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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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나 아렌트를 말한다면 대부분 사람은 아이히만을 생각할 것이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었다. 그가 무고하게 죽인 유대인 수는 차마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나치 전쟁범인들이 국제재판소에 판결을 받고, 그들은 그 죗값에 따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21세기 우리 인류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로 남아있다. 바로 그 아이히만에 대한 연구를 독특하게 진행한 사람이 한나 아렌트다. 유대인 여성인 이 학자는 20세기 중반 최고의 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아래 수학 받고 추후 카를 야스퍼스 아래서 학문을 지도받는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20세기 관념철학 즉 형이상학자로선 최고의 학자이다. 그러나 그가 나치와의 관계성에서 다소 문제가 있으나, 그래도 하이데거의 명성은 21세기에도 <존재와 시간>을 통해 충분히 그 가치를 드러낸다. 하이데거는 19세기 학문에서 관념론과 더불어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를 읽으면 니체가 조금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연구함으로써 인류 악에 대한 기원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20세기 철학사상 도서 중에 상당히 우수한 서적으로 뽑혔다. 하지만 모든 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이번에 내가 처음 읽은 <인간의 조건>은 바로 그러하다. 내용은 다소 난해하면서도 또한 일률적이지 않은 흐름을 가진다. 게다가 마지막은 다소 의외의 내용이 전개된다. <인간의 조건>이란 말처럼, 인간이란 무엇이고, 그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위해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라는 것이 옳은지를 탐구하기보단 그저 인간이란 존재는 노동, 작업, 행위라는 3단계로 구분하여 여기서 가장 좋은 것은 행위, 가장 아래는 노동으로 치부했다. 물론 노동이란 힘든 일이다.

 

아렌트가 적은 글을 보자면 노동은 고대 그리스로 올라간다. 그리스 사회 즉 polis, 폴리스 국가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그리스의 최고의 사상가를 뽑으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서구철학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사회는 인간사회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노예제도 있었던 사회이다. 그리스의 민주정이 있다고 하나, 여성과 아동, 이방인 그리고 노예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사적은 영역, 즉 가정의 노동과 생계를 위한 노동을 일구어야 했다.

 

사적인 영역에서 실행하는 노동이란 그저 단순하고 평범한 일이다. 인간으로써 나은 삶을 추구하기보단 그저 그 삶에 안주하여 만족하고 살아가는 부류일 수도 있었다. 그 다음에 나온 인물들이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만드는 존재이다. 인간의 문명은 그저 발달된 게 아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정복을 했고, 정복의 대상은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까지 이어진다. 도시의 개발은 더 많은 자연을 파괴해야 했고, 자연의 파괴로 인한 자원이 부족할 때, 서로가 가진 잉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을 한다.

 

인류의 투쟁은 전쟁이란 극단적으로 실행되는 정치행위로 변모되었고, 정치적 투쟁은 더 나아가 정치제도의 정책안을 수립하는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전쟁과 관련하여 아렌트가 다소 놓친 부분은 폴리스 국가에서 주인이던 자들은 모두 군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군인이기에 무기를 가질 수 있었고, 무기를 가질 수 있기에 무술을 연마하고 체력을 키울 수 있었다. 플라톤은 정치적으로 현인이기도 하지만, 권투와 레슬링을 전문으로 하던 체육인이기도 하다. 전쟁의 승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의 세련도가 있지만, 그 무기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전사가 필요했다.

 

폴리스 국가에서 폴리스 그 자체를 두고 아렌트는 그것이 하나의 국가라고 했다. 국가의 존재성에서 토지개념이 있어야 하나, 무기를 들고 있는 시민이야말로 폴리스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직접 전쟁을 수행하고, 전쟁과 관련하여 정치와 사회시스템이 움직이므로 공론의 장에서 당연히 행위의 당사자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고대의 전쟁과 근대의 전쟁은 다르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실수한 점은 바로 그것이다. 폴리스 국가에서 공적영역에서 자신들의 다원화적인 가치를 주장하던 이들은 지배자들이다.

 

지배자들이 전쟁을 수행했고,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죽으면 그들만의 종교관념 안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영웅의 최후처럼 비교된다. 노예는 영광스러운 죽음을 누릴 기회는 없다. 왕과 귀족이 직접 병사를 지휘하고 앞서는 시대, 그러나 아렌트가 살던 시절은 왕과 같은 최고 지휘관은 전장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후방에 위치한 전투지휘소에 지휘한다. 그것도 상당한 안전과 보안 속에 말이다. 고대의 전쟁은 지배자들의 권력을 스스로 보여줄 수 있지만, 근대로 이르러 전쟁은 피지배자들을 죽음을 내몰아 권력자와 경영인들이 이득을 취한다.

 

전쟁을 선포한 자들은 총을 들지 않지만, 전쟁 실행 가부결정권이 없는 청년들은 죽음의 땅으로 향한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바로 이런 점을 간과했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은 단순히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노동자에 불과하다. 보초를 서고, 총을 잡고 돌격하며, 떨어지는 폭탄에 두려워 땅에 얼굴을 파묻는다. 전쟁에서 공론의 장은 통용되지 않는다. 물론 전쟁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삶은 늘 전쟁과 같은 상태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국민들은 누군가에게 고용된 노동자이거나 직원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살던 시절은 아주 복잡하고 난해한 시대이다. 세계대전이 2번 일어나고, 나치에 의해 망명을 선택한 그녀가, 전쟁이란 불확실적인 삶에서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왔다. 그녀는 엘리트이고, 매우 똑똑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도 똑똑하고 상류사회의 인간이다. 그녀는 결코 하류사회를 겪지 않은 사람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미국은 대공황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세계도 역시 불황으로 인한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공황에 대해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과잉생산으로 인해 물량이 남아 더 이상 시장을 개척할 수 없을 경우 공황이 일어난다고 했다.

 

공항으로 물가는 치솟고, 일자리 고용은 저하된다. 전쟁과 관련하여 공항의 관계성은 중요하다. 억지로 만들어진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농촌에서 작물재배가 지나칠 정도로 풍년이면 농작물은 땅에 그냥 버린다. 상품의 수요가 소비의 비율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농산물은 그나마 다른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비료와 가축사료, 가공식품 등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공장에서 나온 물건은 다르다. 농장이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빚만 없다면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공장은 다르다. 생산품을 팔지 못하고 노동자의 임금과 더불어 공장운영비조차 감당이 불가하다.

