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반양장) 주니어 클래식 3
사계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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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말하면 대부분 문관을 지망하던 사대부로 보겠지만, <논어사람을 말하다>에서 선비는 무관을 말하던 것이다.장기놀이하면서 왕을 지키는 작은 말 2개가 있는데그것이 바로 사()자이다즉 선비는 왕을 지키는 호위무사로부터 시작했다낮은 무장관료가 점차 문관으로 지향하면서 관료정치의 바탕이 된 게 선비였다삼국지를 읽어봐도 선비의 개념은 특별히 느끼지 못하나용맹한 무장은 단순히 용맹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우나 조운 같이 뛰어난 지혜를 가진 자들도 있었다.


선비의 기원인 무장들은 싸움의 기술만이 아니라 문장력과 정치력을 같이 동반해야 한 점이다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정치의 핵심은 양반 사대부로 이전되고양반은 무반과 문반을 지칭하는 말이다조선시대 대부분 공신들은 칼을 잡은 무관이었으나 점차 관직이나 행정기관에서 정치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많았다조선 시조 태종 이성계도 무장으로 시작했지만그 끝은 군주의 자리고군주는 나라는 다스리는 정치가이다정치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고인간의 도리를 위해서는 학문을 수행하는 것이 유학의 본질이다조선의 유학은 본래 유학자로 하여금 바른 정치를 선보여 백성의 생활을 도모하는 것이 근본이다.


하지만 유학이 유교라는 정치적인 학문보단 성리학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요소로 강조되면서 공자의 유학은 변질되었다.공자의 가르침엔 제자들로 하여금 직접 농사를 짓거나 농사를 짓는 기술을 전파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는 것이었다올바른 정치란 인간이 서로 모여 사회를 구성하여 그들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유학의 본질이다군주가 살던 시대에 공자가 살았기에 군주정에 대한 기초로서 유학을 만들었겠지만군주의 정치는 바로 철인(哲人)정치즉 군주나 군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철학으로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


서양사회에서도 마키아벨리 이전에 정치라는 것은 철학과 연계되어 있지만, <군주론이후 정치와 철학은 분리된다그러나 21세기에서도 정치는 철학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정치하는 자가 철학이 없다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의()가 없다는 것이고의가 없는 정치는 명분이 없기에 무의미한 행위로 그친다그리고 그 명분이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이다내가 유학에 대해 어느 정도 편견을 버리고조금 다른 시선을 볼 수 있던 점은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책을 접하면서부터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정치의 근본은 백성이고백성을 다스릴 계책을 얻고 싶거든 길거리의 농민에게 물어보라 했다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그 사람은 우리가 다스리기 위해선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라는 것이다결국 소통과 대화가 먼저 이루어지는 게 정치의 핵심이다다산 선생이 곡산군수로 부임하면서 길 앞에 어느 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남정은 이계심이라 하여 마을관아에 반란을 든 용의자였다이계심이 다산 선생에게 나와 마을주민을 괴롭히는 조목을 설명하자 다산 선생은 이계심의 말을 받아주며오히려 이계심과 같은 사람이 많아야지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백성이 힘든 것을 지금으로 말하자면 힘이 약한 사람들의 입장을 말해주는 사람이 가장 정치가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다.유학의 근본이란 바로 다산 선생이 보여준 것처럼 사람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21세기에 기원전에 기록된 논어를 읽는 게 시대적 간극이 큰 것처럼 보이나그 바탕에는 오히려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옳다유학에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인()이다어질다는 의미를 가진 인이란 의를 실천하는 단어다어질다는 것은 무엇인가우리 인간은 자연적으로 매우 선한 존재이기도 하지만때로는 매우 악한 존재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과 동화되어 유유자적 살아가겠지만야만의 인간은 폭력과 무지로서 사람들을 대한다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처럼 제자 그러니깐 유학자가 가장 먼저 할 것은 사람을 모이게 한다그리고 그들을 편안하게 배부르게 해야 하고 나중에는 글을 배우게 해야 한다고 했다즉 인간의 최종완성은 문화적인 인간동물적으로 욕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욕망 이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인간이 가져야 할 도리로서 인을 중시하는 것은 바로 인간은 자신만 보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관계의 미학을 중시한다우리는 관계의 미학에서 내 가족만 챙기거나 또는 이익과 손실을 따져 친구를 사귄다물론 가족도 중요하고친구의 손익 관계도 중요하다하지만 내 가족이 소중하면 남의 가족도 소중하고친구의 관계에서 이익을 추가하는 것은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정신적심리적 즐거움이다나를 알아봐주는 사람 하나 제대로 없다면 그것만큼 외롭고 쓸쓸한 일은 없다그래서 공자도 자신의 제자 안영이 죽을 때 그렇게 슬퍼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공자의 가르침이나 논어에 대한 이야기에서 공자와 유학이 낯선 존재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보편적인 가치를 주고 있다단지 그 차이는 조금 더 예를 가지거나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자신의 밥은 초라하나 제사의 밥은 풍족히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지금이야 먹을 것이 풍부하나과거에 먹는 것이 부족한 시기에 배고픈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제사에 차려진 음식들은 귀신들이 먹는 게 아니라 결국 인간의 입으로 들어간다그 많은 음식을 제사를 차린 제주가 다 먹을 수 없다자신의 집에 찾아온 친척과 친구 그리고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제사문화의 특징은 단순히 허례허식만이 아니라 주변이웃에게 나눔과 베푸는 정을 주기 위해서이다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그래서 관계의 정치는 바로 그런 것이다하지만 이익을 기반으로 한 정치는 공자는 용서하지 않았다한국식 민주주의나 유교식 자본주의란 말은 공자가 강요한 적이 없다공자는 아버지는 아버지답게아들은 아들답게 해야 한다고 한다그러나 정치가란 무릇 백성에게 아버지와 같은 자이나아버지가 아들을 혹독하게 대하는 게 아버지의 도리는 아니다공자의 유학을 보고 한국식 민주주의를 마치 정치적 정의로 보는 사람들을 보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옛날 말에 임금은 하늘이 내리지만그 하늘은 백성이라 했다국가의 모든 시작점은 백성인 점에서 공자의 가르침 중에 이 말이 인상 깊다군주가 안보백성의 믿음경제 이 3가지에서 만약 먼저 버릴 게 무엇이냐에서 공자는 맨 먼저 안보를 택하고 다음으로 경제를 선택했다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안보와 경제를 주구 창창 외치는데정작 안보와 경제는 구멍만 나는 현실이다안보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복무를 하는 것은 국민이고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국민이나그 근본을 제대로 잡지 않고관료주의에 물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의 유학사상이라 하여 새로운 사상이나 정치이념이 들어와도 민심의 기우는 변하지 않는다제일 중요한 것은 정치이념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철학적 자세이기 때문이다공자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광폭한 정치라고 했다가렴주구라는 말은 매우 잔혹했다조선후기 군역에 사내아이가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고 시아버지는 이미 죽어 백골이 되었는데도 군역에 올라가 세금을 내어야 했다다산 선생이 지은 애절양(哀絶陽)이란 시조는 부패한 관리가 판을 치는 나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글이다.


