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
피터 디어 지음, 정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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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것은 곧 기존의 어느 특정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혁명이란 것은 반드시 모든 단어에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해 뒤집는 것을 말한다. 가령 혁명을 논하자면 우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논할 수 있다. 기존의 앙시엥 레짐 즉, 구체제인 봉건사회에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시기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반드시 혁명의 조건은 헤게모니에 대한 전복성이다. 그 전복성은 지배하는 부류 내지 사회적 권력을 지닌 자에 의해서가 아니다. 흔히 권력을 소유한 자가 기존 세력을 뒤집는 것은 쿠데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혁명이란 단어에서 과학혁명이란 단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쉽게 요략 짓자면, 이 책은 유럽의 지식과 야망이던 1500~1700년 시대 즉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기라는 점이다. 르네상스는 인문주의와 더불어 과학과 이성이 발전된다. 그 근거는 바로 인간이 가진 이성의 발달이다. 그렇다면 중세시대는 어떠한가? 중세유럽의 시대는 이른바 가톨릭교황 시대다. 물론 그런 요소는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종교가 가진 권위에서 정치적 개입에서 교황이 국왕을 임명하는 행사 내지 각 국가별로 세력을 조정할 수 있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중세다. 그러므로 헤게모니적 부분을 고려한다면 과학혁명은 바로 종교적인 관념으로 가득한 중세의 인식을 전환될 수 있는 큰 업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서양 가톨릭은 초반에 교부철학에 의해 스콜라철학을 영향 받는다. 그 근거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겸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다. 이 책을 읽으면 다소 이해하고 갈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形而上學), 즉 meta-physics라는 것이다. physics란 단어는 기본적으로 자연학이다.

 

지금으로 보면 물리학에 해당되는 말이 physics나, 당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집필 시기에는 physics는 자연과학으로 물리만 아니라 천제, 지구과학, 화학 심지어 생물학까지 포함되어 있다. 실제 형이상학을 보면 인간의 동물적 기능에 대해 적어놓고 있다. 서구사상을 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가톨릭과 겹쳐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부철학으로 발전하여 중세유럽을 지배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종교적 가치관의 중심은 절대적 존재인 신의 영역이다. 신의 중심으로 모든 것이 형성되어있다는 관념론이 결국 과학이란 science로 통해 그 영역이 변화해 가는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까지를 지나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칸트의 형이상학적 영역에서는 이른바 <순수이성비판>이란 선험적 비판이 중시되었다. 즉 신이란 존재성의 유무보단 그 유무를 벗어난 하나의 비경험적 인식으로 통해 이성의 범주를 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이성의 범주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것이 과학이란 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과학은 경험에 의한 도출에 가깝다. 왜냐하면 과학은 가설을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실험으로 통해 증명해야 한다. 그 실험에서 하나의 결과는 인간의 관념적 영역보단 형이하학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경험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객관적 사실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선험적 판단을 하는 이성에 큰 작용을 하는 이유는 종교적인 권력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요한 하우징어의 <중세의 가을>을 보면, 그 당시 종교적인 영향이 그 시대에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12세기 전후 십자군원정은 가톨릭의 권의가 유럽에 모두 미칠 정도로 강력했다.

 

이런 상태에서 지구라는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행성이고, 그 행성은 신이 존재하기에 다른 생물체가 다른 별에 산다는 것을 불가능했다. 게다가 지구는 신이 있기에 모든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는 천동설에 입각했다. 생각해보면 중세시대 인간들은 바다를 보면서 바다 멀리 어딘가 폭포와 같은 낭떠러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구는 둥글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바다를 보면 수평선 너머로 직선이 아니라 타원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그런 지구의 특성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에 대한 반박은 당시 교황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신이 지구를 중심으로 여기던 당시 종교관에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갈릴레오 역시 교황권력에 굴복하여 지동설을 폐기하고 천동설을 주지했으나 결국 지동설로 다시 돌아갔다. 과학의 중요성은 바로 기존 종교적 관념을 가진 사회에 대한 반발이다. 그것은 신을 중심으로 하던 유럽사회에서 인간중심으로 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과학이란 것은 결국 미신이나 관념에 존재하여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추후 뉴턴의 경우 기존 유럽에서 고수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탈피했는데, 과학의 영역에서 과학에 대해 철학적 보편성을 따지고, 그 현상에 대해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다룬다면 과학혁명의 취지는 그 보편성을 떠나 유용성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 Art라는 단어는 지금에선 예술이라고 할 것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절에는 기술이었다. 기예의 하나의 창조물이라고 한다면, 과학의 발전에서 새로운 물건들은 다른 물건을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 보면 될 것이다. 즉 과학혁명이 도래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공학 전공자 입장에서 자연을 하나의 관찰대상에서 이용대상으로 바꾸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종교적 관념으로 영향 받던 시절에 식민지 개척시절로 넘어가면 선원들이 항해술 및 천문학, 해양학의 발달로 통해 지구과학의 지식이 축척되어 간다. 그러면서 지구는 둥글다는 것과 지구가 자전하고 태양의 중심으로 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할 무렵, 교황권력은 지동설적 발언을 하는 사람에 대해 이단심문으로 통해 화형에 처했다. 신의 절대적 영역을 건들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적 맹목적성이었다. 이런 종교가 국가정치와 관여하는 이상 이성의 판단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1600년대 합리주의 철학을 선구자인 르네 데카르트 역시 그런 한계성을 보여준다. 그의 저서인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나, 자연적인 심도에서 설명하기가 난해한 부분에서 대해 신학적인 요소를 가진다. 방법서설을 실제로 읽으면 수학에 대한 정의와 논리, 게다가 과학적 기술에서도 생물학과 물리학이 등장한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데도 결국 그는 종교적 권위에 따라 과학과 수학을 발전시킨 셈이다. 당시 철학사상가들의 특징은 보면 대부분 과학자이면서도 수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형이상학자이기도 했으나, 정치학과 물리학, 수학자이기도 했다. 심지어 생리학인 의학적 영역도 다루었기에 대부분의 형이상학자들은 철학과 수학, 의학과 과학까지 동시에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과학적 발전은 점차 형이상학에서 과학과 의학을 별도의 분야로 분리하도록 만들었으며, 지금의 21세기에 철학자들이 의사와 과학을 동시에 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인간이 알고 있는 범주와 조건이 계속 달라지기에 인식과 관념의 변화가 생긴다. 그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계속 유지하는가? 아니면 변화를 주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기존에 믿고 있던 것이 하나의 거짓이란 점은 그동안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사회적 관념을 해체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룡이 6,000년 전에 있었고, 아담과 이브가 동산에서 사과를 따먹어 공룡이 망했다고 하는 엉터리주장이 나오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그 당시라면 더욱 심했을 것이다.

