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들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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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성식은 아내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얼마 전 성식의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대뜸 자신에게 꿔간 돈을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돈을 꾼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알츠하이머병을 의심하고,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날에 서둘러 어머니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교회 사람들과 기도원에 가고 없고, 예전의 총명했던 어머니라면 자신들과의 약속을 잊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두 사람의 걱정은 더욱 깊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성식과의 전화 통화에서 성식의 목소리를 죽은 형 성준의 목소리로 착각한다. 정녕 어머니는 큰아들의 죽음조차 잊은 것일까.


이승우 작가의 소설집 <목소리들>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어떤 단편은 추상적이고 어떤 단편은 구체적이라서 공통점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목소리들>이라는 제목을 보고 어느 단편에나 인상적인 '목소리'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첫 번째로 실린 단편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에는 차도에 물을 뿌리고 솔질을 하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강제 연행하려고 하는 경찰, 그리고 여자를 대변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어지는 단편 <공가>에는 남편 부재 중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시부모와 시동생의 큰 목소리 때문에 고생하는 여자의 사연이 담겨 있다.


앞에 서술한 <마음의 부력>에는 죽은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목소리를 혼동하는 어머니가 나오고, 이어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어야 했다>에는 갑질 및 성추행의 가해자로 지목된 회사 후배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피하는 남자가 나온다. <귀가>에는 재건축을 위해 비워진 건물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소리를 들은 남자가 나오고, 표제작 <목소리들>에는 아들이 죽은 후 계속해서 목소리를 듣는 남자가 나온다. <물 위의 잠>은 또 다시 죽은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마음의 부력>과 겹쳐 보인다. 시인 이상의 이야기를 다룬 <사이렌이 울릴 때―박제가 된 천재를 위하여>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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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미야모토 테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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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세 남성 마키노 고헤는 도쿄 이타바시 구의 상점가에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중화소바를 운영하며 평생을 보냈다. 오랫동안 휴일도 없이 일만 했던 그는 아내 란코가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난 이후로 만사에 의욕을 잃었다. 어느 날 고헤는 책장에서 읽지 않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펼쳤다가 오래된 엽서 한 장을 발견한다. 30여 년 전 고사카 마사오라는 남자가 란코 앞으로 보낸 이 엽서를 보고 란코는 분명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째서 모르는 사람이 보낸 엽서를 란코는 버리지 않고 간직했을까.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던 란코의 말은 거짓일까. 애초에 이 사람은 왜 란코에게 엽서를 보냈을까...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등대>는 우연히 발견한 엽서 한 장으로 인해 죽은 아내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 남자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갑작스럽게 등대 여행을 하게 된 이야기를 그린다. 하필 '등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엽서 앞면에 등대 사진이 있고, 엽서를 보낸 남자가 "등대 여행을 잘 다녀왔다."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사진만으로는 일본의 수많은 등대 중에 어느 등대인지 특정할 수 없어서, 고헤는 우선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등대부터 하나씩 가보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대화가 뜸했던 자식들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아내와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환갑을 넘긴 아저씨의 일상 이야기가 뭐 그리 재미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일단 고헤 씨는 엄청난 독서광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배운 고헤 씨는 명문대를 나온 친구 간짱의 권유로 책을 읽기 시작해 나중에는 책이 너무 많아서 2층 바닥이 내려앉겠다는 타박을 들을 정도가 된다. 그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고헤 씨가 유일하게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문제의 책'이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인데, 책 정보를 찾아보니 출간 이후 30년 동안 종교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군림해 온 명실상부한 고전이며, 마침 작년에 개정판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언젠가 읽어보는 것으로.


친구한테 '은둔형 외톨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아내가 죽은 후 사람도 안 만나고 바깥 출입도 안 했던 고헤 씨가 여행을 통해 기력을 회복하는 과정도 감동적이었다. 소설에 따르면 오랜 세월 바다를 지켰던 등대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효용이 없게 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추세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등대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수수하지만 진국인 고헤 씨와 란코 씨의 중화소바 역시 찾는 사람이 있을 터. 그 맛을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가게 문을 연 고헤 씨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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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 홈
문지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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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계 백인인 브래드는 한국계 미국인인 아내의 아버지 호철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미국 뉴욕의 JFK 공항으로 향한다. 문제는 팬데믹으로 인한 격리 의무 때문에 한국에 도착해도 곧바로 장인을 만나러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내와도 떨어져 호텔에서 격리 생활을 하게 된 그는 기내에서 썼던 미국 이민 1세대인 장인 이호철의 일대기를 이어서 써보기로 한다. 1942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신세가 되어 결국 미국 이민을 택했고, 그야말로 밑바닥에서 시작해 종국에는 사업체를 여러 개 거느릴 정도로 큰 성공을 한 그가 한국에서 말년을 보내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초급 한국어>, <중급 한국어>를 쓴 문지혁 작가의 소설집 <고잉 홈>은 미국으로 이민 또는 유학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문지혁 작가는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해 뉴욕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어 강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외부인이 되어보고, 외부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았던 경험을 반영한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대표작 <초급 한국어>, <중급 한국어>가 작가 자신의 경험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느낌이라면, <고잉 홈>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초월해 미국 이민자, 유학생 전반의 이야기를 폭넓게 다룬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책에는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미국 이민 1세대인 장인의 생애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백인 사위의 분투를 그린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를 시작으로 시카고에서 뉴욕 집까지 이동하는 차에서 진행되는 실험에 참가한 현의 이야기를 담은 <고잉 홈>, 결혼 1주년 기념일을 맞아 플로리다의 한 호텔로 여행을 떠난 부부의 이야기인 <핑크 팰리스 러브>, 고모 가족과 함께 디즈니 월드에 갔다가 생긴 일을 그린 <크리스마스 캐러셀>, 저널리즘 수업 과제를 위해 단골 세탁소 주인을 인터뷰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골드 브라스 세탁소> 등 한 편 한 편의 설정이 다채롭고 내용도 재미있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한인 교회에서 운영하는 한글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게 된 남성과 '맹 선생님'으로 불리는 여성 사이의 짧지만 깊은 우정을 그린 단편 <뷰잉>이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에는 매운 음식을 먹어야만 풀리는 감정이 있고, 아메리카노가 아닌 믹스 커피를 마셔야만 달래지는 허기가 있음을 아는 건 한국인들뿐이지 않을까. 한 해의 마지막 날 응급실 병원을 찾게 된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나이트호크스>,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건물에서 벌어진 일을 그린 <뜰 안의 볕>, 아버지를 찾아 한국에 온 한국계 미국인 자매의 다큐멘터리 제작기를 담은 <우리들의 파이널 컷>도 하나 같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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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본 남자
데버라 리비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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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가을의 런던. 28세 남성 솔 애들러는 애비 로드를 걷다가 자동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여자친구 제니퍼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솔은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라고 말하고는 원래 가던 길을 간다. 제니퍼와 만난 솔은 사진 작가인 제니퍼의 촬영을 도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얼마 후 갑자기 제니퍼가 솔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충격을 받은 솔은 동베를린으로 떠난다. 역사학도인 솔의 전공은 동유럽 공산 국가 연구인데, 그곳에서 만난 언어 강사 발터 뮐러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영국 작가 데버라 리비의 소설 <모든 것을 본 남자>는 먼저 읽은 그의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살림 비용>과 비슷한 점이 별로 없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살림 비용>이 작가 자신이 여성으로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에 관한 책이라면, <모든 것을 본 남자>는 남성인 주인공의 청년 시절부터 노년의 일을 그리기 때문에 여성만의 경험이나 생각에 관한 비중이 적고, 있어도 주변 인물의 그것으로서 등장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여성의 목소리를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내용인 건 아니다. 