 

전쟁의 효용성이란 바로 묵은 상품들을 처분하기 좋은 기회이다. 상품의 처분은 기업가에게 큰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다시 경제 활성화를 누린다. 단지 조건은 전쟁터가 본국만 아니면 된다. 전쟁특구의 사례는 일본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연합군의 군수 공장의 기능을 수행했다. 공론의 장과 관련하여 전쟁이나 금융에 대한 제재에서 반드시 국민경제나 세계평화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다원화를 통해 인간의 가치관을 많은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렌트는 비참한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노동계급을 알고 있지만, 그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정표 따위는 주지 않았다. 폴리스 국가의 플라톤과 페리클레스 같은 인물에게 깊은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렌트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찬동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을 지배한다는 유물론적인 가치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경제적, 사회적 구조가 결국 하나의 현상으로 이어지고, 그 현상에 대한 대안이 상부 정치구조로 이어지는 점이다. 요새 쉽게 생각하면 대한민국 인구 재생산비율이 1.0 정도로 내려가자 정부가 출산제도를 보완해가는 것과 같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영역은 사적인 영역, 사적 노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시대의 어머니 여성들이 겪은 노동이 그랬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육아를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과 같이 동조해가는 시대다. 아버지에게 주어진 출산휴가는 하루 이틀 정도가 이제 육아휴직이란 제도가 생겼다. 물론 제대로 사용하기란 아직 시기상조일지 모르나 그런 개념조차 없었다. 사회적 변화는 즉 사적영역의 인간이 살아가는 그 삶에서 시작된다. 그들의 삶이 이기심이라 보기는 어렵다. 사적 영역의 추구는 인간의 본질성에 가장 부합된다.

 

인간의 정체성에서 나는 왜 살아가는 가에서 그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한다면 스스로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건다면 호숫가의 수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반해 결국 호수에 빠져죽는다. 자신의 정체성이 자신보단 남에게 전가해야만 새로운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아렌트도 정체성의 본질을 찾기 위해 다산성을 주장했지만, 공론세계의 다산성은 다원화적인 인간이 표상이겠지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은 국한된다. 행위의 주체자로서 아렌트가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를 지지할 수 있는 노동이 필요하고, 그 노동을 실행시킬 수 있는 도구나 기술이 필요했다.

 

지구를 떠나 인간을 살 수 없지만, 거만한 엘리트와 지식인은 그 지구위에서 살고 있다 해도 자신이 머무는 집과 자신이 여유롭게 누리는 커피 한잔은 모두 그 노동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깊이 보지 않는다. 최근에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란 책을 보면 다른 모습을 보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집을 건축하지 않고, 임금을 받고 타인의 집을 건축하고 있으나, 그 노동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산물이 비록 자신에게 소외되더라도 그 순간만큼 자신은 그 어떤 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점이다.

 

아렌트의 발상과 자크 랑시에르의 발상은 이렇게나 다를 것이다. 공적영역을 추구하더라도 사적영역은 없으면 불가하다. 물론 사적영역의 노동을 아렌트는 인정하나, 그 사적영역조차 새로운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치관이 결여된 셈이다. 책을 읽으면 아렌트의 지식과 해박은 인정하나, 그녀가 가진 가치관에 동조할 수 없다. 칸트의 철학은 정말 어렵다. 칸트가 가장 탐독했던 책 중에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 있다.

 

아렌트도 루소의 행위를 말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로사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을 만들어내는데 그 일조를 한 업적을 말이다. 하지만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 반계몽주의적 인간이었다. 루소의 <고백>을 읽으면, 그가 청소년시절 길을 떠나는 과정에서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이동했다. 어느 농가에 가니 농부가 질이 낮은 빵과 음료를 주었다. 루소는 그것을 받아들고 허겁지겁 먹자, 농부는 비로소 자신이 숨겨든 소시지와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부잣집 권력자들이 농민을 착취하다보니, 루소 역시 그런 사람인 것으로 의심했다.

 

루소가 가진 사상이 인민주권사상이고, 그가 정치적 공론에서 주장한 영역은 <사회계약론>에서 보여준다. 플라톤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한 루소지만, 그의 사상은 지배자의 사상에서 피지배자를 위한 사상으로 전도시킨다. <사회계약론>은 원래 <에밀> 이후 나온 책이다. <에밀>에서 루소는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나온 것처럼 계몽주의적 사상가로 보여주지 않는다. 순박한 농부의 세계에 파묻혀 지식을 습득하여 공적영역에 나가는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하며, 그 누구의 간섭 없이 자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상을 그린다.

 

그러나 감정이란 고귀한 인간의 마음은 타인에 대한 애정을 가지며, 남을 돕는 이유는 내가 타인보다 우월하기보단 인간을 돕는 게 바로 인간의 도리이고, 그 감정을 느끼는 게 인간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리나, 막상 어렵지도 않다. 길가다 아이가 넘어져 피를 흘리며 울고 있으면,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서로 몰려와 아이의 상처를 돌봐주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누가 가르쳐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은 위대한 것처럼 보이나, 때로는 질박하고 야만스럽기도 하다. 시장바닥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강인한 성격을 가진다.

 

막노동을 한 사람은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욕도 많이 한다. 그런다고 그들 모두가 타인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게는 공론의 사회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는 시장바닥에도 더 숭고한 정신이 드러난다. 지식인이라면 인간의 조건을 두고 공적영역의 고대 그리스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에게 향해야 한다. 아렌트트의 철학은 그런 점이 너무 부족해 보인다. 스스로 학문을 깨우치며 더 높은 이상으로 향하는 것도 좋다. 그런 점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고 의지이다. 더구나 그 의지를 행위로 옮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들의 바램이지, 지식인의 공적영역이 아니다. 아렌트의 사고방식은 현대적 민주주의제도와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종교적인 영역까지 끌고 내려와 그것이 하나의 구원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오만하다. 아렌트는 서구사회의 철학자이다. 그의 눈에는 동양이나 비서구권에 대한 사유는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의해 그 사상과 사유가 변모된다. 어느 인기애니메이션에 나온 말처럼 인간은 지구의 중력에 의해 움직일지 모르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 현상을 하나의 과정으로 봐야 더 높은 세계로 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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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3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3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뒷북소녀 2018-10-23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렌트가 아이히만 덕분에 과대평가 됐다는 평을 들은 적 있는데, 이 리뷰를 보니 그 평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10-23 13:16   좋아요 0 | URL
저번 주말 책나루 모임에서 몽당각하를 모신 그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도 일부 서평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이데거 인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2차대전에 유대인 학자란 점에서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말하기에 정말 좋은 학자이다보니 과분한 평을 들은 학자가 아닌가 합니다.
책을 보니 사족이 너무 많습니다.

2018-10-23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10-23 15: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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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 오면서 우리는 진짜라는 의미에 많은 열정을 부여하게 되었다. 영화, 스타, 스포츠, 정치사회 이데올로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막상 거기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물어보면 뭔가 상세하게 답변하거나, A에게 질문에 답변내용이나, BC, 더 나아가 그밖에 사람에게 물어봐도 딱히 특별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보편성이 작용할 줄 모르나, 보편성이란 하나의 상식에 기인하나, 개성이나 자기 안의 열정은 보편적 상식에 의해 등장하는 게 아니다. 개성에 대한 보편성은 대다수 사람들 모두 자기만의 캐릭터를 소유하고 있는 점이다.

