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랭면 (여름 리커버)
김지안 지음 / 미디어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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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냉면 없이 어떻게 여름을 버텼을까. 어쩌면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그들만의 냉면이 있었던 건 아닐까. 김지안 작가의 동화 <호랭면>은 더워도 너무 더웠던 조선 시대의 어느 여름날을 배경으로 한다. 더위 때문에 힘든 건 어른도 어린이도 마찬가지. 그래도 놀거리를 찾아 씩씩하게 동네를 누비던 김 낭자, 이 도령, 박 도령은 웬 서책 한 권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서책에 따르면 구범폭포라는 곳에 절대로 녹지 않는 신비로운 얼음이 있다고 한다.


노는 거라면 빠지지 않는 김 낭자, 이 도령, 박 도령은 녹지 않는 얼음을 찾아 구범폭포로 향한다. 얼음을 찾으면 어떻게 먹을지 궁리하고 상상하느라 가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얼음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그들 앞에 무서운 호랑이가 나타나는데...! 이야기의 배경과 전개는 전래 동화의 그것인데, 요즘 사람들이 즐겨 먹는 냉면이 나오니 반갑고 새롭다. 무엇보다도 냉면의 시원함과 감칠맛을 그림으로 표현한 솜씨가 대단하다. 집에 걸어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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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1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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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권여선 작가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을 여러 권 읽고 너무 좋아서 장편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권여선 작가가 1996년에 발표한 첫 번째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의 개정판이 출간되어 읽어보았는데, 작품 자체도 좋았지만 권여선 작가의 원점, 시작점을 알게 된 느낌이라서 더 좋았다. 소설은 서른 살을 앞둔 미옥이 그동안 살았던 방을 비울 날을 일주일 앞두고 이사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옥은 선원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슬하에서 두 자매 중 차녀로 태어났다. 여중, 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명문대에 입학하는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으나 대학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미옥이 대학에 입학한 시기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던 때였고, 인문대생인 미옥 또한 선배의 부름을 받고 언더서클에 가입해 시위 현장을 따라 다니게 되었다.


사실 미옥은 시위 자체보다 언더서클에서 만난 동기들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미옥은 동기인 여자 친구 둘, 남자 친구 셋과 일종의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이십 대 내내 미옥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성적인' 미혜와 '중성적인' 수진은 미옥으로 하여금 앞으로 어떤 여성상으로 살아갈지 결정하는 데 있어 일종의 모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타입의 남자 친구 셋(한영, 명호, 종태)은 미옥에게 각각 사랑, 관심, 우정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미옥의 내면을 성장시킨다.


이 소설은 민주화 운동 당사자의 경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후일담 문학으로도 분류될 수 있고, 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내면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성장 소설로도 분류될 수 있다. 과거의 사건들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지 않고, 이사를 일주일 앞둔 미옥이 곧 있으면 떠날 방 안팎의 풍경들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시간적으로는 뒤섞여 있지만 작품 전체로 보면 유의미한 순서로 각각의 사건들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구성한 점이 기발하고 훌륭하다고 느꼈다.


아울러 이 소설은 한 여성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험한 일들을 여성 자신의 관점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로도 분류될 수 있다, 미옥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재하고 외가 식구들이 집 안을 점령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동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나 여학교 시절 동급생들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것, 대학생이 된 후에도 미혜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 등은 퀴어 서사의 관점으로도 분석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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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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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학생이 실종된다. 경찰과 이웃 주민들은 열심히 여학생을 찾지만 좀처럼 여학생은 발견되지 않고 단서조차 안 나온다. 그러다 저수지 근처에서 젊은 여자의 옷이 발견된다. 여학생의 옷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경찰은 저수지 주변을 철저히 수색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단서는 나오지 않고, 그 사이 실종자 수는 다섯 명으로 늘어난다. 한편 돈 벌러 도시로 떠난 엄마를 기다리며 저수지 근처 방갈로에 숨어 사는 삼 형제는 요 며칠 경찰이 주변을 왔다갔다 해서 불안하다. 경찰에게 발견되면 더 이상 굶주리지도 않고 더러운 곳에서 지내지 않아도 되겠지만, 엄마가 곤란에 처할 것이며 영영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아오이가든>은 2000년에 등단한 편혜영 작가가 2005년에 발표한 첫 소설집이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청아하고 세련된 느낌의 소설이 실려 있을 것 같았는데 읽어보니 전혀 달랐다. 마침 얼마 전에 편혜영 작가의 장편 소설 <재와 빨강>을 읽어서 그나마 덜 놀랐지, 그렇지 않았다면 묘사의 잔인함과 내용의 기괴함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버림받고 방치된 존재들이 모여 있는 저수지에 대한 묘사가 일품인 첫 번째 단편 <저수지>의 뒤를 잇는 표제작 <아오이가든>은 <재와 빨강>과 세계관이 상당히 비슷하다. 두 소설 모두 역병이 창궐하면서 봉쇄 조치가 내려진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도시에서 처음으로 역병 환자가 발생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나'는 오랫동안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누이가 나타나 초인종을 누르며 자신을 들여보내 달라고 한다. '나'와 한 집에 사는 '그녀'는 봉쇄로 인한 긴장과 공포로 정신을 놓아버린 듯 보인다.


