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대종교 - 한국인의 종교경험
차옥숭 지음 / 서광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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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란 참 묘한 것이다. 당신의 가치관보다 당신의 그 자체를 무엇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 국가 중에서 프랑스를 좋아한다. 프랑스라고 하여 모든 게 척도인 게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나온 철학과 사상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특히 장 자크 루소의 서적들은 나에게 삶의 관점을 부여한 중요한 사상가이다. 그의 철학자적인 모습에서 개인적 삶은 불우하고 강박관념에 시달린 광인이었을 것이다. 계몽주의사상이 꽃이 피던 18세기 프랑스와 유럽, 그 공간에서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하나의 계몽철학자로 등장했으나, 한편으로 반계몽주의자로도 나왔다.

 

루소가 그토록 대립해야했던 볼테르는 지금 프랑스 판테옹 사원에 루소의 무덤을 서로 마주보고 있다. 루소의 철학에 내가 깊이 동의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나 본래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억압이란 사슬에 묶인다. 그러지만 인간이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야할 운명이라고 하여도 인간 그 자체가 자연과 친화되지 마란 법이 없다. 서양의 근대철학은 지금의 민주주의 정치체계를 만든 근본이 되던 시기다. 헌법의 모든 요소가 18세기 프랑스에서 나온 점을 생각하면 3세기 이전의 사상이 결국 지금도 통용된다. 계속하여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철학과 사상이 발전해도 근본은 변함이 없다.

 

단지 자유주의 철학은 사상에서 비롯되어야 하나 경제적 이권에 의해 분리되는 기묘한 현상에 따라 왜곡되어갈 뿐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라는 사상구조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의미를 만든 사상은 없었는가? 그런 보완점을 생각하면 한국 근본적인 철학과 사상에 대해 한 번 관심을 가지는 방법도 좋다고 여긴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지만, 다른 국가에서 나는 프랑스를 좋아하고, 그 프랑스의 상징은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을 침공한 것이다. 억압에 대한 저항이 곧 프랑스의 정신이고, 자유와 평등이 곧 프랑스의 정신이고, 인간애에 대한 고귀한 정신 역시 프랑스의 정신이다.

 

그런다고 모든 프랑스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 극우청년이 좌파계열에서 운동하는 학생을 무참히 살해했다. 프랑스 옆에는 나치독일의 정신을 살린다고 하는 네오나치가 기어 나오고 있다. 한편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식 민주주의에서 그것이 민주주의인지 아닌지 참 미묘하다. 토크빌이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 정체가 가장 전체주의적으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곧 전체주의의 표상으로 등장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없다. 헌법에 우리는 민주공화이나, 어느 누구는 주군을 말하고 있다. 주군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사라진 존재다.

 

주군을 다시 살린다면 이성계의 혼을 다시 찾는 것이 옳을 것이고, 그것은 조선을 다시 찾는 것과 같다. 조선이란 말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조선시대의 풍습을 많이 받고 있다. 서양의 사상이나 일제에 의한 탄압이 있어도 주자에 의한 유교문화는 살아있고, 사대부란 계급제도에서 사라지고, 그 계급 대신 자본의 대소로 결정짓게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가문의 내력은 존재한다. 집안의 족보나 문중행사도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 문화적 잔재를 두고 전통문화로 받아들이고, 서구방식으로 하는 것이 예전의 진보라면, 이제는 그런 진보적 가치가 보수적 가치로 변모되었다. 시간의 흐름에서 과거의 진보가 지금의 보수고, 때에 따라 과거의 전통이 현재의 진보로 돌아올 수 있다.

 

조선이란 국가가 대한민국 최후의 왕국이었으니 그 조선의 이름을 가진 고조선이란 국가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집안 분위기가 어머니, 형, 형수, 형수가족이 불교계통에 가깝고, 나는 천주교를 믿지 않으나 대학시절 성당에 대한 인연이 있다. 종교를 믿지 않은 이유는 종교에서 가장 앞세우는 좋은 일을 함으로 타인에 대한 인간애를 실천하는 것은 합당하나, 단순히 종교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심이 싫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은 카를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 아편의 경우 불치병이나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잠시나마 고통을 멈출 수 있게 하는 약이다.

 

그러나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악이다. 종교란 그런 것일까? 최근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건을 보면서 종교인이 운영하는 업체로 통해 대한민국과 그동안 있었던 망언의 꼬리를 찾아가면 마르크스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점을 실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종교 자체가 없어야 하나? 라고 말하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루소의 경우 그는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의 가치로서 종교와 정치는 분리해야 하고, 그가 기독교인이면서 기독교인들에게 외면 받은 이유는 종교는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데,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런다고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 게 옳은가? 종교란 어느 국가와 민족, 더 나아가 개인과 인간관계, 이와 반대로 세계와 인류에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가? 예전에 나는 종교는 믿지 않으나, 우리나라는 단군신앙이 상당히 뿌리 깊게 있다고 생각했다. 산신 할매나 또는 제사문화가 그렇다. 본래 불교의 고향이 인도에선 조상에 대해 제사가 없고, 공자의 유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누군가 죽으면 죽었다고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내지 하늘로 갔다고 한다. 땅에 매장하는 풍습에서도 양지바른 곳보단 산으로 올라간다.

