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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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말 잘하는 논객으로 3사람을 생각하면 우선 모두 까기의 달인진중권 교수, 한국의 마초주의적 달변가 딴지총수 김어준, 그리고 문재인 의원과 더불어 친노의 쌍두마차인 유시민일 것이다. 다들 말도 잘하고 글도 어느 정도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말의 선동적인 힘에서는 김어준, 필력과 수사학과 논리적인 말투에서는 진중권 교수이나 막상 책을 보면서 가장 읽기가 좋은 사람은 유시민이다. 유시민이란 사람은 정치인이란 인물로서 유명하나 막상 그의 책을 보면 글을 적는 작가로서 혹은 비평가로서의 역할이 더 두각을 나타난다.

 

그의 글을 읽는 순간 분명 철학적이면서도 상당히 가치 있는 글인데 반해 읽기가 수월하다. 대신 진중권 교수의 서적은 생각을 깊이 하면서 봐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게 나도 독설적이고, ‘모두 까기의 달인의 그 모습을 좋아한다. 예전에 본 서적 중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아도르노 편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을 진중권 교수에게 느꼈다. 진정한 자유란 이원화의 흑백논리에서 네 편과 내 편을 벗어나야만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분법적 사고로 살아가지 않으면 이방인 내지 외톨이로 만들어버리는 군중심리의 무서움에서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라는 것은 분명히 달콤하고도 아름다우나, 생각보다 잔혹하고 어려운 길이다. 인간의 역사를 알면 지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의 인생은 언제나 만인 대 만인의 투쟁보단 그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대한 투쟁이라고 봤다. 그 점에서 김어준의 경우는 만인 대 만인 사이에 만인이라면 진중권 교수와 유시민의 경우 그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대한 투쟁일 것이다. 생각해보자. ‘모두 까기의 달인과 언제나 제3선택지를 고른 자의 운명에서 말이다. 정치라는 세계는 항상 더럽고 치사하고 위험천만한 롤러코스터다.

 

그렇지만 정치와 우리와 무관하지 않으나, 사람들은 그 세계를 외면한다. 자신만 더럽히는 것이 싫은 것인지, 아니면 골치가 아프니깐 그런지 알 수 없다. 단지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들만은 옳아야 하는 것과 누군가는 더러워야 그 정의관을 실현할 수 있다는 천박한 정의관이 아닐까 싶다. 더러운 세계에서 맞서 싸우려면 더러움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언제까지 혼자 깔끔한 척할 수 없다. 문제는 제일 더럽고 질이 나쁠수록 가장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의 오만과 왜곡은 그 더러움과 추악함이 커질수록 자신을 미화시키려고 한다.

 

한국은 영원히 신화의 제국이 될 것이다. 진실 뒤에 가려진 불편함을 영원힌 은폐하고 대체하려는 것들이 신성하니 말이다. 폭력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은 평화적 비폭력이라고 간디가 가르쳤으나 그것은 결국 틀린 답이다. 영국에서 인도는 해방되어도 가난과 내분에서 해방되지 않은 채 간디 역시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내분으로 암살되었다. 원래 경제학도였으나 이상하게 문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까지 글을 적는 유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항상 역사라는 것은 뭔가 실패와 좌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당통이 프랑스혁명을 주도하였는데, 결국 같은 동지였던 로베스피에르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로베스피에르 역시 같은 혁명가 손에 죽는다. 트로츠키도 레닌과 같이 러시아혁명을 성공하고도 스탈린에게 정치적 패배와 함께 남미 대륙에서 암살당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역사는 성공보단 그 성공 뒤에 보이는 패배와 좌절의 쓴맛을 보고,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런 세계의 역사와 우리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위에 3남자는 2009년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과 뭔가 관계가 있는 사이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 노무현>이란 책에서 3명의 남자 모두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진중권 교수는 너무 이성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역사의 굴레에서 정치의 숙청과 피 냄새는 영원히 이어지는 비극에서 노무현의 죽음 역시 그런 비장미를 제공했다. 얼마 전에 읽은 <레퀴엠>에선 전쟁과 전쟁에 관련하여 힘없이 그저 사라져간 군인, 민간인들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때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파병에 대한 진중권 교수의 비판, 레퀴엠이란 죽은 이에 대한 추모에서 이제는 그 비판을 가한 자가 죽어 다른 식으로 진혼곡을 울린다.

 

김어준의 경우 노무현을 남자가 남자로서 좋아했다고 한다. 진짜 사나이로서 말이다. 그러면 유시민은 어떠한가? 대통령 최초 탄핵소추에 의해 임시적으로 업무를 중지당할 때의 이야기다. 유시민 의원은 국회에서 고뇌에 찬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저지하려고 했다. 몸싸움이 격했는지 그의 바지가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20082월 봉하사저에 내려갈 때도 같이 내려가고, 20095월의 그 절망으로 가득한 날에는 죽은 자의 영정 아래 주저앉았다. 그런 그가 정치인을 마무리하고 자유가 없는 자유인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참 인생의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책 본문에서 이 글귀가 인상적이다. “세상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물을 가르고 온 것 같네. 자네는 정치 말고 더 좋은 것을 하게!”라고 노무현 대통령이 유시민에게 한 덕담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에게 노무현이란 존재는 그 삶과 죽음을 모두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도대체 이때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아니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내가 살아온 길과 살아야 길은 옳고 그른 것인지, 세상이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인지까지 말이다.

 

엄연히 말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유시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마치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잘한 것과 못한 것에서 후회가 넘치는 지난 일들, 그리고 지금의 자신,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에서 오히려 죽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삶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같이 실존주의적 자세는 약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이란 인간이 피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종착지,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는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란 의문도 준다.

 

개인적으로 락과 메탈, 재즈나 블루스와 같은 음악을 좋아하기에 이 책 처음부터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국내 펑크락을 대중에게 알린 크라잉넛이 나온 것이다. 크라잉넛의 공연에 가서 나도 머리도 흔들고 소리를 지르고, 이래저래 재밌게 즐겼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솔직히 우리가 주인공인적은 없었다. 크라잉넛이란 펑크하는 사람들이 글쟁이로 알아주고, 국회의원과 장관까지 역임한 사람이 부러워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알고 있으나, 돈으로 인간을 모두 올리면 결국 남는 것은 극한의 허무이다.

 

돈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 자신이 평생 살더라도 남아도는 돈이 있더라도 결국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크라잉넛이 부러운 이유는 그들은 돈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은 곧 놀이이고 예술이었다. 인생은 예술이라고 말하려면 예술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나, 우리의 인생은 예술이 아니라 그저 전시관에 전시된 박제된 동물에 불과하다.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에서 우리가 진짜 살아있으려면 그 존재가 어느 곳에 머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있는가? 삶이란 그저 박제되어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열정도 없이 꿈도 없이 그저 정해진 틀에 살아가는 인생이란 행복이란 있는 것인가? 사무실에 있는 다른 직원, 나보다 어린 직원이 나에게 아직 철이 덜 든 같다는 말을 들었다. 크라잉넛에 대한 이야기와 그런 밴드를 좋아하는 나, 사실 크라잉넛은 나이 40을 바라보는 중년이다. 그런 중년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음악에 지난 청춘이나 지금도 같이 머리를 흔들고 목소리를 지를 나에게 철없어 보일지 모른다.