최근 국내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남자들이 결혼할 수 없고결혼해도 아이를 가질 수가 없어서 21세기형 애절양을 보여주고 있다자식을 놓은 자신의 남근을 원망하며 칼을 들어 그 남근을 도려낸 남정네자신의 남편의 남근을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낙네관아의 벽은 성문보다 높고 관아 문을 지키는 포졸은 염라대왕보다 더 무섭다공자가 보여주고 싶은 유학은 바로 이런 일을 없애기 위해서고아무리 부당한 현실이라도 잘못된 세상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공자의 유학이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모두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만든 것이다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이상보단 이익으로 돌아가고그럴수록 그들의 사상은 더욱 숭고한 가치를 보여준다논어가 비록 고전이라고 하나 그곳에 비수 같은 말이 여기저기 숨어 있다과거는 멀지 않은 미래와 같다는 말은 아마 이런 연유에서 나오는 것과 같았다인간의 과거를 보고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잘못된 관행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과거의 정치적 제도를 되돌려서 안 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다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반사교면을 삼기 위함이다그러나 그 인간의 도리를 아는 것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자신의 삶에 작은 실천이 큰 대의를 만드는 것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란 바로 작은 것부터 실천하여 커다란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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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쌩 2015-04-1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철학이 없이 통치만 하려드니 ,
정치가 효율성만 추구되고 권력의 시녀가 되는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4-14 22:28   좋아요 0 | URL
세월호 2주기가 모레이고, 다음달이 518항쟁 35주년이나 아직 발포명령자조차 잡아들이지 못하니, 정말 정치적 효율이 아니라 권력의 효율화만 되고 있습니다.
 
향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0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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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말한다면 상당히 난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단어는 도처에 널린 말이고, 늘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들이다. 사랑이란 것을 어떻게 말하여야 하는가? 플라톤의 <향연>은 사랑이 무엇인지 바로 그 에로스가 무엇인지 대해 다루는 철학도서이다. 철학의 모티브에서 서구는 소크라테스로 시작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체계를 다진다. 그리스철학이 서구사상의 기반이 되고,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부철학이 성립되면서 그 철학의 중심에서 그리스철학이 상당히 깊숙이 자리 잡았다.


물론 견유학파 내지 다른 학파도 존재하겠지만, 형이상학적 관념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플라톤의 철학이 중심적인 역할이 된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서구의 사상 특히 기독교 사상은 이분법적인 가치관으로 나누어, 남성의 우월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종교적 가치관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사회 및 정치적으로 강력한 체계가 된다. 따라서 플라톤의 <향연>을 읽는 것은 사랑이란 것에 대해 다루기도 하나, 그 사랑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플라톤이 철학자이고, 그의 사상이 고대사회에서 나온 점에서 이 책을 많이 어려울 것이라 여기지만, 그래 어렵지는 않고, 오히려 대화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쉽게 읽을 수가 있다. 물론 <향연>을 읽는 것의 최종목표지점은 플라톤의 <국가>이다.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귀족 중심의 민주제, 즉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국가다. 특히 철인(哲人) 군주로서 이상적인 정치관을 확립한 플라톤으로서 <향연>은 그 이상적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의 기반을 다룰 수 있는 시작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서 군주란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무술을 연마해야 하며, 모든 어린 아이들은 모든 훌륭한 남성과 여성의 아이들이어야 한다. 공화국의 성립에서 가족의 개인적 이익으로부터 멀리하여 소년들은 모두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지만, 모두 형제 같은 우애를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향연>을 읽다보면 우린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말하면 가족 내지 연인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가치관을 보여준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면 아이가 생기나,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지혜가 생긴다는 점이다.


고대그리스에서 여성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스철학이 남성중심의 사회가 되는 이유는 그 시대는 도시국가 즉 폴리스를 중심이란 점이고, 폴리스 중심으로 각 구역다가 작은 국가들이 있었다. 국가의 존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에서 주요 임무를 담당하는 것은 남성이고, 지금처럼 무기가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전투기를 날리지 않는다. 인간 자신이 칼과 방패를 들고 직접 적 앞에서 달려들어 백병전을 겨루는 방식이다.

 

인구도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무기를 구입하고 지닐 수 있는 계급도 한정적이다. 폴리스에서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는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성인남성만 가능했다. 이들이 직접 전쟁을 수행했고, 정치적인 결정을 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자기 자신이 강해야 했고, 직접 무기를 들고 적진을 향하여 돌격해야 한다면, 강한남자가 가장 이상적인 남성이 되는 것이다. <향연>에서 그런 사랑에서 남자끼리의 사랑 성인남성과 소년들의 사랑은 전투기술과 삶의 지혜를 배우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백병전을 하는 전쟁에서 병사들은 여자를 데리고 다닐 수 없으므로, 소년들을 병사를 만들기 위해 또는 성적인 불만요소를 해결하기 위해 소년을 애인으로 삼았다.


지금 현대인으로 이해할 수 없겠지만, 예술에서 인간의 미를 지금은 여성의 우아한 신체에 집중하나, 그리스시대에는 남성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특히 헤라클레스와 같은 반인반신인 그는 완벽한 남성이고 그 자체가 미였다. 아름다운 존재는 바로 강하고 이상적인 남성인 점이고, 그들은 모험을 떠나 적들을 이기고 자신의 위용을 과시한다. 그런 점은 <향연>에서 이상적 인간상이 소크라테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던 사내는 소크라테스가 하루 종일 서있어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추운 날 다른 사람들은 온 몸을 옷으로 도배한 대신 소크라테스는 아주 간편한 차림으로 다니고, 심지어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 중에 소크라테스는 전우의 무기를 찾아오기도 한다.


보통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없는 행위들이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해내는 점에서 완벽한 인간이란 바로 소크라테스 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런 소크라테스는 <향연>에서 사랑이란 완벽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가 만나 아름다운 아이를 출산하여 그 아이가 아름다운 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생식기능이란 이상적 가치관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식기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인류의 번영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남녀 간의 사랑에 의해 아이가 탄생한다는 점이다.


그 관점이 두 사람의 사랑인지 아니면 소크라테스처럼 이상적 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랑에서 에로스의 개념이 다르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년에 대한 성인남성의 사랑처럼 우리는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와 특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데이몬이란 개념처럼 인간과 신은 분리되어 있는 존재지만, 인간이 신의 영역으로 가는 중간적 존재가 데이몬이란 말한다. 기독교에서 악마라는 데몬이 데이몬에서 시작되었으나(기독교에서 신과 인간은 완전한 분리), 신은 원래 완벽한 존재이라 더 이상의 변화는 필요 없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 완벽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랑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3가지가 있다. 개인적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에로스, 타인과 인류애적인 아가페,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필로소피아가 있다. 철학이란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과정이란 것이다. 인간이 신이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나, 인간이 어떤 위대한 업적을 수행할 경우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그 업적을 기린다. 신이 된다는 것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 존재적 위치는 인간이 지혜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모습처럼 그의 지혜로운 모습은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모습이다.

