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지음, 유재홍 옮김 / 울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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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야할듯, 드보르의 저작들이 아직 번역 되지 않은 게 많지만..
현실문화연구에 물어보니 책의 원본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다른 출판사로 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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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닝기미, 이거 10만 원에 중고로 팔라고 할 때 팔았어야 했는데............. 새책이 나오다니 억울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8-06 10:46   좋아요 0 | URL
10만원 까지 올라갔습니까?
조금 아깝군요...ㅎㅎ
 
나는 루소를 읽는다 - 자유와 평등, 다시 시대의 광장에 서다
김기의 지음 / 다른세상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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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루소를 읽는다>를 읽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루소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연구하고 생각할 것들이 많은지 생각하게 해준다. 물론 이 서적을 집필한 작가도 그렇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루소가 제시한 그 사상이 정말 옳았다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루소는 기독교를 믿었지만, 기독교 안에서 세상을 보지 않았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 반계몽주의자였으며, 자연주의자였다. 오히려 신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던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기보단 그 민중의 고통을 같이 짊어지려 했다.

 

그래서 그는 광인이 되어야 했고, 불안감에 미쳐 의심병에 걸려야 했다. 루소가 그런 힘든 상황에서 잃지 않은 것은 당시 도시 빈민과 시골의 농민에 대한 인간애였다. 그의 인간애적인 모습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볼 수 있다. 이성과 문명이 인간에게 유익한 존재인지 혹은 아닌지를 밝히는 연구에서 루소는 오히려 학문과 예술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핍박받고 배고픔에 허덕인다고 했다. 지금처럼 예술이 누구나 혼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의 위용과 업적을 남기기 위해 막대한 예산과 물자를 낭비해야 했다.

 

그 낭비는 단순히 가지고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향수 하나를 생산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했고, 치장하기 만든 가발에는 많은 식재료가 필요했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어보면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루소가 바라보던 농민의 힘든 삶에서 그의 인간애적인 정신을 볼 수 있었다. 처음 그가 파리에 입성할 때 파리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빈민, 거지, 창녀, 도둑, 병자로 가득한 곳이었다. 모두 가난에 의해 내몰린 자였고, 누구 나하나 그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려 했다. 루소와 더불어 당대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와 디드로 역시 그러했다. 오로지 루소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예전에 <에밀>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정말 놀라운 문구를 발견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고,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회에 살고 있다. 죄지은 사람은 목매달아 죽을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작가도 그렇지만 나도 전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장발장이란 이름의 사나이는 오로지 집에서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조카를 위해 빵 하나를 훔쳤다. 그 죄로 그는 오랜 시간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고, 그의 조카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추후에 장발장이 감옥에서 나와 신분을 속이고 살아갈 때 판틴의 딸인 코제트를 거둘 때, 코제트의 생활은 어느 사기꾼 여관 주인집에서 제대로 된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다. 추운 날에 먼 거리까지 물을 길러야 했으며,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이런 비참한 생활을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또는 범죄를 저지를 것인가? 하지만 범죄자의 말로는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몸을 팔아야 하고, 남자는 몸을 버려야 했다. 오늘 날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최근에 개봉되었던 영화 <레미제라블>은 영국에서 만든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 영화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먹을 식량이 없어서 걱정하고, 공장에서 감시원들의 부당한 행위에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버려진 고아, 이런 모습은 루소가 프랑스 파리에서 보던 그 장면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인 것처럼, 그 사슬이란 고리는 바로 인간의 가난과 굶주림이었다. 루소가 가진 인류애적인 가치는 “아름다움을 사람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라는 말처럼 루소는 인간 스스로 인간성을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루이왕정 시기에 핍박받았으며, 수구세력에 의해 그의 사상은 무참히 짓밟혔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은 논란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루소의 사상이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18세기 낭만주의, 19세기 관념철학과 마르크스주의, 20세기의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유명한 학자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보았다. 거기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면서 더 이상 자연을 착취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을 착취하게 된다. 문명이란 세계는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노동력으로 변화하여 만든 장소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문명의 역사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고대에서는 지식을 이용한 치수관리와 화술,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물리적인 폭력과 무력을 이용한 계급, 현대는 자본이란 이름의 경제로 이어진다.

 

계속되는 인간의 억압과 고통에 대해 루소는 그 굴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마르크스보다 100년 전부터 그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게다가 실존주의적으로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한 존재성까지 고민한 그에게 오히려 학문에 대해 파고가면 갈수록 루소의 영향은 막대했다. 루소가 그렇게 원한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었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루소는 “누구도 자기를 팔 만큼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기의 몸을 파는 여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 파는 인간들도 존재한다.

 

또한 산업화의 가속화로 도시는 계속 인구가 모여들고, 시골은 황폐해지며, 소득의 불평등은 이제 인구까지 감소하고 있다. 현재 부부 2인당 출생되는 자녀수는 1.2명, 여기에 사회는 점차 노령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국방군사력 기본이 되는 젊은 남성 수가 감소하여 비상 시 국가존립조차 위협이 되고 있다. 인구가 줄면 당연히 기업이 생산되는 상품을 소비가 축소되고, 기업의 생산력이 감소되면 그 나라의 경제가 위태롭다. 우리는 매일처럼 정치권에서 경제문제를 두고 이슈로 삼지만, 그 경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참 어리석게 보인다. 인간이 경제위에 있는지 아니면 그 아래에 있는지 구분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구의 감소는 인간이 계속 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재생산되어야 하겠지만, 그 생산에 의한 2차적 생산이 부족한 이유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남성, 중앙과 지방의 경계선상에서 경제력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태어날 2세의 인생에 미친다. 교육비용의 증가, 생활에 불충분한 급여는 점차 국민생활의 질을 떨어뜨리며, 그것이 결국 인구감소로 이어진다.