 

우리는 하늘로 간다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곧 산으로 돌아가 신령이 되는 것과 같다. 한국인은 인간이 신으로 되는 종교관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 보면 신은 절대적 1인자이고, 고대 그리스라면 인간이 신으로 되기 때문에 Daimon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종교가 샤머니즘이란 속성도 있지만, 만물의 자연을 아끼는 점에서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처음에 루소를 언급한 이유는 루소는 자연주의자였고, 한국의 전통종교사상은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게다가 자연주의자로서 유명한 존 러스킨과 같은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를 본다면 자연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생존을 넘어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는 존재이고, 대자연이란 생명은 하나의 신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나 역시 전공이 환경 쪽인지 자연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현실의 종교는 믿지 않으나 산이나 강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고 싶다. 물론 영적인 존재가 현실에 존재할리 없다고 과학적으로 생각되나, 위대한 자연이야 말로 우리 인간의 정신을 치유하고, 어긋난 마음을 돌아오게 하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바다의 파도를 보고, 높은 산의 안개를 보면 우리 인간이 이토록 작은 존재구나 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한국의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는 그렇게 진행되지 못한다. 동학이란 것은 수운 최제우에 의해 만들어진 민족종교로 서양의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서학 대신 동학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김수환 추기경님이 훌륭하신 점과 지금의 교황님을 존경한다. 내가 가톨릭을 믿지 않으나 그분들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의미에서다. 동학이 생길쯤에 국가지도자나 종교지도자가 지금의 교황님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제사문화를 천주교에서 인정하지 않아 마찰이 있었고, 18세 후반에는 남인을 비롯한 신서파 양반들이 받아들였으나, 19세기로 오면서 민중으로 보급된다. 이른바 메시아주의에 의한 구원신앙에서 의해서다. 기복신앙은 한국종교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요소이다. 불교나 유교나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나, 우리는 귀신이 신으로 모시고, 그 귀신은 살아있는 인간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죽음 자체를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란 점에서 내세를 기원하기보단 다시 돌아간다고 하기에 이승에서 죽은 자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로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할아버지라는 개념에서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할아버지도 존재하거니와 죽어있는 할아버지를 우리는 다시 찾는다. 만약 2대조와 3대조를 넘어 몇 대조에 계신 분들에 대해 우리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조상에 대해 우리는 모두 돌아가신 분들을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부른다. 그들은 우리에게 신이란 존재로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공통적인 정체성을 찾는다면 역시 그 민족과 국가를 상징할 수 있는 무엇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단군할아버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에서 하느님과 대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존재는 다른 듯하다. 천도교는 인내천으로 하늘과 인간이 통하기에 평등하다고 하나, 대종교에서는 신 자체를 할아버지로 본다. 신의 존재 아래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것이 토크빌이 바라보는 가치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다른 점은 신이란 존재는 인간과 분리된 게 아니라 인간과 동일하게 이어져 오는 것이다. 가령 그리스신화를 토대로 만든 그리스비극에서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온다.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아버지이신 위대한 제우스”라고 말이다. 원래 고대종교에서 인간과 신은 분리되기보단 분리되었던 존재로 본다. 단지 서양에서 분리된 이상 다시 인간이 신이 될 수 없고, 동양에선 인간이 신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동학의 태아에서 태어난 천도교는 인내천이란 구원주의가 강한 종교로 보이고, 이에 반해 대종교는 구원주의적인 요소보다는 항일투쟁에서 시작한 실천주의가 강한 것 같다. 물론 천도교가 만들어진 일제강점기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대종교에 그 철저한 투쟁의식에 비하면 빛을 보지 못했다.

 

천도교의 죽음은 순교로 볼 수 있지만, 대종교는 순교와 더불어 순국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독립군이 대종교였고, 민족의 얼과 혼, 그리고 역사와 전통을 이어주는 가치관을 대종교에서 시작한 점이다. 일제에서 벗어나 막 새로 시작한 무렵 전쟁이 일어날 때 한국의 언어와 역사를 누군가 제대로 전수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종교에 몸담은 독립군이 노력하여 홍익대학교와 단국대학교를 만들었지만, 독재자의 권력에 의해 대종교 인사들은 적출되고, 그것도 모자라 한국교과서에 대종교의 인물을 계속 축소시켰다.

 

대종교 인물의 인터뷰에서 듣던 중에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김구 선생이나 혹은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과 같이 독립운동 사람의 후손이 해방 후에 돌아오니 일제 치하에 앞잡이 하던 사람이 자신에게 굴욕감을 준 것이었다. 천도교나 대종교의 종교탄압이 심하게 받았으나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유독 대종교를 억압했고, 1942년 임오교변으로 인해 10인의 대종교인들이 서거했고, 그들 대부분은 독립투사였다.

 

어떻게 보면 천도교는 동학이 처음에 농민운동에 시작하여 점점 종교운동으로 흘러가 신비한 종교체험이 중심으로 간다면, 대종교는 독립운동으로 시작하여 한국민족 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종교가 흥미로운 것은 대종교는 파시즘이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항하던 종교다. 그래서 민족주의적인 종교인 점에서 당연히 보수적인 가치가 있으나, 대종교는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민족에 대한 적대심을 품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종교를 같이 양립해도 무관하고, 다른 종교인과의 살아도 문제없이 지내려한 점과 제일 인상 깊은 점은 김수환 추기경님이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홍익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자.”라고 한 점이다.