 

철이 없다는 것에 대해 나는 이제 오히려 좋겠다고 받아들인다. 철이 들었다란 무엇인가? 과연 그 철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그것은 인생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현실의 부정함에 타협하는 것에서 말이다. 나라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 매우 계산적인 스케줄을 관리하거나 또는 개인적 업무를 한다. 물론 현실의 부정함에 타협할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보고 있다. 힘이 없기에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고 싶기에 철이 없어지고 싶었다.

 

그런다고 내 행동에 책임을 회피하거나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인 유시민도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저자와 책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자유에 대한 책임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 의지를 실행하기에는 철드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내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재적 공감, 나는 정의에 대해 생각하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현실에 대한 정의란 그저 쓰레기도 못한 허울 명제이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고 하나, 사실을 그렇지 않다.

 

병원에서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을 붙잡아 두고 생명장치를 연결하나 그는 다시 말을 하고 걸어다닐 수 없다. 심지어 의식조차 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락사에 대해 반박하고 생명윤리를 논한다. 그러면서도 길거리에 얼어주는 노숙자나 독거노인, 소외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생명윤리를 제외시킨다. 결국 그 논리란 무엇이냐 말인가? 거울뉴런이란 단어가 참 신기했다. 내가 아닌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여 인간이 거기에 대하여 사회적인 고민과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주려는 감정적 반응을 말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보면 인간이 자신이 아닌 타인은 그 수단이 아닌 그 목적으로서 존엄성을 두고 타인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을 주는 것을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이는 정언명령이란 어려운 모양이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는 것은 인정하나 결국 그 사회적 합의가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 조금이라도 보이는 작은 이익, 그것에 모든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반응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연대로서 시작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기에 살아가는 세상을 혼자가 아니라 다수의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존 롤즈의 <만민법>이란 책을 보면서 인간은 공공선이란 정해진 공중도덕을 지나 공동선을 추구하여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딱히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점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길이고, 죽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으면 지난날에 대해 깊이 돌아본다고 한다.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떤 삶을 살고, 그리고 주변에 어떻게 했는지 말이다. 공부도 싫어하고 오락실 좋아하고 만화책 보기 좋아하고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나에게 마지막 내 모습은 후회로 가득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그런 세상살이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주변에서 너는 아무런 도움과 이익도 안되는 일을 왜 하냐는 말까지 들은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그런 도움과 이익도 안된 것들이 나에게 보물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조금 손해 보는 마음이나 지금은 그것이 있기에 나라는 존재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단지 조금 비뚤하고 어긋난 것이 흠이나 그것도 나름 매력 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역시 능력이니 말이다.

 

그런 삶을 살아오고 생각하기에 지금이 있어 앞으로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유시민의 책처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도 같을 것이다. 그런다고 그는 당장 자살하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이 올 시기에 죽음에 대한 준비를 위해 옆에 많은 사람을 불러 같이 어울리고 놀고, 축제처럼 만들고 싶다고 하다. 단지 죽음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죽음, 그 죽음에서 나는 안락사를 행위를 찬성한다. 내가 자주 가는 예술영화관에서 유럽영화 중에 <아무르>라는 작품을 상영한다고 한다.

 

노부부의 인생에서 아내가 불치병에 걸린다. 소중한 사람을 옆에 두는 것보다 그저 그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사랑을 실천하는 것 같았다. 고통이란 육체적으로 받는 사람도 괴롭지만 옆에서 정신적 내지 물질적 고통을 받는 사람 역시 괴롭다. 안락사 추구에서 더 이상 가망 없는 자에게 억지로 살아가라는 것은 그 대상자의 존엄성을 정말 생각한 것일까? 차라리 실직하여 절망에 가려진 어려운 사람들을 자살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소중한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2011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자살한 사람이 11,000명 정도라는 점이다. 죽음의 선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고통과 절망의 기로 속에서 방황해야 한다. 하루에 40명 넘는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다. 직업적 원인, 삶의 고독에서 오는 외로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암울한 현실, 게다가 그 자살에서 어린 학생들의 비극까지 들린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보이는 우리의 사회의 어두운 면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 책에서는 유시민의 지난 일과 나가야할 자신의 미래도 담고 있으나, 왠지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유인으로 돌아가기에 그 자유라는 것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서 그의 자유란 인간의 행복이었다. 인간이 행복해야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보면 하루 3끼 먹고, 청년실업자들이 넘치고 있어도 어떻게든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어서 그나마 행복할 기회는 있을지 모르나, 행복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행복이 무엇일까? 삶의 기로에서 어차피 우리는 일회용 인생이다.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생각하고, 우리는 사실 열정적 인생을 가져야 하나 그것이 정말 어렵다. 나도 당장이라도 만화책을 내 방을 다 채워서 며칠이나 계속 읽고 싶다. 최근에는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도서를 접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나 역시 놀이라는 것을 좋아한다. 인간에게 놀이가 소중하기에 나 역시 그 놀이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런 문화를 용서하지 않는다. 언제나 벽에 박힌 것처럼 붕어빵을 만드는 기계 안의 붕어빵처럼 잘 찍혀야 한다. 만약 단팥이 옆에 튀어나오면 팔리지 않는다.

 

오늘 우연히 내가 중학교 시절에 좋아하던 <프린세스 메이커>에 대한 자료를 보다가, 어느 사람의 덧글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자신의 아버지가 아주 예전에 하던 게임인데 그것은 자신의 자녀에게 주면서 해보라는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만화책을 보면 핀잔주거나 오락실에 가면 마구 혼내던 지난 일을 생각하면 나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소통과 교감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이방인 같은 존재이기에 모르겠다. 유시민은 자신의 아들이 축구에 빠졌다는 것을 거론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정신적인 부분은 이미 프로급인데, 신체적 조건은 자신의 DNA라는 것이다.

 

축구선수로 되지 못해도 그래도 축구에 관한 여러 가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니 거기에 몰입하고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그의 결심이 왠지 부러웠다. 물론 부모의 재산에서 자식의 인생은 크게 좌우되나 더 큰 것은 부모로서 가질 태도다. 평소 나는 누가 나에게 말을 걸면 ?”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집에서는 왜는 왜라니 그저 예하면 되는 것이지 하나,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부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니 왜라고 한다. 조금 그 왜는 안 좋은 부분도 있다. 주변 친구나 사람들이 귀찮게 할 것 같아 왜라고 하는 것도 있다. 나 역시 상당히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 그래도 그 왜는 중요하다.

 

왜라는 것은 이유와 그 이유가 된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결과적 해석이 가능하다. 삶의 발견에서 우리는 언제나 철학적인 자세가 없다. 그저 힘과 권력 앞에서 이유를 불문하고 억지로 따라가야 하는 현실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존립할 수 없다. 삶과 죽음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는 결국 왜 그래야 하는가에서 다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무엇 하러 살 것인가? 라는 다소 회의적 관념이 존재하는 나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현실에서 느끼는 보이지 않으나 마치 넘어갈 수도 지나갈 수도 없는 거대한 벽이 내 앞에 막혀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하니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만 사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이 없으니 삶은 언제나 괴로움의 가시밭길일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어떻게 살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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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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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4일 오늘 나는 하루 종일 잠만 잔 것 같다. 그동안 마음속에서 참고 참은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과 고뇌, 그리고 방황도 있었고, 매일 야근과 잔업, 외근이란 업무 속에 쌓인 스트레스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 내가 서평 할 도서인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편>에서 조금 찾아낸 부분일 것이다. 내가 원래 아방가르드에 대해 우연히 맛을 들인 이유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공부하면서이다. 여기서 미셀푸코, 레비 스트로스, 자크 라캉,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등의 서적들을 찾아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여러 가지 책을 읽어보았다.

