁으로 시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공민왕같은 분이 또다시 현대에 나타난면은 나라의 발전에만 힘쓰기를 기원합니다.

(신돈과 함께 개혁을 향해 나아가신 나랏님, 공민왕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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