 

지식이 결국 과학의 발달에 따라 과학은 결국 나라의 부나 혹은 권력의 과시욕이 되었다. 가령 왕이나 귀족의 지원을 받거나 작위를 받는 것에서 궁정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누리는 특권과 동시에 그들의 고용주들은 과학자를 데리고 있다는 권위적 상징을 발휘할 수 있었다. 프랑스 태양왕 루이14세의 경우 그는 과학에 관심 따위는 없었으나, 그래도 과학자를 데리고 있는 이유는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과학자를 보유했다는 상징적인 부분은 지식인들을 소유하는 것 역시 권위적으로 가능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과학자나 그 외의 많은 학자들이 자신을 후원한 주인을 위해 서문에 그들을 위한 헌사 글을 남긴다.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글쓴이들은 연구도 글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과학적 발전에서 인간은 고전주의와 작별을 하고, 구체적인 분야에 들어가게 된다. 대신 과학으로 통해 존 로크나 토마스 홉스와 같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과학이란 분야가 정치학과 사회학에 큰 영향을 준다. 과학의 발전은 곧 인간에게 지금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 과연 그 말 그대로 옳다는 것이 아니라 과연 옳은가? 라는 비판적 사고를 유도하는 점이다. 과학적 사고는 결국 합리적 이성의 추구다.

 

과학혁명이 없었다면 아직 우리는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여길 것이다. 지금 그 소리를 하면 헛소리한다고 하나, 불과 600년 전에는 그것이 당연했다. 과학의 발달에서 인류가 이룩한 과학적 성과는 매우 거대하나, 그 기간은 매우 짧다. 최근 복제동물이 태어나고, 인간의 유전자를 이식한 아이도 만들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르네상스 과학은 신의 중심에서 인간의 중심으로 가게 했으나, 지금은 인간조차 조작할 수 있는 세상이다. 물론 잘 이용하면 인류의 발전이 되나, 과학은 이성을 발달시킨 만큼 윤리적이지 못하다. 독일 나치가 유태인들을 상대로 실험할 때, 그 실험한 의사에 대해 양심적인 독일의사도 그들의 잔혹한 행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과학은 증명하기 위해서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혁명인지 반동인지 그것은 오로지 과학자의 양심에 달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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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바이러스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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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변 친구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좀 극단적이고, 너무 강현 선입견이 아니냐고 듣는다. 아마 내가 성격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도 있으며,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도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이다. 일단 내 개인적으로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경직된 인간이다. 얼굴을 속일 수 없는 기분, 말로 내뱉어도 그대로 드러나는 나의 심정, 거짓말하면 10번 하여 1번 성공할 수준, 그런다고 하루에 거짓말을 10번을 넘기도 어렵다. 아침에 출근하여 사무실에 오면 대화도 그렇게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대화도 거의 업무상, 나머지는 무얼 하냐고? 당연히 PC 앞에 앉아 한글, 캐드, 포토샵, 엑셀을 가지고 보고서 정리하기 바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부분은 내가 이래 보이지만, 다소 선입견도 없고 극단적이지 않다. 그런 요소는 바로 일상적인 부분을 넘은 그 이상의 영역에서 가능한 부분이다. 지식인 사회에 들어갈 수준이나 상황까지는 아니나, 적어도 지식인들은 일반 세속에 나오면 바보가 된다. 세속의 대중들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범주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서 우리는 대중문화에서 공감대 형성이 너무 잘 되어 있다. 가령 “너 어제 TV에서 그 드라마 봤니?”, 혹은 “그 영화 봤지? 너무 감동적이더라!” 뭐 이런 식이다.

 

다들 그 영화를 보면 특별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비극의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을 대입하면서 나라는 존재의 특별함을 느낄 것이다. 물론 인간에 대해 논하면 그 자체로 특별하다. 그러나 그 특별함은 결국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점에서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가 특별하다고 여기기에 특별하지 못한 것이다. 대중문화에서의 대중들은 이런 의식구조가 팽배한다. 그래서 이런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관계를 엿보면 여기에 합류되지 않은 자들이 오지에 살고 있는 원시인이나 문명화가 덜된 야만인으로 보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런 원시인에 야만인의 범주에 나도 들어간다.

 

나의 모토는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이 아니지만, 당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람들과 만나면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그것에 대한 철학적 언변을 쏟아 놓을까? 다들 그런 것에는 잠이 오고 지겨워한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서로 간에 알고 있어야 가능한 대화니 말이다. 따라서 나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활동하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blog나 카페, 그리고 인터넷서점에서는 특별하지 않으나 다소 좋은 우대를 받고 살고 있는데 말이다. 인문학의 정신보다 돈에 모든 것을 거는 이 사회에서는 나란 존재는 그저 이방인에 불과하다. 하기사 이방인이니 이렇게 넘보면서 글을 적는 게 아닌가?

 

아웃사이더의 입장이 되어야 비로소 다른 세계를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머무는 순간 그 세계에 대한 비판적 글을 적을 수 없다. 이미 그것에 물이 들여 어떤 판단력을 내리야 한다는 기준이나 좌표조차 잡을 수 없다. 아니라면 인간의 의식구조 수준일 것이다. 딱히 내가 수준이 높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입도 조금 더러운 편이고, 성격도 급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적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필수다. 최근 일이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사회에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옆에 같이 마시던 놈이 “그렇게 죽을 것 같으면 그 만큼 하면 뭘 못하겠어요?”라고 한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조금 맞기는 하나 그 상황적 순간이 닥치면 그것도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짜증나는 부분은 바로 이런 점이다. 왜냐하면 남의 불행과 고통은 그래 흘러 보내면서 자신의 신세는 한탄한다. 물론 저런 대사를 날리는 녀석은 뻔뻔하게도 백수이면서 전에 돈 모은 다 썼다고 나보고 담배 1갑을 사기 위해 3,000원을 달라고 했다. 그때 소주를 마신 자리라 그냥 줬지만, 속으로 무척이나 짜증났다. 담배를 피우면 몰라도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회사에 다른 직원의 이야기다. 월급이 적어서 울상을 짓고 있는데, 앞으로 결혼문제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런데 자살한 노동자가 생계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냉담한 반응이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특징이다. 내 불행은 말해도 남의 불행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서로 자기가 어렵다고 해도 결국 그 서로가 타인의 어려움을 핑계로 보는 것이다. 적어도 나 같은 경우 내 불행과 남의 불행은 둘 다 말한다. 따라서 나는 주변사람에게 ‘이상주의자’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문제를 논하는 순간, 그것이 하나의 금기까지는 아니나 ‘이상주의자’란 명칭을 부여받는다.