 

그것이 신에 대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결코 멈출 수가 없는 과정이다. <향연>에서 말하는 사랑의 대상자는 바로 자신인 것 같았다. 아름다운 자신, 지혜로운 자신,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철인적인 인간, 그것이 바로 위대한 인간이고, 그런 인간들에게 많은 소년들이 구애를 보내어 그의 지혜를 소년들에게 전수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만든다는 점이다. 지금의 시대라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랑의 개념이겠지만, 적어도 생각해볼 점은 이상적인 삶에 대해 무엇인가에 대해 정도는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연민이라 하겠다.


철학의 개념이 현대에 오면서 다르게 되었다. 인간의 사랑이란 것은 세상에 불행한 사랑이 없어질 때까지 철학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하듯이,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다. 고통 받고 괴로운 사람이 있어서 그가 힘들어 할 때 내가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게 사랑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연민의 정은 내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느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후에 당분간 볼 수 없을 때 기다림에 지친 내 자신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고, 늙은 부모님의 야윈 모습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고, 뉴스에서 가난 때문에 전 가족이 죽음을 선택한 기사를 보면서도 연민을 느낄 것이다.


물론 연민의 감정만이 아니라 기쁨의 감정을 사랑에서 느끼겠지만, 연민의 감정이 나에겐 사랑이란 감정이라 본다. 왜냐하면 나와 내 주변 존재만이 아니라 나하고 전혀 관계없는 존재조차도 느끼는 연민의 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연민의 감정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타인의 불행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그들의 불행에 빠진 절망을 비웃고 손가락질 하는 인간을 보면 과연 그들에겐 사랑이란 감정은 있을까? 사랑받지 못하면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사랑이란 말은 매우 단순하나 그 행위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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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교사 루소 - 루소는 에밀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김상섭 지음 / 학지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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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에 대해 생각하면 보통 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권을 주장한 사상가로 생각해왔다. 물론 그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와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통해 인간사회가 가진 억압과 고통에 대하여 진지한 비판과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문장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곧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면, 카를 마르크스가 제기한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를 읽게 되면, 루소는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사상가와 혁명가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런 루소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경우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에 나온 이 문장에서 이때까지 철학은 세상을 계속 해석해 오는 것에 충실했다면, 그 해석을 하는 철학이 결국 탐구하고 보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탐구대상의 영역이 무언가 오류나 잘못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거기서부터 단순히 비판하여 고찰만 해야할 철학에서 실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실천철학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철학은 당시 사회인 프랑스 계몽주의 물결에서 볼테르나 디드로 같이 단순히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기보단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와 달리 루소는 엘리트이면서도 엘리트인 것에 치중하지 않았다. 사실 볼테르와 루소가 프랑스 파이에 있는 팡테옹이란 신사에 나란히 묻혀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의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그 만큼 달랐다. 볼테르는 지식인 중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우월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루소는 그들과 달리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결국 마르크스가 제기한 것처럼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이 세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핍박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서 변증법적으로 물질이 사회구조를 변화한다는 것처럼 당시 프랑스 사회는 빈곤한 하층민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했던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왜 그렇게 변화를 주었는가? 사실 왕정사회에서 국민이란 그저 왕에 의해 통치를 받는 사람이고, 그들의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얼마든지 수탈당할 수 있는 위치였다. 심지어 목숨조차도 왕이나 귀족의 노여움에 의해 보장받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은 단지 권력자들에 의해 모조리 박탈당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루소의 <에밀>을 읽게 되면 그가 본 사회는 참으로 위태로운 것은 분명했다. 왜냐하면 <에밀>이 발간된 시기는 1762년 당시 유럽 어느 사회든 왕이 통치하지 아니한 국가는 거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프랑스 루이16세가 지배하던 왕정국가에서 그 이전의 루이14세는 태양왕으로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왕권신수설까지 도래한 시기다. 무너지지 않을 듯한 철벽같은 왕정시대에서 <에밀>에서 이제 곧 혁명이 도래할 것이란 위험한 말이 등장한다.

 

지금에 와서 역사적인 흐름을 본다면 혁명이란 것은 최근에 한국에서도 일어난 운동이고, 세계적으로 혁명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혁명의 원인을 찾아보면 민주주의 국가체계에서 헌법을 명시한 국민이 곧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란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소가 살던 시대에는 국가의 주인은 곧 왕이었다. 왕이 모든 것의 주인이던 시기에 루소의 발상은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었다. 바로 그런 사상이 세계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18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그의 사상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정치철학 내지 사회혁명으로서 루소의 가치를 보는 것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주안을 두었다면, 이번에 읽은 도서는 조금 다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연적이고 그 존재는 자유로우나 이미 세상 도처에 널려 있는 사슬에 의해 억압의 사슬로 묶여 버린다. 인간이 태어나는 이상 사회화라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이다. 인간이 사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인간은 또 다른 야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야만의 세계란 무지몽매하고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는 미개한 야생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잔혹한 야만성이 가득한 사회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에서는 폭력에 의한 물리적 타격은 없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말과 그리고 오묘하게 숨어있는 질투, 시기, 모함 등이 존재한다. 루소가 왜 그토록 인간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을까?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을 보듯이 루소가 아주 평화로운 들판을 걸으며 발견한 식물을 채집하여 그 식물이 무엇인지, 그 식물의 외형은 무엇인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편지처럼 자연 그 자체가 존재하는 세계 1가지가 있다. 이에 반해 다른 1가지는 인간 사회의 자연성이었다. 인간에게 수렵이나 채집과 같은 농경산업 이전의 비문명사회로 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마음에 접근하여 인간 그 자체로서의 본질에 다가가는 자연성이었던 것이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여 살아가고 있다. 세속에서 하나의 도덕으로 작용하여 그게 가끔 좋은 것으로 비추어질 때도 있겠지만, 대부분 세속적인 가치가 인간에게 유용한 게 아니라 하나의 허례허식 내지 남을 깔아뭉개거나 혹은 차별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루소는 바로 그런 세속적인 인간에서 인간의 사회성이 결국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본 것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인간이 가진 잔잔한 재주는 어쩔 수 없더라도 자신이 가진 재주 내지 재산, 권력을 뽐내기 위해 억지로 자신만을 돋보이려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재물과 재화를 소모시키는데, 그로 인해 많은 가난한 농부들이 밀가루를 구할 수가 없어 빵을 먹을 수 없는 것도 지적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밀가루는 당장 급하게 구입해야 하나, 그들에게 가진 가난함은 오히려 절실하지 않으나 얼마든지 밀을 살 수 있는 자에 의해 그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밀이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큼 밀이 아니더라도 다른 것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여유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런 여유만큼 얼마든지 구매하고 소모시킬 수 있으므로, 절실하게 원하는 자에게 밀이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회에서 인간이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나, 인간이 가장 필요한 존재가 인간이므로 결국 가장 비참하고 저렴한 존재는 인간으로 되는 것이다. 루소가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본 것은 어린 시절 농부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때이다. 굶주림과 긴 여행으로 허기진 루소는 어느 농부의 오두막에 가서 먹는 것을 달라고 하자, 농부는 아주 형편없는 빵과 음식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루소는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어치우자, 농부는 자기가 숨겨둔 좋은 치즈와 음식을 내어주었다. 루소가 보통 농민과 달리 좋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자신의 재산을 빼앗으려 온 줄 알았지만, 루소가 단지 배가 고픈 사람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으로 루소는 자신의 인생가치를 바꾸게 되고, 후에 가서는 귀족적인 의상에서 아주 간편하고 소박한 의상으로 바꾸게 된다.