 

문제는 캐릭터라 불리는 개인성이 어느새 보면 개인성이 아니라 집단적인 관점을 띠게 되는 점이 많아졌다.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관, 자신만의 가치에서 진정한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의 사유는 자신에게 나올 수 없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여건, 그리고 교육적 특성과 사회적 변화 모두 개인의 인식과 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이들이 그런 비슷한 여건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것만은 아니다. 결국 사회적 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존재하나, 개인성은 사회적인 영향만으로 다 성립되지 않은 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런 요소가 잘 보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는 20세기와 달리 TV,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한 미디어 환경이 구축된 게 아니라 PC, 인터넷, 더 나아가 스마트 폰의 등장 아래 네트워크 시스템 및 모바일 세계로 확장되었다.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었지만, 인간의 공간적 활동제약은 매우 축소되었다. 누군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는다. 침실에 누워 손가락으로 스마트 폰을 누르면 금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최근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 사색>을 읽는데, 한국 전통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통시장은 매일이 아니라 5일에 1번 열려 5일장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그 시장에 가는 사람들은 돈이 많고 적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만 물건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가는 것일까? 늘 같은 생활과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5일장은 늘 새로운 이야기와 소문 그리고 거기서 피어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통을 원하는 존재다.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던 인간이 이제 인터넷 창으로 가상의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

 

보이지 않기에 마음 속 깊은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여기기도 하나, 정작 그것을 털어놓는 내 자신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방이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수용하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진심을 알 수 없는 투명한 장벽에 자신이 만들어낸 진심을 만들어내고 있다. 앤드류 조터의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은 현대사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에 대한 기만과 위선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도서이다.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일화가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 여겼다. 그런데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오길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소크라테스는 다른 이와 다르게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현명한 인간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것을 인식조차 못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기를 사람은 어느 지식을 알기 전에도 이미 자신은 알고 있다는 지성에 대한 오류를 지적했다. 인간은 모르고 알고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자신이 알고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 내지 진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세대는 이런 문제가 심각하다. 어느 누가 일으킨 사회적 물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몰려 각종 덧글을 단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이버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이버공간이 아니라 일상세계를 파괴한다. 서울 시내버스 운전기사 하차대기 중, 뒷문에 어느 어린 아이가 뛰어내렸다. 그 아이가 뛰어내리고 엄마는 당황했지만, 버스기사는 다음 정류소에서 아이의 어머니를 내려주었다. 그게 인터넷에 소개되자, 버스기사의 삶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CCTV로 통해 보호자의 문제라고 드러나자 이제 아이엄마를 욕하기 시작했다.

 

비판을 할 수 있어도 각종 욕설과 비난이 오고가는 사이버공간은 현실의 인간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험악한 발언을 날리는 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 여긴다. 왜냐면 누군가 잘못했으니 자신()이 보기에 잘못된 사람이니 비난을 날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전후맥락이 필요하다. 앞뒤를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고, 최종적으로 문제를 지적하여 개선하는 게 이성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문제는 뒷전이고, 오로지 공격만 존재하고, 적나라한 욕을 통해 자신이 악인을 응징했다는 착각의 세계에 빠진다.

 

착각은 곧 진정성에서 기인한 기만이다. 왜 이런 식으로 전달되는 것인가? 현대사회는 정보가 망라된 첨단사회다. 소통의 장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열린 게 아니다. 자신만 아니라 자신 이외의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과거 100년 선거할 경우 시장후보가 곳곳을 돌며 얼굴을 마주해야 하나, 이제 TV토크쇼에서 후보들을 볼 수 있다. 상대방의 정책안에 대해 관심 있게 듣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이 보는 것은 상대방 얼굴과 몸에 드러난 이미지다. 즉 겉모습에 나오는 분위기가 많은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어눌하게 말을 해서 혹은 말실수를 해서 지지율이 폭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도 토론회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지나치게 상대방을 몰아넣으면 역효과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이성보단 순간적 감성이 따르고, 그 감성을 드러나는 이들에게 하나의 진정성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이란 이토록 감정적이고 순간적이며,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변화하는 것이란 말인가? 기 드보르가 저술한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로 하는 사회이다. 이미지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미디어로 보여주는 방송매체 혹은 신문 또는 인간생활 그 자체만으로 스펙타클이다. 이미지가 매개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주변은 이미지로 가득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세계로 인간과 대화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스펙타클로 구축된 이미지 왕국의 세계이다. 진정성이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 나온 최신유행인기가요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그것이 길거리에서 들려야 한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취향이나 성향보단 지금 억지로 고의적으로 은폐된 사실에 모두가 열광해야 한다. 열광 속의 스펙타클러는 자신이 의지가 아닌 미디어와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세계에 더 자신을 보여주려 한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 시대에 흘러나온 이미지의 부산물에 같이 떠밀려가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회도 20세기 중반과 후반은 민주주의와 노동투쟁으로 많은 진보를 일구어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진보는 그렇지 않다. 이성적 판단력과 구체적 현실성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느낀다는 하나만으로 열광한다.

 

진정성의 의미와 사실적 관계, 사회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단 그저 자신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 신봉하는 진정성만 남게 되었다. 거짓만 넘치는 진정성은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가득하다. 어떤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면 그 행동의 원인 사회적 연결성이 있지만, 그 자체가 사회를 대표하는 인식은 아니다. 결국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논리성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을 인용하는 셈이다. 자신이란 존재가 사회적 조건에 기인하더라도 결국 거기에 너무 매몰되면 자신의 존재성은 사라지게 된다.

 

시대적 흐름은 읽고 변화를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이란 홍수에 몸을 내맡기면 안 된다. 홍수에 휘말린 사람의 최후는 상상조차 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루소가 소개되는 점에서 루소는 인간은 자연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당시 명사들의 오류처럼 인간이 숲에 들어가 곰처럼 사는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세계인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자연주의자이기도 했듯이 실제 자연에 대해 예찬했다. 자연속의 인간은 본연의 모습이 되고, 인간사회의 인간은 본연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살아간다. 그런다고 루소는 숲속의 곰이 되는 게 아니라 자연을 누비며 식물을 연구하여 자신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루소처럼 자신의 본연으로 갈 수 있는 공간도 없다. 농촌은 이미 인구가 말라 황폐화되어가고 있고, 경치 좋은 곳은 펜션과 호텔, 그리고 카페들만 즐비하다. 자연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하나의 존재성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감성을 충전하는 관광지로 변모된 것이다. 그나마 자연이 가득한 관광지를 가면 힐링이 되겠지만, 그곳조차 갈 수 없는 이들은 늘 일상의 빡빡함만 기다린다. 과거 인간은 자동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였다. 민주주의 국가 이전에 왕국과 봉건영주국가였다. 게다가 교회세력이 왕족과 귀족하고 연합하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자신들의 결속력을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왕은 단두대 아래 사라지고, 귀족은 빈털터리가 되어 소부르주아로 되거나 심하면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된다. 이게 인간의 역사이다. 민주주의 가치가 도래하기에 바람직하나, 거기에 반해 문제점도 있다. 인간의 진정성은 각 개인과 국가적 관계로 대비한 근대국가로 이행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은 붕괴했다. 한국사회도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대가족은 이미 사라진 문화제도이다. 일가족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은 거의 드문 케이스가 되었고, 그런 장소조차 관광문화지역으로 설정되어 버렸다.

