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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루소를 읽는다 - 자유와 평등, 다시 시대의 광장에 서다
김기의 지음 / 다른세상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루소를 읽는다>를 읽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루소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연구하고 생각할 것들이 많은지 생각하게 해준다. 물론 이 서적을 집필한 작가도 그렇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루소가 제시한 그 사상이 정말 옳았다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루소는 기독교를 믿었지만, 기독교 안에서 세상을 보지 않았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 반계몽주의자였으며, 자연주의자였다. 오히려 신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던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기보단 그 민중의 고통을 같이 짊어지려 했다.
그래서 그는 광인이 되어야 했고, 불안감에 미쳐 의심병에 걸려야 했다. 루소가 그런 힘든 상황에서 잃지 않은 것은 당시 도시 빈민과 시골의 농민에 대한 인간애였다. 그의 인간애적인 모습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볼 수 있다. 이성과 문명이 인간에게 유익한 존재인지 혹은 아닌지를 밝히는 연구에서 루소는 오히려 학문과 예술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핍박받고 배고픔에 허덕인다고 했다. 지금처럼 예술이 누구나 혼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의 위용과 업적을 남기기 위해 막대한 예산과 물자를 낭비해야 했다.
그 낭비는 단순히 가지고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향수 하나를 생산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했고, 치장하기 만든 가발에는 많은 식재료가 필요했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어보면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루소가 바라보던 농민의 힘든 삶에서 그의 인간애적인 정신을 볼 수 있었다. 처음 그가 파리에 입성할 때 파리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빈민, 거지, 창녀, 도둑, 병자로 가득한 곳이었다. 모두 가난에 의해 내몰린 자였고, 누구 나하나 그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려 했다. 루소와 더불어 당대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와 디드로 역시 그러했다. 오로지 루소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예전에 <에밀>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정말 놀라운 문구를 발견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고,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회에 살고 있다. 죄지은 사람은 목매달아 죽을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작가도 그렇지만 나도 전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장발장이란 이름의 사나이는 오로지 집에서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조카를 위해 빵 하나를 훔쳤다. 그 죄로 그는 오랜 시간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고, 그의 조카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추후에 장발장이 감옥에서 나와 신분을 속이고 살아갈 때 판틴의 딸인 코제트를 거둘 때, 코제트의 생활은 어느 사기꾼 여관 주인집에서 제대로 된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다. 추운 날에 먼 거리까지 물을 길러야 했으며,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이런 비참한 생활을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또는 범죄를 저지를 것인가? 하지만 범죄자의 말로는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몸을 팔아야 하고, 남자는 몸을 버려야 했다. 오늘 날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최근에 개봉되었던 영화 <레미제라블>은 영국에서 만든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 영화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먹을 식량이 없어서 걱정하고, 공장에서 감시원들의 부당한 행위에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버려진 고아, 이런 모습은 루소가 프랑스 파리에서 보던 그 장면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인 것처럼, 그 사슬이란 고리는 바로 인간의 가난과 굶주림이었다. 루소가 가진 인류애적인 가치는 “아름다움을 사람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라는 말처럼 루소는 인간 스스로 인간성을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루이왕정 시기에 핍박받았으며, 수구세력에 의해 그의 사상은 무참히 짓밟혔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은 논란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루소의 사상이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18세기 낭만주의, 19세기 관념철학과 마르크스주의, 20세기의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유명한 학자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보았다. 거기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면서 더 이상 자연을 착취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을 착취하게 된다. 문명이란 세계는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노동력으로 변화하여 만든 장소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문명의 역사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고대에서는 지식을 이용한 치수관리와 화술,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물리적인 폭력과 무력을 이용한 계급, 현대는 자본이란 이름의 경제로 이어진다.