 

루소가 경험한 사회에서 이런 농부들의 행동, 파리 도시에 가서 본 비참한 거지와 빈곤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결국 루소는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점과 거기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루소가 그것을 인지한 지점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면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게 바로 <에밀>인 것이다. 이미 그가 추구한 자연적인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자연적인 인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문학적 요소로서 만든 교육철학 도서가 <에밀>이고, 그것은 프랑스대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혁명이 되게 하는 큰 구심점이 되었다.

 

에밀은 어느 귀족의 아들로서 부모는 없고, 오로지 에밀의 후원자 한 사람인 장 자크가 맡게 된다. 에밀에 대한 교육방법은 지금과 다르게 매우 혁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인 현재에서 에밀에 대한 교육방법은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매우 잘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계성은 에밀을 두고 일대일이란 교육시스템은 어려우나, 그런 시스템적인 요소를 조금 다르게 해결한다면 인간을 두고 새로운 가치관을 부여할 수 있던 것은 분명했다. 가령 20세기부터 경제성장과 물질문명의 지나친 발전은 인간이 가져야할 인간성을 파괴하고, 가족관계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어지고, 가정환경은 자녀들에게 학교라는 단체교육기관에 위탁하도록 만들었다.

 

옛날 교육체계는 학교나 혹은 학교 이전의 교육기관이 있더라도 집안 자체가 대가족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심지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 고모 등이 같이 살았기에 얼마든지 교육의 경로가 존재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하는 교양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적 요건의 변화는 모든 가족의 해체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더 이상 가족의 보호가 아니라 타인의 위탁으로 이어진다. <에밀>에서 에밀은 자신의 가족이 아닌 가상의 후원자에게 맡겨지나, 적어도 그들은 피가 이어지지 않을망정 하나의 가족과 같았다.

 

가족의 중요성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심리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뭔가 집착하거나 또는 불안해진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그런 불안한 아이들에게 계속 억지로 주입하거나 틀에 맞추어지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은 청소년들의 비행이나 왕따, 그리고 소외다. 그런 청소년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면 그들이 경험한 것에 의해 새로운 고통이 반복되고, 그 영원한 고통과 고뇌의 순간을 단절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대안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의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회복은 인간이란 비록 완전하지 못해도 그 인간성 자체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학교생활은 그저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와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할 수 없이, 그저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어야 하고, 그것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면 처벌로 이어진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이미 우리 인간은 학교라는 공간조차도 수용소의 한 자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인간에게 그런 사회화란 것은 누구에게 속박당하고, 거짓과 위선으로 상대방을 속이는 기술만 배운 것이다.

 

정작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말이다. 단지 사회에서 정해져 준 가치란 결국 성공이란 것인데, 그 성공은 출세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삶에서 우리의 성공의 가치는 결국 인간이 가진 재력과 권력으로 측정되어 버렸다. 루소가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결국 재력과 권력이 중심이 되면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늘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 <레미제라블>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루소의 사상 역시 지금도 묻고 있다.

 

<레미제라블>에서 비참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만 비참한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그 비참함은 대를 이어 계속 물려주고 언제 끝나지도 않을 것만 같은 시간지옥 같았다. 인간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팔리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면 안 되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언제라도 버려야 하는 그런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루소는 그런 사회가 결국 인간의 자연성을 찾지 못한 것이라 보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자연성이란 숲과 강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의 마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누가 아프거나 다치면 그것을 보고 당연히 도움을 주어 그가 제대로 생활해야 한다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점이었다.

 

<에밀>에서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에밀이 사랑하는 여인 소피가 에밀을 기다리고 있는데, 에밀과 에밀의 스승이 약속시간까지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본 바, 어느 누가 심하게 다쳐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할 때, 에밀은 그를 간병하고, 의사를 부르러 갔으며, 그의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위로한다고 늦었던 것이다. 결국 타인이 처한 어려운 처지를 보고 당연히 도와주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좋아하는 즐거움조차 포기했다는 점이다. 그런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는 인간,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라 보는 인간이 루소가 추구한 <에밀>의 내용이었다.

 

물론 이런 내용이 아니더라도 <에밀>에서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해야 할 내용들은 너무나 많다. 에밀은 자신이 부유한 재산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마을의 이웃과 즐거움 삶을 살기를 택했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하고, 때로는 타인을 위해 같이 힘을 합치며 모두와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루소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이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닌가 싶다. 단지 루소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본연의 자연적 모습이라면, 더 나아가 칸트와 롤즈는 이성적인 요소로서 사회적 자유를 본 것이다.

 

물론 루소 역시 이성을 중시했다. 그의 저서인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동식물이 위치한 자연에서 살 수 없기에 사회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그 주인이 되어 일반의지로서 자신의 자유를 찾아가는 것을 원했다. 결국 인간의 교육은 사회화라는 흐름에 가겠지만, 그 사회화에서 자연적 본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의 평가로부터 관찰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서 평가하여 판단하는 게 타당했던 것이다. 이성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게 결코 이성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성을 활용하는 방법에서 자신의 이기심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대다수 군중의 이기심은 전체의지로 변하여 일반의지를 대체하게 된다.

 

일반의지란 결코 모든 것을 바꾸는 절대적 힘이 아니라 어느 방향을 향하여 길을 제시하고 안내해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전체의지로서 일반의지를 파괴하고, 그것이 하나의 도덕적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그런 전체의지를 두고 니체는 군중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기 바란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실존주의적인 인간상은 니체 이전에 이미 루소가 정립하였으며, <에밀>을 읽더라도 인간은 자연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것조차가 실존주의적인 인간상이었다. 실존적인 존재이므로 자신의 판단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다.

 

그런 점에서 루소는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타인의 손에 의해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찾아가도록 길을 제시해야 주는 것이었다. 그 경로에는 처음에 인간은 자기애에 의해 이기심이 발동하지만, 그 과정조차도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도록 유도한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본인이 가장 소중하다. 이런 자아와 타인에 대한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서 인생의 참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 이카리 신지는 14세의 중학생으로 아직 개인의 자아가 확립되지 못한 채,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무관심, 어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몰아넣고 외로움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 사회의 청소년과 이카리 신지의 모습은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인간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사회라는 전체적인 구조가 인간을 형성하게 만든 것이다. 에밀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던 계기는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자 하는 어른이 존재이고, 그 존재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지난날의 모습이 옳지 못한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소의 서적에 나온 문구들은 너무나도 훌륭하여 <현대인의 교사 루소>에 나온 루소의 글들을 보는 내내 나는 감탄을 마지못했다. 왜 칸트가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는데(칸트 동네 사람들은 칸트가 산책 나오는 시간을 보고 현재 시간을 알았을 정도였다.), 루소의 <에밀>을 읽는 것 때문에 몇 번 그 산책하는 시간을 깜빡했다고 한다.