 

강제소속이 없는 반면 자신의 정체성에서 모호하게 변질되었고, 정체성에 대한 심리적 빈곤은 진정성에 대해 감각적인 충동에 이끌리게 된다. 차라리 스포츠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 약할 수 있다. 적어도 그라운드 위의 선수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닌 이미지 메이킹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은 어떨까? 그래도 대중은 거기에 열광한다. 열광은 진정성이 아니라 허구성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 사회는 이성에 의해 사회문제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적 비판 없이 무비판적 열광이 남은 사회는 그저 같은 문제만 돌고 돈다. 진정성이란 참된 진실은 결국 이성의 눈이다.

 

근대화에 의해 인간은 사회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부여받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이성에 대한 자율성을 완전히 부여받지 못했다. 탈근대화 시대는 감성과 소통의 세계는 맞다. 하지만 감성의 소통이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타인과의 조우라면 문제가 발생된다.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아니기에 전혀 다른 관점이 존재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무리하게 부여받은 동질성은 자신의 판단력이 아니라 기 드보르가 지적한 스펙타클된 사회이다. 군중 속의 고독은 우리가 피를 흘러 쟁취한 자유의 대가이다. 자유를 원했는데, 고독의 시간이 도래했다. 고독을 탈피하고자 계속 진정성을 내세우나 이 책에서 말하듯 그건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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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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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읽은 도서이다. 요새 진보세력의 방향을 생각 후, 사회경제적 관점을 보면 참으로 답답해보인다. 생산의 조건은 ˝재생산의 기반˝에서 시작된다. 내일도 모레도 10년 뒤나 20년 뒤나 사회적 인프라를 없이 살 수 없으면서 정작 거기에 대한 방향성에 대해 다소 생각해야 할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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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한길그레이트북스 39
이익 지음 / 한길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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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월 나는 해남에 위치한 고산 윤선도 고택과 그의 후손인 공재 윤두서의 고택을 찾아갔다. 윤선도의 고택은 현재 직계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 박물관을 관람했다. 그러나 윤두서의 집은 개방이 되어 건축물 내부에 들어가지 못해도 마루 끝에 앉아 여름비가 하염없니 내리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 시골에 가면 기와지붕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소리는 참으로 경쾌했다. 하지만 이 곳에 오니 그 어린 시절의 빗물소리보다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전통 사대부 기와집 아래 떨어지는 빗물은 마치 거대한 음악이 되어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집에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지만, 가끔 이집의 후손이 찾아와 가끔 머무는 느낌이 들었다. 방안에 옷걸이가 있었고, 마루 끝에 이런저런 간단히 책이나 신문들이 놓여있었다. 해남 백포마을에 위치한 윤두서의 고택, 그의 이름은 잘은 몰라도, 그의 그림은 잘 알 것이다. 최근 외국게임 블라자드에서 제작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한국판 영상광고에서 이른바 시공조아라는 단어가 나올 때, 시공의 폭풍을 탐구하던 한 사람이 어느 초상화 이마 부분을 떼니 게임 로고가 나왔다. 그 초상화 주인공이면서 그린 사람이 바로 공재 윤두서이다.

 

게임 영상광고에 나온 이 그림은 국내 미술학계 내지 세계 미술학계에서도 큰 연구소재거리이다. 한국의 전통화풍에서 사실주의적으로 인물을 표현한 그림이 18세기 초반에 나온 점이 큰 반향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소치 허련 같은 조선화가는 공재 윤두서의 화풍을 따라 그렸다. 양반사대부 집안인 윤두서는 조선시대로 말하자면 지배계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많이 멀어진 자이다. 윤두서는 친구의 형님이 장살(杖殺)당한 사건이 있었다. 장살이란 곤장을 죄인에게 수십 수백 차례 가격하여 죽게 만드는 잔인한 형벌이다.

 

윤두서의 친구 형님이란 누구인가? 우선 윤두서는 해남 백포마을에 고택이 있지만, 자신의 직계조상은 고산 윤선도이다. 윤선도는 효종이 하사한 집을 다 해체하여 해남 연동마을 종택으로 사용했다. 녹우당(綠雨堂)이라 불리는 이 집의 현판을 누가 멋지게 획을 그려넣었다. 그 글을 넣은 사람은 옥동 이서이고, 옥동 이서의 큰형인 이잠은 숙종 당시 노론당파의 부패와 모순을 지적하고 상소하다 미움을 받아 장살을 받아 죽었다. 이잠의 죽음에서 이미 조선사대부들의 정신은 소진 중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말했다고 하지만,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린 이유로 선비 하나가 매를 맞아 죽었다. 바른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이잠에게 동생인 옥동 이서, 그리고 막내 동생인 이익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벼슬의 길을 포기하고, 평생 재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했고, 그 학문은 당시 빛을 보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의 유교를 말하자면 과거에 민중을 탄압한 썩은 물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조선의 유학을 다시 눈을 뜨고 있고, 중국에서 공자의 정신이 움을 트고 있다.

 

한국이 세계화가 되어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은 한국이란 나라는 무엇이고, 그들의 정체성을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때까지 버려온 성리학유학은 그야말로 폐단 중에 폐단이었다. 그런다고 어디서부터 다시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할지 몰랐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다산은 한국 전통사상만 아니라 성리학유학, 심지어 천주교회사가까지 관여되고 있는 인물이다. 다산이 한국의 전통사상의 그 끝이고, 조선의 문을 이룩한 인물이라면, 그가 어디서 자신만의 문을 쌓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는가?

 

정약용과 친한 유학자 중에 이가환이란 인물이 있다. 신유사옥 시 천주교박해와 관련하여 죽음을 당한 학자이다. 그는 이익 선생의 후손이다. 이익이란 인물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 중 하나가 이익이었고, 그가 저술한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이익 선생이 살아생전 적은 글들은 그분의 후손이 모아 집필한 도서이다. 이익이 왜 중요한가? 이익은 노론과 대치되던 남인들에게 큰 정신적 지주였고, 그의 가르침은 조선 명재상 채제공, 불세출의 천재 정약용, 조선 역사학의 지평 순암 안정복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남인 그리고 세도세자의 죽음을 슬프게 여기는 시파 무리에게 성호사설은 중요한 책이다. 사도세자는 당시 집권당인 노론보다 소론하고 친하고, 남인의 영수가 되던 번암 채제공에게 큰 신임을 주었다. 노론과 반대되는 정치세력은 전통적 봉건제도가 아니라 개혁적인 정책을 원했다. 조선시대 가장 심한 정치적 폐단은 군정폐단이다. 양반과 양반이 소유한 노비는 군에 가지 않으나 일반 농민 같은 양민들은 16세에 군적에 올라 60세까지 병역을 이행해야 한다. 군역을 이행하지 않을 시 이에 따른 군포를 납부해야 하나, 그 폐단이 너무 심했다.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이란 시조를 보면 강진 갈대밭 아내가 방에 들어가니 남편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까이 보니 남편이 칼로 자신의 성기를 잘랐고, 피가 온방을 젖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계기는 죽은 시아버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내아이가 군적에 올라 군역을 내야 하나, 낼 수 없어 농민의 재산인 소를 끌고 가서 남편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일을 저지른 것이다. 자신의 성기가 결국 이렇게 만들었다는 그 분노와 절규에서 말이다.