 

어려운 책들이고, 시간적 여유가 한계가 있기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봤다고 할 수 없으나 이들에 대해 알아가면서 프랑스 철학이나 사상이 기본적으로 20세기의 양대 사건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점을 알았다. 특히나 많은 철학자들이 2차 세계대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질 들뢰즈의 경우 2차 세계대전에 자신의 형이 죽었고, 루이 알튀세르와 같은 경우 전쟁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렸으며, 정신적 착란상태에서 아내의 목을 졸라 죽였다. 인간에 대해 연구하고 고찰하는 철학자 역시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구조주의 이전에 장 폴 사르트르나 메를로 퐁티와 같은 철학자들 역시 전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았으며, 전쟁이 곧 사상과 이념 그리고 자본의 유동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스펙타클이란 점에서 사르트르나 메를로 퐁티를 친구에서 학문적 적으로 변했다. 그것도 이 책의 서평과 연결되어 있다. 왜 모더니즘의 예술에서 아방가르드가 위와 같은 철학자나 사상가들과 연결되는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딱히 나는 이 책을 읽어보아도 다다이즘, 표현주의, 극사실주의, 초현실주의, 야수주의, 미래주의, 신즉물주의를 일일이 판단하고 누가 어느 작품을 만들고까지 일일이 파악할 수 없다. 내가 찾는 것은 이들의 작품을 보고 지금의 기준으로 미적 감각을 찾기보단 왜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예술이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학이란 그 예술을 철학이란 칼로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 철학을 알면 결국 미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보인다.

 

미학의 학문적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보더라도 그것은 미에 대한 직접적 판단을 제시하기 보다는 그 미에 대하여 기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 밑바탕은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기초로 한다. 결국 미학은 철학자가 만든 하나의 새로운 영역의 학문이다. 미학이란 딱히 미학으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다른 학문과의 조우에서 태어난다. 만약 건축물에 대해 알려면 건축학을 어느 정도 파악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도시미학에서 도시계획을 모르면 불가능할 것이고, 특히 조경을 모르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중앙의 원근법이나 사물배치에서 과학적 지식 역시 중요하다. 빛의 미학에서도 태양의 운동과 기상적 조건 역시 중요하지 않은가? 미학은 미학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미학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왜 모더니즘의 미학에 내가 눈을 돌리는가? 이미 지금 시대는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 살아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더니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온다. 키치에 의해 지배받는 대중, 대중문화는 이미 자신들의 개성이나 주관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도르노가 비판한 것처럼 문화는 대중들을 그저 그 조류에 따르게 하는 하나의 헤게모니가 되었다.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우리는 과연 우리의 의도대로 살아가는가? 스펙타클이 강렬할수록 대중의 열광 역시 뜨겁다. 같은 모습만 찾고 서로 간의 단결력을 키운다. 파시즘의 미학에서 대중들의 영합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오류로 나타낸다. 민주주의만큼 가장 전체주의로 발달하기 좋은 구조는 없는 것 같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아주 민주(民駐)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주인이 아니라 어디에 갇혀버려 자신의 존재성을 그저 상실한 채 같은 것을 모양만 바꾼 것에 열광하는 저들에게 말이다.

 

모더니즘편의 아방가르드란 그런 것들 깨는 것이다. 내가 그런 시기의 작가와 작품을 다 알 수 없고, 찾아볼 수 없으나 그런 연유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 역시 저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인지하는 바이다. 내가 아방가르드에 관심 갖게 된 동기는 바로 구조주주와 후기구조주의를 알아가면서 1968년 5월 혁명에 대한 관한 것이다. 이때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란 특이한 존재가 나온다. 이들은 1972년에 해체한 20세기 마지막 아방가르드이다. 지금 아방가르드하면 패션이나 혹은 공예물에서 허울 좋은 이름으로 통하나, 막상 아방가르드는 다른 얼굴이다.

 

1968년 5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서적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 드보르이 <스펙타클의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라울 바네겜의 <일상속의 혁명>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인상적이다. “우리가 얻을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우리가 잃을 것을 권태뿐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좋은 영화가 있다. “사드를 위해 절규”라는 것이 있는데 대략 런닝 타임이 65분 정도 된다. 보고 난 뒤에 관객들은 엄청난 쇼크를 받을 것이다. 엄청난 기대감과 함께 왔으나 그 기대감을 모조리 망치는 그들의 계획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관객의 행동을 예측하고 원하는 것이다. 스펙타클을 전복해도 어차피 또 다른 스펙타클이 등장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그런 스펙타클의 전복과 생성조차 못하는 것이 “사드를 위해 절규”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듣고만 있었던 나로서도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근무시간에 모니터 2개에서 오른쪽은 영화를 왼쪽은 근무하고 있었으나 말이다. 아방가르드는 바로 당황스러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책의 들어가기 부분에서 잠시 내용을 빌려온다면 이렇다.

 

제들마이어에 따르면, 현대예술이라는 복잡한 숲을 이루는 그 모든 가지는 결국 네 개의 “공동의 뿌리”에서 자라 나왔다고 한다. ’순수성의 추구, 기술적 구축, 광기의 탐닉, 근원의 탐색‘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를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의 ’근원 현상‘이라고 부른다. 순수, 기술, 광기, 근원, 이것이 20세기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운동을 추동해온 네 가지 충돌의 이름이다.

 

그래서일까? 아방가르드에 대한 모더니즘에서는 현실에서 보이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다소 힘든 상황이 보인다. 예전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대중 앞에 전위예술가가 나와도 문제인 것은 그가 소통을 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 가이다.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해보자? 대중들이 처음부터 소통할 생각조차 없다면 말이다. 이래저래 보아도 현대미술에서 미국이란 곳에서 아방가르드는 현대미술의 한폭에 걸린 소재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린버드인가?

 

그 자는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한다. 다행히도 전에 아이작 도이처의 <무장한 예언자>, <비무장한 예언자>, <추방당한 예언자>라는 트로츠키 3부작을 읽어보았다.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10월 레닌과 더불어 볼셰비키혁명을 이끈 혁명가고,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이었다. 그리고 스탈린에 의해 꿈이 깨어져버린 망명가이었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차이에서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내세웠다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로 이어지고, 지금의 북한까지 영향을 미쳐서 소비에트연방의 공산주의는 결국 독재와 폭력만 난무한 파시스트적인 요소로 되었다.

 

아방가르드에서 5월 혁명가들은 이런 문제를 아는지 소비에트연방에서 낡은 정치사상을 비판하는 전문을 보낸다. 나에게 바로 아방가르드란 존재는 엘리트주의에 대핸 도전의식과 더불어 대중문화에 대한 권태의식을 동시에 이해해주고 새로운 공간으로 보인 것이다. 단지 나는 그렇게 만든 것을 미적 감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감각이 살아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을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역사, 문학, 철학이란 인문정신을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된 것이다. 아방가르드란 끊임없는 현실에 대한 분리를 요구한다.