계속되는 인간의 억압과 고통에 대해 루소는 그 굴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마르크스보다 100년 전부터 그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게다가 실존주의적으로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한 존재성까지 고민한 그에게 오히려 학문에 대해 파고가면 갈수록 루소의 영향은 막대했다. 루소가 그렇게 원한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었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루소는 “누구도 자기를 팔 만큼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기의 몸을 파는 여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 파는 인간들도 존재한다.
또한 산업화의 가속화로 도시는 계속 인구가 모여들고, 시골은 황폐해지며, 소득의 불평등은 이제 인구까지 감소하고 있다. 현재 부부 2인당 출생되는 자녀수는 1.2명, 여기에 사회는 점차 노령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국방군사력 기본이 되는 젊은 남성 수가 감소하여 비상 시 국가존립조차 위협이 되고 있다. 인구가 줄면 당연히 기업이 생산되는 상품을 소비가 축소되고, 기업의 생산력이 감소되면 그 나라의 경제가 위태롭다. 우리는 매일처럼 정치권에서 경제문제를 두고 이슈로 삼지만, 그 경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참 어리석게 보인다. 인간이 경제위에 있는지 아니면 그 아래에 있는지 구분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구의 감소는 인간이 계속 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재생산되어야 하겠지만, 그 생산에 의한 2차적 생산이 부족한 이유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남성, 중앙과 지방의 경계선상에서 경제력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태어날 2세의 인생에 미친다. 교육비용의 증가, 생활에 불충분한 급여는 점차 국민생활의 질을 떨어뜨리며, 그것이 결국 인구감소로 이어진다.
경제를 살린다고 하여 민생이 사는 것이 아니라 민생이 살아야 경제가 일어나는 것을 그들을 모르고 있을까? 루소는 진짜 필요한 것에 대해 너무 가치가 낮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다. 가령 우리 인간은 의식주에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농촌과 바다에서 나오는 식량이 없다면 우리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허나 현재 우리는 식량의존국이 되었고, 농촌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노고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모든 농민이 해당되지 않으나 적어도 쌀과 같은 식재료는 우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또한 인간에게 식량만큼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이 존재하기에 사회라는 공간도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이 가장 필요하기에 인간이 가장 하등하게 취급당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을 싫어하거나 학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무한한 애정을 바라면서 타인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게 여긴다. 애완동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보여주듯이 행동하는 그들의 가식과 협소한 생각이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어느 인간이 애완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기도 하는가? 물론 대다수의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타인을 위해주는 것보다 그저 애완동물로부터 애정을 받으려하는 인간을 두고 어떤 생각이 들까?
억지로 동물을 키워, 그들의 성기를 자르고, 혹은 강제로 수정하는 것이 동물에 대한 사랑인가?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이란 오류와 심지어 인간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어리석음에 계속 시련은 되풀이 된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자연적인 것을 파괴하고, 거기에 자신의 이기심의 공화국을 만든다.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비판한 것처럼 4대강 공사처럼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저 국가의 세금을 낭비하여 어느 특정인에게 이익이 가게 한 일을 보며,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되지 않은 것이 참 안타깝게 여겼다.
이미 도시사회생활에 익숙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나, 그 공간에서도 자연의 세계를 보호하고 가꾸며, 아름다운 것들을 보존해야 하나, 이 모든 것이 돈으로 볼 뿐이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잘 살아보세 라고 외치며, 강과 개울을 콘크리트로 바르더니 강물의 수질이 악화되고, 인간이 마셔야 할 물도 오염되어 식수걱정을 하게 되었다. 잠시 이익을 보려던 것이 오히려 그것을 원상 복구하는 것으로 몇 십 배에 가까운 예산을 소모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하는 일이 모르겠다.