 

<에밀>만 아니라 다른 서적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구와 너무 인상 깊은 단어는 내 가슴을 움직인다. 루소는 다른 철학자와 달리 그의 서적을 읽으면 마음에서 뭔가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철학은 차가운 이성으로 볼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루소는 뜨거운 영혼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저자는 교육철학자이기에 다소 책 내용이 어려우나, 제4장에 나온 그의 테제는 아주 인상 깊었다. “사상가 루소는 유명한 제자 에밀을 창조했지만, 학습자 에밀은 휼륭한 교육자 장 자크를 창조했다.”

 

우리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단지 교육자란 이유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지만, 사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 역시 학생들로부터 충분히 교육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 학생들의 이성적 수준과 지성의 범위가 넓거나 깊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나, 그들이 품고 있는 상상력과 창의력은 교사보다 더 월등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죽이는 것만 권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인 모습을 파괴하고 억압하고 파멸시키고 있다. <현대인의 교사 루소>처럼 루소가 현대인들의 교사가 되어야 할 점은 인간이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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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한길그레이트북스 57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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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을 예전에 돋을새김 출판사에서 나온 보급판으로 읽은 적이 있었다. 처음 내가 <에밀>을 읽었을 때는 어렵지 않고 매우 이해가 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좋은 도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읽는 내내 <에밀>이란 책을 소개한 부분이 상당히 눈이 가기 시작했다. “인간 혁명의 진원지 된 교육서”라고 말이다. 사실 돋을새김에서 출간된 <에밀>을 읽는 내내 어떻게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어떻게 아이에 대한 교육을 매우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루소가 가진 철학적 문학적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돋을새김에서 나온 도서들은 물론 가격도 저렴하고 읽기가 수월한 편이나, 사실 깊이 들어가고자 할 때, 그 서적들 일부는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게 아니라 편집자와 번역자로 하여금 쉽게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든 서적이다. 따라서 이 서적들은 처음 독서를 시작한 분들 중에 조금 심도 있는 서적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겠지만, 만약 그 이상의 깊이와 사고를 요구한다면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도서가 좋을 것이라 여긴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한길사의 <에밀>을 읽었다.

 

이전에 읽은 <에밀>과 달린 한길사에서 출간된 <에밀>은 상당히 책이 두꺼우며(거의 900페이지에 이름), 편집자의 작업 시에 책 안의 편집용지 여백공간이 매우 좁다. 따라서 보통 같은 사이즈의 A5 도서에 비해 본문 한 페이지 내의 글자 수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목차가 같은 5가지라고 하더라도 전개방식이 조금 달랐다. <에밀>은 다소 소설과 같은 형식이 취해져 있지만, 소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적혀 있다. 문학적으로 적힌 것이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철학, 사상, 교육, 정치, 사회, 경제 등 수많은 학문적 소양이 담겨있다.

 

당초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 내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밝힌 것처럼 지나친 학문에 빠진 인간들을 대해, 그 학문과 예술에 너무 의존하여 인간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더 나아가 그런 형식적인 틀에 얽매여 지나친 과소비와 악덕을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고 했다. 루소가 가지고 있는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에밀>에 와서 더욱 증폭된다. 왜냐하면 루소는 자기 자신이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속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반계몽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그 계몽주의에 대한 지식의 맹신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진 것은 대부분 일부 사람들이고, 그 외의 농민이나 도시의 평민들은 글을 읽고 쓰는 지식이 없다. 따라서 글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방도로 사용할 것이며, 예술이란 것은 일련의 사치품으로 그 예술품 하나를 구경하기 위해 예술가를 고용하여 무수히 많은 자원과 금전을 소모하게 한다. 그 소모에서 가난한 농민과 도시의 빈민들이 먹어야할 밀가루나 음식조차도 필요하게 된다. 그토록 가난한 사람들은 빵 하나를 먹기 위해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치나, 부자들은 그 빵을 만들 수 있는 밀가루를 자신을 위한 놀이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밀가루가 필요했다. 밀가루의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기보단 밀가루가 취향에 의해 가져가는 부류가 더 많았다. 생계를 위한 사람은 가난으로 구매할 수 없지만, 취향에 의해 구매하는 자들은 경제적 부를 소지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저렴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식량이다. 하지만 루소가 보던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이 매겨진 것은 인간의 생명이었다. 이 얼마나 슬프고도 분노가 넘치는 말이란 말인가! 루소가 인간의 생명을 저렴하게 취급한 게 아니라 당시 그런 사회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글로서 잘못된 것이란 점을 남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은 모두 선천적인 불평등보단 오히려 후천적인 불평등에 의해 고통 받는다고 말한다. 후천적인 불평등 가난과 신분이란 사슬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비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군가 이익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그 이익으로부터 멀어져만 했다. 사회생활하면서 가장 인간의 자기당착에 빠지는 경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절대적인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루소도 인정한 것처럼 인간의 제1의 사랑은 자기보존에 대한 자기애다. 하지만 그 자기보존이 이루어지 위해서는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조차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모조리 부정하고, 그들을 존재성을 인식하지 않으나, 그들이 가진 부나 명예들을 갉아먹어 자신의 부와 명예를 증가시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이 가장 몰려있고 서로 악취와 오물을 내뿜는 도시는 그야말로 악의 소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자연적인 존재이지만, 도처에 있는 사회적 굴레와 제약에 의해 사슬로 묶여있다. 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모두 펼칠 수는 없다. 오로지 그 사회적 계약 안에서만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에밀>은 바로 위와 같은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살아가야하는지 알려주는 도서이다. 그토록 <에밀>이 당시 프랑스사회나 현재 지금에 와서도 권력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경계되는 도서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는 사회라는 큰 사슬에서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사슬로부터 자유로이 살 수 있거나 그 사슬조차 인간의 고귀한 영혼을 지배할 수 없기에 그런 것이다. 이미 <에밀>은 현대 모든 인문학의 구심점처럼 보일 정도로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전에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란 도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상당히 어려운 도서이면서도 그 책에서는 아이들로 하여금 무지한 스승이 필요한 것처럼, 학생들로 하여금 강제로 주입하는 교육체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무지한 스승> 이전에 이미 <에밀>이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어린 시절의 자신이 없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란 존재조차 자신에게 어린아이라는 육체를 가진 적이 있었다. 어른이 가진 가치관은 모두 어린 시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 성장해가지만, 그 성장의 토대가 되는 영양분은 결코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좌우된다. 즉 그 인자는 부모, 스승, 주변 사람에 의해 결정되게 만든다. 문제는 그것은 상당히 편향되어 있으며, 아이에게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아이들이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보다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가기 전에 말이다.

