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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민 토킹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평점 :
한 마을에 사는 여자들에게 갑자기 단체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릿속이 몽롱하고 몸에는 핏자국이 있고 어떤 여자는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한 것이다. 문제를 호소하자 같은 마을에 사는 남자들은 귀신과 악마의 소행이라며 오히려 여자들을 비난하고 벌주려 한다. 옛날에 유행한 귀신 이야기 같은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2006년부터 2009년 사이에 볼리비아에 있는 한 메노파 신자 공동체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남자들이 '귀신과 악마의 소행'이라고 했던 일의 정체는 알고 보니 한밤중에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동물용 마취제를 먹이고 강간한 것이었다.
캐나다의 작가 미리엄 테이브스의 소설 <위민 토킹>은 바로 이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아우구스트 에프는 오나 프리센의 의뢰를 받고 메노파 공동체 여성들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여성들이 남성에게 회의록 작성을 맡긴 이유는 메노파 공동체에선 읽기와 쓰기를 남성에게만 가르치고 여성에게는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의 목적은 여성들을 강간한 남성들과 그들의 보석금을 벌기 위해 다른 도시로 간 남성들이 48시간 이후에 돌아올 예정인데, 그들이 돌아오면 여성들은 더 이상 이 마을에 살 수 없으니 그 전에 그들을 용서할지 말지 결정하자는 것이다.
여성들의 반응은 크게 두 편으로 갈린다. 한 편은 마을에 남아서 싸우자는 것이고, 다른 한 편은 마을을 떠나자는 것이다. 두 편으로 나뉜 여성들은 각각 일리 있는 의견을 펼친다. 남아서 싸우자는 여성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내 이 마을에서 지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살 길이 없고, 원수도 용서하라는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견해를 펼친다. 마을을 떠나자는 여성들은 마을에 계속 남아봤자 과거와 동일한 고통과 폭력이 반복될 따름이며, 자신들이 남성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강간을 당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신에게 더 무슨 기대를 하느냐고 반론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고은 시인이 언급되는 대목이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고은이라는 한국 시인의 이야기였다. 나는 여자들에게 그가 어떻게 자살을 네 번이나 시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71-2쪽). 여성들은 고은이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네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고도 끝내 살아간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들도 그렇게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아마도 고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모르고 이 대목을 썼을 텐데, 안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피해자들의 고통은 계속되는데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를 자처하는 소설 속 현실이 실제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