 

군적의 문제는 성호 이익이 늘 지적한 부분이다. 양반은 높은 자리에 올라 폼만 부리는 게 아니라 직접 일을 해야 하며, 글을 쓸데없이 과거만 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농민이나 백성을 위한 실학적 요소를 강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호사설을 보면 공자의 논어(論語)가 계속 나온다. 공자는 그 당시 기준으로 2200년 이전 사람인데도 왜 공자인가? 공자는 실제적인 유학정신을 백성을 위한 정치적 제도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의 성리학은 지배이데올로기만을 강조했고, 백성들은 거기에 시름을 앓아가고 있었다.

 

백성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쓰러져 가는데도, 그들은 늘 풍악을 올리고 술잔치를 올린다. 그리고 백성의 쌀을 빼앗아가고, 그들이 빚을 지면 노비로 부려 평생 짐승처럼 부린다. 이익의 그런 현실이 너무 싫어했다. 자신의 형인 이잠이 이런 현실에 분노하여 강개 굳은 의지를 표출했지만, 그도 역시 희생되었다. 조선의 엘리트들은 약자를 늘 착취했고, 약자의 슬픔을 동조하는 엘리트들은 그 최후가 매우 끔찍했다. 성호사설을 보면 이런 부분을 지적하고, 다양한 현상을 연구하고, 경전을 다시 재해석했다.

 

만일 100년 전에 이익이 이 책을 썼다면 위험했을지 모른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는 주자의 성리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했고, 만일 거기서 글자 하나라도 잘못 인식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여 버렸다. 학문은 늘 자유롭게 연구하고, 기존의 것을 다시 작금의 현실에 따라 새로이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 학문의 정신이 이미 조선에게 없었다. 벼슬을 위한 학문하는 자만큼 가장 백성에게 해로운 존재는 없었다. 이익은 백성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고 책에 기록했다. 나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글귀 한 편을 적고 있을 때, 이익은 30년 일을 떠올렸다. 아주 추운 겨울 어느 거지가 어떤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거지의 옷은 모두 헤져 있었고, 앞을 볼 수 없던 맹인이었다. 그 거지가 문을 두드리며 하던 말은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라고 했다. 이익은 그 일이 본지 30년이 지났는데도, 그 일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복이 죽고, 그 노복의 아들이 아버지 묘 관리를 하지 않자, 종복의 외손자를 불러 묘 앞에 참배할 수 있도록 재물을 주고, 제문까지 지어 올려주었다. 그것도 자신의 농지를 잘 돌봐주어 자신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이다.

 

아무리 몰락한 사대부라도, 상민보다 높은 계급이었다. 그런데도 양반도 일을 해야 하고, 피지배계급이라도 그들의 인권과 삶을 존중했다. 노복이라도 하나의 생명이었고, 그들의 고단함을 알아주고, 고마워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위에 있는 강자들은 자신보다 약한 자들의 고단함을 고마워하기보다 오히려 더 착취하려고 한다. 성호사설이 개혁적 지식인에게 귀감이 된 이유는 성호 이익이 제시하고 있던 인간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깊은 학문이라도 그것이 백성의 입에서 환호성이 아닌 탄성이 나온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라?

 

백포마을의 윤두서 고택을 방문하면서 윤두서가 한 업적이 생각났다. 그가 어느 날 집에서 어떤 문서를 들고 농민이 사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에 간 후 그 문서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 문서는 돈이나 곡식을 대출해준 것을 기록한 장부였다. 세금도 제대로 못 내고, 군포에 시달린 그들을 본 윤두서는 결국 장부를 소각했다. 성호사설을 읽은 후 고산 윤선도가 가족에게 남긴 유후을 보면 비슷한 내용이 많다. 노복의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노복이 가족이 있으면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점이다.

 

이런 점을 보면 윤선도나 윤선도의 후예 윤두서, 윤두서와 친구이던 이익은 아주 탁월한 정치경제학자이다. 만일 노복에게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조치하고, 일을 할 때 아무리 종이라도 그 일한만큼의 노임단가를 준다면 그들은 계속 그 지역에서 생활을 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 일을 열심히 한다면 자기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그것이 다시 고용주에게 이익이 된다면 서로 간 의지할 수 있는 형상이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립되는 현실 속에서 상생의 관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물론 있는 자는 고용되어 일하는 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나, 그들의 노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성호사설에도 그런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다. 경세치용, 농상중심 경제구조에서 농민이 잘 살아야 국고가 부유하고, 국고가 부유해지면 국력이 상승해서 외적의 침입을 대비할 수 있다. 또한 국력의 상승과 인구가 불어나면 그만큼 나라가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대의가 있어도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면 얼마나 아쉬운가? 성호의 가르침은 조선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않고, 단지 그들의 후학들로 하여금 그의 정신이 옳다는 점만 증명했다.

 

21세기 조선의 역사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영화 <대립군>은 광해군과 같이 사지를 헤쳐 나온 이름 없는 조선의 민중이 곧 조선의 주인이라 보여주었고, 앞으로 개봉할 <군함도>에는 일제에게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이 죽음의 섬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되찾고자 했다.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조선의 아나키스트 청년과 일본의 가난한 여성의 혁명과 사랑을 다루었다. 조선은 패망해도 우리에게 조선인이라 꼬리표는 조선인의 후예가 살아있는 그 순간까지 같이 갈 것이다. 조선의 망해도 조선인을 살아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대한민국 역사는 자랑스럽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수가 있다. 대다수 백성들이 권력자에 의해 핍박과 억압을 당했고, 그런 부조리를 느낀 왕족과 선비들은 독살당하거나 참수당하거나 유배 살이 등을 당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자들이 있기에 우리의 역사는 자랑스럽다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몰라도 우리 역사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희망이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성호(星湖) 이익의 호처럼 성호는 태호(太湖)처럼 크고 넓은 호수이다.

 

호수의 물은 우리에게 식수를 주고, 생물에게 생명을 주며, 농부에게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원천이 된다. 모든 생명과 시작의 중심이 물은 우리 인간만 아니라 지구전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호 이익은 우리 민족에게 그 크기와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호수이다. 거대한 호수이기에 머나먼 존재가 아니라 그 거대한 호수의 물이 모두의 오아시스가 되기를 바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은 언제나 가려진 존재였다.

 

당시 권력자들은 역사의 이름아래 역적 내지 간신이 되어있고, 아니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익 선생의 이름과 성호사설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가 가진 사상은 옳았음을 입증되었다. 시대에 따라 살아있는 자와 그에 따른 환경은 달라도,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그 세상에는 항상 모순과 부조리가 살아있다. 그리고 모순과 부조리에 의해 고통 받는 인간 역시 계속 존재한다. 그런 사회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호 이익 선생의 안목에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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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9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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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9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왜 조선 유학인가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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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문화 내지 고유의 사상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한국은 고조선 즉 단군조선에서 시작된 문화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태조 이성계가 수립한 조선까지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조선 시대를 생각하면 너무 아득하지 않을까 하나, 사실 한국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농업은 단군조선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우사, 운사, 풍백을 데리고 신시를 건국했다는 점에서, 이미 기상학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그 인식은 바로 농업에 필요한 비와 관련된 것이다. 농업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물은 벼이다. 벼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은 논이고, 논은 언제나 물이 필요하다.

