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에서 과학으로 - 새날 고전 묶음 2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나상민 옮김 / 새날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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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인류의 역사 천재라는 존재가 나올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천재인 것도 있으나, 시대적인 흐름이 존재함이다. 만약 플라톤이 현세에 태어났다면? 혹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삼국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적인 조건에서 항상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봉착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물론 세종대왕의 한글이야 얼마든지 한국이란 영토 내만 아니라 북동아시아 대륙으로 가도 문자의 능력은 십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현세에 살았다면 아마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극소수에게 민주주의가 선택된 귀족중심의 민주주의라는 꼬리에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란 바로 그런 하나의 과정 속에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역사적 현실 속에서 오류를 부정함에 따라 새롭게 긍정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소상하게 알지 못하나, 적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향을 받은 변증법에 유물론적인 요소를 더함으로 기존의 절대적인 관념에서 변증법적인 가치로 통해 현실을 새롭게 재조명한다. 그래서일까? 유독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이라는 서적을 볼 때면 마치 변증법적인 역사관이 매우 뚜렷하다.

 

왜 사회주의는 반드시 오는 것일까? 세계 어디를 보아도 소비에트 연방 해체이후 그냥 그대로 사회주의 국가는 없다. 단지 덴마크, 스웨덴 등과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 정치경제적인 요건에 따라 운영하고 있다. 이른바 시민사회주의로서 말이다. 사회주의 이념이란 국가는 없어도 사회주의 관련 정치적 조직은 여전히 프랑스 및 독일 등을 중심으로 선진국에서 활동 중이다. 그들이 그렇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엥겔스가 설명한 <공상에서 과학으로>이란 서적을 보면 우리는 인간의 계몽주의 사상이 도래한 18세기 프랑스를 봐야 한다.

 

몽테스키외, 디드로, 볼테르,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엥겔스는 사상이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상으로부터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충분히 문화라는 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나, 오히려 문화로 통해 우리 인간이 형성되어 왔다. 아니라면 문화라는 자체도 본래는 하나의 유기절인 환경조건에 의해 구성되었다가 추후 하나의 문화적 관념으로 고착화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그동안 살아온 사회구조는 상부구조인 정치적 입지에 따라 형성되어 왔다.

 

생각해보면 왜 다른 나라에 비해 서구가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문명화가 다른 대륙에 비해 빠른가? 중세유럽부터 각 나라의 태어난 사람들이 고국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에 가서 신하가 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일정한 영토에 비해 국가들이 많이 연접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가 전쟁을 벌이게 되면, 다른 나라에서 전쟁으로 약해진 나라를 침공하기에 일정한 정치적 권력을 확보한 채 유지하는 편이 더 이익이 될 것이다. 또한 무역거래에서 상인들의 이동이 많은 점과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전략에 따라 상업활동이 발달했다.

 

정치적 조건에서 농경사회에서는 봉건군주 내지 절대주의왕정이 유리할 것이다. 농노나 자유농민들이 대부분 국민이고, 그 위에 왕족 및 귀조, 그리고 전쟁에서 임무를 수행할 기사와 형이상학적 가치관을 내세우기 위한 성직자들까지 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이런 신분계급 체계가 안정화 될 수 있는 것은 최하위계급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이 없는 점과 그 지역의 귀족이 자신의 관할지역의 농민들을 다스리고, 때에 따라서는 결혼 내지 의료 활동까지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이동은 일부 상인에 국한되었으며, 대부분 이송물자는 그 지역의 특산물에 한계였다.

 

하지만 무역거래가 늘어나고, 상인들의 이동이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세력이 늘어가고, 그들은 재력과 더불어 지식까지 소유하고, 그동안 미천한 신분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신분상승을 노린 것이다. 자본주의혁명은 결국 봉건사회의 적이 되어야 했다.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도 루이왕정은 수입에 비해 지출이 심했고, 귀족들에게 세를 거두지 않고 농민에게 거두는 바람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부여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에밀>처럼 당대 지식인들을 자극하던 서적의 중요도보단 그 시대의 국가경제 상황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단지 그 혁명의 주도세력은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왕족의 과소비는 알아도 왜 그런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 따위는 없었다. <사회계약론>에서 언급한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아직도 대한민국 헌법 내지 세계 어느 국가에서 통하는 헌법 문구이다. 하지만 그런 개념조차 당대 사람들에게 없었다. 인간 누구나 천부인권이 있다는 관념조차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상에서 과학으로>는 비록 프랑스대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나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삼색기에서 자유, 평등, 박애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된다고 했다.

