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사유 - 실천하는 교사,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함영기 지음 / 바로세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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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것은 참 어렵다. 왜 어려운 것일까? 사실 인간은 인간을 스스로 키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이란 인간에 의해 사회적 그룹으로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현재 21세기가 과거 조선시대 내지 봉건사회였다면 농경산업으로서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오히려 어린아이 내지 청소년들을 가리켜 작은 어른이라고 했다. 단지 몸이 작을 뿐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업무나 책임을 이미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정에서 요리를 하는 소녀나, 논과 밭에서 추수하는 소년들이 있었고, 심지어 10살 내외의 아이들도 나름 잔잔한 심부를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가장 행복은 그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고,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작은 아이였던 청소년들은 지금의 청소년처럼 단순히 보호받고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나름대로 삶의 한 영역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다. 중세유럽부터 근대유럽까지 학교라는 곳은 모두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귀족이나 왕족, 그리고 일부 부유한 사람에 한하여 가능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산업구조는 농경사회가 아니라 경공업으로 변모되면서 노동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공업이란 특성에 인간을 맞추어야 했다.

 

가령 옷감을 만드는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물과 석탄 그리고 재료의 배합을 알아야 했으며, 장거리 수송을 위한 교통에서도 말과 소보단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도구를 다루거나 수리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적 기술이 요구되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자본주의 산업체계에서 지식은 농업을 하는 것과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가 능률이 좋아지는 만큼 세분화된 작업구조와 그 기계에 대한 작업능력이 요구되므로 공장에서 근로하는 사람들에게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시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글이 되었는데, 사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에서 감옥의 역사에서 감옥은 단순히 법적인 조치로 만들어진 물리적 감옥 즉 교도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학교, 병원 등 다양한 공간에 머무는 인간 역시 감옥 같은 감시체제로 이루어진 셈이다. 제레미 벤담의 일망감시탑인 판옵티콘에서 감시와 통제로서의 기능은 결국 인간에게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라기보단 그저 그 감시와 통제로서 이익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교육이 교육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교육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인 권력에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기존의 노동인력이 빠지면 새로운 노동인력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대체되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그 사회는 계속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조직이란 하나의 구조에서 본다면 국가의 운영과 존립에서 하나의 토대를 이루는 하부구조로 되는 것이고, 국가라는 전체적 틀에서 떠나 개인으로 본다면, 교육으로 통해 인간의 자아성찰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그저 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제시스템으로 이어가고 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교육사유>로 생각해보는 한국의 교육이란 항상 위기의 연속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근대에서 넘어 탈근대로 이어져야 할 단계이나 아직까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려 있다. 이른바 계몽이란 것이 진실한 계몽이 아니라 계몽이란 이름의 새로운 억압으로 등장한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으로 되는 것일까? 우리는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자유와 민주주의는 인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같이 좋은 삶을 살아가야할 가치관이다. 민주공화국이란 단어에서 공화국은 결국 그 나라의 국민이 전쟁이나 위험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단순히 국가외부의 적이나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등장할 수 있다. 그런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 나는 교육이라 생각한다. 비행청소년 내지 각종 왕따 사건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도 일어나는 각종 문제들은 결국 교육에 의해 일어나는 인간의 재해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원래 인간으로 된 게 아니라 인간은 후천적인 요건에 의해 인간이란 존재로 사회로 나오는 것이다. 물론 태어날 때 두뇌가 우수한 아이나 또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할 수 없기에 결국 인간은 교육으로서 자신의 인생이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교육사유>를 읽기는 했지만, 먼저 이 책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한국사회에 전반에 일어나는 교육문제를 다룬 것은 맞다. 그 문제에 대한 원인 역시 언급한 것까지도 인정하다. 그러나 깊이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사례에 대해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면 적용이 가능한 사례를 들어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존 듀이라는 미국 교육사상가에 대한 거론은 좋으나, 존 듀이의 이론을 어느 정도 구체적인 설명보다 일반적인 설명으로 끝난 것이 아쉬우며, 차라리 존 듀이의 서적들과 그 연구결과 그리고 존 듀이의 연구를 계속 진행하는 사상가들을 소개하여 우리가 어떤 서적을 보는 것이 좋은가 하는 안내가 없던 게 아쉬웠다.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해 생각하자면, 교육학이나 교육철학을 직접 공부하거나 수업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정치․사회학․철학․문학 등을 접하면 교육에 대한 사유와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령 교육의 기회에서 균등배분은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등장하는 내용이다. 롤즈의 경우 최소수혜자로 하여금 그들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혜택이 경제적인 문제로 배제되는 것이 안 되며,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기회를 부여하여 스스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거론했다. 그렇다면 교육사유에서 그런 부분이 등장하고, 그런 중요한 사안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것은 학생과 교사 개인적인 영역에서 학교와 사회 그리고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로 이어간다.