주인공 솔 애들러는 1980년대를 살았던 남성으로서는 드물게 눈 화장을 하고 어머니의 유품인 진주 목걸이를 하고 다닐 정도로 관습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이다. 여성과 남성 모두를 사랑하는 양성애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유대인이고 노동계급 출신이며 공산주의자인 아버지를 두었다. 여러 면에서 그는 약자, 소수자의 정체성을 지녔고, 그 자신도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여자 관계에 있어서는 절대 약자가 아니다. 제니퍼를 사귈 때 그는 제니퍼의 룸메이트에게 추파를 던졌다. 발터와 자면서 발터의 여동생 루나를 탐했다.


루나는 솔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영국에서 동베를린으로 올 때 파인애플 통조림 하나만 사달라고 부탁했을 뿐이다. 그러나 솔은 루나가 좋아하는 비틀즈의 앨범 재킷을 모방해 자신이 직접 애비 로드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루나에게 가져다줄 뿐이다. 동베를린에서 탈출해 리버풀에 살면서 의대에 다닐 거라는 루나의 계획을 도울 마음도 없다. 그저 루나의 몸을 탐하고 루나에게 사랑(주지 않고) 받기만을 원했던 대가는 수십 년이 흐른 후에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만남으로 찾아온다. 모든 것을 보았지만 진정으로 본 건 없는 남자의 쓸쓸한 말로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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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민 토킹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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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을에 사는 여자들에게 갑자기 단체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릿속이 몽롱하고 몸에는 핏자국이 있고 어떤 여자는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한 것이다. 문제를 호소하자 같은 마을에 사는 남자들은 귀신과 악마의 소행이라며 오히려 여자들을 비난하고 벌주려 한다. 옛날에 유행한 귀신 이야기 같은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2006년부터 2009년 사이에 볼리비아에 있는 한 메노파 신자 공동체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남자들이 '귀신과 악마의 소행'이라고 했던 일의 정체는 알고 보니 한밤중에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동물용 마취제를 먹이고 강간한 것이었다.


캐나다의 작가 미리엄 테이브스의 소설 <위민 토킹>은 바로 이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아우구스트 에프는 오나 프리센의 의뢰를 받고 메노파 공동체 여성들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여성들이 남성에게 회의록 작성을 맡긴 이유는 메노파 공동체에선 읽기와 쓰기를 남성에게만 가르치고 여성에게는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의 목적은 여성들을 강간한 남성들과 그들의 보석금을 벌기 위해 다른 도시로 간 남성들이 48시간 이후에 돌아올 예정인데, 그들이 돌아오면 여성들은 더 이상 이 마을에 살 수 없으니 그 전에 그들을 용서할지 말지 결정하자는 것이다.


여성들의 반응은 크게 두 편으로 갈린다. 한 편은 마을에 남아서 싸우자는 것이고, 다른 한 편은 마을을 떠나자는 것이다. 두 편으로 나뉜 여성들은 각각 일리 있는 의견을 펼친다. 남아서 싸우자는 여성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내 이 마을에서 지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살 길이 없고, 원수도 용서하라는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견해를 펼친다. 마을을 떠나자는 여성들은 마을에 계속 남아봤자 과거와 동일한 고통과 폭력이 반복될 따름이며, 자신들이 남성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강간을 당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신에게 더 무슨 기대를 하느냐고 반론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고은 시인이 언급되는 대목이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고은이라는 한국 시인의 이야기였다. 나는 여자들에게 그가 어떻게 자살을 네 번이나 시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71-2쪽). 여성들은 고은이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네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고도 끝내 살아간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들도 그렇게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아마도 고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모르고 이 대목을 썼을 텐데, 안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피해자들의 고통은 계속되는데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를 자처하는 소설 속 현실이 실제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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