 

경제를 살린다고 하여 민생이 사는 것이 아니라 민생이 살아야 경제가 일어나는 것을 그들을 모르고 있을까? 루소는 진짜 필요한 것에 대해 너무 가치가 낮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다. 가령 우리 인간은 의식주에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농촌과 바다에서 나오는 식량이 없다면 우리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허나 현재 우리는 식량의존국이 되었고, 농촌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노고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모든 농민이 해당되지 않으나 적어도 쌀과 같은 식재료는 우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또한 인간에게 식량만큼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이 존재하기에 사회라는 공간도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이 가장 필요하기에 인간이 가장 하등하게 취급당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을 싫어하거나 학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무한한 애정을 바라면서 타인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게 여긴다. 애완동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보여주듯이 행동하는 그들의 가식과 협소한 생각이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어느 인간이 애완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기도 하는가? 물론 대다수의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타인을 위해주는 것보다 그저 애완동물로부터 애정을 받으려하는 인간을 두고 어떤 생각이 들까?

 

억지로 동물을 키워, 그들의 성기를 자르고, 혹은 강제로 수정하는 것이 동물에 대한 사랑인가?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이란 오류와 심지어 인간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어리석음에 계속 시련은 되풀이 된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자연적인 것을 파괴하고, 거기에 자신의 이기심의 공화국을 만든다.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비판한 것처럼 4대강 공사처럼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저 국가의 세금을 낭비하여 어느 특정인에게 이익이 가게 한 일을 보며,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되지 않은 것이 참 안타깝게 여겼다.

 

이미 도시사회생활에 익숙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나, 그 공간에서도 자연의 세계를 보호하고 가꾸며, 아름다운 것들을 보존해야 하나, 이 모든 것이 돈으로 볼 뿐이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잘 살아보세 라고 외치며, 강과 개울을 콘크리트로 바르더니 강물의 수질이 악화되고, 인간이 마셔야 할 물도 오염되어 식수걱정을 하게 되었다. 잠시 이익을 보려던 것이 오히려 그것을 원상 복구하는 것으로 몇 십 배에 가까운 예산을 소모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하는 일이 모르겠다.

 

오로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고, 그 이기심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이끌려 새로운 사슬의 고리가 되는 우리들의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은 병이 든다. 인간성의 형성에서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 우리의 교육은 인간이 한 사람의 존재로 만들기보단 그저 기존의 사슬에 적합한 인간만을 만든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자신 내지 그 단체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조차 마음의 양심조차 느끼지 못한다. 최근 육군28사단에서 벌어진 구타사건이나 혹은 다른 군부대에서 일어난 자살사고나 총기사고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병폐에 빠졌는지 알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평등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 도리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게 된 것이다. 그 억압하던 자도 분명히 타인이나 혹은 어느 사회에서 억압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보상심리는 정말 최악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현상이다. 왜 그럴까?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루소가 말한 것처럼 오직 자연적인 인간이고, 그 자연에서 인간의 영혼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치는 바다나, 혹은 넓고 푸른 하늘, 시원한 강줄기가 흐르는 하천, 바람이 부는 넓은 평야에서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하나가 된다. 모든 것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서도 그들이 맑은 땅과 물을 지키려한 것은 단순히 도시사람들의 건강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갉아먹는 도시의 척박함에서 영혼을 다시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자연에 대한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의 문장이 거대한 강줄기처럼 굽이치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다.

 

인간 역시 그 자연적 존재로 본다면 서로 다를 것도 없으나, 계속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하나라도 더 빼앗기 위해 살아간다. 강자의 논리로 하나의 정의를 만드는 것은 고대 노예를 만들고 착취하던 자들의 부조리한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루소는 “힘을 정당성으로 만드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바꾼 것이다.”라고 한다.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에 대한 권리로부터 시작이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면 타인의 자유가 소중하고,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평등이 필요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공적재산의 영역으로 보겠지만, 최소한 존 롤즈라는 정치철학자는 알고 있었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소수혜자가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인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정치적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판단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고, 그것은 교육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인 성공은 교육에 의해 결정되고, 그 교육은 기회의 균등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공적교육이 무너진 이상 경제적 조건이 없는 자에겐 오직 같은 운명을 되풀이된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 것이다.

 

루소는 인간의 교육을 인간 스스로 살아가고, 자연에 대해 같이 살아가게 함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과정이기를 원했다. 인간이 도구로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이 감옥과 같은 학교에서 감시와 처벌로 통해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제 아무리 좋은 대학과 좋은 일자리,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패륜을 저지르고, 또한 자기인생에 대한 허무함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비정규직과 실직자 같은 사람들은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멀어진 세모녀의 자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삭막한지 잘 보여주는 단적이 예다. 그러나 우리는 브레이크가 없는 벤츠처럼 계속 어둠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자신들은 벤츠에 타고 싶어 하나, 막상 그들은 벤츠 타이어가 밟고 지나가는 아스팔트에 불과한데 말이다. 벤츠를 타고 그저 어디에 추락하든지 또는 충돌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차를 타거나 먼 길을 걸어가는 다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눈앞에 있는 위기와 고통을 잠시 잊는 힐링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대안이 필요하다.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여 현실은 바뀌거나 나아지지 않는다. 개인의 성향과 개성에 의해 개인적 삶은 바꿀 수 없으나,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삶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개인의 문제는 개인으로서 끝이 나지만, 사회의 문제는 각자의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안 일어날 것이란 믿음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현실에서 언젠가 그 칼날은 자신의 목을 향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하기에 계속 비극은 되풀이고 매일 새로운 소극이 탄생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이나, 인간의 이성 내에 윤리가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기심(利己心)이고, 인간은 감정(感情)을 가졌다고 하나 거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정(無情)한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개인보다 더 못한 야만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개인들은 자신들의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 이상 문제를 삼지 않지만, 문명과 미개의 중간단계인 야만은 자신의 배가 부르고 잠을 충분히 자더라도 멈추지 않고 약탈과 착취는 반복한다. 진심으로 문명인 혹은 이성적 인간이라면 타인을 공격하거나 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루소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배운 가르침에서 "의무와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 타인의 불행 속에서 자기 이익을 찾는 일은 피해야 한다."라고 했다. 타인의 불행에 빠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경제적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현실은 마치 야만의 사회처럼 보인다. 그 야만적인 공간에서 루소가 제시하는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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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유 - 실천하는 교사,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함영기 지음 / 바로세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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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것은 참 어렵다. 왜 어려운 것일까? 사실 인간은 인간을 스스로 키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이란 인간에 의해 사회적 그룹으로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현재 21세기가 과거 조선시대 내지 봉건사회였다면 농경산업으로서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오히려 어린아이 내지 청소년들을 가리켜 작은 어른이라고 했다. 단지 몸이 작을 뿐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업무나 책임을 이미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정에서 요리를 하는 소녀나, 논과 밭에서 추수하는 소년들이 있었고, 심지어 10살 내외의 아이들도 나름 잔잔한 심부를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가장 행복은 그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고,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작은 아이였던 청소년들은 지금의 청소년처럼 단순히 보호받고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나름대로 삶의 한 영역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다. 중세유럽부터 근대유럽까지 학교라는 곳은 모두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귀족이나 왕족, 그리고 일부 부유한 사람에 한하여 가능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산업구조는 농경사회가 아니라 경공업으로 변모되면서 노동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공업이란 특성에 인간을 맞추어야 했다.