 

사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 관념에서 사회주의라는 개념에서 민주주의와 별개로 놓고 보는 것이다. 자유주의 역시 민주주의와 별개로 보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영역이냐? 공적의 영역이냐의 차이점이다. 단지 민주주의에서 고도화로 발달되면 사회주의 요소가 되는 이유는 지금의 북유럽 선진국처럼 대부분 국민들이 굶지 않고 가난으로 허덕이지 않아야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들이 그동안 근현대까지 해온 식민지국가 침공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영국이 그나마 근로자 수당이 적정하게 책정된 이유는 그만큼의 임금을 인도와 같은 식민국가에서 착취해온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어느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을 희생하거나 문제가 생기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수정하고 극복하여 또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부분은 어떻게 가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결코 유토피아 국가를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나라를 가는 과정에 대해 항상 강조했다. 그 어떤 것의 달콤한 이야기들은 결국 헛된 공상이란 점을 강조했다. 공상에는 과학이 없다. 현실의 상황과 그리고 지금 가야하는 점은 언제나 대립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도 우리가 지금 일반적 받아들이는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속박과 굴레를 해방하겠다고 나온 레닌 사후 스탈린의 소비에트 정권은 결국 오히려 더 인간을 속박하고 폭력의 역사를 물들게 하였다.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가 관념론이란 봉건제도를 타파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되었고, 계몽주의는 그저 부르주아의 일부 지식인에만 국한 된 것이었고,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양되지 못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은 계몽주의를 스스로 알았을까? 그들은 계몽주의적인 정신 대신 단지 루이왕정을 전복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시민이라 불렀다. 하지만 시민은 그 속에 얼마 없었다.

 

계몽주의자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과 관계없이 그저 그 흐름에 맡겨 공상적으로 계몽주의에 입각한 시민이라 여긴 것이다. 따라서 그런 공상에 휘말린 만큼 추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모든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환영했고, 자신들 손으로 왕을 죽인 자들이 이제는 스스로 황제를 옹립한다. 인간의 공상이란 바로 자신들의 한계와 현실을 깨우치지 않기에 늘 똑같은 어리석음에 고통 받는 것이다. 또한 그 고통에 의한 억압이 또 다른 혁명과 쿠데타, 전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민주주의 역사는 피를 마시고 자라는 나무라고 하지 않은가?

 

공상에 빠진 자들은 자신의 무지에 의해 똑같은 것을 반복되고, 또는 새로운 가설에 의해 이끌려 다니기도 한다. 당시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과 같은 사회주의들은 공상적이며, 현실적 조건과 경제적 판단에 대해 오류를 범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푸르동에게 보낸 <철학의 빈곤>은 푸르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해 반박하기 위한 서적이다. 또한 엥겔스는 위 3명의 사상가만 아니라 다른 사상가의 정치적 노력이 실패했음을 설파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정치사상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실패했다고 하나, 진짜 마르크스의 원전을 읽었다면 마르크스의 실험에서 최종테스트는 성공도 실패하지 않은 채 중간에서 실패한 것이다.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시도를 했다고 치더라도 그 일부의 마르크스주의자만 마르크스를 알았지, 그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그 무리에 속함으로서 하나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공상적인 망상이다. 엥겔스의 서적은 바로 그런 점을 설파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른 사상가의 사상에 대해 비판을 한다. 그런 서적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후로 나온 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자. 그때와 지금은 다른 세상이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경제적인 조건과 그 조건에 의해 사회적 약자, 즉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은 비슷해 보인다.

 

제일 놀라운 말은 산업예비군이다. 또한 평소 경제가 호황이면 화폐가 유통되어 물가가 오르고, 임금이 하락되는 결과가 되는 점이다. 경제가 불황이면 근로자들은 언제든지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물가가 오른데 반해 임금은 오르지 않고, 경기가 좋지 않아 실업도 문제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익을 주더라도 일하는 사람에게 일자리는 빼앗는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면 결국 그 사람들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사람이 줄어든 만큼 일의 양이 늘어난다.

 

20세기 수그러질 것처럼 보인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오히려 21세기에 다시 부상되는 이유는 그의 지적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이 책에서 나온 단어나 해설 등은 지금 학교과정이나 혹은 사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와 의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한다고 해도 그들이 만든 개념이나 사상은 충분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공상이란 허울 좋은 망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하라고 한다. 공상에 빠진 자들은 자신이 공상에 빠진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무지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상에서 벗어나 과학으로 가는 것은 무지의 맹아를 스스로 벗어야 한다.