 

교육이란 것은 누가 임의로 정하여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육행정에 의해 이루어진 체계이며, 아쉽게도 우리는 교육을 인간의 성장으로 통한 미래투자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는 투자라는 점이다. 그런 투자가 인간의 성장에 대한 투자가 아닌 경제적 조건으로 연결되니 학생들은 인격이 아니라 자본적 가치로 보는 것이다. 국가는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큰 효율을 보는지, 혹은 학교는 얼마나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보는지, 부모는 얼마나 애들이 성적이 올라 좋은 대학에 들어가 대기업에 취업하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말이다.

 

아니라면 공무원 중에서 고위직이나 또는 전문직으로 수익이 월등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국가에서 돈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모든 것이 돈으로 보기에 인간을 돈에 대한 효율성으로 따지므로 학생들 역시 효율적인 것만 따지고, 그 효율적인 요소는 이기심에 의해 조성된다. 왕따 내지 폭력문제가 발발하는 것은 바로 그런 조직사회라는 은폐공간에서 학생들 스스로 인격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도구로 보기에 타인의 고통이나 상처에는 연연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자신의 목표는 좋은 대학과 일자리, 없으면 오늘 하루 어떻게 견뎌 무사안일하게 지나가는 것이다.

 

이런 학교구조 누가 만들었나? 학교는 그 사회의 축소판이다. 사회라는 규모에서 국가가 가장 큰 규모이니 학교는 그 나라의 현재 상태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학교는 보이지 않은 은폐공간에 계속 집단적으로 격리되어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지 때문이다. 문제가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어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 및 조작으로 이루어진다. 최근에 자살한 어느 중학생의 경우 집단폭행에 괴로워 다른 곳으로 전학가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것은 교사와 어른들이 학생들끼리 잘 지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수수방관에 그 피해학생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단지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자신들에게 책임이 오는 것부터 걱정하는 것이다.

 

안심하지 못하고 학교강단에 서는 선생, 그리고 그 선생을 믿을 수 없는 학생, 집에 가면 학생들은 더 감옥이 된다. 왜냐하면 집에서 바라보는 교육이란 시험 후에 돌아오는 통지표로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가정이 평온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가시바늘이 돋는 감옥처럼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 물론 돈 잘 벌고 좋은 직장에 가면 좋겠지만, 모든 학생에게 그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어떻게든 누군가는 덜 좋거나 더 힘든 일을 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좋은 조건으로 보이는 자리가 과연 몇 %가 되는가?