 

가령 옷감을 만드는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물과 석탄 그리고 재료의 배합을 알아야 했으며, 장거리 수송을 위한 교통에서도 말과 소보단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도구를 다루거나 수리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적 기술이 요구되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자본주의 산업체계에서 지식은 농업을 하는 것과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가 능률이 좋아지는 만큼 세분화된 작업구조와 그 기계에 대한 작업능력이 요구되므로 공장에서 근로하는 사람들에게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시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글이 되었는데, 사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에서 감옥의 역사에서 감옥은 단순히 법적인 조치로 만들어진 물리적 감옥 즉 교도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학교, 병원 등 다양한 공간에 머무는 인간 역시 감옥 같은 감시체제로 이루어진 셈이다. 제레미 벤담의 일망감시탑인 판옵티콘에서 감시와 통제로서의 기능은 결국 인간에게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라기보단 그저 그 감시와 통제로서 이익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교육이 교육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교육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인 권력에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기존의 노동인력이 빠지면 새로운 노동인력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대체되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그 사회는 계속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조직이란 하나의 구조에서 본다면 국가의 운영과 존립에서 하나의 토대를 이루는 하부구조로 되는 것이고, 국가라는 전체적 틀에서 떠나 개인으로 본다면, 교육으로 통해 인간의 자아성찰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그저 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제시스템으로 이어가고 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교육사유>로 생각해보는 한국의 교육이란 항상 위기의 연속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근대에서 넘어 탈근대로 이어져야 할 단계이나 아직까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려 있다. 이른바 계몽이란 것이 진실한 계몽이 아니라 계몽이란 이름의 새로운 억압으로 등장한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으로 되는 것일까? 우리는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자유와 민주주의는 인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같이 좋은 삶을 살아가야할 가치관이다. 민주공화국이란 단어에서 공화국은 결국 그 나라의 국민이 전쟁이나 위험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단순히 국가외부의 적이나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등장할 수 있다. 그런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 나는 교육이라 생각한다. 비행청소년 내지 각종 왕따 사건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도 일어나는 각종 문제들은 결국 교육에 의해 일어나는 인간의 재해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원래 인간으로 된 게 아니라 인간은 후천적인 요건에 의해 인간이란 존재로 사회로 나오는 것이다. 물론 태어날 때 두뇌가 우수한 아이나 또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할 수 없기에 결국 인간은 교육으로서 자신의 인생이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교육사유>를 읽기는 했지만, 먼저 이 책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한국사회에 전반에 일어나는 교육문제를 다룬 것은 맞다. 그 문제에 대한 원인 역시 언급한 것까지도 인정하다. 그러나 깊이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사례에 대해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면 적용이 가능한 사례를 들어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존 듀이라는 미국 교육사상가에 대한 거론은 좋으나, 존 듀이의 이론을 어느 정도 구체적인 설명보다 일반적인 설명으로 끝난 것이 아쉬우며, 차라리 존 듀이의 서적들과 그 연구결과 그리고 존 듀이의 연구를 계속 진행하는 사상가들을 소개하여 우리가 어떤 서적을 보는 것이 좋은가 하는 안내가 없던 게 아쉬웠다.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해 생각하자면, 교육학이나 교육철학을 직접 공부하거나 수업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정치․사회학․철학․문학 등을 접하면 교육에 대한 사유와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령 교육의 기회에서 균등배분은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등장하는 내용이다. 롤즈의 경우 최소수혜자로 하여금 그들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혜택이 경제적인 문제로 배제되는 것이 안 되며,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기회를 부여하여 스스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거론했다. 그렇다면 교육사유에서 그런 부분이 등장하고, 그런 중요한 사안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것은 학생과 교사 개인적인 영역에서 학교와 사회 그리고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로 이어간다.

 

교육이란 것은 누가 임의로 정하여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육행정에 의해 이루어진 체계이며, 아쉽게도 우리는 교육을 인간의 성장으로 통한 미래투자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는 투자라는 점이다. 그런 투자가 인간의 성장에 대한 투자가 아닌 경제적 조건으로 연결되니 학생들은 인격이 아니라 자본적 가치로 보는 것이다. 국가는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큰 효율을 보는지, 혹은 학교는 얼마나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보는지, 부모는 얼마나 애들이 성적이 올라 좋은 대학에 들어가 대기업에 취업하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말이다.

 

아니라면 공무원 중에서 고위직이나 또는 전문직으로 수익이 월등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국가에서 돈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모든 것이 돈으로 보기에 인간을 돈에 대한 효율성으로 따지므로 학생들 역시 효율적인 것만 따지고, 그 효율적인 요소는 이기심에 의해 조성된다. 왕따 내지 폭력문제가 발발하는 것은 바로 그런 조직사회라는 은폐공간에서 학생들 스스로 인격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도구로 보기에 타인의 고통이나 상처에는 연연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자신의 목표는 좋은 대학과 일자리, 없으면 오늘 하루 어떻게 견뎌 무사안일하게 지나가는 것이다.