 

엥겔스는 유물론자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독일 관념철학자인 칸트에 대해 존경하고 그의 철학을 받아들인다. 물론 마르크스 역시 칸트와 피히테 등과 같은 철학자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마르크스가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 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현세의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마르크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가 존재하던 시대에 살았다는 점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름이 지금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읽으면 마르크스의 여러 서적을 요약 정리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읽어보면서 제법 잘 정리된 책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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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켜다 - 무도한 세상에 맞서는 세상의 울림
표정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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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철학 입문서 내지 혹은 철학자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어떤 철학자가 있는지 그 철학자가 살아간 시대적 배경과 상황, 그리고 그가 이룬 업적들을 다룬 것들을 보았다. 문제는 그런 서적을 읽는 순간 그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상적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번 서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학자의 서적들을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자에 대한 소개나 그 시대적 배경을 다루는 책들을 보면 늘 아쉬운 게 그저 철학교양서적에 불과한 점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을 켜다> 역시 그런 책에서 크게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 철학도서가 그렇듯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마르크스라는 큰 틀에 몇몇 잘 모르는 인물들이 나왔다.

 

그래도 그나마 인상적인 인물은 스피노자라고 할까나? 스피노자에 대해 일반적으로 철학도서에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다. 그의 일생이 항상 고독과 위기 그리고 미완의 저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업적은 개인적인 부분이 대다수의 대중을 이끌지 않았다. 적어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그들은 당시 그리스 사회에선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했기에 어느정도 연구자료가 전해온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그러지 못했다. 하다못해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되어 말년에 정신적인 피해망상에 시달린 루소조차 많은 지식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병으로 죽은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국제노동자협회에 글을 적어 보낼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스피노노자는 고독과 고독으로서 살아간 것이다. 예전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서 나온 내용처럼 스피노자그는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어도 사회적으로 죽은 인간이었다.

 

그가 본 부당한 세계, 그 세계라는 것이 하나의 도덕이고 하나의 진리라는 비틀린 사회가 그의 철학을 일깨워주었다. 철학은 자기비판과 더불어 자기가 속한 세상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프랑크푸르트대학 사상가가 단 1명의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세계는 철학을 멈추면 안된다고 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그 지혜라는 것을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물론 여러가지 종류와 방법이 있을 것이나, 철학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바라는 학문이다. 요새같이 자본주의 논리가 하나의 가치기준이 된 세상에선 인간의 존재조차도 자본에 비례하는 실정에 이르게 되었다. 스피노자와 같이 호모 사케르들은 당시 막혀있는 사회적 규율과 도덕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자본에 따라 그 존재감이 희비로 엇갈릴 수 있다. 영화 <두 개의 문>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호모 사케르라는 존재는 그 어디서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도 찾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우리 인간들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이해는 이미 쇠퇴해질 때로 쇠퇴한 것인가? 생각해보면 중세시대의 소설에서도 황금은 모든 것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두고 보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인간이 타락해서 필요한 게 아니라, 그 타락으로 인해 인간 세상에 큰 위기와 상황이 닥친다는 점이다. 버트런드 러셀과 같은 경우 그의 업적에서 평생 반전, 반핵을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와 같이 충분히 그도 좋은 가문에서 좋은 환경에 좋은 인생을 보낼 수 있었으나 과감히 버리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덕분에 20세기 위대한 철학자 이름에서 러셀은 빼놓을 수 없는 영국신사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길은 어렵다. 어렵고 쉽지 않아 누구나 가지 않은 길이기에 그들의 사상이 전해내려오고 그들의 이름이 내려온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당시 가장 배척받고 가장 무시당한 자들이 오늘날에 성인에 이르기까지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인류역사상에 가장 많이 팔린 성경과 동급으로 많이 팔린 서적이고, 19세기 이후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준다. 어떻게 보면 그의 예언이라고 할지 아니면 그의 예상이라고 할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현상을 보면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인간의 선견지명은 분명히 지혜로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보배와 같은 것이다.