 

조금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의 욕망을 현실화를 위해 자연주의적 인간상을 추구한 루소에게도 아방가르드는 빚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헤게모니라는 거대한 틀에서 인간이란 정신적 지배를 받아도 그 지배가 자유라는 공간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오는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는 민주자유주의 정신의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차라리 만인 대 만인을 주장하는 홉스일까? 최근에 나온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아방가르드 문화는 1차와 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전쟁 전·후 문화현상에 가깝다. 전쟁과 인간의 광기, 오히려 그 광기가 이성이라고 믿는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은 오로지 충격이다. 괴이하고 이상한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이성으로 회유다.아니라면 광기의 초현실주의가 인간의 근원을 되찾을 길인지도 모른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처럼 광인은 그 시대의 현학자이며 시인이며 고상한 능력을 가진 자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볼까? 샤먼의 화려하고 알 수 없는 춤과 노래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주게 한다.

 

그들은 보이지도 않은 누군가와 대화하고, 혼자서 모든 한과 열정을 토해낸다. 무속신앙에 대한 진귀함에서 우리의 감추어진 내면의 율동화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속이고 감추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초현실적인 경험이야 말로 인간이 본연의 모습을 찾는 길 중에 하나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방가르드에서는 그런 것을 여러 길 중에 하나일 것이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구축주의에서는 유물론적인 가치관인 관념 안에 있는 세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방가르드 문화가 나오기 어려울지 모른다. 아방가르드의 출현은 어지러운 국제사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니 전 세계적으로 피 냄새가 진동했고, 인간의 광기가 전쟁에 의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전쟁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아니 진짜 자유와 평화가 왔다. 그들만의 자유와 그들만의 지배에서 누릴 평화가 말이다. 1935년 초현실주의자가 코뮤니스트와 결별에서 그들의 결별은 정해진 것인가? 스탈린이 1936~1938년의 대숙청은 이미 그 전에 전초전을 알린 것과 같으리라. 그리고 러시아에선 아방가르드는 완전히 사라진다. 진취적이고 현실도전적인 사상을 누가 관료주의 파시즘이 용납하는 것인가?

 

지금에 와서 하나의 고착된 세계관계에서 아방가르드는 설자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세계가 변화하는 것은 맞으나 변화에서 더 이상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를 보고 하나의 정신적 충격이기보다는 하나의 수집품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작품들을 보면 분명히 저항의식이 분명하고, 절대적인 권력자와 착취자 앞에서 희생당하는 약자에 대한 아픔을 간직한 그림이다. 그런 그림을 그런 세상을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수집당하거나 혹은 그것을 용인하는 형태라는 참 신기하다. 아니 아방가르드는 대중적인 세속을 피하려고 했다.

 

키치, 이제는 시뮬라크르로서 피카소의 작품들이 우리 주변에 모사품으로 걸려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게르니카와 같은 작품들은 미술교과서에도 실린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아! 피카소이니깐.”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지방에 사는지라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상황주의 전시회에 가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아쉬운 적이 없었으나, 적어도 우리는 오늘날 개인적 인간으로서 개성과 주관을 가지고 있는가? 왠지 가지고 있으면 이상한 녀석으로 취급당하는 것에서 회의적인 기분이 드는 이유는 어쩔 수 없으나, 적어도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배울 점은 분명히 있다.

 

예술이란 것은 정치적 도구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정치적 수단으로 예술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이야기하기 위해 생각하는 존재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말로서도 할 수 있으나 하나의 사물로서 표현할 수 있다. 캔버스 위로 펼치는 그림이나 혹은 레디메이드(신문)와 놀이(가위질)의 결합이 콜라주에선 삶이 예술로 되고자 하는 것은 놀이를 위한 방법이다. 예전에 강신준 교수님의 강연에서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이 오직 한 가지였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놀이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고전주의는 숭고를 위한 것이라면 모더니즘은 숭고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술의 파괴는 새로운 예술의 출현이다. 그러면 그 뒤에는 예술이 일상이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예술이 너무 흔하고 흔해 넘쳐서 어느 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의 아쉬움은 인간 누구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자에게 주어진 헤게모니의 특권이란 점이 유감이다. 레디메이드에서 마르셀 뒤샹이 서명이 들어간 것이 결국 큰 특권이 되는 것을 알았기에 마르셀 뒤샹은 그 물건을 사진만 남긴 채 실체를 없앴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좋은 소변기가 화장실에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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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레퀴엠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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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광기 속에 죽음을 기다리던 롤랑 부인의 대사가 나온다.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그렇다. 자유 그놈의 자유가 문제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법조인 출신의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하는 동안에도 루소의 가르침을 담은 <사회계약론>을 항상 들고 다녔다. 영화 <당통>을 보면, 로베스피에르의 아내에게 남동생이 있는데, 당통을 기요틴 아래 목을 자르고 나서 집에 가니 루소의 가르침을 아내의 남동생이 외워 로베스피에르에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당통을 죽인 로베스피에르는 정치적 권력에서 승자지만, 민주주의에서 패자가 되었다. 아니 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괴물이 된 이유, 그리고 그렇게 잘 못된 길을 톱니바퀴가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과 혁명은 왠지 모르지만 공통성과 차이점이 있다. 2가지 모두 폭력을 시작으로 인간의 죽음이 발생되며, 그 피는 당사자에게 잔혹한 운명이나 그것을 피하고 지켜보는 이에겐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희생이다. 따라서 숭고 속에 이루어진 미학적 감각은 죽은 자로 하여금 애국자 내지 순국자란 이름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죽음의 가치가 모두 다르다고 해도 죽으면 모두 같아진다. 죽는 순간 그 사람이 죽음으로서 더 이상 자신의 평판을 들을 일이 없다. 아무리 내가 존 롤즈라는 미국 정치철학자를 존경해보아도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의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롤즈가 열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열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전쟁과 혁명의 죽음에서 그들이 어떻게 죽든지 그들은 그 죽음에 대해 평가할 수 없다. 사자(死者)는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다가올 수 없으리라! 오직 사자가 올 수 있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햄릿 왕자의 아버지가 몽상 속에 나타날 것이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외치야 할 것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우리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고 하여 신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고, 데카르트 합리주의 이래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믿음이 결국 최악의 마녀사냥을 남기고, 고전주의가 활성화로 이어진 중세시대에는 십자군이란 광기의 메시아주의로 정의라는 이름을 실현한다. 물론 자신의 신념 아래 살아가고 죽는다는 것에서 전사들이 만족하면 나름 다행이겠다. 무사들의 전쟁에서 항상 이런 말이 나온다. “무사의 최고의 영광은 바로 전장에서 죽는 것이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유한성이란 목숨을 유한성을 넘어 영원불멸한 신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 이 책을 읽으며 평소 내가 생각하던 내용을 이리저리 모아 요점을 정리하면서도 탁월한 이성적인 관찰과 때로는 거침 감정의 파도는 나를 압도한 기분이었다. 진중권 교수의 아내는 미와 쿄고, 일본인이다. 나이도 진중권 교수보다 3살 많은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한국에서 가장 담론을 시끄럽게 하는 분과 결혼했는지 생각하면 정말 재미있기도 할 것이다.