 

이런 학교구조 누가 만들었나? 학교는 그 사회의 축소판이다. 사회라는 규모에서 국가가 가장 큰 규모이니 학교는 그 나라의 현재 상태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학교는 보이지 않은 은폐공간에 계속 집단적으로 격리되어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지 때문이다. 문제가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어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 및 조작으로 이루어진다. 최근에 자살한 어느 중학생의 경우 집단폭행에 괴로워 다른 곳으로 전학가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것은 교사와 어른들이 학생들끼리 잘 지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수수방관에 그 피해학생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단지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자신들에게 책임이 오는 것부터 걱정하는 것이다.

 

안심하지 못하고 학교강단에 서는 선생, 그리고 그 선생을 믿을 수 없는 학생, 집에 가면 학생들은 더 감옥이 된다. 왜냐하면 집에서 바라보는 교육이란 시험 후에 돌아오는 통지표로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가정이 평온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가시바늘이 돋는 감옥처럼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 물론 돈 잘 벌고 좋은 직장에 가면 좋겠지만, 모든 학생에게 그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어떻게든 누군가는 덜 좋거나 더 힘든 일을 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좋은 조건으로 보이는 자리가 과연 몇 %가 되는가?

 

아무리 바득바득 따라가도 갈 수 없다면 제3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학생의 자유고, 그것을 유도하는 것이 선생이고, 그것을 배려해주는 것이 부모다. 안 그래도 프랑스대혁명 발생 225주년인 올해 7월, 나는 다시 루소의 서적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에밀>이 너무 생각났다. <에밀>이란 서적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함께 세계적인 도서이며,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존재하게 만든 정치사상도서다. 그런 <에밀>에서 교육에 의한 방법론적인 요소를 단순히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인 요소로 이끌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은 부모고, 부모가 아니더라도 그 어른은 아이에게 너무 미리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아이로 하여금 자연과 어울리게 하여 그 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이에게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보다 강제로 의자에 앉히기를 바란다. 교육을 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나 오히려 인간의 폐쇄성과 이기심만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위인과 문호들은 왜 루소의 <에밀>을 보고 큰 전환점을 얻었을까? 아이에게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는 또 다른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이고, 그들이 아직 인격적으로 부족해도 그것을 억지로 누르는 게 아니라 그 인격을 새롭게 이끌어가게 해주는 것이 진실한 교육이다. 예전처럼 1인의 천재가 10,000인의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10,000인의 사람이 10,000 인을 먹여 살리는 것이 옳은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세계야 말로 진실한 교육의 가치가 드러나고, 그것이야 말로 헌법과 교육법에서 말하는 민주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민주적인 인격체로서 성장하는가? 결국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어른이 되기 전에 그 당사자가 어떤 가치관을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가치관은 누가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관점과 아이들이 보는 관점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항상 기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풍조에서 우리는 창의적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20세기 산업은 레드오션이라고 하면 21세기는 블루오션이란 말이 있다. 게다가 21세기는 이미 문명적으로 개발이 다 되었기에 새로운 산업은 문화라는 거대한 인간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1달에 책을 얼마나 읽는지, 그리고 그 책은 어느 종류인지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책은 단시간 내에 성과를 내려는 자기계발서 내지 주식투자서 등과 같은 도서다. 그런다고 모두 그 책을 보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는 그 본인의 역사이지 우리 모두의 역사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하는데, 개인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게 해줄 가능성은 과연 0.01%나 될까? 아니라면 주식투자 역시 주식시장의 변화, 국제사회의 변동, 시시각각 움직이는 정국에서 그 흐름조차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이 계속 주식투자에 집착해보았자 결국은 망하게 되는 점이다. 우리는 조금 더 느리게 생각하고 판단해야하는 것을 빨리 자각해야 한다.

 

어차피 21세기는 다양한 업종과 다양한 사회가 조성되어 있기에 어느 일정한 것으로 모두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나 주입식 교육만 추구하는 현실에서 사교육은 언제나 공교육의 앞에 전제되었고, 사교육의 부담은 가정살림에 부담이 오며, 가정의 살림이 압박이 오면 인구까지 감소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국가적으로 교육이 중요하나, 그 교육정책과 흐름이 역으로 한국에서 젊은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이다. 재생산적인 가치로 따지자면 우리 사회 역시 또 다른 모순과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투자는 당장 실적이 이어지지 않겠지만,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교육 실태는 차가운 복도와 막혀있는 창문, 그리고 숨 막히는 경쟁의식에 학생들은 깊은 나락에 삼켜지고 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청소년 자살이 많은 국가로서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한 이들의 비명에 우리의 미래는 과연 빛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적 흐름에 맞물려 있다. 교육에 대한 사유는 비단 내 아이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 대한 문제다. 내 아이는 다르다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어차피 그 아이도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와 사회 안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할 줄 모른다. 내가 피해가고 싶어도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공간적 안식처를 만들어가야 한다. 전에 지방자치단체 투표하기 전에 우리 회사 직장동료에게 이 말을 들었다.