 

철학을 계속 켜고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게 지금 가는 길의 중심에서 현재 위치를 알려면 오직 철학만이 제시할 뿐이다. 철학이란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요술지팡이가 아니라, 적어도 철학이란 어느 문제가 왜 생겼는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구이다. 원인조차 모르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 인간의 어리숙함에서 철학은 인류가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하나의 등불이다. 하지만 등불이 있더라도 앞의 성난 파도를 막아주지 않는다. 단지 성난 파도가 오고 있다는 정도만 알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을 켜다는 결국 그런 인류의 역사에서 인류가 앞을 보고 갈 수 있는 등불을 켜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나로서는 루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덕분에 우리나라 헌법정신인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성립이 가능한 것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단지 그 사상과 헌법을 모른 채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은 니체의 사상을 왜 다루지 않았는지 조금 아쉬운 면도 없지 않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얼마나 현재에 충실할까? 덧붙여서 스피노자의 인상은 아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 영향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자신에 대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한다. 부당한 도덕관에 대해 부당한 현실에 대해 끊임 없이 고찰하고 지적하고 대항한 스피노자로 본다면 인류의 스승이라 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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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유주의
존 롤스 지음, 장동진 옮김 / 동명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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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언제나 투쟁과 투쟁의 공간에서 반복된 갈등으로 살아왔다. 아니 살아가는 것보다 죽어가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기에 그렇다. 인간의 가장 최고의 적은 무엇일까? 고대 선사시대부터 보면 추위, 질병, 맹수, 재해 등이나 결국 인간 그 자신이 인간 최고의 적이 되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지식인으로 유명한 롤랑부인은 단두대 아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자유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파괴하는지에 대한 탄식과 함께 사라졌다.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필수불가결적인 존재이면서도 한편으로 과연 이 자유라는 것은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은 것인지 항상 난해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상으로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한다. 하지만 막상 자유민주주의국가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려고 하는 적은 없는 것 같다. 헌법이란 인간 그 누구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제도다. 그 평등한 제도가 바탕이 되어야 자유라는 것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이란 상대적인 관념에서 서로 간에 대한 개념조차 되어있지 않은 한국의 비극적 현실에서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는다는 것은 자유주의 철학에 대해 깊은 이해와 앞으로 우리가 나갈 길을 열어주는 것과 같다. 사실 롤즈의 <정의론>, <공정으로서의 정의>, <만민법>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는 롤즈의 정치철학에서 <정의론>과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보충적인 서적이며, <만민법>은 롤즈가 최후에 내놓은 저서로 앞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서가 되어 준다.

 

 

20세기 최고 위대한 정치철학자 중에 하나이며, 자유주의철학에서 우리나라만 아니라 선진국의 민주주의에도 큰 영향을 끼친 롤즈의 정치철학은 이른바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정치적 가치와 판단력을 제시한다. 롤즈의 철학이 자유주의철학이라고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와는 다르다. 롤즈의 철학은 칸트의 구성주의적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존 스튜어트 밀과 토크빌의 자유주의 철학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민주주의 국가이든 혹은 어느 사회이든 3가지 분류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선동가, 하나는 시민, 나머지는 군중이다.

 

 

롤즈의 <만민법>에서는 현실적 가능한 유토피아적 자유주의 철학을 제시하는데, 그 요건이 바로 이성적인 합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구성주의적 자유주의다. 그것은 합리적인 것을 넘어 합당하기를 권장한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합리주의(合理主義)라는 것은 합리(合理)라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의견을 모우나 그것은 이치에 대한 정당한 요건보다는 합리(合利)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라는 것은 공적인 이성이 요구되는데 반해, 실제 우리가 보이는 사회적 현상은 공적인 이성으로 대하기보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성이 추구된다.

 

 

그것은 공공선에 대하여 무관심하나, 어느 정책이나 정치적 입장이 어느 불특정 대다수 개인에게 이익을 주는 경우라면 합리(合利)가 합리(合理)로 변질되는 경우다. 이들의 특성은 어느 사회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공동선을 추구하기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다. 이런 무지의 장막에 놓인 자들은 대다수의 군중으로 이루어질 경우가 많으므로, 이들이 가지는 정치적 권위가 막대하게 작용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게다가 자유주의적인 요건에서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최소한의 생존요건이 갖추어야 하기에 사회적 약자인 최소 수혜자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와 그들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균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그런 기회의 평등이란 점이다. 인간에게 부여된 불평등한 상황은 인정하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자유라는 것은 양심에 대한 자유와 더불어 그 양심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기 위한 결사의 자유를 중요시 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자유와 양심은 매우 중요하다고 제시한다. 사실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다보면 분명 칸트의 구성주의적 자유주의, 즉 실천이성에 의한 자유주의가 중시되는 것은 분명하나, 개인적으로 읽으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적인 요소가 방대하다.