자신의 기준과 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하는 한국사회, 나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그것조차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재다. 그래서일까? 진중권 교수의 <빨간 바이러스>를 읽으면서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도 든다. 내가 이래저래 인문학을 독학하고, 글을 쓰는 방법이나 전개과정을 고민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체가 진중권 교수 양식이다. 뭔가 아이러니하면서도 생뚱맞은 것도 결국 큰 조류로 흘러가게 하는 그 풍자와 묘사력, 게다가 글을 읽으면 이 사람이 머리가 차갑지 마음은 뜨거운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이때까지 위에서 왜 이래저래 주절거렸을까? 대중문화와 대중, 거기에 나라는 존재의 미약함, 그리고 주변에 있었던 일화들까지 말이다. 이런 것을 <빨간 바이러스>를 읽으면 이해간다. 미디어사회에서 지식인의 자리에 네티즌이 들어서도 결국 지식인은 필요하다. 지식인이 가진 논리와 지성은 네티즌에게 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그 말대로 물량투입이란 점에서 극단의 성격을 가진다. 개인적으로 나도 다소 진보적 성향이 있으나, 이른바 한국에서 진보라고 뭉치는 행태를 보면 진보에 가깝기보단 신보수주의자에 가깝다. 극단의 좌익은 극단의 우익과 같다.

 

이런 극단적 성향 구보수와 신보수는 양쪽 날개를 펼쳐 곡예비행을 하고 있다. 마치 이것은 누가 그 진영에서 가장 극단적인 행동과 말로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파시즘이란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 파시즘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안티파시즘이 필요하나 그것 역시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에서는 진중권 교수의 정치철학관을 볼 수 있다. 처음에 노무현 대통령에서 나중에 민주노동당, 지금은 진보신당 계열이다. 시민주의적인 정치참여에서 한국에서 시민의식이란 것을 찾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극단적 이분법이 적용하기 때문이다.

 

어느 일정한 프레임에 조금이라도 비켜 가면 몽둥이찜질을 받아야 한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의 존재를 보자. 조선일보의 막말식이나 혹은 한나라당 당시 행동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을 들어주는 것보다 그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한 자들에 대한 공격이다. 덕분에 반사효과인가? 노무현 대통령을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에 비판하면 진중권 교수의 말이 인용된다. 그것을 보면서 당사자는 무슨 생각을 들까? 한국의 언론은 내가 볼 때는 몽타주의 향연이다. 언론은 진실성보다 중요한 것이 공정성이다. 공정성이 없는 진실성에서 분명 누군가 한 대사는 맞아도 그 전후관계는 따지지 않는다. 그렇게 편집된 영상에서 우리는 국민들은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정의가 된다.

 

개인적으로 존 롤즈의 <정의론>이란 도서를 좋아하나, 정의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아마 이분법적인 사회구도로서 점철해야 하는 것일까? 토크빌이란 사상가는 그 나라의 정치수준이 곧 국민의 수준이라고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 역시 수준이 높지 않으나 우리나라 국민 수준이 바닥이라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나보고 너무 지식에 맹신하지 않은가 라는 말도 들으나 지식 없는 맹신은 더 무섭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식인의 죽음은 지식이 없는 자들의 포효다. 대한민국 헌법조차 보지도 않고 정치적 행위에 대해 논하는 네티즌을 볼 때마다 참 우리 미래를 맑고 맑아 물고기조차 살지 못 살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조선 중후기 열녀문이 한참 세운 시기가 한국이다. 특히 중세인가? 현대인가? 편에서는 순간 사회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책이 어느 순간 진중권 교수 특유의 미학연구도서 변한 것처럼 느꼈다. 예전에 읽어본 요한 하우징어의 <중세의 가을>이 나오고 움베르트 에코의 고전주의 시대를 다룬 서적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개하면서 갑자기 미학오디세이인가? 여겼으나 그 이유는 한국이 여전히 계몽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적 요소에서 계몽은 스스로 깨우치고 껍질을 벗어야 하나, 한국에선 전체주의적 상황에 따라가야 한다. 열녀문이 세운 시기의 한국이라 내가 명하는 것은 사고의 우회가 불가능한 경직사회라는 점이다.

 

그런 문제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기성세대와 신세대에서 마찬가지다. 자동차 연비문제로 나는 어느 회사가 좋아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연비가 좋은 차는 하이브리드인데 말이다. 제3의 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같은 것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 논하기를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은 망해도 그 정신은 살아있다고 한다. 이해하기 위해 만들기보단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 예술, 때로는 그것이 필요하다. 늘 같은 것만 하려고 하니깐 말이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도 말이다.

 

가장 나를 폭소로 만든 것은 뇌물방관 수사로 결국 자살한 어느 부산시장의 목숨을 위해 그 장례식은 부산시장 걸맞은 장례식과 그 죽음에 대한 애도로서 눈시울을 붉히는 그들이 “노동자가 분신을 해도 ‘뽀득뽀득’ 말라 있던 눈이다. 농민이 음독을 해도 ‘말똥말똥’ 굴러가던 눈이다. 서민들이 투신을 해도 ‘맹송맹송’ 시큰둥했던 눈이다. 도대체 그, 메말라 척박한 눈을 촉촉히 적신 가뭄 끝 단비와 같은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듣자하니 수뢰 혐의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던 어느 공직자의 자살이라고 한다. 평소에 아끼고 아꼈던 그 고귀한 눈물을 기껏 어느 수뢰 혐의자를 위해 흘린 것이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간단한 사안이 아니나, 한국에서는 그런 것이 참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선거철만 되면 코스프레 의상을 하고 포토제닉에 충실한 이들이 행태를 보면, 우리나라의 코미디언은 우리 국민들이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역시 자신도 그런 게 죽어가는 노동자, 농민, 서민인 주제에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후예들은 자신의 길을 가지 말라고 한다. 가지 말라고 하면서도 과연 그 길을 벗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 모든 법을 망라하여 그 모든 법보다 위에 있다. 한국의 헌법은 인권에서 생존권을 중시하나 한국은 이상하게 재산권을 중시한다.

 

겉으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공정을 외치나 실상을 보면 재산권에 대해 생계가 달린 자들에 대해 사회적 악으로 만들고, 횡령을 한 어르신에 대한 법적 처분이 부당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2013년 유효하고, 이 책이 나온 2004년에도 유효했다. 물론 조건은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 이라크 파병과 관련하여 참여정부의 기록에선 부시행정부와 외교적 조건이 달려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다른 선택, 수우미양가라는 성적순에서 가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양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적 입장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극단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찾지 않은 사회에서 <빨간 바이러스>는 정말 퍼지지 않는 바이러스다. 인체에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운이 없을 사망하고, 컴퓨터는 포맷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바이러스는 퍼지지 못한 것도 모자라 백신도 투여하지 않아도 앓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바이러스가 퍼져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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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24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리뷰네요.
저도 심히 공감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3-24 15:57   좋아요 0 | URL
생각은 많은 반면 아무런 힘이 없는게 심한 우울이죠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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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조금 생각한 도서가 <감시와 처벌>이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생물학적인 신체가 있다면 생물학적 이상으로 존재하는 신체가 있는 것이다. 단지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의 다루는 신체는 신성한 존재, 즉 임금에 대한 것이다. 루이15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이 처참한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사형을 집행할 적에 앙시앵레짐에서 인간의 존재는 전제적인 군주 아래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왕권신수설이 강하여 짐이 곧 태양이라고 말한 루이왕정에서 인간의 신체를 나누는 기준에서 단순히 생물학적 요소가 아니라 영원성을 강조하는 신성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신성성도 영원하지 않았다. 호모 사케르에서 sacer라는 단어는 신성하다는 뜻도 있으나 그것은 이제 더 신성할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호모 사케르는 죽일 수는 있되, 희생양으로 삼을 수 없는 존재다. 루이왕정의 앙시앵레짐에서 17897월 프랑스대혁명 이후 17931월에 루이16세는 사형을 집행 받는다.