 

자신이 지지하는 당은 그다지 있는 것은 아니나, 어느 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자신은 거기에 투표할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거기 지역에 출마한 후보자가 자신의 친척이 되는 것이란 점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무슨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말에 나는 참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도움이 되는 일이 몇 번인지 혹은 그 도움을 준다고 해도 얼마나 만족할 수 있는지, 제일 중요한 것은 진짜 도와주는 지였다. 나라면 그런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의 자식이나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 진짜 교육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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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1 -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1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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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하위문화에 대한 리뷰를 적으면서 아직까지 구색을 갖추기가 어려운 비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비평이란 것은 문학에서 다루는 분야이기도 하나 때로는 사회나, 정치 그리고 그것을 많은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영상매체 즉 미디어라는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비평이란 것을 다룬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혹은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가? 단순히 인상이나 상징적인 장면이나 행위, 단어나 사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판단력에 의해 사고하고 다시 언어로서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대부분을 글로 이루어진 활자본보다는 주로 영상매체, 거기다가 음향까지 입혀진 멀티미디어로 접촉한다. 물론 대부분 기사거리나 구경거리는 영상과 소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보단 영상에 더 큰 정보력을 보여줄 수 있다. TV에 나오는 뉴스앵커나 혹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 아가씨와 아줌마들이 열광하는 드라마조차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소리는 계속 이어지지 않으나 영상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소리로 전달되는 인간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질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으로 영상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 영상과 소리에서 영화감독 칸단스키는 인간의 감정을 좌우하는 것이 소리가 크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작용하는 소리로는 그 전달력의 지속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소리는 물리적 에너지를 가지는 파동이기 때문에 에너지의 파동이 멈추는 공간에서 소리라는 에너지는 사라지고, 인간의 청각에 의해 더 이상 소리는 에너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진 기억이란 공간 안에 저장된다. 물론 그 저장 공간이 디드로의 <백과사전> 전부를 들어갈 수 있는 용량이라고 해도, 결국 소리라는 에너지는 기억의 관념에서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망각의 동물이고, 방금까지 들은 소리의 강력함에도 어느 순간 망각하여 잊을 수 있다. 왜 그럴까? 당신이 운전대를 잡고 시내도로를 주행하는데, 뒤에 매너가 전혀 안 보이는 사람이 계속 경적 음을 울리기 시작한다. 분명 보통 사람들이라면 짜증이 밀려오고 때에 따라서 범죄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 차가 다른 길로 가거나 앞지르게 되어 다시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에 집중하면 그 소리에 의한 감정과 또는 그 일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게 된다. 마음 구석에는 분명 그렇게 시원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나, 적어도 소리라는 것은 우리의 정보력에서 계속 사라진다. 어떤 만화책을 매일 1번씩 읽다보면 지겨울 수 있겠지만, 같은 노래를 하루에 1번씩 듣는다고 하여 바로 지겨울 수가 없다.

 

그것이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차이다. 보는 것은 자신의 지식으로 이어지는 것과 동시에 본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에 대한 고찰에서 얼마만큼 알아보고, 그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인식하느냐의 차이는 결국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한 판단의 척도 내지 기준, 상황까지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내가 주로 감상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란 매체는 눈에 보이는 이미지세계의 향연이다. 이미지란 실재하지 않은 존재가 내 앞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로 통해 보는 세상에서 설사 애니메이션영상이 아니더라도 실사영상조차도 모두 허구이고 가상의 세계다. 그 진실은 1895년 뤼미에르형제가 제작한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라는 작품을 예를 들면 알 수 있다. 당시 흑백필름으로 보던 사람은 진짜 기차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 영화를 지금 우리가 본다면 가소로운 아이들의 장난으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라는 것은 거짓의 세계이지만 거짓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미지의 세계가 결국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처럼 이미지는 거짓이어야 하겠지만, 그 자체로서 사실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누가 봐도 하나의 새로운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미지의 이율배반에서 우리는 사진의 발명과 사진이 연속촬영이란 기계적 도구, 그리고 디지털시대라는 멀티미디어 공간 구축으로 인해 진실 그 자체는 미스터리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상의 이야기가 사실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 과정조차도 더 이상 우리 대중사회는 인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나의 가상세계가 하나의 진실세계에 반영된 세계처럼 말이다. 왜 내가 드라마와 뉴스를 두고 말하는가? 가령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 작품 내에서 죽게 되면 많은 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실존하는 인물은 죽지 않았지만, 왜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하지만 그 배우가 어느 행사장에 등장하면 전광석화처럼 팬들은 그 인물에게 모인다. 그의 연기에서 그는 죽었는가? 아니면 현실에서 살아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눈에 비추는 것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아있을 뿐이다.

 

20세기의 영상장치의 발달이 중요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장치의 발달과 인터넷의 발달이다.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미디어를 제한적인 공간에서 이제는 제한을 넘어 그 제한 없는 오픈라인이 새로운 데드라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정보의 공유에서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정보가 어느 자리에서 쉽게 구하고 즐길 수 있다. 문제는 그 정보의 원전이 과연 사실과 거짓을 떠나 진실성을 가지는 것이다. 언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의 진실보다 공정성이라고 한다.

 

이제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지라는 매체를 공정성을 떠나 단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동물적인 반응은 이미지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단지 인간 그 자체가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에 읽어본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 인문학>은 바로 이미지에 대한 인간사회를 다루고 있다. 이미지라는 것이 예술과 기술, 그것을 미학적으로 보는 미학자의 견해에서 단순히 예술과 미학의 <이미지 인문학>은 예술을 넘어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인간의 현실까지 파고 들어간다.

 

처음에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란 단어를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지에 대해 우리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이미지가 가장 큰 파장을 준 것은 바로 사진기술의 발명과 발전과정이었다. 하지만 사진의 이미지가 리얼리즘이란 사실주의를 만들어낸 획기적인 도구라고 해도 사실 사진 이전의 이미지가 엄연히 존재했다. 사실이 인간의 초상화 대신 증명사진을 내놓게 되면서 화가는 사실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넘어 초현실적인 세계를 그리게 되었다.

 

하지만 사진기가 나오기 전에 분명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에 대해 카메라에 의해 뽑아진 사진이 아니라 화가의 손에서 태어난 그림이다. 역대 왕의 초상이나 귀족들의 모습들은 당시로는 예술적 기능보다는 차라리 역사적 기록을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작품이 되어야 했고, 루이16세의 목을 자른 후에 내보인 바스티유 광장의 그림과, 루이의 목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묘사한 그림은 이젠 예술품으로 남게 되었다. 그 그림이 루이의 모습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루이는 아니다. 그리고 사진기로 오드리 헵번을 촬영해도 그 사진 자체가 오드리 헵번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흑백사진으로 나온 그녀의 모습과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면서 여전히 그녀의 매력을 느낀다.