 

학교 교육이나 사회적인 시스템에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강요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 강요는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론이란 여론몰이로 결정된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가 아니라 세상이 결정되어지는 구조는 한 마디로 스펙타클한 사회라는 점이다. 루소가 살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세론이나 여론이 결국 미디어로서 전달되어 그 미디어가 이미지라는 형태로 제작되므로, 우리는 이미지로 매개된 사회로서 스펙타클을 구축하고 또 구축한다. 자신의 존재는 소외되고 결국 남의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

 

인간의 욕망은 자신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사회적인 입지를 높이려 한다. 물론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목표로 삼는 것도 인생의 큰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좁은 시선으로 만들어진 인생의 목표가 완수되면 어떻게 할 것이고, 그 것보다 규모가 더 큰 목표를 달성하여 더 이상 무엇을 찾아가야할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뭐든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원하게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자기의 의도를 무시한 채 결국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걸어온다. <에밀>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알기도 전제 죽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인생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메여있기에 루소는 늘 자연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그 자체를 포기하고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원래 물리적인 요건에서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문명발전에 의해 호흡할 때마다 매연과 먼지가 내 코를 찌르고 내 목을 아프게 하며, 내 눈은 탁해진다. 마시는 물은 정수기를 놓아도 안심하지 못할 경우도 있으며, 땅에서는 각종 오염물질로 가득하다.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자연, 그 자연을 인간이 부수고 망가뜨리고 정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최종적으로 정복된 것은 인간 바로 자신이었다. 인간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육체를 나약하게 만들었으며, 정신은 온갖 사악한 정신으로 가득하다. 인간이 바라고 있는 것은 가장 자신의 이익이고, 다음으로 타인의 파멸이다. 자신의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타인의 이익에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루소가 그래서 약자의 재물을 강자가 삼키는 이유는 강자들은 자신의 쓸데없는 권위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로부터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어쩌나? 루소는 분명 18세기 인간이나 21세기 역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에밀>을 읽는 순간, 당대 사회에도 파장을 일으키나 지금도 파장을 주는 이유는 <에밀>에서는 인간은 주어진 것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 행동하라는 점이다. 자연적으로 키워진 에밀, 그는 누군가에게 억지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이란 불리는 아버지 친구로부터 같이 성장한다. 그 스승은 에밀은 자신의 학생이지만, 그를 학생으로 대하기보단 같은 시선으로서 친구로 대한다. 스승과 제자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인 것이다. 학생에 대한 인격과 자유의 존중은 결국 그 제자 역시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부모나 사회적 세론에 의해 아이들에게 닦달하듯이 교육하고 억지로 강요하는 모습은 오히려 아이들을 망치는 지름길이며, 아이들로 하여금 눈치만 보고 거짓말을 하게 만들어 어른이 되어서 비굴한 행동을 일삼게 하는 패악 질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처럼 자라고, 뭐든지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물론 그 당시와 지금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서 루소의 사상이 모두 옳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루소가 주장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인간을 만드는 것만큼 정말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오덕 내지 덕후라고 불리는 오타쿠라는 사람이다. 오타쿠라는 나라도 인간사회에서 보이는 모순과 문제점을 모르거나 단시 구경만 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하면 좋다는 것 역시 생각하게 한다. 문제는 판단력이란 것이다.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우리는 인간 본인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하지 않은 채 단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왜 내가 오타쿠라는 점을 여기서 아무 망설임 없이 밝혔을까? 예전에도 지금도 계속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그 요소를 알 수 있다.

 

주인공 파일럿 소년에게 세상의 어른들은 그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이 그 소년에게 원하는 것은 어른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행동하기를 바란다. 소년은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그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을 원망하고 책망하여 심지어 자신을 파멸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아이의 고민을 알아주지 않은 어른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어른들이란 존재 역시 지난 어린 시절에 힘든 삶을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인생을 배운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인간이란 자신과 혹은 그 집단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자유롭고 관대한 어른만이 오로지 자유롭고 관대한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게 <에밀>을 보던 마지막 모습인 것 같았다. 아이는 어른들의 거울과 같은 존재다. 아이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게 해준 어른의 책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자신의 기대나 목적을 바라고, 그 이면에 가려진 책임과 의무는 회피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인간이라 되라고 말만 하면서 정작 좋은 인간이 되는 방법과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틀과 형태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이다.

 

그래서 사람의 정신적 관념들은 결국 현실의 육체적인 요소까지 아이들에게 작용한다. 아이들에게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배내옷이나 침대를 주지 않고, 그대로 온 몸은 감싼 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좁은 침대에 그를 감옥의 죄수처럼 나둔다. 아이들이 자유로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움직일 자유도 주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인형처럼 꾸며대기만 한다. 또한 루소의 시대만큼 지금의 시대에 아이들에게 자연이란 공간을 제대로 알게 해주지 않는다. 농촌이란 시골에 살기는 어려우나 아이들에게 농촌이란 흙을 어촌이란 바닷물을 알게 해줘야 한다. 인간의 강인한 신체와 정신은 단순히 성능 좋은 약과 조기교육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자립성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면 결국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의는 결국 어떻게 죽는 것인가라는 양면적인 의문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름은 너무 두렵고 무서우며 때로는 공허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태어나서 자라고 병들어 죽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린 죽음에 대하여 진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단 그저 그 죽음에 대해 어떻게 도망치려다 결국 두려움과 좌절에서 사라져간다. 물론 죽는 것은 두렵지만, 그 두려운 마음을 줄이기 위해서 인간은 자연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육체는 죽어도 그에 대한 기억은 주변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애를 가져야 할 이유는 자신의 생명이 끊어져도 주변사람들에게 그가 베풀었던 진실한 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조선시대에 가난한 백성을 위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위해 노력하던 지식인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영원한 스승이 되어 좋은 교육의 본보기로 활용된다. 자신의 창고에 쌀이 쌓이는 것보다 주변사람들의 가마솥에 쌀이 들어가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것이다.

 

<에밀>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인간 본인은 그렇게 대단하고 뛰어난 존재이기보단 그저 평범하고 보통 사람들 같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범해 보여도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자유로운 영혼과 따듯한 인간애를 가진 것이다. 따라서 에밀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의 일상에서 주변과 보내는 즐거운 시간은 행복함으로 이어지고, 그 행복함을 나누는 것으로 그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와 잘 지낼 수 있는 에밀은 그렇게 사람들과 잘 지내라는 교과서적인 도덕관념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러고 싶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선을 실행하는 것은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가능하다. 정언명령이 되는 그 근본은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에서 발견된다. 인간은 윤리적 가치는 타인을 위한 것처럼 보이나, 그 최종적인 이익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왜냐하면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도 역시 자신에게 큰 고통이고 상처가 될 것이고, 길가에 괴로운 사람들이 넘치면 그 마을과 도시는 점점 쇠퇴하여 온갖 범죄와 흉흉한 소문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애적인 가치는 타인의 이익이 아니라 결국 자신도 같이 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타인의 이익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타인의 삶까지 박탈하고 그 생명까지 앗아가 버린다. 정말 두렵고도 무서운 일이다. 그런 인간들이 있고, 그런 인간들을 허용하는 사회가 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들도록 허락한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강요된 삶으로 얼룩진 그들은 단체와 조직에 속하면서 오로지 거짓과 위선을 배운다. 순수하게 아이들의 입장을 고려한 게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진 어른 같은 아이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어른들이 되면 아이들보다 못한 어른이 된다.