 

교황 아래의 추기경이란 자리와 한국에서 천주교인에서 가장 어른이신 분이 홍익인간이 다시 태어나자를 크리스마스 메시지란 점에서 인상이 깊었다. 대종교란 종교가 다소 관념론적인 요소가 강하나, 다르게 본다면 현실적 투쟁을 한 점에서 유물론적인 요소도 있다. 자연과 만물에 대한 사랑은 산과 강을 좋아했던 지난 선조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어 사람들조차 숨쉬기가 어렵고 물마시기도 곤혹스러워지는 이런 시대로 오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홍익인간 정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조심할 점은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만의 가치가 있고, 주관과 목표가 있다. 공동체 주의라는 점은 칸트주의자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제창한 롤즈의 철학에서 볼 수 있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도 볼 수 있고, 존 스튜어트 밀의 철학에서 볼 수 있다. 공동체사상이란 것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처럼 정언명령, 즉 자신의 의지로서 타인에 대한 선(goods)을 전해 주는 것으로 인간애적인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본래 불교나 크리스트교 역시 그렇지만, 종교적인 가치에서 철학적 방향이 잃어버렸기에 아편이 되었던 것이다. 대종교를 특혜를 주는 것이 옳지 않으나, 적어도 한국에서 10월 3일 개천절은 의미 있는 날이야 한다.

 

일본의 예전 왕이던 히로히토라는 천황이라고 하여 신으로 모셔지고 있지만, 그는 엄연히 말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전범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이 신으로 되는 나라가 일본이다. 물론 일본이란 나라에서 많은 국민들은 죄가 없고 그들은 자신만의 인생에 충실하며, 한국과의 관계에 긍정적으로 대하기를 바라며 실제로 그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왕이 있다는 것만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신사에서 제문을 외우는 신관의 입에서는 일왕의 존재성이 드러난다. 그것이 결국 전쟁광으로 이어지는 열쇠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단결력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문제는 공동체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만이 공동체로 이어지고, 타 민족과 타 국가는 배타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문제다. 인류애적인 요소에서 루소의 사상과 유엔인권보장에서 대종교의 가치가 어느 정도 부합되는 것부터 놀라게 했다. 책에서는 천도교가 앞에 나오나 후반부의 대종교에 강한 인상이 남은 이유는 대종교의 활동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민족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대종교도인 독립군들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투쟁하기를 원했다. 물론 군사독재에 의한 국가에 대한 충성은 국민에 대한 억압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제와 독재에 억압받는 국민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대종교가 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은 그나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이름아래 누군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아울려 지내야 하는 이화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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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보내야 한데, 요새 사회를 보면 더욱 생각나게금 만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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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정의 - 위기의 시대에 읽는 인권과 정의의 투쟁 역사
정경환 지음 / 이경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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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권과 정의>라는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갑자기 국내에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안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여객선을 탑승했는데, 선박운항 중에 중심을 잃고 선박이 침몰한 것이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470명 전후로 추정되고, 생존자보다 사망자 내지 실종자의 수가 더 많았다. 우리나라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생긴 몇 안 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 희생자들은 아직 미래조차도 열어보지 못한 고등학생이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하면 이번 비극은 단순히 끝날 일은 아닐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은 자의 주변사람들은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정신적 외상증상으로 우울증 내지 각가지 신경정신 병적인 증세를 안고가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trauma는 눈으로 드러나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인 세계이므로 억지로 고칠 수도 없고 가릴 수도 없다. 오히려 보이지 않은 내적세계이므로 계속 안고 가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왜 <인권과 자유>라는 책이 이 사건을 두고 나는 연결을 짓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인권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하거나 도구로 삼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세상 때문이다. 인권과 선박사고의 연계성에서 이 비극의 시작은 단순히 선박안전을 지나 그 근본이 되는 사회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다. 왜 그럴까? 만약 선박을 운항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경험으로 통해 운항을 잘 한다고 해도 세상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을 수 있다.

 

인지의 불찰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대형사고가 아닌가? 조금이라도 안전을 생각했다면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왜 안전을 중요하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안전이란 것은 무슨 사고로 인해 어느 인간의 생명과 재산에 위험이 가지 않기 위해 사전에 예방하고, 설사 사고가 나더라도 신속한 조치로 통해 최소한의 피해로 줄이기 위한 절차다. 안전을 지키는 것은 사고가 나지 않거나 사고가 나더라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다. 안전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안전이 부실하고 무너지면 누가 다치게 되거나 또는 누가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닥치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위해서고,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실천하는 행동이다. 배에 달린 안전도구가 부족하거나 관리가 부실하고, 안전을 위한 선원교육도 그렇고, 승객의 안전을 고려해야할 선박 내의 승무원들과 또는 그 선박을 고용한 회사도 그렇다. 그들은 승객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돈이었다. 물론 시장경제를 생각하고, 이익을 생각하면 승객유치로 통한 이윤창출은 기업의 목적이다. 그러나 기업은 기업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 내지 의무가 있었다.

 

최소의 경계를 무너뜨린 이상 상업에 대한 도리란 사라진지 옛날이다. 한국 불감증 중에 몇 가지가 있으나 안전과 환경이 더욱 그러하다. 이런 것에 생각하는 인식은 기업의 이윤을 깎아먹고 오히려 기업의 재정에서 쓸데없이 낭비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참사가 일어나고, 큰 환경오염이 발생했다. 진도 앞바다에 죄 없는 어린 영혼이 자기가 찾아가야 부모의 품에 가지 못하고, 추운 바다에서 들리지 않을 진홍곡만 울리고 있다. 배가 침몰하고 안에 들어있는 많은 물품들을 바다를 오염시킨다. 만약 이런 사고가 없었다면 인간의 생명과 소중한 자연을 망쳤을까?