 

사진과 영화로 보는 오드리 헵번의 매력은 여전히 후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던진다. 얼마 전 내가 추억의 애니메이션으로 본 <무책임함장 테일러>의 OVA에서 라르고의 공주가 오드리 헵번이 나온 <로마의 휴일>을 계속 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고 말한다. 가상의 세계에 있는 존재가 실제의 있는 존재를 가상으로 만든 작품을 본 것을 두고 감상을 말하는 것을 보면서 가상의 세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가상은 현재 실존하는 우리나, 심지어 우리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공간조차도 또 다른 가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즉 이미지라는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구성되기에 이미지라는 것은 가상의 세계이나, 계속 이어지는 영원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연예인들이 육체는 늙어가지만, 우리의 기억이나 추억에는 나이라는 개념은 크게 다가오지 못한다. 예전의 팬조차도 자신이 늙어가는 것에 대해 인식하나, 그 예전의 자신이 좋아하던 연예인들은 아직까지 그 당시 그 모습의 영상으로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드리 헵번이 나이가 들어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우리의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의 공주님이어야 했다.

 

이미지의 모순이란 바로 우리 인간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인문학>에서 소개한 챕터 중에 최근 일어난 사회적 현상을 접목한다. 이미지가 이제는 가상으로 고정된 게 아니라 현실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은 다르게 보자면 우리가 관객이 되어 계속 구경해야 하는 하나의 매체다. 이와 달리 실시간적인 이미지의 연속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부여했다. 가령 시위현장에 대한 기사를 보다보면 최근의 큰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실제 그 공간에서 일어난 상황을 알리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규모를 축소하거나 또는 그 상황이 발발한 원인과 사건전개에 따른 결과론적인 견해조차도 왜곡하거나 축소한다. 이런 문제는 미디어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본력이 필요하고, 그 자본의 뒤에는 권력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라는 영상매체를 단순히 거대한 자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만든 새로운 매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팟캐스터나 아프리카 TV 내지 혹은 실시간 중계방송, 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정보가 수시로 올라오는 것을 우리는 항시 얻을 수 있다.

 

그 정보가 확실하든지 혹은 아니던지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우리 스스로가 미디어의 영상과 동화되어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저기에 있지 않으나 마치 저기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영상매체 중에 특히 컴퓨터의 기능은 우리가 정보를 받을 수 있는 만큼 역으로 되돌려 보낼 수도 있다. 실시간으로 마이크로 통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마이크가 없더라도 키보드와 마우스로 통해 상대방과 대화한다. 문제는 그 상황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관객은 자신이 마치 그 피사체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만약 그 대화가 연결되지 못한다고 느끼면 소외감에 따라 그 대화공간에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터넷 공간의 소통은 즉 오프라인이란 실존의 세계가 아니라 가상이란 온라인 세계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그 가상의 세계에 자신을 돋보이게 위해 혹은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처음 본 단어나 용어 그리고 개념이 많았으나 가장 인상남는 것은 게이미피케이션이란 단어다. 영상에서 보이는 대상과 그 대상이 보는 전경이 실시간으로 이어져서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낌을 받는 점이다. 역사라는 대상을 이제까지 우리는 TV라는 매체로 통해 일방적으로 전달 받는다면, 이제는 우리가 역사의 가운데 내지 만들어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문제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언론정보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진실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공정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진이란 영상과 그림이란 영상은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이나, 그 근본은 같아. 그것은 문자라는 텍스트가 지배하던 계몽가치관이 탈락하고, 계몽가치관 이전의 시대로 도래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늙어버린 것이 너무 세련되고 새로운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신화라는 mythos는 진실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다. 하지만 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시라는 것이 역사보다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도 그런 상황에 될 수 있다는 믿음 내지 가능성이다.

 

가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나오던 비너스는 당시 사람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여인의 몸이었을 것이다. 실재하지 않은 비너스를 한 폭의 그림에 담은 화가나 그것을 두고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이런 여자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런 욕망이 화가의 관념 안에서 꺼냈다면, 이제는 이미지의 재구성으로 통해 계속 역으로 인간에게 흘러간다. 가상의 이야기는 만들어진 이미지를 매개로 우리 인간들의 사고를 좌우한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제시된 이론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으나,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진이란 가상의 공간은 우리 인간이 그 사진이란 이야기에 빠지게 한다. 문제는 사진이란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느 각도와 방향, 조명과 배경을 두고 다른 식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최근 세월호 침몰사건이란 비극적인 사건을 보면서 희생자들의 죽음을 기리는 자리에 놓인 헌화가 인상적이다. 거기에는 대통령과 그 대통령의 이름이 있었다. 문제는 그 사고로 인해 희생자 가족들과 정부기관 사이에 분명한 괴리감이 자리 잡혀 있으나, 그 많고 많은 헌화에서 왜 대통령이름이 새겨진 헌화가 찍혀 있을까? 바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조차도 어떤 이미지화된 관념 아래 지배받는 것이다.

 

단순한 포착 역시 이미지를 보게 해주는 재미가 있으나, 그 이상의 이미지는 그 이미지 바탕이 되는 이미지가 인간의 관념 아래 자리잡혀 있기 때문이다. 진실과 현실적 조건보단 사실로서 만들어진 가상 뒤에 존재하는 커튼은, 오히려 커튼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거나 전혀 다른 것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스탈린이 폭력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정당한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볼셰비키혁명의 지도자이면서 소비에트연방 최고위원에 올라간 레닌은 처음에 스탈린을 인정하였으나, 스탈린이 교활하고 잔인한 인물을 알면서 정치적으로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레닌이 휴양지에서 쉬고 있을 때 스탈린과 사진촬영 했는데, 그 모습이 전혀 친밀하지 못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사진을 서로 자르고 붙여 마치 두 사람이 가까운 것처럼 보이게 했다. 레닌의 후계자가 바로 스탈린이기 위해서 다른 볼셰비키들을 제거하는 것처럼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 볼셰비키혁명의 새로운 신화가 되었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이 어둠>에서 나온 내용 중에 레닌(그 어른) 옆에 같이 촬영한 볼셰비키들의 사진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최후에는 레닌과 스탈린만 남는다. 거짓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실로 되어 신화적인 왜곡과 은폐를 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진리보다 예술이 우월하다고 했는가?