 

물의 이용에서 농업문화가 시작되는 것이고, 벼 외에도 밀이나 각종 곡식도 물하고 관계성이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는 이민족 내지 사냥수렵보다는 농업문화를 중심으로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농업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는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일제강점기 시절, 고종황제가 폐위되면서 조선왕조는 끝이 났다. 게다가 고종의 마지막 종손이 작고하면서 황실 적계는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대한민국의 전신인 대한제국의 역사는 그렇게 사라졌던 것이다.

 

고조선의 시작에서 마지막 조선까지 한국역사의 여정은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세기 도래는 기존 사회의 가치관을 고수하기보단 해체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강만길 교수 외 여러 학자들이 저술한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의 비교>를 읽으면,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 방법에서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은 조선왕조를 신봉하는 국민들의 의식이었다. 왕의 존재가 국가의 시작이 아니라 개인적인 목적이 국가라는 근대주의사상을 주입했다. 여기에 자유주의사항이 도입되고, 자유주의는 반봉건적인 형태로 갔지만, 한편으로 일제통치에 대한 반대여론을 형성했다. 자유란 개인의 권리는 개인에게 있지 조선의 국왕도 조선총독부 총독도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개인주의적 성향인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 사상은 기존 조선이 가진 가치관을 해체하기 좋은 사상이고, 특히 유교문화 중심인 조선에서 가장 먼저 도입될 문화였다. 조선의 유학은 사대부 중심이기도 하나, 그 사대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성립되기 위해선 조선은 농경문화가 계속 유지되어야 했다. 그래서 해방과 전쟁 이후에도 농경사회는 유지되고, 한국의 전통문화가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경제화는 기존 사회를 다른 식으로 변경했다. 농업문화는 시골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그들 대부분은 가족 내지 일가 같은 씨족부락이 제법 많았다.

 

조선시대 유학은 사림의 승리로 끝이 나고, 사림들이 중앙정부를 점령해도, 그들의 기반은 여전히 사림, 농경사회 속에 있었다. 농업을 하는 것은 양민들이고(사대부 내지 일반농민), 그들은 대가족 중심으로 집단노동으로 생산품을 만들어내었다. 20세기 산업화에서 농업이 소나 인간의 노동력보단 기계로 대체하기 시작하고, 생산성 증가만큼 인력의 잉여로 남게 되고, 도심지 및 그 주변이 공업화 내지 도시화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농업이 중심인 조선은 공업이 중심인 한국으로 변했고, 이제는 공업에서 지식정보사회로 흘러가게 되었다.

 

21세기가 도래하면서 세계는 글로벌주의라는 통용을 중시하게 되고, 기존 산업체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지닌 문화콘텐츠가 생산품으로 변모해갔다. 한국의 위기와 기회는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가 1년 동안 판매한 승용차보단 미국 할리우드가 만든 <쥐라기공원>이 훨씬 높은 이익을 창출했다. 물리적 생산품보다 문화적 생산품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문화콘텐츠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했고, 여기에 수많은 서사들이 필요했다. 한국의 서사를 이루어줄 문화적 자본은 여기서 큰 위기를 봉착했다.

 

일제강점기시대와 산업화시대는 전통문화를 해체와 파괴를 기반으로 성립된 사회였고, 21세기에 와도 한국은 서구화가 되어, 기존 한국사회의 기반이 되는 서구화 논리로 문화적 상품을 내놓기에는 부적절했다. 한국에서 만든 문화콘텐츠는 검은머리 서양인들이 나와 서구애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내놓을 뿐이다. 대안은 무엇이고, 새로운 돌파구는 무엇인가? 결국 한국은 과거에 버린 조선의 역사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사극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에 비해 제작도 어렵고, 연기수준도 높기에 제작하기가 쉽지 않다.

 

장소도 제한적이고, 의복 역시 그렇고, 대화체 내지 문화적 배경도 그렇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를 보면, 사극드라마가 정규TV만 아니라 인터넷방송에도 방영되고, 영화관에서 사극 중심소재가 생각보다 많이 나온다. 과거에 버린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로 등장했다. 웹툰 <신과 함께>는 사극중심보다 한국의 신화, 그중에 무속신화를 소개한 것이다. 현대사회에 등장한 무속신들을 이해하려면 다시 조선의 역사를 이해해야 했다. 저승사자 중 강림도령은 포도대장의 휘하 무관이었고, 또 다른 저승사자는 변방의 무관이었다.

 

이민족을 토벌하는 무관이나 혹은 관아에 등장하는 지방수령관의 벼슬은 조선시대의 산물이었다. 조선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의 문화조차 이해하기 조금 힘들지 못할 것이다. 제사문화가 있기에 설날과 추석이 늘 교통지옥이고, 조선시대 음식문화가 내려오기에 김치와 된장이 있다. 제사문화와 음식문화도 남아있는데 다른 문화가 남아있지 않을 리가 없다. 그 문화들이 다시 학문적 영역에서 떠오르고 있고, 일반 대중에게 영화와 드라마, 만화로 등장하고 있다.

 

전통의 단절은 왜 다시 21세기에 재연결로 이어진 것인가?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산업화의 탈근대화 내지 제3국의 가치관을 내세우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학문 영역을 다양성을 연계하는데 일조한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만사는 아니나,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잊은 과거를 불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를 부른 이유는 획일화 정형화 규격화가 정답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다양성을 내보이는 것으로 여러 가지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모두가 서구화가 된다면 언젠가 이들의 모습에서는 누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모두가 같은 색을 칠하면 나와 타인의 관계성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한국의 서원이나 향교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현들이 모셔져 있다. 이들의 위패 내지 관련 자료는 원래 중국에서 들어온 문물이다. 그런데 지난 중국의 마오쩌둥 시대에 과거의 산물을 모조리 파괴하고 부정하는 바람에 공자의 사상과 문물도 배척했다. 중국에서 한국의 향교에 와서 공자의 위패를 받아가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중국이 이런 모습을 보인 이유는 중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면서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난 중국은 근대화를 통한 과거의 단절에서 오히려 과거로 지향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여러 학자의 책을 보면 과거 유학을 버렸던 이들이 말년에는 오히려 유학으로 돌아서고 있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문화는 경제적 규모가 되고, 국민의 삶이 향상될수록 역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그건 자국의 위상을 올라가면 갈수록 자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 즉 상징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을 보자. 20세기 한국의 뮤지컬에서 한국역사를 기반으로 만든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만든 뮤지컬이 넘쳐나고, 이들은 국내만 아니라 세계 문화상영관에도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왜 조선유학인가>라는 책은 우리가 기존에 잊은 유학을 다시 집어 들어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지 설명한다. 유학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리타분한 것으로 본다. 원래 한국은 한글 훈민정음이 아니라 한자로 기록하고, 한자는 오직 사대부 양반과 일부 천민만 알고 있었다. 조선의 문자문화는 지배계급의 위상을 알리는 수단이다. 문자를 알면서 지식을 알고, 지식을 알면 지식을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다.