 

나는 그 문제의 근본을 인권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왜 태어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에서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 물론 인간의 존재론적인 고찰에서 살아가는 것은 또한 죽어가는 것이다. 죽는 것이 있기에 살아있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아야 한다. 만약 선박회사와 선장이 조금이라도 타인을 생각했다면 과연 저런 사고부터 나왔을까? 하다못해 저런 사고가 터져도 허무하게 대처했을까?

 

지금 TV와 신문에서는 하루 종일 저 사건에 대해 다룬다. 선박회사의 회계에 나와 있는 지출내역이나 선박 내의 안전장비, 승무원들의 심문 등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전초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예전에 삼풍백화점 사건이나 페리호 사건이나 대구지하철 사건도 그렇다. 그것뿐만 아니다. 외국의 어느 유명한 자동차 회사는 부품 하나 더 보강하는데 몇 백 원만 투자하면 교통사고를 줄일 수 있는데도, 부품비용이 아까워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세계적으로 명작영화 중에 하나인 <타워링>에서도 건축자재만 똑바로 사용했다면 대형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소한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 이익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안전을 무시하다가 그 이상의 피해를 남에게 안겨주고, 그 가해자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남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돈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했다면 어떻게 흘러갔을까? 내가 정말 안타까운 것은 저 학생들이 죄 없이 죽어가는 것보다 왜 죽어갈 수밖에 없냐는 것이었다. 시간을 흘러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다시는 이런 비극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주어야 한다.

 

위에서 내가 정신적 외상이란 단어를 거론했는데, 저런 사고를 당한 사람과 주변 사람들은 평생 그 충격으로 심리적, 정신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이번 일이 지나가고 똑같은 사고나 유사한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 예전의 충격이 다시 떠오르게 되어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게 된다. 그런 일들은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어릴 적에 성폭행 당한 여성은 남성이 옆에만 와도 공포에 질리며, 군인들의 의해 학살당해 죽은 사람의 가족들은 군복만 봐도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그리고 실제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조차도 정신적 외상으로 우울증에 걸려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평범한 인간으로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당하게 되면 정신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건강한 신체만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과 심리도 필요하다. 건강한 세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 자유와 평화라는 기본적인 명제가 필요하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인권이다. 인간의 권리가 소중하고 필요하기에 자유와 평화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인권이 무시된 인간에게 자유도 없고 평화도 없다. 오로지 억압과 불행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인권과 자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인권이 무엇이고, 정의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깨끗한 입으로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실질적인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인권이 없는 인간의 정의란 과연 통용되는 것인가?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가? 인간의 권리는 이른바 천부인권이라고 한다. 하늘이 부여한 인권,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인권, 대한민국 헌법도 다 인권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도 인권을 유린하고, 짓밟으면 심지어는 생명조차 아무 망설임 없이 파괴하는 사례도 있다.

 

인권이 왜 중요할까? 인권은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이며, 인권이 없는 국가는 세계화가 된 현실에서 매우 도태된 국가라는 점이다. 세계에는 UN이라는 국가연합이 존재한다. 물론 UN이 모든 국가분쟁과 세계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도 최소한 UN의 존재성에 따라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UN총회에서 선언문으로 채택된 글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태어났으며,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1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나타난 모든 권리와 자유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국제적 질서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28조), 모든 사람은 종족,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혹은 기타 의견, 민족적 혹은 사회적 신원, 재산 가문, 혹은 기타 지위 여하로 인하여 하등 차별을 받음이 없어 본 선어에 발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을 가진다(2조).”이다.

 

만약 인권을 무시한다면 UN에서 정한 선언문을 무시하고, 국제연합의 정신을 무시하기에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이야말로 세계평화를 어기고 인류발전을 더디게 하는 해로운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권보다는 오히려 이권에 치중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본성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고, 그런 이기적인 조건이 부합하여 공리주의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인간이 이타적인 이유는 그 자체로 실천이성적인 정언명령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정언명령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언명령에 의해 수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정언명령이든 가언명령이든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인권을 위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많이 따른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으로 통해 인간에게 인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많은 인민(people, citizen)들이 피해를 받게 되며, 그것은 결국 그 나라의 근원마저 흔들리게 되는 알 수 있는 것이다. 1789년 7월 프랑스 바스티유감옥의 함락과 더불어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은 귀족과 왕족, 그리고 종교인들의 지나친 욕심과 향락으로 인해 국고는 줄고 국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비참한 생활을 하는 원인은 결국 지배계급의 부조리한 정치체계였고, 그런 부조리가 혁명을 봉기했다. 혁명의 근원에너지는 민중의 분노였으나, 그 화살의 도화선은 루소였다. 루소는 자연주의자로서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지닌 존재나 사회에 소속되므로 억압의 사슬이 묶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슬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제도로 통해 “모든 국가의 권리는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각자 하나의 존재이어야 하고,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루소는 계몽주의철학자이면서도 한편으로 반계몽주의철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이 프랑스인권선언문부터 시작하여 UN선언문, 심지어 대한민국헌법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 루소를 생각하면 최근에 어떤 사람이 지은 책을 보면 웃기지 않을 수가 없다. 뒤에 생 쥐스트에 대해 나와 있는데, “자유주의의 적은 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것은 이른바 본인이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인권과 정의>에서 그런 자유주의자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생 쥐스트를 생각하니 그의 옆에 있던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이 생각난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실행한 인물이나 본래는 자코뱅파에서 프랑스대혁명 영웅 중에 한 명이다. 그런 그도 자유는 우리만 아니라 상대에게 줘야 그 자유가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법조인이 적은 책 내용에서 생 쥐스트를 말하기 전에 로베스피에르나 장 자크 루소를 말하면 어떨까 싶다. 왜냐하면 <인권과 정의>의 저자는 다소 보수주의적 성향이 있다. 보수주의라도 우리가 아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철학에서 말하는 의미다. <인권과 정의>에서 보수적 관점은 헌법의 정신에서 말하는 인권으로 저자의 보수적 성향은 민족주의자라는 점이다.