이어지는 단편 <맨홀>은 맨홀 안에 모여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문득>은 낚시꾼이 발견한 시체 한 구와 남편을 찾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는 추리 소설의 결말을 끝내 알지 못하고 경찰에 체포된 남성의 이야기이다. 하나 같이 설정이 기발하고 전개를 종잡을 수 없다. 무덥고 긴 여름밤에 하나씩 읽으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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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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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어딘가에 원래는 나였지만 지금은 내가 아닌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게다가 생애 주기의 어떤 시기에 도달하면 다시 그 존재와 몸을 합쳐야 한다면. 우다영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의 첫 번째 소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가 바로 그러한 상황을 그린다. 이 세계에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이 있다. 이들은 원래 한 몸으로 태어나 트윈으로 분리되어 살다가 열여덟 살 생일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면서 한 몸이 된다. 알파인 '나'는 자신의 분신인 오메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기도 하고 오메가와 결합하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기도 하면서 오메가와의 결합을 기다린다. 


그런데 열여덟 살 생일이 되어도 오메가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오메가를 찾아서 집으로 끌고 오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성격이나 취향도 맞지 않아 이 상태로 결합하면 재앙이 벌어질 게 분명하다는 불길한 예감만 든다. 그러나 오메가와 결합하지 않으면 완전한 성인이 될 수 없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전개만 보면 결혼에 대한 비유인가 싶은데, 알파와 오메가가 원래는 한 몸이고 결합 후 다시 한 몸이 된다는 점에서 개인과 개인의 결합인 결혼보다는 개인 안의 서로 다른 인격 또는 자아의 충돌과 화합을 그린 이야기로 읽혔다.


이어지는 단편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은 남태평양의 사모아제도에서 '아즈깔'이라는 식물이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 풀의 독성에 감염된 사람은 자신이 환생하기 전의 모든 생과 환생한 후의 모든 생을 기억하게 된다. 그 결과 감염자들은 어떤 사건의 인과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게 된다. <긴 예지>는 여섯 살 쌍둥이 자매의 베이비 시터인 효주가 어떤 게임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 외에도 SF 또는 판타지의 요소가 결합된 기발하면서도 환상적인 내용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문장도 좋아서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을 계속 따라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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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기념일
사이토 하루미치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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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 장애가 있는 부모는 어떻게 갓난아기를 키울까. 궁금하다면 사이토 하루미치의 책 <서로 다른 기념일>을 읽어보길 권한다. 저자 사이토 하루미치는 1983년 도쿄에서 태어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선천적 난청으로 중학생 때까지 일반 학교를 다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농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만난 마나미와 결혼해 첫 아이 이쓰키를 얻었다. 이 책은 둘 다 농인인 부부가 청인인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경험한 일들과 생각한 것들을 일상 에세이 느낌으로 담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저자는 자신이 청인 중심인 사회에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진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등 장애가 없는 사람도 좀처럼 해내기 힘든 삶의 과제들을 순조롭게 완수했으므로 청인과 다를 것이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갓난아기를 기르면서 그러한 믿음이 무너졌다. 농인 부모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 청인 부모는 아기의 울음소리로 아기가 지금 졸린지 배가 고픈지 안아 달라는 건지 구분한다는데, 농인 부모는 그럴 수 없다. 밤중에 아기와 함께 자다가 아기에게 위험한 상황이 벌어져도 농인 부모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저자 부부는 온갖 방법을 고안해내기 시작했다. 낮에는 아기의 얼굴을 보면서 표정 읽는 연습을 하고, 수시로 아기의 위치를 확인했다. 밤에는 주기적으로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30분마다 진동이 울리도록 설정한 휴대전화를 속옷 속에 넣고 잤다. 아기가 위험한 행동을 할 때 청인 부모는 아기에게 "안 돼", "하지 마"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농인 부모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저자 부부는 표정이나 몸짓으로 전달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장난감을 입에 넣으면 저자도 입에 장난감을 넣고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아기가 이해하고 더는 하지 않았다.


"네가 들은 것. 그것을 나는 바로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한다. 그다음에는 상상한다." (67쪽)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사람이 의사 소통을 하는 방법은 말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글이나 그림, 사진 같은 이미지로도 의사를 표현할 수 있고, 표정이나 몸짓 같은 비언어적 표현도 언어로서 기능할 수 있다. 농인 부모들이 아이와 의사 소통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아이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청인 부모들이 보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청인들은 말을 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더 많이 알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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