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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ㅣ 사회비판총서 1
연구모임 사회 비판과 대안 엮음 / 사월의책 / 2012년 4월
평점 :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철학과 사상에 대해 조금씩 배우려고 했던 시기이다. 철학과 사상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담론과 흐름 그리고 비판과 고찰이란 시점을 내놓은 것으로 필두로 거기에 대해 어떤 학파가 있는지 그리고 어느 학자들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초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기존 관료화, 제도화, 규격화, 획일화이라는 모더니즘에 거부하는 사상적 풍조로서 베트남전쟁 이후 막 태동하던 사상운동이었다.
그 근원에서 학문적인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담론과 사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대하여 담론을 만들고, 대중을 넘어 시민사회를 이끌어갈 지식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만든 사상과 철학이 (후기)구조주의였다. 주로 프랑스 파리를 기반으로 하여 현대철학과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응되던 부류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였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사회문화연구소의 개설과 더불어 당시 1930년 전후로 독일에서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시에는 미국이나 국외로 옮겨, 다시 전쟁이 끝나자 독일로 돌아와 세계지성의 큰 중추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글을 적는 스타일과 문화 내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문과 많은 연관성을 가졌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성의 대한 비판과 억압에 대한 해방, 인간의 인권으로 당시 나치와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류의 큰 위기 속에서 그것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시행한 것이다. 그런 점을 미루어볼 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라는 서적은 당시 독일 지식인들이 바라보는 국제사회와 그리고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변하고 또한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지 고찰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서 느꼈으나, 대부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식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영향을 주던 사상가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헤겔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적인 역사적인 논리로 통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란 말처럼 당시 사회는 이상적이지 못했다. 이성적이란 것은 무엇일까? 차라리 이성이라고 말하나, 실제로는 비이성이 하나의 교조주의로 변하여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결국 인간을 하나의 수동적인 존재로 낙하시켰다. 그러한 것이 당시 독일의 나치가 공산당과 사회당 대립이었고, 또한 소비에트와 나치의 대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학문바탕이 되던 마르크스는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좀 더 현실적인 인식아래 지켜봐서 유물론적인 변증법을 전파했다. 당시 계몽이란 명제가 진실로 계몽이었는지 보다는 계몽으로 위장한 하나의 억압이요 신화였다. 이런 전반적인 역사적 근거로 하여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식인들은 2차 대전부터 시작하여 베트남전, 심지어는 악셀 호네트 프랑크푸트르대학 3대 소장까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을 살펴본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독일만 아니라 유럽 및 전 세계는 광기로 미쳐있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고, 그 전쟁의 산물은 폭력을 해결하는 폭력이라고 했으나, 오히려 그 폭력들을 합리화시킨 도구로 되었다. 그 와중에 인종차별, 남녀차별, 노동자 및 소수약자 인권 침해는 여전히 등한시 되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으로 우리나라 역시 그런 문제를 지적했다. 산업화라는 모더니즘 경제사회로 돌입하면서 공사장과 공장의 근로자들을 산업화 사회를 위한 일꾼이란 칭호를 사용했지만, 막상 각종 인권침해와 노동착취, 산업재해로 약자들은 피멍을 입었다.
국가라는 조직이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나 그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 슬로건이 결국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헤게모니적인 부분으로 이런 문제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아도르노 의견처럼 문화산업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단지 발터 벤야민이 주장한 19세기의 파시주라는 파리의 건축양식처럼 그 양식에서는 꿈, 환상, 현실이 공존하는 몽상의 세계였으나, 20세기에 다가오면서 높은 빌딩이나 백화점은 파놉티콘이란 일망감시체계처럼 상업적 기능을 변화했고, 예전처럼 소비의 대상은 소수 부르주아가 아닌 대다수의 대중으로 바뀌었다.
문화의 향유가 결국 소비라는 자본의 사용으로 변모된 것이다. 대중문화라는 것은 결국 문화의 소비로 이어지는 것이고, 문화의 소비에서 대중들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기보다는 일정한 틀에 갇히는 꼴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영화, 드라마, 잡지 등은 우리의 취향들을 모우기 보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따라가는 셈이 된다. 우리는 과연 현실 속에 살아가는 존재지만, 우리가 담론지어 보는 것은 현실일까? 주변에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대화하면서 자신의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본 환상과 가상이 현실의 이야기를 대체한다.