 

백범 김구 선생을 추모하고, 김구 선생이 말하는 민족주의로서 자국민이 스스로 국가를 세우고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생 쥐스트를 거론한 사람은 민족주의보단 국가주의에 가까워 보였다. 자신은 모르나 자유란 국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부여받아야 하는 점인데, 몇 페이지 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째든 <인권과 정의>라는 책을 보게 된 동기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철학자가 장 자크 루소 이외에도 카를 마르크스, 그리고 존 롤즈라는 사람이다.

 

<인권과 자유>에서는 존 롤즈의 내용이 나와 있다. 존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것을 드러내서 시민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만민법>으로 통한 세계적인 시민으로서 만민이 되는 것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하던 정치적 철학사상은 거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나, 그는 그런 유토피아적인 가치를 현실 구현 화를 위해 집필했다고 한다. 실제로 무척이나 책인 <정의론>에서는 다소 이상적인 내용이나 정의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현실에서 균등한 기회라는 것은 모두 똑같이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최소수혜자에 대한 권리보장에서 그들이 정치적 자유주의에 참여하기 위해 경제적인 보장과 최소한의 교육을 보장받아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자본주의국가이고, 루소는 자본주의경제체계가 들어오나 아직까지 루이16세가 지배하던 왕정이었다. 롤즈는 시장경제국가라면 루소는 봉건왕정국가의 차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인간의 권리를 중시하는 점이 분명하고, 인간에게 권리가 없다면 그 나라는 잘못된 나라인 점은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비판하고 싶은 것은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고, 그 자유를 존재성을 인정하기 위해 비자유라는 것을 대비하는 옳지 못한 일이며, 비자유로운 상대에게 자유를 주어 자신들의 자유를 같이 지키고 넓게 포섭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사상은 단군왕검께서 홍익인간 사상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소 민족주의적인 가치이기나 백범 김구 선생은 그런 사상을 잘 이해했다.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문화가 있는 나라이기를 바란 점에서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는 평화의 노래와 자유의 율동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복을 더 누리기 위해 다른 이들과 행복을 누려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행복하다는 기분을 그렇게 잘 느끼지 못하는 성향이나 그래도 행복이란 것이 저런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 것은 충분히 실감한다. 인간의 목적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인간에게 행복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권리인 인권이며, 그 인권이 곧 진실한 진리이며 정의다.

 

물론 그런 말은 쉽게 나오나, 막상 실행은 어려운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히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여 누리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자유라고 여기는 오만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행복을 짓밟고, 타인의 생명을 짓밟으며, 그러면서 그것이 하나의 정의라는 위선의 가면을 씌워 합리화 하는 인간들을 보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없는 것이다. 폭력으로 약자를 억압하는 세상에 인권이 제대로 존재할 리가 없고, 그것은 진장한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국가라면 그 나라의 국민은 자유를 가진 주인이다. 모두에게 그 권리가 없다면 그것은 파시스트 국가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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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난 철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라는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교수이다. 그의 도서 중에서 <철학에 대하여>, <재생산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프랑스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의견과 더불어 관념론과 유물론의 부딪힘에서 새로운 방향이 나온 것에 대해 보았다. 알튀세르의 경우 그는 분명히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사상가였다. 그런데 그의 저서 중에 이런 도서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고독>과 <마키아벨리의 가면>이란 도서를 말이다.

 

제목만 봤지, 실제 그것이 어떤 내용이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은 후에 왜 그런가 싶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알튀세르가 <철학에 대하여>에 제기한 부딪힘에 대한 부분이었다. 관념론과 유물론, 그것이 어디서부터인가? 흔히 유물론에 대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계몽주의 철학이 꽃피우던 18세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왜 마키아벨리에게 거슬러 갔는지 생각하면 그 해답이 있었다.

 

16세기 전후 피란체에서 거주하던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으로 적고, 또한 자신의 정치계에 복귀하기 위해 <군주론>을 집필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가 교황이 살았던 곳이고, 지금도 이탈리아 바티칸에는 국가는 없으나 국가를 초월한 세계의 지도자인 교황이 살고 있다. 교황이 지배하던 세기를 생각하면 중세유럽부터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에서 교황은 거의 신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자였다. 그런 신의 이름이 횡횡하던 시절에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선상에서 신이란 이름을 어떻게 보는가였다.

 

승리를 여신의 미소가 변덕스러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운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나, 그것과 더불어 인간의 노력과 근성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군주의 정치적 행보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운과 노력이 반반이라는 것은 운이라는 것이 신의 가호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이고, 인간의 노력과 업적이란 유물론적인 요소다. 르네상스 시대가 다가온다고 해도, 결국 당시 유럽은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신이란 이름을 가지고 지배하던 시기다.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게 아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내가 맡은 직업적 소양에서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넓은 평야에 엄청난 비가 내려 그곳이 물이 잠기는 것이라도 만약 제방이나 둑을 쌓을 경우, 그 물들은 범람하지 않거나 혹은 범람하더라도 둑과 제방으로 충분히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천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홍수량과 홍수위를 미리 예상하여 하천은 폭과 제방의 높이 그리고 둑의 넓이를 고려하여 홍수피해를 저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호우가 너무 심하게 내릴 경우 모든 피해를 막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으로 막아 큰 타격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인간에게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란 어떻게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행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사자와 여우를 모두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여우의 민첩하고 예리한 사고력, 그리고 사자와 같은 강한 힘과 집행능력을 말이다. <군주론>을 읽다보면 분명히 이 책은 위험한 책일 수 있다. 절대적인 군주가 강한 통치력을 가지기 위해 갖은 모략과 전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딱히 위험하다고만 여길 수 없었다. 아쉽게도 <군주론>에선 군주가 견제해야할 대상이 누군지 정확히 명시했다.