 

그의 사형에서 상징적인 요소가 있다. 프랑스 인권은 국민의 대부분이 되는 인민에 대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헌법의 기초이다. 세계 대부분의 헌법이 프랑스 인권선언문을 바탕으로 헌법으로 제정되어 있다. 인권선언문의 기초가 된 것은 로크와 홉스와 같은 근대철학의 기본이 되던 자와 특히 시민사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가장 큰 공헌을 한다. 이런 프랑스 인권선언문의 중요한 점은 루이16세에게도 그런 조항이 해당될 수 있는가이다.

 

루이16세는 외국으로 망명하던 도중 붙잡혀 파리로 붙잡히고, 재판도 없이 그냥 단두대 아래 처형당한다. 당시 국민공회라는 프랑스 혁명위원들의 결정에 의해서다. 따라서 인간의 처분이 결국 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양으로 될 수 없음은 절대적으로 법을 넘은 인간 내지 권력이 존재함에서 가능함이다. 루이16세의 죽음은 인권선언문에서 제7조에 해당되는 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가 아니거나 법에 의해 규정된 형식에 따르지 않고서 누구도 기소되거나 체포되거나 구금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 자의적인 명령을 간청하거나 선동하거나 집행하거나 집행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법에 의거해 소환되거나 체포된 시민은 누구든지 지체 없이 그 조치에 따라야 하며, 이에 저항하는 행위는 범죄가 된다.”와 무관계되는 점이다.

 

루이16세는 프랑스공화국의 범죄자가 아니라 프랑스공화국을 부정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프랑스인이면서 프랑스공화국민이 아니라는 점에서 루이16세는 중간적인 존재, 즉 어떻게 되어도 문제없는 인간이 되었다. 노모스에 대한 부분에서 너무 난해한 개념이라 딱히 말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인간은 법아래서 공평하게 지배관계(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 명제를 지켜야 하나, 노모스의 관계에서 인간은 오히려 그 법이라는 것에 대한 규칙을 초월하는 것에서 법을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 모순적이나 현실적이었다.

 

그런 이유를 보면, 우리는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법적인 절차를 법 스스로가 움직이지 않고, 결국 법을 집행하는 준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사람이 법을 이용하여 다른 인간을 통제하는 것에서 인간이 법의 위와 아래에 있게 되는 것은 결국 공평할 것이 공평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음이다. 권력의 관계에서 모순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법을 집행하는 자에 대해서 논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인민들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하나, 그 사회적 공간에 대한 질서를 위해 법을 집행할 경우 결국 모든 사람들이 법의 아래에서 위로 승격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라는 이름이 법으로 행하는 점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가? 그런다고 하여 호모 사케르의 영역은 민주주의 사회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여부와 심지어 끔찍한 독일 나치즘까지 다룬다. 호모 사케르는 말 그대로 살아있어도 살아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다. 그것은 있음과 있었음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있음은 그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나, 있었음을 그것이 있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 걷다보면 옆에 사람이 있지만, 그들에 대해 우리는 있음이라 물리적으로 각인해도 그들에 대한 존재성에 대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이 스쳐가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버릴 존재라면 몰라도, 대상자가 인간이어도 인간이 아니라는 인식이 등장하면 어떨까? 이 책에선 매우 끔찍한 이야기로서 독일 나치가 실행한 인간실험을 다루고 있다. 자국의 항공기조종사의 생명유지에 대한 연구를 위해 유대인 포로를 실험실에 넣고 상공 12,000ft의 조건을 부여한다. 호흡곤란을 일으키다가 결국 청색증올 죽고 만다. 이런 잔혹한 방법은 단순히 유대인을 가혹하게 다루는 독일 나치즘만이 아니다.

 

미국 12명의 사형수도 생물학적 실험에 의해 죽는다. 그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만약 실험에서 살아남는 경우 그들은 죄를 사면 받는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 그들은 모두 실험 도중에 죽고 만다. 사형수의 법적인 절차에 의한 집행은 당연성을 가져도 그런 목숨에 대해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권리를 준다는 것에서 이것이 자유의지인가? 호모 사케르에겐 그런 권리란 없다. 단지 권리라는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권리다.

 

자살이란 단어는 사회적 타살이란 의미다. 사회적 타살을 맞이하는 많은 호모 사케르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파멸할 것인가이다. 그냥 혼자 죽을 것인가? 혹은 옆에 주변사람과 같이 죽을 것인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같이 죽을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자. 루이16세의 죄는 분명 크다. 미국독립전쟁으로 인해 영국에 대항한 프랑스의 군비지출에 경제적 제정은 붕괴하고,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을 보면 대부분의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그 세금의 비용부담을 부르주아와 농민에게 전가시킨다.

 

삼부회의 소집에서 프랑스 루이왕조는 국운이 다 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프랑스혁명 시기에 가장 활발한 혁명가이면서 제일 무서운 공포정치를 펼친 로베스피에르의 말을 상기시키는데, 인민에 대해 2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people로서 생물적 기능, People이란 사회적 기능을 말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전자의 초점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가 프랑스 국민에 대해 가엾게 여기는 것은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경제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토크빌의 지적대로 만약 무의미한 제정낭비가 없었더라면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지방자치단체적인 코뮌의 체계마저 허물고 중앙집권화로 되자 예산운용이 더욱 어려워졌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역전의 관계일 것이다.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에서 일반 농민의 경우 살아있는 생물체이지 국가적인 존재로 될 수 없다. 그들은 영주나 봉건귀족의 소유물이었다. 그들은 농노와 같이 착취당하다가 혁명 이후 왕족과 귀족이 농민들과의 위치가 역전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왕족과 귀족이 사라지는 대신 그 사회적 통치기능이 분산된 시점에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존재의 한계성이 바로 비정치적 존재의 정치적 존재로 전환이다.