 

 

일단 여기서 헌법에 대한 기본적인 의견과 더불어 헌법에 의해 헌법학자들이 자유주의에 대해 이끌기보단 그 헌법에 의해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야 하는 점이다. 프랑스대혁명과 더불어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인권선언문의 작성에 큰 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2가지는 세계의 헌법의 주축이 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와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장을 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바로 민주주의 서막을 알리는 거소가 같을 것이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현상과 당시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사회적 현상은 무척이나 다르지만, 그 근본적인 이념적 함의는 매우 흡사하다. 그 안에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추가되고 보완될 뿐이다. 프랑스대혁명에서 삼부회의 요인이며, 국민공회에서 위원을 맡던 로베스피에르도 자유에 대한 파리 시민에 대한 연설에서도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내용과 흡사한 면이 많다. 자신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하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은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 가지고 있어서 실현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공유로 통해 비로소 자유로움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철학과 정치사상에서 항상 그것은 역사적인 흐름과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롤즈가 추구하는 구성주의적 자유주의란 바로 현실적인 상황에 맞추어 시민들 간의 합당한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넓히기 위해 타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인 공적재산이 늘어가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적인 요소를 반영했는데, 사실 자유론을 읽어도 밀의 철학에선 그 사회의 악적인 요소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도 중요하나 그런 악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요건도 역시 중요하다고 했다.

 

 

공적으로 사회적 자유를 위해서는 바로 시민들의 합당한 공동선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 시민들이 이룩해야할 사회적 정의에서 포괄적인 자유는 회피해야 하면 다원주의적인 요소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며, 그것이 곧 양심과 언론의 자유로 이어진다. 자유주의에서는 이성이 없으면 자유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저런 이유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위대한 지침서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회계약론>을 읽은 사람은 일부 지식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누구에게나 호칭을 시민이라고 해도 실제 시민의식이 없는 시민은 군중에 불과한 것이 한계성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프랑스대혁명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흑인노예 문제도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헌법적 명제에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것이 하나의 정당한 도덕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미국 역사에서도 자유주의 철학이 빗나가게 된 것이다. 이런 노예해방운동과 관련하여 약간 <정의론>과 비교해보면 종교에 대한 부분이 관대해진 것 같다. 가령 종교가 하나의 정치사회적인 입장을 견고하게 나오는 것은 부당하나,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노예해방운동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경우 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그가 진실로 하던 일은 인류평화를 위한 흑인노예해방운동이었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대학이나 교회와 같은 기관들이 정치적인 특권을 누리려하는 것은 반대하나 이들이 정치적인 활동에서 올바른 가치를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사회적으로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종교 인사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이념을 강조하기보단 보편적인 인간애를 몸소 실천하는 사례를 종종 보게 된다. 이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로운 시민들에 대해 큰 가르침이 된다. 사실 구성주의적 자유주의에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보다는 <실천이성비판>적인 요소를 더 많이 반영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회는 같지 않고 저마다의 특유한 문화와 정치적 현상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그 정치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한 사회에서 어느 한 개인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든 혹은 가지지 않더라도 정치는 그 개인에 대하여 항상 영향을 미친다. 정치라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피할 수도 없으며 피해 갈 수도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자유로우나 정치적 사회가 존재하기에 속박에서 피해갈 수 없다는 루소의 사상처럼, 인간이 속박 안에서 최대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결국 이성으로 통한 정치적 자유주의를 실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쉬운 일이 아니다. 무지의 장막처럼 인간은 공적인 이성으로 통해 정의를 실천하기보단 개인적 이익을 위해 실천하려 하며, 특히 이익을 추구하는 대다수의 개인이 존재할 경우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실천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어느 특정 세력이 자신에게 유리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 될 경우, 누군가는 그만큼의 손실을 입어야 하는 점이다. 자유주의 철학은 자신의 권리를 추구하는 것만큼 타인의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주의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 없는 자유주의만큼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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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문학으로서 삶
알렉산더 네하마스 지음, 김종갑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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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니체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이미 한 번 니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니체, 문학으로서 삶>, 생각보단 니체에 대한 서적에서 꽤 유명한 서적이고 많이 읽어진 도서다. 한국에 번역이 늦어 이제 출간된 점에서 뭔가 의아한 부분이다. 한국에도 니체학회가 있을 정도로 니체의 학문적 역량은 막강한 것이다. 예전에 질 들뢰즈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저술한 <들뢰즈의 니체>를 읽어보면서 니체의 입문서로 좋다고 하나, 솔직한 생각으로 질 들뢰즈가 저술한 니체 입문서보단 알렉산더 네하마스가 저술한 도서가 더 좋은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이 철학자가 니체를 꾸준히 연구한 점이고, 미국에서 니체와 더불어 실존주의 철학을 오랫동안 강의한 것이다. 따라서 니체를 읽어본 사람이나 혹은 읽어 보려한 사람에게 제법 친절한 도서라는 점이다. 사실 니체의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전에 읽어본 <비극의 탄생>에서 2번 읽어도 난해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존의 모든 형이상학을 뒤집기 위해 반형이상학적으로 글을 적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을 전도시키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역사의 흔적에서 역대 폭군에 의해 고통 받는 민중이 있다면 그들은 부당한 폭력에 반항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혁명의 방법에서 폭력이란 수단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폭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고, 이와 다르게 사랑을 잃으면 새로운 사랑이 필요하다. 오히려 필요 없다는 것이 더 필요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 살아온 역사적 흐름이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기독교를 엄청 비판하지 않았던가? 니체는 오히려 기독교 본질적 요소를 원했을지 모른다.