 

그것은 자국을 위협하는 적국, 그 적국을 맞이하여 전투를 벌일 때 같이 전쟁을 수행할 타국 원군과 용병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국가의 안전을 군주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 그것을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하나 용병은 자신의 국가가 아니기에 최선을 다해 싸워주지 아니하며, 타국의 원군은 결국 자신의 국가가 아닌 자신들만의 국가의 주군을 위해 싸워주므로 최후에 승리할 경우 모든 승리의 전리는 원군이 좌우를 결정하는 셈이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임진왜란에서 왜국의 침입에서 명나라를 조선에 합류하도록 했으나 갖은 노략과 패악질만 부렸다. 또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한국의 운명을 외국에 넘긴 셈이 되었다.

 

광복 이후 독립국가가 아니라 신탁통치에 의해 북과 남으로 갈리어 전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하면 그 나라의 권력은 남의 국가에 의해 결정되고, 자국민의 안전을 지키기가 곤란해진다. 설사 지킨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대가비용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문제를 이미 16세기에 지적을 했고, 로마의 공화정과 과두정, 혹은 역사적 사실에서 나온 비극이나 교훈을 찾아 <군주론>에 명시를 해놓은 것이다.

 

<군주론>에서 보이는 국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무엇인가? <군주론>을 읽는 순간, 마키아벨리의 서구정치철학사에서 <군주론>을 통해 정치에서 철학이 분리되었다고 본다. 이전까지 정치적 요건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라는 철인군주가 존재했었다. 철인군주는 강력한 육체와 정신력을 가진 군주로서 뛰어난 지략가이면서 전사, 그리고 철학자이어야 한다. 군주라는 존재는 철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완벽한 존재, 미적인 존재였다. 이와 달린 <군주론>은 군주는 완벽한 미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인 존재처럼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철학군주가 아니라 계략군주가 되어야 한다. 지금으로 봐서는 매우 잔혹하고 끔찍할 수 있다. <군주론>에선 가차 없는 공포와 처벌을 가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유럽사회에서는 유럽대륙 내에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서로 인접했기에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한 순간 국가는 패망하고, 적에게 잡힌 그 나라의 군주와 귀족들은 어김없이 저자거리에서 참수를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군주와 귀족은 죽더라도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그 나라에는 그냥 생업에 종사하는 주민들, 즉 국민들이 존재했다.

 

고대 중국에서 공자의 정치철학에서 민(民)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군주의 자리를 지키고 명예롭게 보이기 위한 술책을 제공하나, 그것의 모든 시작점은 결국 국민이었다. 뒤로 갈수록 귀족과 국민에 대한 거리에서 귀족에게 환심을 사면서도 한편으로 국민에게 좋은 군주로 인식을 받아야 했다. 군주가 귀족에게 환심을 사야 하는 이유는 귀족이 자신만의 권력을 잡아 언제든 군주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고, 국민에게 환심을 사야하는 것은 결국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존재는 타국의 원군도 용병도 설사 귀족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군주로 모셔주는 국민들에 의해서이다. 군주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국민이라는 점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고려하여 만든 서적이라고 한다. 이제 갓 운 좋게 독립을 한 자신의 나라에 언제 타국의 침입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고, 그것이 단순히 왕족과 귀족 같은 정치적 권력자에게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문제가 국민들에게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제시하는 의견 중에 군주는 낭비를 삼가야 할 것이나, 만일 다른 나라의 국민들의 재산을 강탈하여 자국의 군인이나 국민에게 주는 것은 찬성한다.

 

생각하면 자신의 국가가 타국을 정복하는 것에 대한 이익을 생각한 만큼, 역으로 돌리자면 타국이 자국을 침입하면 자국의 국민들이 노략질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통해 이른바 마키아벨리주의를 만들게 한 인물이나, 그는 공화주의자란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공화주의자는 평화를 모두 조화롭게 나누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인데, 그런 자신이 엄격하고 교활한 군주를 앞세운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에게 정복당하여 비참한 삶과 심한 피해를 받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군주가 되는 인물은 무릇 그 자신의 보위를 위해 결국 나라의 보위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만큼 마키아벨리는 군대가 바르게 운영되어야 하고, 법이 바르게 되어야 하는 것을 원했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최근 국내에서 사병자살로 인해 위로금을 간부들이 착복하거나 또는 각종 성범죄나 의문사고로 인해 군부대가 바르게 되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런 현실이 부딪히면 결국 군인이 되는 자, 그러니깐 나라를 지키는 사람은 국민인데, 그 국민들이 군인이 되어 적절한 관리를 받지를 못하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저하된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군주의 생명이 직결되는 것은 국민들에게 사랑이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가다.