 

아무리 바득바득 따라가도 갈 수 없다면 제3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학생의 자유고, 그것을 유도하는 것이 선생이고, 그것을 배려해주는 것이 부모다. 안 그래도 프랑스대혁명 발생 225주년인 올해 7월, 나는 다시 루소의 서적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에밀>이 너무 생각났다. <에밀>이란 서적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함께 세계적인 도서이며,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존재하게 만든 정치사상도서다. 그런 <에밀>에서 교육에 의한 방법론적인 요소를 단순히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인 요소로 이끌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은 부모고, 부모가 아니더라도 그 어른은 아이에게 너무 미리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아이로 하여금 자연과 어울리게 하여 그 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이에게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보다 강제로 의자에 앉히기를 바란다. 교육을 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나 오히려 인간의 폐쇄성과 이기심만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위인과 문호들은 왜 루소의 <에밀>을 보고 큰 전환점을 얻었을까? 아이에게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는 또 다른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이고, 그들이 아직 인격적으로 부족해도 그것을 억지로 누르는 게 아니라 그 인격을 새롭게 이끌어가게 해주는 것이 진실한 교육이다. 예전처럼 1인의 천재가 10,000인의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10,000인의 사람이 10,000 인을 먹여 살리는 것이 옳은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세계야 말로 진실한 교육의 가치가 드러나고, 그것이야 말로 헌법과 교육법에서 말하는 민주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민주적인 인격체로서 성장하는가? 결국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어른이 되기 전에 그 당사자가 어떤 가치관을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가치관은 누가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관점과 아이들이 보는 관점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항상 기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풍조에서 우리는 창의적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20세기 산업은 레드오션이라고 하면 21세기는 블루오션이란 말이 있다. 게다가 21세기는 이미 문명적으로 개발이 다 되었기에 새로운 산업은 문화라는 거대한 인간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1달에 책을 얼마나 읽는지, 그리고 그 책은 어느 종류인지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책은 단시간 내에 성과를 내려는 자기계발서 내지 주식투자서 등과 같은 도서다. 그런다고 모두 그 책을 보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는 그 본인의 역사이지 우리 모두의 역사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하는데, 개인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게 해줄 가능성은 과연 0.01%나 될까? 아니라면 주식투자 역시 주식시장의 변화, 국제사회의 변동, 시시각각 움직이는 정국에서 그 흐름조차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이 계속 주식투자에 집착해보았자 결국은 망하게 되는 점이다. 우리는 조금 더 느리게 생각하고 판단해야하는 것을 빨리 자각해야 한다.

 

어차피 21세기는 다양한 업종과 다양한 사회가 조성되어 있기에 어느 일정한 것으로 모두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나 주입식 교육만 추구하는 현실에서 사교육은 언제나 공교육의 앞에 전제되었고, 사교육의 부담은 가정살림에 부담이 오며, 가정의 살림이 압박이 오면 인구까지 감소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국가적으로 교육이 중요하나, 그 교육정책과 흐름이 역으로 한국에서 젊은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이다. 재생산적인 가치로 따지자면 우리 사회 역시 또 다른 모순과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투자는 당장 실적이 이어지지 않겠지만,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교육 실태는 차가운 복도와 막혀있는 창문, 그리고 숨 막히는 경쟁의식에 학생들은 깊은 나락에 삼켜지고 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청소년 자살이 많은 국가로서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한 이들의 비명에 우리의 미래는 과연 빛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적 흐름에 맞물려 있다. 교육에 대한 사유는 비단 내 아이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 대한 문제다. 내 아이는 다르다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어차피 그 아이도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와 사회 안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할 줄 모른다. 내가 피해가고 싶어도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공간적 안식처를 만들어가야 한다. 전에 지방자치단체 투표하기 전에 우리 회사 직장동료에게 이 말을 들었다.

 

자신이 지지하는 당은 그다지 있는 것은 아니나, 어느 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자신은 거기에 투표할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거기 지역에 출마한 후보자가 자신의 친척이 되는 것이란 점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무슨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말에 나는 참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도움이 되는 일이 몇 번인지 혹은 그 도움을 준다고 해도 얼마나 만족할 수 있는지, 제일 중요한 것은 진짜 도와주는 지였다. 나라면 그런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의 자식이나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 진짜 교육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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