 

법의 취지는 공공선의 추구인데, 그 법의 공공선에 대한 철학적 인식에서 시민의식이 부족한 이유다. 게다가 혁명이 가난이 문제라도 혁명 이후라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저 사회구조적인 해결보다는 한 순간의 체제전복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혁명이 없으면 그 사회구조 병폐를 해결할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그 체제가 이익이나 이권에 관여되는 다수의 무리가 나타날 경우, 법의 정신은 이제 이권에 개입되는 자들에 의해 움직인다. 홉스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말하면서 그 만인 대 만인에서 한쪽이 강력한 만인일 경우 나머지 만인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익을 위해 결국 희생된 자에서 현대 민주주의에서 한계점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 결합이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구조이지, 정치적 구조는 아니나, 그것이 정치적 구조에 대한 압력으로 결국 호모 사케르는 주권의식에 대한 부분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적 이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나온다. 예전에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프랑스가 시민주의 국가보단 오히려 민주주의 체계를 이용한 전체주의적 요소를 고발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면 인건비가 하락하고, 노동운동단체는 이들 외국인들에 대해 반강제적 조치를 국가에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두고 좌파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우파적인 행위에 가깝다. 사실 전체주의가 가장 되기 좋은 사회는 민주주의국가이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에 대한 의지표출에서 인간은 공통요소를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공선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을 위한 카르텔이 될 경우 무서운 일들이 벌여지게 된다. 참고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에티엔 발리바르는 출산을 앞둔 외국인 임산부가 강제로 항공기에 태운 채로 추방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을 분리하는 공간이 단순히 나치가 만든 실험소나 수용소가 아니라 공황 대기실이나 혹은 그 밖의 많은 공간도 해당된다.

 

생명에 대한 담론에서 그것이 생명이 있지만, 사회적 존재로 용인될 수 없는 사례는 많다. 우리 주변에도 흔하게 본다. 예전에 영화 <두 개의 문>에서 용산참사에 대한 부분을 다루는데, 그 주민들은 보상 문제를 두고 합리적인 절차를 요구했으나, 이내 무시되고 용역깡패가 들어오자 옥상으로 연결되던 출입문을 봉쇄하고, 이후 경찰특공대가 진입하면서 그들이 농성하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결국 아까운 인명이 죽고 만다. 이들은 생명이 있으나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현실에서 호모 사케르는 단순히 수용소의 포로나 참수당하는 왕도 아니라 슬프게도 우리 사회의 만연한 이기심에서 발생된다. 아니라면 그 이기심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대상자가 지시하는 명령에도 존재하는 법이다. 더욱 슬픈 이야기는 호모 사케르의 죽음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한 존재로 여기거나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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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1
장 자크 루소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루소의 도서는 그가 살던 시절인 1760년대부터 죽기 전인 1788년까지 금서에 올라갔다. 그리고 특히나 로베스피에르가 애용한 <사회계약론>, 칸트가 즐겨보던 <에밀>은 대표적인 어느 중세유럽의 금서목록(“어느 마술의 금서목록” 제목 패러디, 내 블로그 이웃인 피콜로군을 위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2가지 책은 현대사회에서도 금서로 보기에 적당한 것 같다. 기존에 <사회계약론>이란 도서는 민주주의국가에서 반드시 전 국민이 지키거나 보장받아야 할 헌법의 기본이 되는 도서인데도, 헌법보단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이미 존재한 상태이고, 그런 존재들이 용이하고 영원불멸한 이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승계한다.

 

권력이란 재산과 공권력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어갈 하나의 수단이다. 현대사회에서 그 수단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만큼 인간에게 이득이 오는 것만큼 해로운 것은 없다. 일전에 읽어본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루소의 사상을 잘 볼 수 있다. 학문을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한 곡학아세하는 행위들은 결국 가난한 자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는 원리와 같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에밀> 역시 현대의 우리 어른들에게 금서목록 중에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극성적인 어머니들에게 말이다. <에밀>을 읽는 순간 그들의 표정은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입에선 오만 때만 욕이나 비난이 터질 것이다. <에밀>은 딱히 그런 사람들을 욕하거나 비난하는 도서는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자동으로 알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한국사회에는 분명 자유민주주의국가라고 하고, 그 정신의 모태는 결국 프랑스대혁명과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으나, 결국 제일 맞지 않은 책이 되었으니 말이다. <에밀>에서 보인 내용에서 만약 루소가 현대에 살았고, 그가 한국에 왔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친구가 외국에 있는 유명대학교 대학생이 한국의 대학가와 노량진학원가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저렇게 몇 년 동안 청춘을 보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어떻게 보면 교육 그것이 문제다. 좋은 학교는 결국 자신의 인생에 성공을 보장하는 수단이란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꼭 그런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학벌은 중요한 위치를 미친다. 학교를 보면 고교 성적표가 보이고, 대학교에 따라 선후배라는 인맥이 형성된다. 한국은 인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의 사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익을 중심으로 모인 대학사회이니 당연히 학문에 대한 철학적 자세나 인문학적 소양은 이미 분리한지 옛날이다. 학교 정문에 쇼핑가를 설치하여 학문의 장이 경제적 효과로 이끄는 총장이나, 그 총장이 뇌물을 받아먹고 구설수에 오른 것을 보면 교육이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의문을 가진다. 사실 한국에서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것이다. 늘 교육감이나 대통령선거까지도 교육이 이래저래 말이 많다. 대통령이 바뀌면 거기에 따라 교육부 수뇌부까지 교체된다. 국가적 교육정책이 큰 변화를 준다.

 

안타깝게도 교육의 변화는 없을 것 같다. 아니 더 치열하고 잔혹하고 소름이 끼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교육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에밀>이 왜 지금 우리 사회의 금서라고 생각하는가에서, 우리 사회는 무조건 빨리빨리 그리고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기를 바라는 경쟁사회이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나만 살면 된다고 가르치는 어른들, 그러면서 어른들은 그 자신의 아이들에게 착하게 바르게 살라고 한다.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고, 세상에 그런 위선이 없다. 우리는 후예들에게 진실적인 인간이기를 바라는 것인가? 아니면 세론에 맞추어 우월감에 젖어 타인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무례한 인간으로 키우는가?

 

예전에 영화 <공공의 적>을 보았다. 똑똑한 엘리트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잔혹하고 더러운 일들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보단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많이 일어나고, 오히려 부정적인 재산축재와 범죄의 깊이가 더 사회지도층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추하고 더럽고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당장 굶어죽을 것만 같은 고통에서 빵 하나를 훔쳐 큰 죄 값을 치루나, 막상 그런 사회를 만든 자는 경건한 자세로 근엄한 척한다.

 