 

군주는 너무 난폭하거나 흉악할 경우 밑의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국민들에 의해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군주는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도움이 되는 신하를 잘 뽑아야 하고, 그 신하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아이러니한 것은 마키아벨리는 거의 모든 인간에 이기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결국 군주도 이기적이고, 국민도 이기적이라면, 신하 역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의 조건에서 신하의 충성을 위해 무엇을 바라는가? 군주는 무릇 신중하고, 현명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 신하 소수 어느 대상에게 의존해서 안 되고, 너무 많은 신하에게 의존해서도 안 되면, 출세와 이권을 위해서만 올라오는 신하도 견제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정확히 선택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중간의 지점, 혹은 알튀세르의 관념론과 유물론의 부딪힘에서 발생되는 우연처럼, 계속 부딪히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부딪히기 전에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사전에 미리 계산하여 부딪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적 조건에 내몰릴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측하지 못하는 운이 누군가에게 행운이고, 누군가에게 불운이다. 그렇다면 그 운에만 맡기지 못하기에 평소 행실에서 드러난다. <군주론>에서 중요한 정치적 공략과 혹은 분리되어도 끝까지 남아있는 철학적 윤리는 절대로 국민에 대한 재산과 부녀자 강탈을 하지 마라는 것이다. 국민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는 순간 군주는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귀족의 견제와 더불어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 것 자체가 바로 이것이다. 산업을 장려하고 농업을 흥행하게 하는 점은 바로 군주를 위한 최고의 방법이 국민을 안전하게 보살피는 것이다.

 

생각하면 <군주론>의 가치가 현실을 보면 조금 기분이 묘하다. <군주론>은 독재자의 것이 아니라 독재자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짜 군주로서 국민을 대하는 것이 요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군주론>이 집필 시기는 중세유럽이고, 계급이 왕족과 귀족이 있어도 최하층의 농민이 있다는 생각하면, 정치적 판단력은 결국 일부에게 정해져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도시국가도 10%의 남자만 정치에 참여하고, 그들은 직접 폴리스를 지키기 위해 병사로서 싸웠다. 중세에서는 기사라는 직업이 농민과 다르고, 오히려 국민들은 기사보단 일개 보병으로 싸울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국민에게 군주가 의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지켜줄 자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환심을 사는 것만이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는 셈이다. 지금에 와서 <군주론>이 통치자 하나에게 가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대중문화라는 군중심리를 생각하면 미디어에 대한 부분이 효과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면 <군주론>을 읽을 필요가 있다. 통치자와 그 주변의 관료들은 조금 자신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군주론>에서 가장 조심할 주변인물로는 아첨꾼이다. 아첨꾼이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것만으로 국가의 손해인데, 그들이 탐욕스럽다면 더욱 어려운 형국이 될 것이다.

 

아무튼 <군주론>을 읽으면서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고, 그 중에서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공과 타인의 이익이란 이름으로 가면을 쓰기도 한다. 아마 그런 자들이 마키아벨리가 가장 경계하는 내부의 적일 것이다. 과연 <군주론>을 읽으면서 강한 군주란 무엇인지 다시금 볼 필요가 있다. <군주론>에서 21세기와 어울리지 않았던 이유는 이때는 왕정시대고, 왕은 주로 무력을 직접 통솔하는 장군이었다.

 

그렇기에 주변의 국민들을 제대로 볼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통치자들은 국민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이지 않은 현실이다. 안 그러면 차라리 괴벨스와 같은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편이 오히려 정치적 이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사용하지 않은 편이 좋을 것이다. 현실을 속일 수 있어도 현실의 문제점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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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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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식당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저녁을 먹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이야기 흐름이 나왔다. 나 같은 경우, 약자의 편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치관은 사람들에게 다소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본래 그것이 헌법이나 혹은 자유주의적인 철학이다. 왜냐하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늘 가지고 다닌 프랑스혁명의 영웅이자 공포정치의 최고에 군림하던 로베스피에르조차도 인정한 부분이다. 그가 파리의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강조한 부분이 있다. 자유란 자신에게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있어야 그 자유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말이다.

 

자유라는 것은 결국 자기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인간의 최고의 가치이며, 진리이다. 하지만 그 자유라는 것이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사항이라고 하여 타인에 대한 입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튼 그 친구는 나보고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면서 예전이면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났으면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딱히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분법적인 비난보단 그런 나의 생각에 대해 말한 것이다. 나는 약자에 대한 입장에 대변하는 것이 본래 자유주의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그것은 자유주의 사상이 기본이라 했으나 친구는 아무래도 시대가 바뀌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으나, 실제 자유주의 철학사상으로 이미 18세기 장 자크 루소와 더불어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그리고 20세기에는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 등과 같은 사상을 일반인들이 알기란 어렵고, 책이 있다고 해도 읽지를 않으며, 읽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미시적인 접근법에서는 나는 무지하고 어리숙하나, 거시적인 구조와 고찰에서 나는 친구들보다 밝다. 자기 앞날조차 제대로 감지하기 어려운 입장에서 큰 구조를 본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생각해보면 많은 학자들이 그렇지 않은가 싶다. 자신의 입장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겪던 사람들이 결국 큰 이름을 날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하여 내가 그런 사람들과 같이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야 말로 오히려 자신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 같은 경우 어떤가? 그렇게 사는 것이 재미없다고 여긴다. 늘 같은 일상과 생활, 대한민국 소시민으로 태어나 그렇게 살아가는 나로서는 일확천금의 기회조차도 없다. 게다가 나는 로또복권과 같은 행운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현실에 낙관적인 기대나 희망도 그다지 가지지 않고, 그런다고 현실에 대해 뭔가 할 수 있다는 의지나 추진력이 없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정말 무기력하고 지루하며 비관적인 관념에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 다소 그런 무기력한 일상에 대해 지쳐있으며, 비관적인 관념이 내 의식을 자리 잡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꼭 나쁜가라는 생각에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는 분명 좋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 못하고 나쁜 것이라고 여긴다.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생각하는 것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라고 의문을 던지면 인간은 자아에 대해 들어가고, 자아에 대해 들어가면 그 자아에 대한 형성의 주변을 보기 시작한다. 즉 인식과 존재에 대해 각인하면서 인간은 본인만 아니라 타인, 그리고 타인들이 사는 사회와 그 사회가 존재하는 국가와 인류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이란 책은 바로 이런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다른 책과 달리 매우 경험적인 저자의 본인을 통해 현실의 모순과 그늘 그리고 그것을 보는 눈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예전에 가라타니 고진이란 일본 문화비평가의 책을 읽을 적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근대문학의 종언>이었다. 읽은 시기에는 상당히 어려웠고, 단순히 문학을 떠나 하나의 사회와 정치 그리고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때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쓰메 소세키였다.