 

지배계급의 지식독점은 곧 모든 권력을 독점할 수 있다. 조선의 유학은 공맹의 유학보단 남송의 주자가 만든 성리학을 토대로 시행한다. 공자의 유학은 철학보단 정치학에 더 가까웠다. 정치학과 철학은 연결되어 있더라도 공자는 주자의 성리학과 비교하여 형이상학적이지 못했다. 주자의 성리학은 매우 형이상학적이다.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이때까지 우리가 서양에서 받아들인 서양철학 내지 사상과 유사한 요소도 있었다.

 

이 책에서 중점으로 다룬 내용으로 실학이 있다. 실학은 조선의 지식인이 민중을 무시하고 뜬 구름만 잡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말놀이만 하는 게 아니라 백성에게 도움이 되고 국력의 이익이 될 수 있는 방향성이 있었다. 문제는 그 실학을 연구하던 자들은 중앙정부에서 활약한 관리가 아니라 모두 거기서 떨어진 자들이다. 대표적인 자로 다산 정약용을 보자. 정약용은 1800년 정조가 붕어하자,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각종 수모를 당하고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정약용만 아니라 박지원 내지 박제가, 홍대용 등 수많은 실학자는 현실에서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들이 평생 남긴 서적은 당시 현실을 개선하기보단 20세기 한국으로 넘어와 조선의 발견으로 대두되었다. 생각하면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국내 대통령만 아니라 외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즐겨 읽은 책이고, 하다못해 식민지시대 일본학자가 다산을 두고 조선의 영광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다산이 살던 조선은 다산이 박해받던 세상이다. 자신이 연구한 서적을 1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다산이 이제 20세기에는 조선의 대표학자가 되었고, 21세기에는 세계 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유학을 연구한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구는 유학이 아닌 기독교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천주교회사를 연구하면 서구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톨릭이 외국에서는 각종 박해와 전쟁 등 무력충돌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고, 가톨릭에서 기독교의 메시아주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종교가치관이 되었다고 하면, 조선의 가톨릭은 이와 다르다. 조선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가톨릭이 유입되고, 학문으로써 가톨릭이 어느새 종교로 바뀌게 되었다. 가톨릭이 서구에서 피지배계급의 메시아주의 관념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갔다면, 한국은 사대부 비주류권에서 학문의 영역에서 민중의 메시아주의 관념으로 변해갔다.

 

조선의 학문은 한자를 이해해야 했고, 조선에 없던 천주교를 이해하려면 맨 처음 성호 이익의<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을 읽었고, 그 뒤로 북경에 오가면서 얻은 책으로 연구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광암 이벽이나 만천 이승훈은 신부가 없던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한국천주교회를 만들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자발적으로 가톨릭이 열린 곳은 없었다. 하지만 마테오 리치는 가톨릭의 God을 동양사상의 하느님인 옥황상제 내지 천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가톨릭을 전파했다.

 

가톨릭의 전파는 서구종교이고, 동양문화인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새로운 문물의 유입이다. 여기서 뜨거운 감자로 오른 인물은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책에서 거론한 것처럼 한국 최초 순교자 윤지충의 외사촌이었고, 정약종의 친동생이었다. 윤지충과 그의 동생 윤지헌, 정약종과 그의 딸들은 한국만이 아니라 교황청에서 인정하는 천주교 성인들이다. 21세기에 와도 정약용이 천주교를 배교했는지 아니면 마지막까지 마음에 두고 그것을 속였는지에 대한 문제점이 남아있다. 우연히 알게 된 천주교 쪽 사람과 책에서는 다산은 배교한척만 했다고 하고, 강진 다산초당을 천주교회사에서 유적지로 삼았다.

 

한국의 유교에서 다산 정약용은 성리학자이면서도 성리학 이외에 실학을 토대로 공맹의 원시유학을 넘어가고, 민중의 문화에 관심을 두었고, 서양과학 및 문물을 위해 서학을 배운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은 현대 한국 지식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가 천주교를 배교하지 않았다면 천주교회사는 엄청난 성과로 볼 수 있고, 서양의 유학연구자들은 한국의 전통사상종착지인 다산이 결국 유학이 아닌 서구의 학문으로 종점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조선의 유학에서 이 논쟁은 아직 그치지 않은 모양이다. 이 이야기들은 외국 유학 세미나에서 나온 논쟁이라 하니 말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국가였고, 사대부에 의해 망한 국가였다. 사대부 중에 비주류가 가려졌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학문적 성과이다. 그 성과가 이제 한국역사 교육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주류이다. 200년 전 정조가 죽을 때 순조의 외척인 김조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에 의해 그나마 정약용 일파마저 숙청되었다. 특히 정순왕후는 천주교회사에서 지울 수 없는 신유사옥을 일으킨 공작정치가이다.

 

신유사옥은 천주교를 이용하여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정치라도, 천주교 입장에서는 신앙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은 정약용의 철학을 연구하면서 왜 남인이 천주교가 많은지 그들의 학문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왜 조선유학인가>에서 그런 내용이 나온다. 천주교에 대한 최초 연구는 성호 이익이 했다. 성호 이익은 남인의 정신적 지주이며, 성호 이익은 다산 정약용의 외가 조상과 친우 관계를 수 백 년 넘게 유지했다. 이익 선생이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다소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이익의 후예 사대부들이 그것을 토대로 천주교회사를 만들었다.

 

서학이 남인 지식인들이 만든 실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나, 그 모든 것은 아니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끝까지 믿었다면 그의 모든 성과는 천주교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학의 관점과 천주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탐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산이 유배를 갔던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 일원에 사는 주민들의 반응을 보면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다산에 대해 연구한 다양한 도서에 당시 교황청은 다른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고유문화를 존중했으나, 교황의 교체 및 정치적 성향이 개편되면서 동양의 국가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선비가 어머니의 신주를 불살랐고,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사촌과 더불어 참수되었다. 피로 얼룩진 천주교회사고, 그의 선혈은 전주에 위치한 전동성당의 터가 되었다. 지금의 전동성당을 가면 전주 한옥마을과 연계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순교자의 한이 어느새 한국의 대표관광지로 바뀐 것이다. 성리학과 천주교의 마찰에서 근대문물의 유입과 전통의 갈등에서 전통의 승리로 끝나고, 조선의 멸망과 산업화로 전통이 패배했다.

 

이제는 다시 전통의 세계가 문화콘텐츠와 관광사업이 되었다. 전주에 가면 오래된 향교에서 전통결혼식을 올리는 커플도 있다. 향교와 전통혼례는 유교문화의 흔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양한 관광 상품이 되었다. 게다가 진동성당 근처에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는 곳이다. 조선의 역사가 담긴 곳 역시 유교문화이나, 또 다른 관광장소이다. 전주한옥과 전주한복이 유명을 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한복을 개량하여 입고 다니는 젊은 여성분들도 많다. 한복은 유교문화의 복식이다. 물론 100% 복원한 것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전통문화 그것도 유교문화가 다시 회귀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유교 그중에 성리학이 가진 문제는 심각했다. 공자는 사대부는 백성을 위해 존재하나, 그들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생활에 문제없이 살 수 있도록 행정적인 제도를 개선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 주류세력은 재산을 늘리기 위해 백성의 농지 수탈하고, 군역을 빠졌으며, 세금조차 내지 않았다. 성리학은 공자의 유학을 보강했지만, 공자의 유학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저자도 주자의 성리학에 대한 경구 하나에 이론을 다르게 봐도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은 백호 윤휴의 이름을 거론했다.