역시 교육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라고 배운다. 인간은 나는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 죽이려고 하는 살인마로 될 생각한 사람은 없다. 단지 그렇게 만들어질 뿐이다. 환경이라 주변 여건에서 인간의 인격이 형성된다. 물론 선천적인 요소가 있으나 후천적 요소 역시 크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병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경제성장을 하고도 국가적 지위에서 세계 강대국과 비교한다고 떠들어대도 여전히 부족한 것들이 많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에밀>을 보는 순간 그 해법은 나오되, 아마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대학교 입시생 내지 교양철학 시간에 루소의 도서는 매우 중요하므로 책에 있는 내용을 외울망정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한국의 교육은 위대한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에 입시시험에 질 들뢰즈나 마빈 해리스와 같은 사상가들의 도서내용이 나온 것으로 아는데,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들뢰즈나 마빈 해리스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은 인간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 게다가 이 세계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그것을 염두 하지 않고 점수 따기라니, 우리 사회의 교육은 바로 이것이다. 뭐든지 조급하고 뭐든지 억지로 물꼬를 트는 점이다. 부모들은 그것이 트이면 트이는 데로 따라간다. 우리 아이들은 천재가 될 것이라고 하거나 혹은 좋은 곳에 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 나이가 유치원에 갈 때도 안 된 상태에서 외국으로 보내 유학 물을 먹인다. 참 부끄럽다. 만약 부모가 외국으로 일을 가서 거기서 살아갈 것이라면 외국어는 필수이나 한국어도 모른 상태에서 영어로 하여 결국 토익 내지 토플로서 높은 줄에 서야 한다는 강박관념, 거기에 떨어지면 인생은 끝이라고 말하는 부모들, 과연 그 아이들은 행복할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있었던 한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행복은 성적순이 되어 버린 지도 모른다. 덕분에 세상은 더 좋아지긴 보다 삭막한 냉정한 기운마저 돈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 아닌 기계로 되어가는 세상, 감정이란 그저 자신의 상태만 나타기 위한 표출이다. 아니 그런 표출조차도 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른바 세론, 루소가 세론을 <에밀>에서 언급할 때 나는 많이 놀랐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그 세론이 사람들을 잡는다. 흔히 우리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도 아닌 그저 그렇게 사람들이 무의식적 심리에서 새로운 것만이 나오기 바라는 욕망, 그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라캉의 말처럼, 그 욕망은 끝이 없다. 해결만 해도 다른 욕망이 다시 떠오른다. 인간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다. 루소의 <에밀>에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욕망의 해결이 아니라 해소다. 해소라는 것은 참 어렵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욕망은 끝없이 굴러가는 눈사태와 같다. 물론 욕망의 종점은 있다. 내가 망가지거나 혹은 타인들이 망가지거나 말이다. 문제는 타인이 망가져도 나만 괜찮다는 식의 사람이 존재하면 눈사태는 이젠 타인만을 밟고 지나간다.

 

이것이 되는 이유? 역시 교육이다. 그 교육의 책임은 바로 어른이고 그 사회다. 아이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아이를 그렇게 만들도록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식량, 집, 의복과 같은 의식주가 먼저다. 그러면 이것이 만족하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자유라고 할 것이다. 나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힘, 하지만 자유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스스로 물어본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우리는 자유가 소중하다고 하지 그 자유라는 의미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자유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와 사유가 중요하다.

 

<에밀>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가르친다. 그런데 자유를 위해 억지로 아이를 건들지 않는다. 우리 사회와 달리 아이에게 꽉 끼는 옷을 주는 것이 아니라 헐렁한 옷을 주고, 자연과 친숙하기 위해 맨발로 흙을 밟고 옷이 더러워도 좋으니 이래저래 뛰어놀게 한다. 그것이 유아와 아동기, 게다가 청소년기이다. 우리 사회를 보자. 일단 꽉 맞는 옷을 계속 사서 입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맨발로 돌아다니면 당장 화를 내고, 풀밭에 갈 시간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숲속에 풀이란 겨우 조경 수준이다.

 

산으로 가면 역시 많은 사람들로 넘친다. 루소가 살던 18세기 유럽은 아직까지 심각한 환경 오염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렇지만 루소 역시 시골농촌에 가서 아이를 키우기를 바란다. 우리는 대도시 8학군에 가서 어린 시절부터 좋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로 보내려고 악을 쓴다. 심지어 유치원도 영어유치원을 선호하여 풀밭에서 뛰어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축구공을 들고 방과 후 뛰어노는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행복한 어린 절인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 모래로 가득한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그나마 도시개발이 덜 된 상태라 뒤에 숲속에 가서 산딸기를 따먹고, 갯벌에 가면 작은 게나 고동을 잡아 익혀 먹기도 했다.

 

루소는 바로 그런 자연적인 체험을 중요시했다. 직접 바람을 맞고, 책으로만 연상하지 않고 실제 자신의 몸을 스스로 익히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기예도 중시했다. 필요한 물건을 무조건 구매보다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목공일을 하면서 책상이나 의자도 만들어보고, 해의 위치를 보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까지 말이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청소년 시절이다. 이때는 제2차 성징기이며, 인간의 사춘기가 도래한다. 게다가 혈기왕성하기에 그 젊은 피를 억제하기보단 운동으로서 풀어주는 것이다.

 

신체를 단련하는 것은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다는 모습이라, 요새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억지로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터득하고, 학문적으로 깊은 내용은 차츰 가리키는 모습을 말이다. 물론 남녀의 성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루소는 중세와 근대의 사이에 있었으나, 그의 남녀 간의 업무와 애정에 대한 것도 흥미로웠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나 루소는 어린 소녀에게 집에만 있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자유롭게 춤과 노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억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울려서 즐길 권리가 있는 점이다.

 

가끔 우리 청소년들이 불량하게 되는가에서 그들이라고 처음에 규정에 맞게 행동하라고 설교를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계속 어기고 더 큰 반항을 하게 된다. 그것을 하게 된 이유는 어른들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이 없기에 어른들이 가진 공간을 넘보고, 그것을 자신에게 올 수 없기에 비행을 저지른다. 담배피우고 술을 마시고는 결국 어른이 하는 행동이고, 아이가 아이로서 남아두는 자리를 모조리 앗아 가는 바람에 결국 아이가 아닌 어른이려고 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도 자유의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서 자유라는 숭고한 이름을 하나의 속박으로 목을 옭아맨다. 루소의 <에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라는 것이다. 그 자유는 모든 것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가능하다.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교육할 가능성은 없으나, 한 번 제고할 필요가 있다. <에밀>의 마지막 부분은 소피라는 소녀를 만나 에밀과 순수하고도 이성적이며 열정적인 사랑을 확인도 있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에밀이 부잣집인데도 그는 스스로 일한다. 목공일을 하며 땀 흘리며, 주변 농민들과 잘 지내며 그들의 일도 돕고 같이 밥도 먹는다. 루소의 근본적으로 <에밀>에서 에밀을 가르치는 이유는 인간의 인간성 회복이다. 본문에서도 장인의 기술은 소중하다고 한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량생산대량소비이기에 공장에서 나온 많은 상품에서 장인들의 손맛을 알 수 없다. 모르겠다. 농민의 손에서 나온 귀한 음식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루소가 어떤 부분을 말한 것이 인상적인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그랬다. 그는 공사장에서는 목수가 되었고, 병영에서는 북치는 병사가 되었다.”, 조금 내용이 비켜가도 스파르타 왕들은 누구보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고, 누구보다 용맹하게 앞에 나간다고 한다. 음식도 병사들과 같이 먹고 잠자리도 같이 한다. 오히려 높은 위치에 있기에 그런 특권의식을 버리기에 주변의 존경과 그 위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루소의 정치제에서도 민주정치를 원하나 그 민주정치에서도 귀족정치를 원한다는 것을 보았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外>에서 간사하고 무식하고 이기적인 시민이 인민의 대표로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되는 순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그것은 곧 다른 인민들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은 종종 우리 사회에서 보는 것이라 안타까우나, 루소는 인간의 본연적인 자세를 중시했다. 필요한 것만큼 먹고, 그 필요이상은 멀리하려고 했으며, 그런 필요이상의 기대나 세론이 오히려 인간을 속박한다고 한 것이다. <에밀>을 읽으면서 불현듯 생각나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그것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제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군은 학교생활에 그다지 눈에 튀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 성적도 나름 우수하고 첼로도 켜는 학생이다. 어떻게 보면 모범생 같은 느낌은 강하나 사람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며, 인간관계가 무척 약하다. 신지만이 아니라 레이나 아스카, 그 위의 어른들인 이카리 사령관, 미사토, 리츠코, 카지와 같은 인물 역시 어른 나름대로의 고통과 고뇌가 있었다. 이 작품에서 어른들이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을 억압하고 괴롭게 하는 존재이다. 아이의 어긋난 자아와 행동들은 그 사회가 가진 병에 걸린 모습을 반증하는 것인가? 자신의 의지가 없이 타인에 대한 세론이나 눈치 보는 신지나 그렇게 살아온 나 역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나마 지금은 반항적인 기질이 있어서 가끔 주변에서 사춘기 소년 같다는 말을 듣는다. 원리 원칙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험적인 이성으로 내 사고는 옳으나 세상은 옳지 않다는 것이 유감이다. 그나마 <에밀>에서 내가 가진 생각은 그나마 옳은 모양이다.

