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미야모토 테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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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세 남성 마키노 고헤는 도쿄 이타바시 구의 상점가에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중화소바를 운영하며 평생을 보냈다. 오랫동안 휴일도 없이 일만 했던 그는 아내 란코가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난 이후로 만사에 의욕을 잃었다. 어느 날 고헤는 책장에서 읽지 않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펼쳤다가 오래된 엽서 한 장을 발견한다. 30여 년 전 고사카 마사오라는 남자가 란코 앞으로 보낸 이 엽서를 보고 란코는 분명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째서 모르는 사람이 보낸 엽서를 란코는 버리지 않고 간직했을까.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던 란코의 말은 거짓일까. 애초에 이 사람은 왜 란코에게 엽서를 보냈을까...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등대>는 우연히 발견한 엽서 한 장으로 인해 죽은 아내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 남자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갑작스럽게 등대 여행을 하게 된 이야기를 그린다. 하필 '등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엽서 앞면에 등대 사진이 있고, 엽서를 보낸 남자가 "등대 여행을 잘 다녀왔다."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사진만으로는 일본의 수많은 등대 중에 어느 등대인지 특정할 수 없어서, 고헤는 우선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등대부터 하나씩 가보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대화가 뜸했던 자식들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아내와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환갑을 넘긴 아저씨의 일상 이야기가 뭐 그리 재미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일단 고헤 씨는 엄청난 독서광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배운 고헤 씨는 명문대를 나온 친구 간짱의 권유로 책을 읽기 시작해 나중에는 책이 너무 많아서 2층 바닥이 내려앉겠다는 타박을 들을 정도가 된다. 그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고헤 씨가 유일하게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문제의 책'이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인데, 책 정보를 찾아보니 출간 이후 30년 동안 종교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군림해 온 명실상부한 고전이며, 마침 작년에 개정판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언젠가 읽어보는 것으로.


친구한테 '은둔형 외톨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아내가 죽은 후 사람도 안 만나고 바깥 출입도 안 했던 고헤 씨가 여행을 통해 기력을 회복하는 과정도 감동적이었다. 소설에 따르면 오랜 세월 바다를 지켰던 등대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효용이 없게 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추세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등대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수수하지만 진국인 고헤 씨와 란코 씨의 중화소바 역시 찾는 사람이 있을 터. 그 맛을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가게 문을 연 고헤 씨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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