 

 

책 안에 가미카제 특공대의 박물관에 갔는데, 그곳에서 재미난 모습을 본다. 자살특공대가 하늘을 날아올라 미국 해군의 구축함을 정통으로 부딪치는 장면에서 모두 함성을 지르는 분들을 본다. 모두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시고, 손목에 손이 달린 대신 이상한 갈고리가 달린 늙은 노인이다. 그들은 분명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동아공영화라는 슬로건 아래 청춘을 광기의 군국주의에 헌신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장애뿐이나 그것을 대체할 것은 그때의 광기다. 그것이 아니면 그들이 살아있는 이유란 없다. 인간에게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중시하는데, 그것은 도저히 이성으로 설명해도 불가능하다.

 

 

그 어떤 것이라도 거기에 반발할 경우 바로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다. 다행히 요새는 우리나라에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없어졌지만, 대신 사회적인 생활에서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차라리 혼자 죽으면 그만이나, 가족들까지 무슨 죄가 있으랴? 그래도 이런 생활을 해도 아직도 파시스트의 추억은 달콤한 모양이다. 파시즘의 매력은 아주 달콤하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군중 속에 가려져 내가 나오지도 않아도 나는 정의로운 인간이 될 수 있으며, 만약 거기서 조금 활동적으로 행동하면 영웅이 된다. 고문기술자가 자신의 고문을 예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고문기술자가 고문당하는 사람에게 “나는 너를 3개월 안에 죽게 해줄 수 있고, 6개월 안에 죽게 해줄 수 있어!”라는 말에서 고문이 하나의 기술(ART)로서 인정받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정말 예술은 맞는 모양이다. 그 당시 많은 현장을 돌고 돌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칭송을 받았으니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미적 감각이란 그 수준이다. 미학에 대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나, 나는 미학에 대해 말하면 그 미적으로 판단될 대상이 나올 때에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란 점이다.

 

 

문화가 비단 가수와 드라마만 존재하겠는가? 경제, 사회, 정치, 군사, 외교, 환경 등 다양한 조건이 따라 붙는다. 그래서 문화를 단순히 보기에는 큰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것이 하나의 미라는 것이다. 자유라는 단어를 위해 자유라는 것을 없앤 것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은 결국 안티 휴머니즘으로 바뀌어가고, 인간에게 이성보단 오히려 광기가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그 과정에선 항상 희생자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극적인 plot을 일으킨다. plot이 있기에 드라마나 영화가 재미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뻔히 보이나 충격적이고도 눈에서 피하기 어려운 매력, 그 plot에서 죽음이란 테마는 매우 극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언제인가? 꼭 TV음악방송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장면 중에 하나가 죽음이다. 4분 내외의 뮤직비디오의 극적연출에서 죽음만큼 극적인 부분은 없다. 특히 곡이 발라드에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말이다. 우리는 그런 잔혹한 희생을 보고 깊은 몰입을 한다. 하지만 막상 본인은 저 상황에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남의 고통이 진실이든 가상이든 자기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에서 글은 저런 진실이든 가상이든 모든 것을 뛰어넘은 글이 된 것이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이런 말을 했던가? 이라크전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일까? <레퀴엠>은 상당히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가 강한 도서다. 이라크전이 했지만, 하지 않았다는 말에서 우리가 보는 전쟁의 모습과 실제 일어나는 전쟁의 모습은 다르다는 것이다. 가령 이라크의 당시 권력자인 후세인이 결코 좋은 인물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후세인이 나쁠 뿐이지 그 외의 일반 사람들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압정과 폭정으로 인해 고통 받을 뿐이다. 그렇지만 전쟁이 나면 누가 가장 타격을 입는가?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다. 군대 가는 남자들은 모두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은 군인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20세기 이전에는 군인이 제일 많이 죽었다. 왜냐하면 군인들은 일반 농민이나 부녀자들을 건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20세기에서는 그 희생자들의 대상이 군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라는 점이다. 여기에 아이와 여자, 노인 모두 열외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최고의 피해자다. 남자들은 모두 총을 들고 게릴라 군으로 활동하면 여기저기 활보하나 연약한 신체를 가진 그런 사람에게 불리하다.

 

 

최근에 여자들도 발육과 신체적 조건이 전쟁에 참전하나, 그렇다고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단지 한국의 입영대상이 남자만이고, 여자는 부사관과 장교로 가기에 계급적인 요소에서 남자들의 비애가 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쟁나면 여자 남자 상관없다. 여군의 죽음을 보고 여자들의 입영을 만류하는 외국의 여론이 있었으나 정작 그 여군들이 전장에 가서 민간인 여자들을 살해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레퀴엠>을 보라. 엄청 끔찍한 이야기가 나온다. 머리가 반통이 나가 파리가 누워있는 남자아이에게 붙어있거나, 여자아이의 목이 떨어져 나가거나, 하체가 모두 나간 병사, 시체가 조각된 채로 들어와 그 붉은색 피와 이물질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들, 나는 군대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군대가 있는 것은 만약의 대비이지, 만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랴? 생각해보면 진중권 교수는 <레퀴엠>에서 비판한 사람에 대해서도 레퀴엠을 올린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에서 진중권 교수는 2009년 정치적인 압박으로 자살한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애도한다. 글을 보면 너무 이성적이라 약간 식상한 맛이 없지 아니하나, 그 속에는 오랫동안 인류가 가지고 내려온 피의 숙청이 따라오는 정치적 보복을 고전을 토대로 언급했다. 단순히 통시적인 사건을 공시적인 사건으로 결부지은 것이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했던가? <레퀴엠>에서 다루던 진중권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의 이라크전 파병에 대해 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국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고, 최소한의 피해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한 방침에 아마 당시 한국군은 1명만 사망한 것으로 생각난다. 그런데 전쟁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사회적 타살에 가깝다. 왜냐하면 전쟁참전 자체가 자살에 가깝기 때문이다. 전쟁이란 것이 나는 왜 무섭냐면, 인간의 광기를 최고로 올리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해도 용인되고, 무슨 짓을 해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총을 잡은 병사는 그 개인 하나 하나가 그 나라의 영웅으로 생각한다. 영웅이라고 생각되는 그 개인은 다른 개인의 마음과 동일하지 않기에 각각마다 영웅이란 사고가 스스로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을 두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은 매우 보편적이다. TV에서 연애이야기가 나오면 세상을 다 살은 인간처럼 절망한다. 이 세상은 나와는 관계없이 흘러가는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왜만하면 다 있는 일이고, 나처럼 그다지 연애에 아마추어라도 그런 일들도 있었다. 그런 것이 있다고 무척 괴로워해도 남은 모른다고 여기겠으나 다들 그런 경험이 있다.