 

바로 은폐, 왜곡, 억압의 이야기가 왜 지금도 가상의 세계인 이미지로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다가오는 정보를 말이다. 정보의 거짓에 대해 의심하기 보다는 그 거짓에 대한 폭로 내지 비판이 음모론이 되고, 음모론 자체가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나는 꼼수다>에서 거짓과 사실을 떠나 절대 아니라고 하는 부정의 부정이 결국 대중에게 하나의 긍정이 되었다. 하지만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되어 계속 그 정보력의 가치가 긍정으로 갈수록 탈정치적인 놀이가 정치를 두고 놀았다면, 이제 그 놀이 자체가 정치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세계가 끝난 후에 이미지라는 가상의 이야기가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경우에 거짓임에도 알거나 혹은 거짓조차 몰라 가상의 영역이 현실로 침투할 경우 형이상학이란 meta-physics의 한 단계 위에 있는 pata-physics라는 형이상이상학으로 변모된다. 처음에 내가 제기한 만화와 애니메이션조차 생각하면 완벽한 pata-physics이다. 실사영상은 적어도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이 원본과 전혀 무관한 사본을 만듦으로서 파생실재로서 존재하나, 만화와 애니메이션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은 현실부재다.

 

pata-physics란 가치로 본다면 2013년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인 PISAF에서 가수 데프콘이 가이낙스와 카라에서 활동하던 사다모토 요시유키라는 만화가에게 장인어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맡은 사다모토 요시유키는 아스카라는 인물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나 가상으로 만들어내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그리고 게임으로 접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해준 셈에서 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아스카란 인물은 실존하지 않으나,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아스카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이른바 moe라고 하여 실존하지 않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캐릭터에게 마음이 끌리는 현상으로 실존하지 않아도 마치 존재하듯 대하는 것이야 말로 완벽한 pata-physics가 아닐까?

 

그렇다면 pata-physics 세계를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과 실사영상에 의해 조작된 정보가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과 무엇일까? 결국 우리 인간들은 이미지에 의해 구성받게 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점에 대해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부여하거나 그로테스크 요소보단 충격적인 사실을 가상의 사진으로 통해 세계에 알리기도 한다. 가령 베트남전쟁에서 <네이팜탄 소녀>이란 사진이 반전운동의 계기가 된 점에서 사진에서 보이는 사실적인 요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20세기 중반부터는 바로 이미지의 세계로 통해 우리의 인식과 삶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또한 사진이란 사실성에서 이제는 초현실주의적인 요소로 도입하여 사진이란 단순히 믿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왜곡과 조작의 영역으로 간 것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진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까지도 보게 해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우리 인간의 신체 안의 조직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으로 볼 수 없었지만, 현미경의 발명으로 미생물을 발견하고, 유전자구조까지 발견하여 유전자공학까지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전자구조를 발견해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아니라 현미경의 영상으로 보고, 그 유전자구조 조차도 가상의 이미지로 봐야 했다.

 

일상 자체가 이미지로 의해 현실적 조건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수술실의 bed 위로 메스를 대지 않으면 뼈의 골절을 제대로 찾지 못한 시절이 있는 반면 지금은 MRI나 CT 영상기기로 통해 뜯어보지 않은 채 영상으로 판독한다. 디지털기기의 이미지가 결국 우리 모든 것을 지배하고 존재해주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보다 “나는 가상이다. 고로 존재한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대사회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 그 자체만의 사실이란 점에서 <이미지인문학>은 미학적인 시선으로 단순히 예술을 넘어 사회라는 그 자체를 보게 해준다. 진실의 공간이 가상의 이야기로 변질될 때 예술이 될 수 있다. 예술이란 세상을 광학적으로 바라보니 말이다. 그 광학에는 사진기술이나 방법, 그리고 그 의도와 무의식적인 요건들이 끊임없이 생산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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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폴 르블랑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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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서비스가 저술한 <트로츠키>를 비판한 도서인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을 읽는 순간, 여러 가지 판단을 해보았다. 왜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의 인생에 대해 설명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면서 인용한 자료를 전부 사용하지 않고, 설사 인용하더라도 그 문구를 반 정도 잘라 먹는 것을 생각하면 객관적인 자료를 혼자서 너무 주관적인 사족으로 가득했다는 판단을 버릴 수가 없다. 우선 내가 트로츠키가 해낸 업적과 더불어 그가 실수한 부분을 다 본 만큼 그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분명히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실수로 가득했다고 해도 그의 실수는 자신의 이기심에 의한 실수보다는 자신의 완고한 타고난 성격에 의한 실수였다.

 

그런 실수라도 그 개인에게 책임이 부가된다고 해도 비판의 과정에서 그의 실수를 비판해야 할 것이지 그가 나쁜 의도로 했다는 비판은 도가 지나치다. 그 로버트 서비스의 책에서 비판은 정당해도 그 비판의 언사는 주관적인 사족이 지나치다 못해 너무 거슬렸다. 아이작 도이처 같이 차라리 공과 실을 다 다룬 것을 여기서는 트로츠키는 뛰어난 연설가 웅변가라도 결국 완고한 고집불통에 이기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웃긴 말이다.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한 평생 스탈린과 적대하며, 다른 강대국의 지배 권력조차 스탈린에 대한 비판적 언사를 함부로 날리지 못했지만, 트로츠키만 달랐다.