 

그래서일까? <에밀>은 종착편은 에밀이 소피를 만나 결혼하여 그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에 대한 맹약과 복종이 보여준다. 에밀과 소피가 애를 낳아 에밀의 아이를 맡는다면, 에밀은 분명 그 에밀을 만들어준 친구 같은 스승처럼 애를 키울 것이다. 하지만 에밀에 대한 교육은 끝나지 않는다. 에밀에게 아이에서 어른으로 키운 스승은 필요 없을지 모르나, 에밀이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그 아버지로서 가져야할 자세를 에밀은 또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우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 배움은 무리하게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하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에밀>이란 서적은 모순 아닌 모순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편견을 이기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자연적으로 살아가게 하여 그 편견으로부터 지켜주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을 지키는 어른은 누구로부터 방어책을 얻을 수 있을까? <에밀>이란 책은 쉬운 책이 아니다. 특히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은 그야말로 인간의 종교와 철학이 그대로 담겨진 내용이다. 아마 지금 21세기에 본 나라도 루소의 관찰력에 감탄을 숨길 수 없다. 종교는 간단해야 하며, 어려워서는 안 되며, 종교는 그 나라와 문화 그리고 인종에 따라 다르면 그 차이에 그 자체로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그것은 존중해야하며, 절대적으로 자신의 종교만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신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선을 베푸나, 그 선을 실행하는 것은 인간이고, 어떤 종교가 있더라도 그것을 강요하면 안 되며, 신의 가르침은 오직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를 돕는 것임을 알기에 루소의 <에밀>은 당시 종교인들에 의해 박해받는다. 루소의 박해는 <대화>편이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힘들었다. 루소는 광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누가 남을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그 망상적인 피해의식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던 실존주의 선구자이며, 가난하고 배고픈 농부를 사랑하던 인도주의자였다.

 

<에밀>은 바로 루소의 사상이 모두 담긴 서적이다. 왕이나 귀족, 농민이나 노예 상관없이 모두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했으며,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 조화로운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에밀>은 <사회계약론>을 적는 밑바탕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에밀>의 마지막 부분은 <사회계약론>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나온다. <에밀>은 인간에게 자연적 존재가 되어 이기심과 시기심으로부터 멀어져 인간 그 자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린다면, <사회계약론>은 자연적으로 살아가야할 인간이 자연적으로 살아가지 못하여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안내한 도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루소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 대상은 언제나 억압받고 가난함에 지친 약자의 편에 있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개인의 의지, 집단의 의지, 그리고 일반의지로 나운다. 인간은 자기애가 1번째이기에 그렇고, 국가라는 조직을 이루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이기주의, 그리고 그것을 넘어 공공의 이익을 원하는 일반의지, 하지만 일반의지가 가장 실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루소는 안다. 개인들의 이기심이 하나가 되는 전체의지가 너무 강력하고,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는 결코 남이 강조하는 것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아래 탄생하기 때문이다. <에밀>을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살아가야하나 살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본연의 감정과 이성 그리고 윤리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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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2 -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2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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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2권, 분명 이 책은 진중권 교수가 일반인들 중에서 미학이나 인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을 위해 만든 책이 아니라 정말로 미학이나 인문학에 깊이 들어간 사람을 위해 만든 책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동안 <미학 오디세이>, <생각의 지도>, <아이콘> 등과 서적을 보면 그렇게까지 어렵게 적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미학이란 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연구하기에 기본적으로 미학을 알기 위해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서적으로 통해 볼 수밖에 없다. 미학의 아름다움이란 그 가치를 찾는 것이고, 미학에서 찾는 가치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뽑거나 혹은 현실이 아닌 이상이나 관념에서도 존재한다.

 

가령 고전주의 미학을 찾아보면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모멘트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처럼 교회의 권력에 의해 유럽이 지배되는 정치적 구조에서 내세 내지 선악의 이분법은 군주와 종교 세력의 결탁에 따라 백성들(민중으로 판단하기 어려움)을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이 중시되고, 신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으로 가면서 과학적 근거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현실적인 시각과 관점이 예술에 반영되고, 미학적인 틀을 반영되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보면 매우 과학적인 구조로 보이는데, 작품을 만들면서 물리적인 계산과 생물학적인 해부학으로 통해 완벽한 동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즉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을 신성하게 만든 고전주의적 미학과 현실의 존재를 모방하는 과학적인 미학은 계속 대립되거나 혹은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사고를 중시하는 계몽주의 사상이나 또는 더 나아가 휴머니즘은 20세기의 2번의 큰 전쟁으로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초현실주의 내지 반미학이란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2번의 큰 전쟁의 원인은 제국주의적인 성향과 더불어 자본주의에 대한 급가속적인 팽창으로 인해 상품의 판로와 재료의 구입이란 경제적 조건이 정치적 이익과 결합되어 터진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란 것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체계에 드러난 비인간적인 모습, 전쟁에서 보이는 비이성적인 인간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지에 대해 인문학을 접근한다는 것은 바로 이미지가 가진 매체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활자문화가 도래하지 않은 시기에는 과학적인 사고와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쟁이란 것도 귀족이나 기사 중심으로 벌였으며, 일반적인 농민을 최대한 휘말리지 않도록 했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다보면 군주는 모두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어야하겠지만, 한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일반 백성들을 건들지 말고, 상대국가의 군주나 정치세력만 제거하라는 것이다. 백성들을 건드는 순간 민심을 잃게 되어 정복자인 군주는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를 20세기에서 전투는 군인과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조차 살해하고,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는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격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보편적 윤리의식이 결여된 사건을 보여준 계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저지른 행위가 비도덕적인 것을 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미디어로 통해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접한 것은 무엇을 통해 우리는 보고 들었는가? 그것은 촉각이나 미각, 후각으로 정보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청각과 시각으로 멀티미디어 내지 또는 이미지라는 시각적 정보로 알게 된 것이다. 특히 뉴스나 인터넷 매체의 전달력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정보로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전쟁의 학살대상이 군인에서 민간인, 정보의 전달력이 중세시대 때는 그림이나 말, 문자문화가 도래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시대에는 신문이나 잡지 등이었고, 이제는 신문과 잡지보다는 TV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까지 주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때까지 정보를 얻은 문자중심에서 탈피하여 영상중심으로 이어지고, 영상문화는 단순히 눈보다는 청각적인 매체로 통해 탈문자화 하였다. 문자의 탈피는 이미지에 대한 정보력을 더 강하게 부여했으며,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미지의 구축은 아날로그 시대나 그 이전처럼 분리된 정보로서 대중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이미지의 복제와 복제로 통해 그 이미지가 모두에게 같은 조건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지의 세계는 살아있는 자에 대해 가둠으로서 이미지의 공간에 찍혀진 피사체는 죽은 존재로 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도 아니므로 사진 속의 존재는 기록된 죽음일 것이다. 사진은 기존에 가진 기록기능을 대체하는 방편에서 최고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인물의 초상화를 그릴 이유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초상화보단 사진기로 촬영된 사진이 훨씬 더 실물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기술의 발달은 회화의 새로운 길을 제공했으며, 눈에 보이는 실물보단 초현실적인 요소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전쟁에서 보인 비인간적 행위는 인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은 우리에게 무섭고도 충격적인 느낌을 전달해준다. 그 충격이란 단순히 공포와 낯설게 보이려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으로 통해 우리가 간과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과 같은 경우 다다이즘으로서 레디-메이드란 20세기 초반 생활양식을 비판했고, 가장 인상적인 영화장면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준 기계와 인간의 결합성이다.