 

 

사람들은 공통적인 부분이 항상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기에 이런 전쟁도 잘 나오는 부분이다. 결국 총을 들고 있는 군인, 당신은 조국의 미래요 희망이다. 생각하면 정답이 아니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주를 누비던 독립군의 희생을 우리는 비웃을 수 없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광복절에 요인을 줄 수 없을망정,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반드시 기억하고 존경해야할 분들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냉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독재국가라는 골치 아픈 숙제가 있다. 그곳의 대부분 국민들은 어려운 생활과 억압으로 매일 하루가 고비일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통제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스미스의 모습을 보았는가? 2+2가 4가 아니라 5라고 마지막에 말하던 그의 모습을?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인간의 영혼은 망가진다. 망가지지 않으면 인간일 수 없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조금씩 정신이 망가진 내가 그 폭력적 사회적 문화와 현상에서 정상인처럼 보인 이유는? 물론 남에게 정상인의 범주에서 멀어져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광기를 머금고 뱉기에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정말 옳은 것에 대해 지금 말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미학에서 도덕적인 면을 부각한 것이 당시의 작품이라면, 나치의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역시 나치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일 것이다. 나치의 독일은 위대하고 모든 종족은 열등하다. 따라서 상징을 내세워 하나의 신성성을 부여하니 예술이 아니겠는가? 단지 그것은 우리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예술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숭고함을 가진 예술이다.

 

 

몽타주의 화려한 연출은 인간에게 하나의 정의감을 부여한다. 언론의 역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성이 아니라 공정성이라고 하는데, 몽타주의 화려함은 없는 내용을 만들고, 있는 사실을 감춘다. 이 세상은 이미 몽타주의 세계이다. 통신전자가 발달하여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그것조차 몽타주처럼 만들어진다. 그것은 뉴스를 봐도 나오고, 아직 철없는 아이들의 인터넷 키보드 베틀과 도배에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런 행위를 하는 자들은 정의의 사도들이란 점이다. <레퀴엠>에서 그런 자들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가장 따분한 구경꾼이고, 열광적일수록 지루한 인간임을 나타낸다.

 

 

자기의 주관이 결국 헤게모니 속에서 움직이니 말이다. 병사들은 아마 헤게모니의 강력한 지배에서 숨을 쉬어야 한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을 때나 혹은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죽음이 있어도 죽음은 자신에게 아닌 적에게 있다고 생각해야할 것이나, 막상 폭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그것은 불가능이다. 아무런 판단의지도 없이 나와 죽이고 죽어야 하는 공간에서 그들은 도망칠 곳은 오직 죽음이다. 폭력이 미적인 가치가 되는 곳이 파시스트의 세계라면, 그 죽음의 미학적 부여는 인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장을 보여준다. 인간이 평화를 원하는 것도 사실이고 인간이 상대방의 머리를 밟고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발밑에 인간들을 두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노예와 주인이 구분되어 노예가 평생 받들고 살아야 하는 세상, 그것이 헤게모니의 유지성이다. 전쟁은 그런 노예와 주인이 영원하기를 바란 것이고, 혁명은 그것을 뒤집거나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은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다. 노예보다 주인의 권력과 폭력적 수단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혁명을 이루었다고 기뻐해서도 안 된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 최근 우리의 역사까지 보면 혁명은 일어나도 성공한 적은 없다. 특히 미국독립전쟁 이후 혁명정부의 수립에서 미국은 혁명을 했으되,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 약간은 좋아진 것으로 봐야할 것인가?

 

 

이렇듯 인간은 자신들의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생각도 없이 계속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돌고 있는 자들이 가장 먼저 전쟁에서 죽고 죽이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만다. 미군 탱크에 깔려 죽은 여중생의 비극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전쟁이란 참혹함을 알았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단순히 어느 국가를 무조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나, 결국 어떤 것이든 폭력은 일어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성이라고 레비나스가 그랬던가? 내가 당하지 않으면 남에 대해 알 수 없다. 우리는 내가 당해도 나도 남도 알 수 없다. 계속 <레퀴엠>의 연주곡은 흐를 것이다. 이 굴레를 파악조차 하지 못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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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의 재탄생 - 시대와 불화한 24권의 책
장동석 지음 / 북바이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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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항상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품는 것에 대해 이율배반적으로 태도를 보인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진실로 원한다. 그것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억압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영화제목이 생각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금지된 억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도덕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도덕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를 혼돈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도덕과 윤리는 전혀 다르다.

 

윤리는 타인의 기준에서 보는 것이고, 그 타인이라 사회적 약자가 대부분이다. 소외된 이웃 특히 고아, 노인, 노동자, 미혼모,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그리고 오늘도 열심히 힘들게 살아가는 서민들까지 말이다. 윤리라는 단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약자를 위한 가치이다. 에토스란 단어가 그런 것을 말하지 도덕이란 단어는 에토스보단 차라리 나는 파토스에 가깝다고 본다. 그것은 입장이다. 누구의 입장인가? 바로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이다.

 

<금서의 재탄생>, 시대와 불화한 24권의 책은 그야말로 그런 파토스보단 에토스에 치중한 도서이다. 따라서 내용 자체가 온건하기보단 차라리 불결하고 저항적이고 도전의식이 팽배하다.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헌법을 생각하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많이 인용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나 1776년 미국 독립기념을 생각하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많은 역할을 부여했다. 덕치의 공포정치를 실현하여 결국 기요틴 아래 목이 잘린 로베스피에르조차도 <사회계약론>을 위대한 성서처럼 들고 다녔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사회계약론>은 엘리트 지식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대중 전체가 봐야 정답일 것이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다보면 루소가 당시 <사회계약론><에밀>을 내고서 얼마나 힘든 삶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존재조차도 무시되고 파리 시민에게 철저하게 조롱을 당하고, 그의 망가진 모습은 루이왕가의 큰 화젯거리였다. 루소의 서적부터 금지된 서적으로 나온 것이 과연 우연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하나의 모든 이론적 도서이다. 헌법의 토대가 루소의 사상이란 점을 보면, 루소가 가진 사상이 얼마나 현대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심지어 적대시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마저 루소의 사상이 미쳤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프랑스혁명의 전철을 잊지 않았다. 루소가 프랑스혁명의 원동력이란 점에서 민주주의 사회에 남긴 루소의 재산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루소가 당시에는 금지된 도서의 주인이었다. 당시 왕정사회이고 루소는 왕권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로부터 국가권력이 발휘된다고 하는 민주공화주의자였다. 그의 도서는 불온서적이 되는 이유는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지금의 루소의 사상이 민주주의의 기초인데도, 오히려 불온서적처럼 보인다. 내가 가장 한국사회에서 한심한 꼴이 좌우 이데올로기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으로 통해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왕정복고주의를 원하는 정당을 지롱드파이고, 자유주의를 원한 정당을 자코뱅당이라고 했다.

 

문제는 자코뱅당은 항상 자리를 좌측에 차지했다. 지금에서 말하는 좌파가 이때부터 유래했다는 점이다. 좌파라고 하면 무조건 나쁘게 보는 시각에서 원래 민주공화국의 시초가 프랑스혁명에서 좌파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적 상황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가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지금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 과연 국가의 전복할 과격한 도서인가? 의문하는 자는 대한민국 헌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헌법 그것은 인권을 위해 인간이 살아가면서 최소한으로 생존이 가능하게 만든 법이다. 그러나 그 헌법의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 루소가 살던 루이왕정이나 혹은 보나파르티즘이 도래한 19세기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것이다. 죽어 있는 평화보단 위험한 자유를 원하는 루소의 사상이야 말로 우리에게 자유를 말하는 척도이다. 이래서 <금서의 재탄생>은 상당히 아슬아슬 위험한 곡예를 하는 기분으로 책을 나간다.