 

에밀이 소피의 집에 초청받을 때, 그 날 못가고 며칠이 지난 후에 갔다. 일하다가 귀가 길에 누군가 길에 넘어져 고통 받는데, 그 사람은 처음 소피의 집에 가기 전에 주변에 있던 농민이었다. 그 농민은 다리가 부러져서 말을 탈 수 없자, 에밀은 스승과 같이 들 것을 만들어 그 농민을 집까지 모셔드린다. 그런 후에 에밀은 의사에게 달려가고, 자신이 탄 말은 의사에게 주고, 자신은 걸어온다.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니 소피는 오히려 에밀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생각한다면 교육의 진실한 가치는 이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5장 성인기의 에밀이 남녀의 사랑도 중요하나 그 사랑만큼 중요한 게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 점이다. 우리의 교육 그런 철학이나 있을까?

 

집안의 지나친 가난과 병마로 자살한 노동자와 서민 그리고 소외된 자들, 우리 헌법에서는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말 한 마디는커녕 차가운 무시와 악의가 담긴 폭언을 날리는 사람들, 그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 <에밀>이란 책이 왜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중요한지는 내가 볼 때 역시 어른들이 문제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이상하게 인간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만 살아남고 남은 어찌 되든지 상관없다는 그런 이기적인 존재가 어른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후예들에게 스스로 얼굴을 드는 모습에서 교육 참 어렵고도 험난한 존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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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그레이트북스 92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곡학아세(曲學阿世), 그것은 아주 무섭고도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단어이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심각한 국가적 정치적 문제로 인해 국민들이 고통 받는 것을 두고 가렴주구(苛斂誅求)라고 칭한다. 아니면 <마의 백광현> 소설을 보면 어느 여인이 무덤3개 앞에서 울고 있는 장면을 둔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여인이 우는 까닭을 묻자,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까지 모두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어 가족을 잃은 셈이다. 그런데도 무덤가에서 울며 사람들이 많이 사는 부락이 아닌 산 속에 사는 이유는 바로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부패한 관리라고 한다.

 

 

부패한 관리 중에 호방이나 이방과 같은 중인 계급층이 그들과 밀접하겠으나, 그들을 진실로 힘들게 하는 것은 높은 자리에 앉은 ‘나리’ 덕분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읽어보면 목민관의 위치는 그 마을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고, 임금을 대신하는 존재이다. 그 만큼 관리들의 업무를 중요하다. 백성이나 혹은 백성을 돌보는 존재들은 그 위치나 입장을 생각하면 항상 공정하고도 양심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작년 2012년은 내가 존경하는 인물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탄생주기 250년이었고, 이와 달리 서양에서는 장 자크 루소의 탄생주기 300년이었다.

 

 

루소의 이름을 생각하니 최근에 루소의 도서를 열심히 읽은 것 같다. 여러 가지 경로가 있었으나, 현대 내지 현대 이전의 근대의 민주주의 역사나 사회구조에 대한 연구에는 반드시 루소를 거치지 않고서는 말하기는 어렵다. 프랑스대혁명과 더불어 헌법의 기본적인 명제가 다 루소의 사상에서 시작한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특히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와 사회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자유, 평등과 같은 정치적 가치와 더불어 인권이란 중요한 원리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정치철학적 사상과 유사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루소는 그런 위대한 사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박해와 조롱만 당했으며, 그의 고독과 슬픔 그리고 좌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수모를 당했다. 충언은 역이고, 옳은 말은 하는 것은 역시 잘못된 상식인가? 이번에 읽어본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는 참으로 나에게 많은 생각을 심어준다. 평소에 조금 내가 생각한 부분들이 이미 루소가 250년 전에 했다는 것에서 이렇게도 시간과 공간이 다른데도 충분한 공감과 이해,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를 알려준 그의 성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구성은 2가지로 되어 있다. 1번째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자체의 논문 그리고 그 논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박을 하자 그 반박에 대한 반박문이고, 2번째는 루소가 <산에서 쓴 편지>다. 시기적으로 보면 1번째는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저술하기 전이고, 2번째는 그것을 저술한 이후다. 루소의 <참회록>을 읽다보면 루소는 1762년 이후 상당히 심한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 자신의 고국 제네바에선 루소에 대한 체포령과 동시에 그의 저서들을 모두 불태운다.

 

 

그것도 국정회의라는 근대적 정치제도를 가진 다소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국정회의는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과 비슷한 곳이다. 입법부로서 법을 집행하고 각종 국가적 의회적 관건을 다루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법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편익과 더불어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서이나, 문제는 그들은 법의 아래 있다는 것보다 법의 위에 있자는 것이 문제이다. 루소의 2번째 <산에서 쓴 편지>를 읽으면 루소에게 가해진 시대적 폭력과 더불어 그 문제가 다소 자신 만에게 가해진 문제만이 아님을 다룬다.

 

 

루소가 이토록 열렬한 사상가로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참으로 안타까우나 그가 처해진 현실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가기보단 만들어진 것이라는 구조적 상황에서도 그 만들어진 공간에서 만들어가기에 다시 시대적인 조류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사회적 갈등에서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는 그렇게 길지 않은 논문이었으나, 그가 의미하는 바는 많은 의미를 보여준다. 루소가 살던 시절은 <그네>라는 그림을 그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가 살던 시절이다.

 

 

당시는 귀족들의 탐미주의 성향의 욕망이 강한 로코코시대, 그 이전에는 고전주의,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바로 예술이란 것이 인간의 정신을 흐리고 망치고 나라를 어렵게 한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전에 읽은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고전예술편>에서 서양의 미술이나 예술을 보면 대부분 민속예술보단 왕족예술 내지 종교예술에 많은 것을 두었다. 특히 왕족이나 귀족들은 권력을 상징하기 위해 많은 금액을 들어 예술로서 만들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했고, 종교 역시 그렇다.