 

혼자 안위무사를 위해 꽁무니 빼는 것에서 비판의 대상에게 비판을 날리지 못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당시 유럽사회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은 그야말로 비겁하다고 여겼다. 유럽이 1930년대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들끓고 있었고,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여 많은 유대인을 고통스럽게 죽였으며, 프랑스에 침범하여 수많은 프랑스국민들을 괴롭혔고, 레지스탕스에 대한 응징 역시 잔혹했다. 제일 잔혹한 것은 아마 스페인 내전이었을 것이다. 프랑코가 지배하던 반민주세력이 독재 군부로 민주주의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파시스트들은 권력을 위해 다른 국가의 권력과 손을 잡아 무기를 도입하여 권력을 손에 넣었다. 독재자 프랑코와의 대전은 스페인내전에서 통일노동자당으로 참전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유명한 감독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란 영화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리아 찬가>를 보고 만든 영화라고 들었다. 스탈린과 GPU가 저지른 그 오만한 행동은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일국사회주의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가리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때 유일하게 계속 그 스탈린에게 비판을 멈추지 않은 자가 트로츠키다. 가진 것이라고 그의 입과 글이었다. 언어로서 폭력에 대항했던 자였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자유시장주의자들도 스탈린이 눈에 가시거리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트로츠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트로츠키의 글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세계에 파시스트가 넘쳐 결국 나치와 스탈린을 연합을 할 것이고, 그것이 일국사회주의 관료주의 체계가 되어 국민을 억압할 것이란 점이다. 왜 나는 로버트 서비스의 글을 보고 이렇게 비판하는 것일까? 트로츠키는 이런 글을 <배반당한 혁명>에서 남겼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오세아니아 국가에서 금지하던 그 책의 원조인 도서에서 말이다.

 

“관료 지배의 토대는 소비재의 빈곤과 이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있다. 상점에 물품이 충분히 있으면 구매자는 원할 때는 언제든지 상점에 들려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물품이 거의 없을 때는 줄을 서야 한다. 이 줄이 아주 길어지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관을 임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련 관료 집단이 누리는 권력의 출발점이다. 관료 집단은 누가 어떤 물품을 가져야 하고 누가 줄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이런 글은 딱히 트로츠키에 의해 만들어진 비판도, 트로츠키가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르크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닐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으면 이런 문제를 이해할 수 있으며, 루소 리옹에서 학술상으로 받은 논문인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이런 문구는 특히나 인상이 깊다. 루소의 사상이 결국 칸트로 이어져서 칸트도 이런 부분을 미학적인 요소로 받아들인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관료주의는 어떻게 보면 근대정치의 모순현상이나, 그런 요소가 이미 봉건사회에서 귀족에 의해 착취당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소수의 권력 특권층과 반대되는 시골 농민, 그 사이에 중간에 끼여 있는 관료집단들 어떻게 보면 트로츠키가 말한 것은 20세기만 아니라 21세기도 유효한 말이다. 관료집단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자만 아니라 다수의 국민조차도 희생되어야 할 때가 있다. 로버트 서비스가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은 그가 경솔한 실수를 해야 하는 것이지 트로츠키가 가지고 있던 큰 흐름은 제대로 봐주어야 했던 것이다.

 

자유주의 철학사상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는 인간이 비참한 경제적 상황에 놓이면 안 된다고 한다. 롤즈의 <정의론>에서도 인간이 정치적인 활동을 위해서 최소한의 경제적인 요건이 필요하고, 그들이 정치적 판단을 위해 문화적, 교육적인 혜택이 뒤를 따라야지 기회로서의 공정한 자유와 평등이 완수되는 것이다. 단지 개인주의적 자유시장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단지 그 개인의 이익에만 치중되기 때문에 공적영역에 대해 의미가 없으면 공적인 요소를 말하고자 하는 행위만큼 모순이 없다. 가령 인간은 개인 스스로 잘 살기 위해 노력하기에 타인의 이익에 누가 관여할 의미는 없다. 그러면서 그런 행위를 방해가 사회적인 악이라면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데 계속하여 사회적으로 경제사고가 터지면 누가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 것일까?

 

이들의 관점이 틀린 이유는 개인의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이 간섭을 배제하는 게 공정영역에 이롭다면 그 공적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어서 여기저기 모순이 터지면 그 개인에게 책임이라고 하여, 만약 그 개인들의 인생에 대한 파산선고로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놓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고 권리라고 주장하면 누가 어떻게 조율을 할 것인가? 난해한 담론이 아닐 수가 없다.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은 바로 이런 모순에서 답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개인성 추구하는 사람이다.

 

러시아혁명이 결국 모순으로 인해 냉전시대와 공포정치로 물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왜 그렇게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한 교훈을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대혁명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들은 인권의 자유라고 외치면서 왜 타인의 인권에서는 무지하고 야만스러운가? 자신들만의 자유만 있으면 모든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위적인 행동이야 말로 제일 위험하다. 왜냐하면 나치 역시 자신들의 민족의 영광과 자유만이 허락되었기에 범죄국가라는 낙인을 찍게 만들었다.

 

역사라는 교훈에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나 그 비판은 역사의 당시에서 벗어나 그 흐름에서 이어지는 현재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이다.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을 읽으면 로버트 서비스 당시 국제사회에서 일어난 끔찍한 전쟁과 파시스트들의 잔인함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는 점이다. 인간 자신은 개인이나, 그 개인은 국가와 사회 더 나아가 국제정세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관점이 생략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졸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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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2014-07-3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시대의 전반적 상황에 대해 정확한 판단과 날카로운 비평이 아주 탁월한 서평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31 16:12   좋아요 0 | URL
악! 감사합니다

NamGiKim 2018-09-07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점은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에서도 그러합니다. 내전시기 백군 반동들이 한 짓은 언급치 않으며 볼셰비키들의 잔인성만 강조하죠. 그게 바로 서비스 같은 우익들의 한계라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9-07 08:55   좋아요 0 | URL
백군 장교들의 잔혹성은 언급하지 않고 적군파의 무력충돌만 말하니 참 가소로운 글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