오로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고, 그 이기심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이끌려 새로운 사슬의 고리가 되는 우리들의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은 병이 든다. 인간성의 형성에서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 우리의 교육은 인간이 한 사람의 존재로 만들기보단 그저 기존의 사슬에 적합한 인간만을 만든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자신 내지 그 단체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조차 마음의 양심조차 느끼지 못한다. 최근 육군28사단에서 벌어진 구타사건이나 혹은 다른 군부대에서 일어난 자살사고나 총기사고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병폐에 빠졌는지 알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평등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 도리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게 된 것이다. 그 억압하던 자도 분명히 타인이나 혹은 어느 사회에서 억압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보상심리는 정말 최악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현상이다. 왜 그럴까?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루소가 말한 것처럼 오직 자연적인 인간이고, 그 자연에서 인간의 영혼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치는 바다나, 혹은 넓고 푸른 하늘, 시원한 강줄기가 흐르는 하천, 바람이 부는 넓은 평야에서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하나가 된다. 모든 것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서도 그들이 맑은 땅과 물을 지키려한 것은 단순히 도시사람들의 건강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갉아먹는 도시의 척박함에서 영혼을 다시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자연에 대한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의 문장이 거대한 강줄기처럼 굽이치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다.
인간 역시 그 자연적 존재로 본다면 서로 다를 것도 없으나, 계속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하나라도 더 빼앗기 위해 살아간다. 강자의 논리로 하나의 정의를 만드는 것은 고대 노예를 만들고 착취하던 자들의 부조리한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루소는 “힘을 정당성으로 만드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바꾼 것이다.”라고 한다.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에 대한 권리로부터 시작이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면 타인의 자유가 소중하고,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평등이 필요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공적재산의 영역으로 보겠지만, 최소한 존 롤즈라는 정치철학자는 알고 있었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소수혜자가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인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정치적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판단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고, 그것은 교육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인 성공은 교육에 의해 결정되고, 그 교육은 기회의 균등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공적교육이 무너진 이상 경제적 조건이 없는 자에겐 오직 같은 운명을 되풀이된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 것이다.
루소는 인간의 교육을 인간 스스로 살아가고, 자연에 대해 같이 살아가게 함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과정이기를 원했다. 인간이 도구로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이 감옥과 같은 학교에서 감시와 처벌로 통해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제 아무리 좋은 대학과 좋은 일자리,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패륜을 저지르고, 또한 자기인생에 대한 허무함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비정규직과 실직자 같은 사람들은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멀어진 세모녀의 자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삭막한지 잘 보여주는 단적이 예다. 그러나 우리는 브레이크가 없는 벤츠처럼 계속 어둠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자신들은 벤츠에 타고 싶어 하나, 막상 그들은 벤츠 타이어가 밟고 지나가는 아스팔트에 불과한데 말이다. 벤츠를 타고 그저 어디에 추락하든지 또는 충돌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차를 타거나 먼 길을 걸어가는 다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눈앞에 있는 위기와 고통을 잠시 잊는 힐링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대안이 필요하다.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여 현실은 바뀌거나 나아지지 않는다. 개인의 성향과 개성에 의해 개인적 삶은 바꿀 수 없으나,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삶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개인의 문제는 개인으로서 끝이 나지만, 사회의 문제는 각자의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안 일어날 것이란 믿음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현실에서 언젠가 그 칼날은 자신의 목을 향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하기에 계속 비극은 되풀이고 매일 새로운 소극이 탄생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이나, 인간의 이성 내에 윤리가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기심(利己心)이고, 인간은 감정(感情)을 가졌다고 하나 거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정(無情)한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개인보다 더 못한 야만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개인들은 자신들의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 이상 문제를 삼지 않지만, 문명과 미개의 중간단계인 야만은 자신의 배가 부르고 잠을 충분히 자더라도 멈추지 않고 약탈과 착취는 반복한다. 진심으로 문명인 혹은 이성적 인간이라면 타인을 공격하거나 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루소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배운 가르침에서 "의무와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 타인의 불행 속에서 자기 이익을 찾는 일은 피해야 한다."라고 했다. 타인의 불행에 빠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경제적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현실은 마치 야만의 사회처럼 보인다. 그 야만적인 공간에서 루소가 제시하는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