문화산업에서 대중들을 집단적으로 획일화된 관료적인 미디어로 통해 그들은 비판의식을 상실한다. 더구나 미디어의 의해 정치적 참여나 의지 역시 박약해지는 것을 지적한다. 가령 인간들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대안으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이성을 맹신한 무조건적인 부분이냐는 것이다. 바로 인간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다수결의 이름 아래 존재적 정체성으로 뭉친다.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학력차별로 구분되는 엘리트주의와 저학력자들, 성으로 구별되는 남성과 여성, 지역으로 분리되는 지역주의까지 만연하다.
그런 부분은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제기한 문제이고, 오늘날 그 문제의 제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고 해도 그곳은 자유주의국가라고 하나, 단지 자본주의로 이루어진 전제국가였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유색민족에 대한 인종차별, 여성에 대한 인종차별 역시 현실적 문제였다. 아메리카 드림이란 것은 결국 백인남성 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신화에 불과했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옳지 않아도 그 속에서는 당연한 논리로 결부 짓는다. 이성의 한계가 와도 이성의 계몽은 결국 자신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칸트의 말처럼 인간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억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난다. 드골의 강압정치와 노동자의 불만, 그리고 여성들과 학생(이들 속에는 중학생도 많았다)들이 정부에 대해 반발감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 책 서문에 나와 있듯이 그들의 시작은 좋았으나 시작의 철로는 언제나 일직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탈선하기 마련이다.
파시즘이란 단어는 보통 지극한 우파들에게 붙어지는 칭호다. 그러나 파시즘이란 단어는 좌파 역시 피해가지 못할 단어이다. 단지 그 잔혹성과 원인성이 기존 권력과 무력을 소유한 자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좌파파시즘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변증적 논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의 전복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을 보듯이 기존 정치체를 전복되어도 인간의 세계에는 평화가 오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프랑스 국민들은 모두 굶어죽었고, 러시아 국민은 전쟁으로 더 많이 죽었을 것이다.
극단과 극단의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없앰으로서 사회의 장애를 외면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곧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일까라는 의문을 주게 된다. 인간은 자신 혼자서 살 수 없는 정치적 동물이나, 오히려 정치적으로 되었기에 억압과 갈등이 시작된 점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이성적 계몽과 비판적인 안목으로 타인에 대한 인식과 인정으로 가야하는 점이다. 하버마스나 프롬, 호네트 편을 읽으면 전형적으로 대화단절이란 것을 실감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외면이 결국 타인을 인정하지 않게 되어 언제나 자신의 소유만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의 감성과 무의식까지 억압하는 것도 옳지 않다. 예술이란 것은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도 안 되지만, 현실에 대한 모방성 역시 중요하다. 예술이 자본의 가치로 환원된 이상 그것은 예술의 가치를 상실하고, 그런다고 예술이 대중들을 탈피한 존재로 있을 수도 없다. 루이 알튀세르의 말처럼 유몰론과 관념론은 끊임없이 대립하여 나가는 것처럼 예술 역시 현실 그 자체와 분리된 현실을 격리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대립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단락은 아도르노편인데, 그의 사고는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아주 유사한 상황을 지적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정치권력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나 정치적 무정부주의, 극단적 채식주의나 원시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우호적 관심을 갖는다. 아무리 극단적인 체제 비판세력이라고 하더라도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그에 대해 자기 확신의 논리를 가진 사람은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편이 아니라 저편에 봉사하는 논리도 결국은 실천 가능성이나 현실적 유용성을 입증해야 한다면, 결국 같은 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제시된 액자택일은 이미 타율의 일부다.” 이런 방식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양자택일을 거부하는 사람은 노이로제 환자 취급을 받기 쉽다. 그러나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유란 흑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선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과거의 야만이란 신화가 과학이 들어서면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야만이 과학이란 기술로 통해 새롭게 억압을 시작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야만은 통제력이 강하고,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의식구조를 지배할 수 있는 전방위적인 신화이다. 그 신화는 결국 아도르노 말처럼 인간의 극단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더 가속화시킨다. 어떤 나쁜 존재가 있어서 그 나쁜 존재를 없애도 그 존재가 나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오산이듯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