 

유학이란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것은 학문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져 할 가치이다. 학문은 다양한 가치와 사람과 소통해야 하나, 조선의 성리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 왜곡되어 갔다. 지배주류세력을 위한 맞춤형 유교가 된 것이다. 흔히 붕당정치하면 자주 등장하는 세력이 노론과 남인, 소론, 북인 등이다. 천주교가 남인과 같이 어울리게 된 동기는 남인의 학문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주리론, 즉 이()에 중점을 두었다. 노론은 기()에 중점을 둔 점에서 다르게 간 것도 있지만, 남인의 주리론은 기에 의해 이는 변동되어 나쁜 방향으로 갈 수 있으니 이에 대한 완비 내지 반성이 필요하다고 봤다.

 

즉 인간은 절대적 가치인 이에 대하여 지켜야 하나, 기에 의해 변동되어 그게 왜곡될 수 있으니 언제나 마음을 수양하고 몸은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원죄의식을 강조하는 것까지는 아니나, 원죄의식을 가진 기독교사상에서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점에서 유사하다. 서학과 유학은 다르지만, 동서에 살고 있는 많은 인간들이 가진 다양한 가치관 중에 서로 일치하거나 맥락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리학이 어렵지만, 현대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나 우리가 알 수 있는 서양철학 내지 사상과 비교하여 큰 벽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석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받아들이기가 다소 어려울지 몰라도, 거기에서 주장하는 세상의 이치나, 삶의 자세에서는 비슷한 맥락이 존재했다.

 

조선건국 초기 성리학이 지배되던 유교국가에서 처음에 여성에 대한 정책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재산분배가 공평되게 아들과 딸에게 갔고, 재혼도 되었던 모양이다. 전쟁을 걸치며 열녀문이 새기야 가정의 영광이 되었고, 청나라에 끌려간 환향녀가 지금의 화냥년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열녀문이 세워지려면 청산과부가 자살을 해야 하고, 환향녀들은 억울하게 청나라에 끌려가 겨우 고향에 돌아온 여성이다. 이들이 겪은 고통은 이뤄 말할 수 없다. 이런 잘못된 여성관 그리고 주자의 성리학에 토씨 하나 달지 못하는 학문의 자율성이 없어지면서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 성리학이 조선의 성리학으로 종점부를 찍은 것이다. 그러면 누가 봐도 유학인 성리학을 좋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위대한 유학자인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의 호를 딴 연구소들이 대학에 설립될 정도로 업적을 유지된다. 유학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 유학자들의 연구하는 학문기관은 여기저기 있다. 유학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시 돌려 다르게 볼 것인가? 한국인 정체성은 위협받지 않을 시기가 없었다. 조선 개국부터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침략,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거대한 조류에서 한국인은 오늘을 살고 있다.

 

내가 다시 찾아보는 유학은 예절을 중요했지만, 예절을 떠나 서로간의 의견을 존중하고 학문의 자율성을 존중했다. 율곡 이이는 자신보다 대선배인 퇴계 이황과 편지로 논쟁을 했고, 고전을 읽고 거기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구성하여 학문을 발달해왔다. 유교경전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고, 어떻게 내가 살아가면 좋을까를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유교경전은 과거시험을 볼 때 필요한 문제지 수준을 변한 것이다. 현대사회에도 학문은 다양한 관점과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 논지는 500년 한국 성리학이 최고인 시기와 비교해도 그 시선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끔 보면 이 못난 성리학의 폐단은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유학자들은 본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학문은 다양성을 연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소통이 되어야 새로운 학문을 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보다 처지가 아래인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조한다. 밑에 있거나 혹은 다른 생각이 가진 사람이 말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바른 말을 하든 혹은 그렇지 않은 말을 하든지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돌아오는 말은 항상 같다. “어린놈이 버릇없네.”

 

최근 유행하는 단어 중에 답정너라는 것이 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 권위의식적인 가치관은 이미 조선 성리학의 모순에서 시작된 병폐이다. 조선의 유학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은 아니다.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의 시작점까지 찾아간다. 조선유학이 답인 것도 아니고, 배척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다시 화두로 올라오는 전통문화 담론에서 조선유학을 반드시 우리가 생각해야할 문화적 유산이다. 유산은 좋은 것만 오는 게 아니다.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빚도 찾아온다.

 

현대는 과거로부터 쌓여진 시간의 축척물이다. 조선의 유학이 그 축척물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이다. 대한민국 역사는 상해임시정부를 기준으로 100년이 되어가지만, 조선왕조는 이미 600년을 가졌다. 600년이 가진 역사가 현대사회 한국인에게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겉모습은 바뀌어도 심연의 세계에는 여전히 조선시대의 산물이 남아있다. 하다못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이 한글로 되어 있어도 한자어로 되어 있고, 그 이름이 조선시대 사람들과 비교해도 비슷하다. 앞으로 한국인들이 살아가도 과거에 존재한 조선이란 존재에서 강제로 벗어날 수 없다. 책제목처럼 <왜 조선유학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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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11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역사에서 벼농사는 석탈해 집단이 대두하면서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벼농사 기술이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단군신화에서 벼농사에 대한 해석은 개인적으로 처음 봅니다만..

석탈해 집단은 동남아 이주민으로 보는 설이 국사학계의 다수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음....한형조 교수가 쓰신 책이군요. 이 분이 쓰신 책들은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죠. 밀도 높은 리뷰 잘봤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6-11 22:39   좋아요 0 | URL
단군신화와 관련된 논문에서 곰족은 수렵부족이고, 그리고 마늘은 항생제 및 살균작용이 있어 야생에서 수렵한 곰족에게 소화기관 및 각종 내성을 키우는 능력이고, 쑥은 부인병에 좋은 약초이죠.
단군신화에서 환웅의 신화가 곧 농경문화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저는 봅니다. 단지 벼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바는. 제가 2년 전에 815 광복절날에 서울에 있었습니다. 서울에 단군성전이 있는 곳에 갔습니다(규모가 너무 적어서 참으로 슬픈).
거기 가니 관리인이 책을 주는데, 떡국을 먹는 풍습과 각종 전통문화가 단군조선 때부터 시작했다는 글을 보았죠.
그 유입물은 4년 전 개천절 행사 유입물이었던 것이죠. 떡을 만드는데 곡식이 필요하나 주재료는 쌀인 점과

신문기사에서 이미 5천년 전 고양 일원에서 쌀농사가 있었다는 기사도 있네요.

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5294

이게 다 고고학에 대한 분석기술이 늘어남에 따른 고증이 아닌가 합니다. 한형조 교수님의 동서를 막론한 지식과 역사적 관점 그리고 엄청난 분석력에 깜놀했습니다. 대신 뒤부분에 신해사옥이 1791년인데 1795년 오타가 보여, 문학동네에 인터넷메일로 제보했으나 모르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