 

왠지 대중문화에 결코 거론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거침없이 담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에 대해 진단에서 우리는 그 근본원인을 찾아보기보단 있는 그 자체로 본다. 결과론적 선택에서 실적 유무 상벌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왜 생기고 벌여지는지에 대한 반성은 없다. 조지 오웰의 <1984>처럼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지정하는 슬로건인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단어는 너무 적절한 표현이라 더 이상 바꿀 수가 없다.

 

폭력이 하나의 사회적 미학으로 되는 순간 그 사회는 파시즘의 천국이 된다. 파시즘이 판을 치는 곳에는 인권이나 평등이나 자유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차 대전 나치가 유럽의 광기를 일으키던 시절에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살아있던가? 여기서 빅브라더는 단순히 그 소설만의 빅브라더만이 아니다.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억압하고 처벌하는 것이 빅브라더의 영원한 정치적 통치기술이다. 끝에 2+2=4가 아니라 5라고 혼자 대답하는 스미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란 인간의 의식마저 없는 세상이 되는 곳이다.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위해 생각한다. 대화와 소통이 억압된 공간에는 표현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처럼 성적인 부분에 억압이 심하면 그렇다. 나 역시 그런 공간에 자라왔기 때문에 가끔 이런 저런 성적 애기를 하는 것을 잘 모르겠다. 가끔 결혼한 분들이 많은 모임에 가서 대화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란다. 아직 조금 순진한 면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성숙하지 못한 것인가?

 

인간이란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남녀의 관계에서 비롯되나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육체적 관계와 그것을 뛰어넘은 정신적, 심리적 안정감을 나와 타인에 대한 유대감을 향상한다. 또한 그것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기도 하고, 견문을 넓히기도 한다. <1984>의 스미스 역시 자신의 동물적인 사랑을 꿈꾸었다. 아니 같이 염소같이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남자를 야유할 때 뭔가 통하는 여자와의 일탈을 원하는 것에서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욕망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금지된 도서>에선 물론 조지 오웰의 <1984>를 다루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나와 큰 호평을 받았던 <동물농장>도 나온다. 스탈린이 당시 2차 세계대전 시에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견제세력이기에 처음에 자본주의국가에게 큰 호응을 받았으나, 조지 오웰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파시즘으로 물든 공포정치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이 지배한 소비에트 연방이 공산주의 국가이라 하나, 거긴 공산당만 존재하고 공산주의는 없다.

 

<금서의 재탄생>에서 아직까지 한국에서 다루면 안 될 도서인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도 다룬다. 문제는 막상 2사람이 저술할 때는 소비에트연방이나 중공처럼 헛된 것만을 주입한 게 아니라 현실의 자신을 보는 거울로서 보란 것이다. 예전에 <중국을 읽다 1980~2010>에서 중국의 기념일에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보면 참 부끄럽지 않은가 싶다. 진짜 마르크스주의의 가르침이라면 그들이 하는 행동은 탈선을 너무 심하게 해서 더 이상 오기가 힘들 정도다.

 

세계적으로 고전이자 유럽 철학과 사상에서 위의 도서는 지금도 나오는 것인데, 한국에선 팔지도 못했다. 지금은 서점에서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는 도서이나, 왠지 불온서적처럼 보는 시선은 여전하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사회가 별 다른 문제가 없다면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까지 충분히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제대로 그것을 즐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유럽 중세시기에 기독교 문화이면서도 성경조차 평민에게 금지된 영역이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제대로 알기란 어렵고, 지식이 곧 권력을 승계하고 권력은 지식을 통제했다. 언어로서 이미 모든 것을 속박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 만든 성경을 만든 사람은 죽은 후에 다시 시체가 훼손되고, 영어로 된 성경을 읽은 영국인들은 처형당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 문화에서 영국인이 영어로 된 성경을 읽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나 오히려 제재 대상인 것이다. 금서의 지정은 결국 도덕이란 이름이 좌우한다. 도덕은 그 사회의 법칙이고 규제다.

 

그것을 만드는 자는 법칙과 규제를 억지로 만들고 자신들은 뒤에서 뭐든지 누리는 초권력적인 존재이다. 빅브라더는 인류의 역사에서 멈추지 않고 생기던 자들이다. 단지 얼굴과 국적만 바꿀 뿐이다. 여기에 대항하는 서적들은 이미 오래전에 나온 고전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는 너무 외설적이라 판매 불가 된 사례가 기억나는데, 성적인 욕망에 대한 표현과 열정조차도 금지되어야 할 곳에서 오히려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인 버드런트 러셀이 이 말을 한 기억이 난다.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고" 말이다. 오히려 금욕주의만 강요하기에 변태적인 성범죄가 일어나고, 특히나 그 대상이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손이 뻗치기 시작한다. 게다가 최근에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까지 당한다. 성적 약자는 더 이상 여자만이 아니라 저항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또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까지 말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철학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조차도 철학이 사라지기 시작한지 옛날이다. 아니 그 이전에도 그럴 것이다. 위선으로 가득한 도덕이라는 거짓된 억압이 존재하는 한 우리에겐 그런 철학이 모두 골고루 돌아갈 수 있을까? <금서의 재탄생>을 읽는 순간 이 책조차 금서목록에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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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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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학은 아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 너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직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담론은 너무 일부만이 소유한 영역이다. 그런 연유는 한국이란 나라는 철학적 담론에서 매우 약하다는 점과 철학적 요소도 하나의 암기식 내지 고형화하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철학이란 것은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문제이나, 오히려 그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 이유인지 한국에서 미학을 이야기하기란 참 어렵다.

 

 

美學이란 것은 미라는 것 즉 아름다운 것을 다룬다. 하지만 진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현대사회는 너무 어지럽다. 왜냐하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가? 아니라면 무엇이 더 옳고 그른 것인가? 라는 의문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진중권 교수가 적은 <현대미학강의>에서 진중권 교수가 가장 추천하는 문학가 및 사상가인 발터 베야민부터 그렇다.

 

 

발터 벤야민은 탁월한 문학비평가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정치철학적으로 미친 영향도 크다. 그가 적은 문학론 이외에 영상에 대한 의견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유효한 영향을 미친다. 단지 그의 관점은 다소 긍정적이나 현실은 부정적으로 흐른 편이다. 벤야민이 살던 시대에 이미 세계 1차 대전을 경험하고, 게다가 벤야민은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실망감에 자살을 택한다. 지식인의 고뇌는 언제나 시대적으로 처해진 운명인가? 그런 벤야민이기에 우리는 그가 적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담론할 수 있게 되었다.

 

 

벤야민의 담론에서 우리 인간에겐 예술이란 하나의 상징적인 도구로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에서 그가 같은 주제를 하나만으로 각각 다른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하나로서 존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비드의 석상을 보면 그것은 여러 개가 존재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원본으로서 가치를 부여받는다. 실존적으로 존재하기에 변화하지 않기에 니체의 <비극의 탄생>으로 따지자면 아폴로적인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폴론적인 예술이 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 존재해야 한다. 변화무쌍하고 소멸이 되어 다시 새로운 것이 탄생해야 한다. 소멸의 미학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상이다. 영상은 원본이 실제 있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원본의 가치를 수행할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사진관에 가서 카메라 앞에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그 사진은 이미 죽은 시간을 대표하는 것이지 살아있는 시간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의 발견은 우리에게 죽은 시간의 발견이다. 살아있는 시간은 결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물론 영상물로 통해 인간의 시간이란 비가역성에서 가역적인 부분을 소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 그 자체로는 비가역을 탈출할 수 없다.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영원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으나, 그 영원한 이야기를 소비할 인간 개인에게 영원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세계에선 TV 속의 연예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은 영원 불구한 존재이다. 가령 오드리 햅번이란 명배우는 나이가 들어 아름답게 서거했지만, 젊은 시절 <로마의 휴일>의 공주의 모습은 영원하다.