 

더러움 권력과 물욕에 사로잡힌 독거미 같은 당시 교회권력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신이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신의 죽음으로서 그 믿음이란 절대적 광기를 폭로함으로서 신의 존재성을 부정했는지 모른다.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기 위해서는 신은 죽어야 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 신으로 되어야할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에선 인간과 신은 이분법적 존재보다는 그 중간적 존재를 인정했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자연 속에 하나로서 운명적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특히 소포클레스의 비극전집을 보면 비극 속에서 우리 주인공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것을 보는 코러스들의 합창, 합창의 엄중한 화음은 그들의 운명적 비극을 위로하고 찬양한다. 희극으로 끝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야 하나 비극으로 되면 다시금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극은 영원한 것이다. 그 영원한 노래 속에는 그 본질적 특성인 항상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 자체가 불변하기에 영원한 것이다. 니체의 사상에 그렇게 원근법적인 시야를 가진다. 절대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다가 그의 이야기를 비틀어버린다. 마치 이때까지 따라온 독자를 우롱하듯이 말이다.

 

니체의 문체는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고 장엄하다 못해 하나의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노래를 계속 따라가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영원히 미로를 헤매고 있는 독자에게 차라투스트라는 그 길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내 멀리 내쫓으려 한다. 니체는 인간 그 스스로가 주인이어야 한다고 했다. 권력이란 바로 자신을 지배하는 인간이다. 니체는 귀족을 추구한 것은 아니나 귀족주의를 추구했다. 인간 스스로 고귀하고 위대해지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위대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을 예술적인 삶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마치 군대행렬의 기수가 되는 전위부대처럼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생각하면 니체의 사고는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것은 예술이란 것은 그 자체로 다른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 구별이 결국 개인에 대한 자아의 형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에 대한 자유로운 의지다. 타인을 지배하거나 지배받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서 말이다. 그런 니체의 서적들을 여기저기 찾아보면 겹치거나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 니체의 도서는 <비극의 탄생>, <도덕의 계보>, <반사회적 고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도이다.

 

<니체, 문학으로서 삶>을 읽다보면 저자는 니체의 많은 서적을 골고루 참조하여 니체가 가진 공통적인 철학을 제시한다. 그러나 철학이기보단 문학이란 것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하나의 서사이기보단 그 서사로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서사에는 모든 것을 좌충우돌하는 아이러니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그토록 흔드는 이유는 인간에게 절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거부하기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니체는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한 번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친해질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대할 수 있기에 그 사람의 본질적 요소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화를 내고 웃고 울고 때로는 냉정하고, 다양한 모습에서 인간을 알 수 있다. 니체의 문체는 바로 그런 다양한 감정들이 숨어 있다. 마치 웅장한 연설가가 하늘 아래서 내려 보는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 같다. 누가 선위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한번 니체의 책을 읽어볼 사람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갈지 혹은 어떤 식으로 자기가 읽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제법 매력 있을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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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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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구조에서 20세기 말 미소냉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서로 자신들만의 가치관만을 강조했으나, 실제로는 그것을 핑계 삼아 은폐, 조작, 감시, 첩보 등을 상대 국가만 아니라 자신의 국가에게 사용했다. 결국 서로에 대한 이분법적인 적개심이 결국 그 감정의 표출된 수단적 방향을 적대하는 상대방이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조르조 아감벤의 설명과 더불어 기 드보르의 설명을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구경거리의 세상은 1927년부터라고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가 1967년에 나왔고, 그것에 대한 비판이 20년 뒤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왜 1927년이란 말에 확실히 1927년은 중요한 시기인 듯하다. 미소냉전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각을 세우기 전에 그것의 바탕이 되던 것이 1927년이다. 레닌이 1924년에 죽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정치적 대립에서 스탈린이 1927년 트로츠키를 정치적으로 승리한 시기와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프롤레타리아독재국가라는 겉모습에서 관료주의적 국가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시장경제자유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대립각에서 각 나라에 속한 국민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적개심을 느껴야 했는가? 국가와 국가에서 개인적 갈등은 전쟁이 아니라 단순히 싸움에 불과하나, 국가와 국가의 대립은 전쟁이다. 전쟁과 더불어 일어나는 인종청산 내지 인종말살과 같은 비인도적 행위들은 상대국가에 대한 관념에서 국가적인 영역으로 다른 나라의 사람을 대하지 그 사람 자체로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적이기에 국제법이나 전쟁법을 따르기보다는 내부적 법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에 히틀러의 수하들은 폴란드 점령과 프랑스 및 기타 유럽국가의 유태인들을 수용소에 가두어 심각한 잔혹행위를 빚었다. 그 행위에서 그들의 행위는 인간과 인간으로 대하기보단 그저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통해 다루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합법적인 도구라고 볼 수 있다. 그 도구 속에서 인간은 그 법의 대상에 해당되는 인간과 해당되지 않은 인간으로 분리하고, 그 분리된 공간에서 법의 범주에 벗어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나 그들은 법적인 요건, 즉 시민 내지 인민으로서 자격이 없기에 보호 받을 수 없다.