 

 

그러다보니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켜주기 위한 것보단 자신들의 권력의 위상과 입지를 알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게다가 학문 역시 많은 사람에게 열려있지 않았다. 서양 중세역사에서 성경이 자국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다. 그것은 19세기 프랑스도 그런 것 같았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주인공 쥘리엥 소렐이 가정교사로 역임할 때나 귀족집안에서 화려한 생활을 할 때 그는 분명히 라틴어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고, 나폴레옹의 이야기가 가득한 점을 본다면 충분하다.

 

 

학문은 인간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하나의 기예(ART)가 아니라, 미셀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가 권력을 낳고, 권력이 언어를 낳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루소는 바로 그 학문과 예술이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특히나 서문에서 김중현 교수가 거론한 곡학아세의 이야기에서 그 학문과 예술을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의미는 아마도 인간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그것들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고, 게다가 억압한다는 점이다.

 

 

루소의 미적 가치를 보면 그는 자연주의자이다. 전에 읽은 루소의 <식물사랑>이란 도서에서 루소는 식물이 가진 효용과 가치에 중시하기보단 자연 있는 그대로를 존중했다.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그 순수한 것을 찾기 위해서는 오로지 자연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식물표본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그것이 어떻게 생기고, 언제 나오며, 특징은 무엇인지 찾는 루소의 관찰은 지식으로 타인을 괴롭히거나 우월감을 나타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지식으로 통해 교류를 나누고, 자연의 소중함을 새긴 것이 인상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자연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빛에 대한 신기함과 계절의 변화, 광활한 대지와 푸르고 푸른 바다와 하늘들이 우리 모두의 보물이었을 것이다. 물론 자연은 아름다운 부분을 보여주는 것처럼 무섭고도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숭고의 대상이었다. 숭고의 대상이 점차 착취와 파괴의 대상으로 변해가고,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처럼 자연의 착취를 할 수 없으면 그 착취의 대상은 인간으로 변한다. 인간에 대한 착취에서 지식이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예술이란 상징을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

 

 

루소가 가진 사상에서 그 학문과 예술을 비판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전에 읽어본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서 취미와 취향이 인간을 구분하는 척도가 된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구별짓기하고 있는지 당하는지 묘한 상황이다. 이른바 mass-culture에 대한 회의감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무관심이 일반 대중들과 대화가 어렵다는 점이다. spectacle의 요소는 바로 이런 것인가? 대신 내가 철학이나 예술에 대한 담론을 나눌 수가 없는 점에서 나는 별종으로 보일 뿐이다. 아니라면 다소 sub-culture 내지 underground-culture에 관심을 가지기에 대중문화에서 소외된 존재다.

 

 

아니라면 오히려 그런 곳에 있기에 문화적인 현상과 문화로 통해 보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깊이 다루기에 어렵고, 깊은 들어가도 그들이 주장하는 담론에서 많은 한계성이 보인다. 본래 인간은 불평등하다. 태어나고 자라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에서 불평등이 생긴다. 그 불평등이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입지가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선천적인 영역이 강하나, 한편으로 후천적인 부분이 강하다. 내가 오늘 돈 5만원을 들고 서점에서 책을 몇 권을 사는 것이나 혹은 친구들과 소주한잔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나 그것으로 인해 발휘되는 효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문제는 책을 사든 술은 마시든 2가지 부류 모두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가진다. 하지만 생각하면 전자가 바른 판단력이 가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오히려 알면 알수록 말하기가 어렵다. 일반 사람들이 아는 철학적 지표는 모두 한계점이고, 대부분 그 한계점에 몰린 반면에 진짜 노력하는 이들은 그 한계점을 넘어 자신만의 영역을 도달하려 한다. 그래서 루소도 저렇게 심한 꼴을 당하지 않았는가? 그런 상태에서 학문이란 것은 똑똑한 바보들이 사는 대다수에 대한 헤게모니적인 영향을 발휘한다.

 

 

특히 그런 부분에서 루소가 비판하는 것이 종교적 부분인 것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와 더불어 <에밀>, <사회계약론>에서 정치에 대해 종교적 부분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종교는 신앙이 중요하지 기적을 바라면 안 되는 것이다. 흔히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신화적 욕망이다. 기적이란 메시아주의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이며, 메시아주의가 강할수록 그 사회의 대중들의 의식구조는 낮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것이다.

 

 

또한 그런 종교적 현상에는 항상 예술이란 상징적 권위가 부여된다. 예전에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읽으면서 칸트가 루소의 사상을 많이 영향 받았다는 점과 특히 <에밀>을 읽으면서 자신의 산책시간을 놓칠 정도로 깊이 몰입했다는 점에서 루소의 사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주변 환경보다 선험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력을 전해준 것이 가장 특징이고, 인간의 개인적 계몽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루소의 서적들은 계몽주의적 요소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왜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가 <에밀>과 <사회계약론>하고 통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대해 그토록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인가? 그것은 내가 인상 깊게 본 문구로 통해 알 수 있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당시에 자본주의 경제구조보단 농경사회이기에 지금 경제사회구조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예술이 왜 문제라는 이유는 예술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예술적 사고는 왠지 모르게 아방가르드 정신과 부합되는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술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 아방가르드, 그 자체도 근현대미술 역사의 한 자리에 들어가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나, 루소의 사상처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바라는 예술이란 바로 배고픈 농부, 20세기에는 가난한 도시 서민과 노동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당시 지식인들은 왕족, 귀족, 성직자들과 친교가 있기에 자신의 신분적 상승과 위엄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식을 가진 자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항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해당되는 지식을 가진 자들이 필요한 점이다. 루소의 서적에선 당시 시민과 부르주아들은 국가적으로 지식과 양심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부르주아는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나온 것처럼 악독한 귀신과 같았다. 귀족과 왕족이 있던 자리를 대체하였다. 노예와 주인의 사슬을 끊을 수 없는 그 인간의 고뇌에서 루소는 그 고리를 끊으려한 인물이다.

 

 

그런 루소이기에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라는 서적은 현대사회의 지성인이라면 반드시 읽고 새겨둘 필요가 있다. 학문과 예술은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정말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학문적으로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문명의 발전과 동시에 삶의 혜택은 주었다. 그러나 환경오염, 전쟁무기의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예술에서 음악하거나 미술 한다는 것은 곧 가정의 부를 알려주는 척도가 되어버린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예술다운 예술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의 자연적인 느낌을 표현이 아니라 상징성을 부여하기에 그렇다. 물론 상징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나, 그것이 곧 나 아닌 타인에 대한 인간애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루소의 서적에서 그가 보낸 편지에는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과 그 원인을 집어내는 부분이 있다. 학문과 예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지에 대해 알 수 없거나 판단조차 할 수 없는 학문과 예술은 세상에서 가장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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