 

 

우리는 마릴린 먼로의 항상 글래머한 섹시한 스타일은 늘 기억한다. 그녀에 대한 오마쥬에서 많은 여자연예인들이 밑에 바람이 부는데, 원피스 치마를 누르고 있다. 자신의 속옷이 노출되지 않기에 말이다. 사실 생각하면 처음부터 자신의 속옷이 노출되기 부끄러우면서도 그런 장치 위에 올라간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다. 보여주려고 하면서도 보여주지 않은 페티시즘의 연출은 결국 우리 인간에게 계속 먹히고 있다. 이것 역시 예술이 없다고 보는가? 따지고 보면 영상이란 것은 계속 존재하고 복사되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말할 수 없다. 내가 애니메이션 오타쿠라고 하여 <신세기 에반게리온> DVD-CD를 보고 있다.

 

 

그러면 나는 분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을 원본으로 보고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구매한 DVD-CD로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어느 것이 원본인지 사본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을 카피한 복사원본조차도 원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영상매체로 통해 한 가지만 있다는 숭고한 대상이 아니라 다수들이 볼 수 있는 무한의 관찰이 가능하다. 영상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힘이 있다. 따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비평가로서 되는 길을 열어준다. 신화적으로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리오타르의 거대 서사에서 탈피하는 것에서 기술력의 발전을 매우 크다.

 

 

따라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기술 발달로 통한 분산적 영역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그런다고 하여 발터 벤야민은 그동안 우리 인간에게 가해진 억압이란 공간이 모두 해체될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돌고 도는 새로운 과정에 들어가는 역사 내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았다. 미학이란 것이 예술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라고 하는 점에서 그 담론이 일부에게 열린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가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나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본 기억에서 그는 영상이 다수의 대중을 접하기에 파시즘을 위한 도구, 즉 프로파간다로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의 담론에서 보드리야르에게 가면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한다. 우리가 보는 걸프전이란 그저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된 몽타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기사 그런 요소는 이미 베트남전쟁에 십분 발휘하지 않았는가? 베트남전쟁보다는 베트남전쟁을 소재한 영화가 오히려 더 베트남전쟁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뮬라크르의 계속 이어가는 시뮬라시옹에서 절대적인 숭고함을 탈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시뮬라크르로 통해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숭고함을 심어준다.

 

 

벤야민이 기대한 것이 결국 독일의 나치에겐 유효한 선전수단이 되었다. 그런 점은 스탈린주의 소비에트연방이나 그것을 비웃는 소설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에서 신랄하게 보여준다. 복제가 가능한 예술품이란 점에서 절대적인 영역이 아니라 보편적 영역의 전환은 다른 문제를 보여준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적인 철학자로서 예술을 벤야민처럼 쉽게 다루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긴듯 하다. 혹은 예술이 너무 범람하기에 미술평론가, 미술전문가, 하다못해 큐레이터나 감정사까지 나오는 판국이니 예술이 예술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상품적 가치만 가진 게 아닌가?

 

 

게다가 모더니스트의 예술은 기본 예술에 대한 파괴다.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예술을 위해 예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파괴하기 위해 예술을 한다. 반예술적인 예술이 결국 예술을 파괴하면서 다시 예술로 대체하고, 기존의 예술은 대중들이 상징성을 아방가르드 예술이 부여받는다. 프랑스 상황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반예술적 행위들이 결국 대중화가 되었다. 누가 도서를 전시한 서점에 책표지를 일반 종이가 아니라 종이를 손상시키는 사포로 만들면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하지만 이 역시 어떻게 하리, 사포로 만든 책표지들이 계속 생산되었다. 상황주의자들은 그만두게 된다. 전위적 실험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피카소가 그린 많은 기이하고도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은 기존 미술과 어긋난 태도이나, 그런 아방가르드의 요소마저 하나의 예술로서 가치를 부여받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와 관찰조차도 제대로 반기지 않은 한국조차도 마르크스주의자인 피카소의 그림이 미술교과서에 당당히 실린다. 코미디인지 아니면 그저 바보들의 향연인지? 미적인 영역에서 대중들은 그것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부분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대중들을 속박하는 숭고한 예술에 대한 파괴가 결국 그 자체가 숭고하게 되는지 아니면 자본주의 시장에 팔려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방가르드의 반예술이 결국 대중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그것은 있어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하이데거식으로 보자면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존재한다고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예술품이나 도구라 다행이지 물화된 인간에게 호모사케르라는 소외된 인간은 존재하는 실존적 존재와 이름이 있어도 존재성을 부여받지 못하니 말이다. 미학에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이 가진 정체성에 대한 절대적 가치보단 부정적 가치의 발견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는 나치의 파시즘에 이어 스탈린이 펼친 개인을 과학주의란 억압에서 집단화시키는 점이나, 또는 자유의 나라라고 여긴 미국에 가서도 자유의 비례가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것처럼 자본에 비례한 점에서 절대적인 인간의 유토피아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토피아의 부재가 예술로서 나타나고, 그것이 부재를 알리기에 유토피아적인 영역으로 된다. 현실의 부정성에서 미는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로테스크는 아도르노에게 부정의 부정의 또 다른 부정이다.

 

 

미학이 기존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시작하여 헤겔에서 찬, 반, 합이란 변증법을 아도르노는 다른 식으로 본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잘못되게 되어 다시 안정으로 가는 것은 영화서사에서 종종 보는 일이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위기로 빠져 또 다른 부정적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정의 미학은 여기서 다다이스트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베이컨은 인간의 형상을 무시한 상태를 그려 인간의 존재성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 표현한다.

 

 

마치 이것은 서구철학에서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동양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근원이 되는 불교철학과 비슷해 보인다. 불교에서 이렇게 말하지? <색즉시공, 공즉시색> 있는 것은 없음이요,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실존성이 있을까? 없을까? 중용의 덕을 강조하는 불교이나 그 돌고 도는 의문은 절간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의 손가락처럼 원을 그린다. 그러고 보면 벤야민이 말한 역사적 테제와 유사하지 않은가? 차라리 돌고 도는 것에서 발터 벤야민이 논한 인간의 역사가 폭력의 역사처럼 그것은 멈추지 않더라도 멈추지 않기에 오히려 다시 볼 수 있는 게 아닌지 말이다.

 

 

현대미학을 이룬 것은 단순히 절대적 상징성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온 역사와 문화, 인간을 지배하는 스펙타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논하게 한다. 중요한 점은 미학은 미의 미학만이 아니라 추의 미학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당신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 여기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부터 가장 추한 사람이 될 것이다. 파시즘의 미학은 자신(들)의 절대적 미가 있다는 자부심이다. 그 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미화시킬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 인터넷은 폭력의 시대가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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