 

기계와 인간은 본래 이원적인 관계이나, 테일러주의 혹은 포드주의라는 경제적인 시스템은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로서 보는 것이다. 기계 톱니바퀴를 돌리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은 상당히 우스꽝스럽게 연출되어 보이나, 그 모습은 살아있는 인간보다는 살아있지 않은 인간으로 보인다. 인간인데도 인간처럼 보이지 않은 섬뜩한 느낌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20세기 2번의 전쟁에서 인간의 대량학살은 정신적 외상이란 트라우마를 낳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인간은 삶에 대한 열망보단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의 죽음은 항상 원하지 않는다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나,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죽음에 대한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죽음은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낯선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 그 개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낯선 행위다. 단지 그 익숙한 낯설음에 대해 억압하므로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나지만,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은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간극 사이에 만들어진 예술품을 본다면 한스 밸머의 인형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신체형식인 인형이 매우 괴기스럽게 보이나,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색다른 매력을 느낀다. 낯선 것이나 왠지 낯설지 않게 보이거나, 또는 낯설지 않은 것 같아도 낯선 것을 보는 것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게 애매모호하게 될 때 우린 언캐니라고 부른다. 언캐니의 존재에서 인간은 실제 존재하는 인간 또는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구성한 인간 내지 존재를 만들어낸다.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은 무존재를 만들어내서 새롭게 존재성을 부여한다.

 

내가 평소에 즐겨보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본다면, 그것들은 분명 실존하지 않은 존재이나, 마치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는 각 캐릭터에 대한 특징과 속성을 중시했으나, 어느 순간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실재 인간과 비슷한 외형과 얼굴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모습은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최대한 반영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실존하는 인간과 다르게 생겼으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와 전혀 다르게 생겼기에 섬뜩한 느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3D영상의 구축과 더불어 실재 인간의 외형을 따라한 캐릭터들이 나오면서 우리는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속성이 사라진 캐릭터가 외려 인간이 닮은 모습에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보이기에 언캐니로 받아들인다. 캐릭터를 바라보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인간에 의해 주시당하는 캐릭터의 간극에서 인간은 자신보다 더 완벽한 인간처럼 보이는 캐릭터에 대해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과 같은 존재가 있기를 바라나, 막상 그 존재가 눈앞에 등장한다면 오히려 적대적으로 변해 매우 낯설고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이 낯설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스스로 가진 가치관의 변화와 시대적 흐름에서다. 우리가 이성적인 존재라고 여기고 만들어온 문명사회가 오히려 인간을 파괴하면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오히려 언캐니하게 된 것이다. 그런 언캐니의 요소에서 <이미지 인문학> 2권에서는 재미있는 요소가 나타난다. 바로 그 언캐니가 처음에는 매우 낯설고 불안하게 만들지만, 이제는 언캐니가 하나의 친숙성으로 되돌려지는 것이다.

 

이 부분이 너무 새로운 개념이고, 막상 생각하면 현실에 적용된 내용이니 많이 놀라웠다. 몇 년 전에 개봉된 <아바타>의 경우, 분명 외계인은 우리 인간과 유사하게 생긴 종족이나, 그 모습에 대해 불안감 내지 낯선 모습만으로 다가온 게 아니었다. 오히려 후반으로 갈수록 아바타의 캐릭터가 친숙하게 여기게 된다. 또한 언캐니하던 3D 영상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가령 오락실에서 인기 있는 게임으로 <철권> 시리즈가 있다. 철권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오락실의 오프닝영상이나 혹은 영화로 만든 영상을 본다면 그다지 낯설지 않게 보인다.

 

3D 영상에서도 인간처럼 작고 섬세한 근육이 보이고, 얼굴표정과 몸의 움직임이 매우 흡사하다. 본질적으로 인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과 같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아니라면 인간이 언캐니(그것이 언캐니인지도 모르면서)의 이미지들을 계속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것이 정말 언캐니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못하여 낯선 것들이 낯선 게 아니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 최초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다. 이 흑백필름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실제 시오타 역에 도착한 열차를 촬영한 시퀀스로, 약 50초의 롱 테이크로 보여준다.

 

당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진짜 그 열차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처럼 보여 극장 내부는 혼란으로 쌓였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1960년대 한국에 흑백 TV가 보급될 때 처음 TV 드라마를 보던 사람은 TV 안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하는 질문을 TV에서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TV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지만, TV에 나오는 사람에 대해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이나 또는 그 대상에게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있다. 하이퍼리얼리티한 공간을 만든 TV 이미지의 아우라는 여전하다. 그렇지 않으면 왜 TV 드라마의 연예인을 두고 많은 팬들은 열광하는가?

 

이미지의 세계는 바로 저런 대중매체로 동시다발적으로 정보가 전달되므로, 설사 실존한 인물이 피사체로 담겨도 그 인물은 진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가상의 존재 내지 이미 그 모습은 사라진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이미지는 실존한 인물을 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존재조차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는 이미 존재한 것을 이미지로 기록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는 것과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에서 “신은 죽었다.”로 변화하면서 이제는 인간이 신화의 공간에 잠든 환상을 과학의 힘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 이끌어낸다.

 

낯선 것들에 대한 현실화는 인간에게 큰 가능성을 부여하기도 하나, 인간 그 자체를 기계 내지 또는 가상의 영역으로 가려진 존재로 은폐할 수 있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처럼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사실로 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란 세계에 아무 것도 없지만, 그 아무 것도 없기에 하나의 진실로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조차도 우리는 이미지로서 알아갈 수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는 이미지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문맹인이라고 한다. 이미지 자체가 의미하는 정보는 알겠으나, 그 의미하는 정보의 숨은 의도는 읽지 못한 경우가 많다. 미디어에서 등장한 이미지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정보이므로 그 정보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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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이 책에 대한 호응이 별로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대중적이지 않아서 그런가요 ?

만화애니비평 2014-08-07 14:07   좋아요 0 | URL
정말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어려운 개념도 나오고, 새로운 개념도 나오고, 게다가 새로운 예술작품도 많이 나옵니다. 진중권 교수 이 양반 국내가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에 있는 편이 훨씬 본인에게 이익이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