 

주권의 영역에서 주권은 결국 people이란 생물적 조건과 더불어 People이란 시민권이란 것이 필요하게 한다. 하지만 후자에 속하는 시민권에 속하는 것은 한정된 존재다. 그것은 언어, 문화, 풍습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언어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존재다. 언어가 가졌기에 그 고유한 문화와 조건들이 형성되어 있다. 언어의 분리된 이질감이 결국 차별이란 것을 둔다. 다시 그 언어로서 이미지들을 형성한다. 예전에는 글을 읽지 못하면 문맹인이나, 지금은 영상을 이해하지 문맹인이다.

 

영상으로 이루어지 20세기에서 이미지로 매개된 사회, 즉 스펙타클이란 거대한 소용돌이에 우리 사회는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의 모든 권력적 요소는 인간의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언어적 기능을 통제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스미스가 일하던 국가기관에서는 새로운 사전을 발간하고, 언어의 실제사용을 제한적으로 두려한다. 그것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미지들로 매개된 사회에서는 결국 대중문화의 연계성이 된다. 민주주의 정치제에서 가장 한계점은 그런 이미지로 매개된 대중들의 전체주의적 요소일 것이다.

 

가장 파시즘에 가까운 정치제는 사실 민주주의 제도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형식적 제도이지 그 제도에 대한 사실적 행동에서 인간 스스로 계몽이 아니라 미디어로 통한 형성된 여론과 상황이 주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과 여론들은 다시 정치적으로 수단화되기도 한다. 근거도 없으나 민주주의 제도의 한계점은 국가적 업무를 모두 국민 모두가 담당할 수 없다는 점이고, 그것을 대신할 관료들이 필요하다. 문제는 관료라는 존재들이 국민의 아래에서 행동하기보다는 국민의 위에서 행동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것이다. 노모스라는 법의 통치적 부분에서 우리는 법의 아래에 있어야 하나, 법의 위에 있는 것으로 통해 하나의 정치적 질서가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법으로서 통제하는 존재는 인간이지 그 법 자체가 아니다. 게다가 기계적으로 수치를 드러낼 수 없으며, 그것을 판단할 이성조차 없다. 판단의 기준은 결과론적 부분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행위의 근거성과 동기 부여다. 그렇기에 인간 스스로가 법으로서 다른 인간을 통치하는 부분에서 법을 집행하는 인간 스스로가 도덕성의 판단함에 그 판단하는 자의 도덕성이 소유하지 않게 되면 일어나는 것이 수용소적인 통치일 것이다. 그것이 전쟁이라면 전시수용소고, 그것이 내부적이라면 재외국민들의 수용하는 공항이나 보호소일 것이다.

 

민주주의적 요소가 왜 전체주의와 가까운 내용에서 민주주의에서 People이란 조건이 민주주의국가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해당될 뿐이지 그것에 해당되지 않은 이들은 법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 법적인 조건은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인간을 나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질과 물질로서 구분하는 것이다. 법적인 요건에서 그런 일련의 행동들은 여론과 상황이 좌우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런 사건들은 많이 일어날 경우 국내외 인권단체에서는 분명 경고를 내릴 것이나 그것을 실행하는 정부기관과 국민들은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법적인 절차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고, 민주주의 제도에서 국민이 주인이기에 그들의 주인으로서의 소유권이나 행복추구권이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유지가 결국 민주주의 제도에서 그 나라 국민들의 목적의식이다. 그렇다면 저런 의식은 자유민주주의제도만 있었던가? 아니다. 20세기 소비에트연방 붕괴가 일어나던 러시아에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제도적인 부분과 더불어 미디어로 통해 상대국가의 불리한 점만 편집하여 몽타주화한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하는 것은 스펙타클화되어버린 국가적 인식에서 실제적으로 미소 냉전 시기에 직접적으로 그들이 무력적으로 충돌하지 않았다. 상대국가의 동맹국이나 해보았자 첩보전이었다. 직접적 물리적 충돌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동맹국에게 우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상대국가의 주권에도 민폐를 주는 것에서 말이다. 어째든 그런 초국가적인 권력과 더불어 한 국가의 내부적으로도 이런 부분은 국가에 대한 권력을 지대한 부분을 공헌한다. 국가권력 중 경찰은 내부적 치안을 해결하기 위해 진실로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보단 오히려 감시와 처벌의 형태로 발현할 수 있다.

 

국가 내부적으로 긴장감을 형성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심리적 행위에 대한 카타르시스가 필요하다. 결국 그 카타르시스가 해결되는 것은 만들어진 범죄의 소탕이다. 범죄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하나 한편으로 사회적으로 안정을 만들어 놓게 하는 장치다. 범죄의 구조적인 접근은 결국 한 개인의 도덕성 및 정신적 문제에서 그 이상으로 사회적인 조건을 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곧 이것에 대한 제도적 개선보단 오히려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보여줌으로서 미디어의 기능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갈등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조건이 다르므로 발생하고, 국가적 갈등은 그 국가들이 존재하는 지역적, 정치적, 종교적인 부분에 따라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서로 다른 사회 내부와 국가 외부의 현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부분은 미디어로 통해 매개된 스펙타클로서 알아가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도서에서 이미지의 연속성을 둔 영상이 오히려 파시즘 국가에서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한다. 책자와 같은 것은 분명 계속 집중적으로 읽고 생각해야 하나, 영상물은 눈에 보이는 화면과 동시에 이제는 소리까지 나온다.

 

정보의 전달력이 그만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쉽고 이해하기 좋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발달한 영상물이 이제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으로 바뀌었다. 실시간적으로 늘어나는 정보의 유통에서 이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의 과잉으로 넘쳐난다. 정보가 과잉화 되면서 문제점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와 조작 및 은폐된 정보들이 몽타주로 변질되어 사실이 아닌 거짓이 하나의 사실성을 가지게 되는 simulacre의 연속성이다. 결국 simulation이 스펙타클의 산물로서 결정체인 것이다. 일망감시체제인 판옵티콘에서 이제는 인터넷콘이란 단어가 좋지 않을까 싶다. 네티즌의 해킹과 더불어 정보감시는 그 당사자조차 알지 못할 만큼 교묘하고 지능적이다.

 

문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미디어로 통해 생성된 스펙타클은 신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어제 봤던 뉴스와 드라마, TV토크쇼 뿐만 아니라 인기유행 중인 극장가의 영화까지 포함된다. 우리는 언제나 스펙타클이란 도구에 의해 모든 것들을 대화하고 사고를 공유한다. 정해진 것만 보는 것에서 인간의 집단적 사고를 유도하고 결국 그것은 인류의 적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로 대체하게 만든다. 그나마 2차 세계대전의 잔혹한 수용소는 그 자체로서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나, 상징성이 없는 수용소에서는 누가 과연 희생되어 가는가? 호모 사케르적인 요소로 보면 그것은 권력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다. 모두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사람들은 받아들이나 사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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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3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한 번 읽어봐야 겠어요. 호모 사케르보다 이 책이 더 좋다는 소릴 들어서 말이죠.
민주주의는 결국 쪽수 싸움이잖아요. 쪽수를 밀고가는게 파시즘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파시즘은 전체주의이지만 쪽수가 전체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죠. 민주주의는 올바른 감시 체제가 작동을 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파시즘입니다. 한국 사회 파시즘적 사회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3-31 21:38   좋아요 0 | URL
호모 사케르보단 이 것이 좋은 듯합니다. 여러가지 모아 중구난방적인 부분이 조금 이어진 부분이라고 할까요?
민주주의라고 하기엔 이성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민주주의로 가장한 전체주의에 불과하죠.
한국 파시즘이죠. 확일화 되니 말이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