 

지금 일본의 천엔 지폐의 얼굴이 새겨진 인물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을 생각하면 나쓰메 소세키는 만엔보다 높은 가치를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서적을 읽는 순간 지식인이 가지는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일본이 러일전쟁 전부터 하여 1916년 사망 전까지 많은 저술을 남긴다. 그의 저서에 담긴 근대문학에서 무엇을 말하는가? 생각해보면 나쓰메 소세키는 근대문학이라고 해도 근대문학 치고 조금 다른 감이 있다.

 

그의 서적에는 근대라는 것에 대해 같이 조류를 타는 것에 긍정적인 요소보단 오히려 부정적인 요소가 강했다. 특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같은 경우, 작품 소재가 러일전쟁 이후에 나온 것이고, 러일전쟁에 대한 승리로 모두가 들뜬 상태인 반면, 작품 내의 주인공은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관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장병을 위한 모금활동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러일전쟁의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눈으로 본 것이다. 바로 근대라는 것은 거대한 서사 즉, 인간이 인간 본인에 대한 가치보단 국가와 사회라는 하나의 거대한 틀에 맞추어 가는 것이다.

 

일본 근대문명이 결국 군국주의의 길로 열렸고, 메이지유신은 에도시대의 도쿠가와 정부를 천황중심의 군사국가로 변모했다. 기술의 발달과 세계의 흐름에 인간이 거슬러 갈 수 없어 거기에 억지로 흘러가는 소시민의 모습에 나쓰메 소시키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좋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런다고 에도시대나 혹은 이전시대를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자본주의라는 근대화적인 경제체계가 들어오면서 인간의 정신세계가 점점 가라앉는다고 본 것이다. 문명이란 과연 인간에게 좋은 방향을 준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인간을 더 망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런 사고는 18세기 장 자크 루소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발견한 것처럼 근대문명이 결코 인간에게 좋지 아니한 것을 안 것이다. <고민하는 힘>의 강상중 씨의 생각대로 그도 느끼는 것이 바로 인간의 근대화와 더불어 인간이 가진 벽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이 결국 인간을 소외와 좌절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결국 하나의 도구이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안정성을 위해 낯선 이방인을 외면하고 차별하는 것인가? 강상중 씨는 일단 한국인이었으나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교포였다. 어린 시절에는 일본에서 조선인이라고 멸시받고,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왔다고 낯선 눈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 차별당할 수 있다.

 

그것도 어려운 경제여건으로 가난이라는 고통도 짊어지고 살았을 것이다. 차별과 가난 그것이 지닌 강상중 씨에게 다가온 문학가와 사상가가 바로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가 겸 문학비평가였고, 막스 베버는 경제학자다. 개인적으로 막스 베버에 대해 읽어본 적은 없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도서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본 자본주의정신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영국의 경제학자가 아니라 도덕철학자였다.

 

그의 유명한 경제학의 성서라고 볼 수 있는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는 시장경제에 대해 논하기를 “그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경쟁이 부를 만들고 풍요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으며, 설사 경쟁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 속에 도덕과 윤리가 존재하는 한, 이른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서 불평등과 불균형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반해 막스 베버는 “마지막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이들은 인간성이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이미 올랐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할 것이다.”

 

<고민하는 힘>에서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그들은 바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즉 인간의 이성보단 동물적인 욕심이 합리적인 이성이 되어버린 존재를 두고 말한다. 생각하면 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이성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논리라는 것은 자기의 손익득실관계에서 명확히 자기중심적인 형태로 이어지고,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이기심이 만일 그 논리와 부합될 경우 인간이 주어진 논리란 자기합리화 시키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가령 힘이 있는 자가 약자에 대해 부당한 행위를 하여 사익을 챙겨도 그것은 하나의 논리로 이어지는 합리성으로 이루어진 절차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본래 중세후기의 유럽에서는 근검절약이었지만, 그게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근검절약정신이었으나, 추후에는 타인에게 전가되어 공장의 근로자에게 전개된다. 그런 정신은 타인에게 병들게 하여 처음에 육체가 다음으로 정신이 파괴된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근검절약은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물론 타인에 대한 근검절약과 달리 자신에겐 온갖 보석과 고급 의상과 향수로 도배로 한다. 이런 점을 많은 책에서 지적한다.

 

18세기 프랑스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 이전에는 계급사회가 확연히 존재했다. 그것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계급이 귀족이나 왕족, 성직자라는 신분이 되지 못하면 그런 상징적인 요건을 가질 수 없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많은 제약과 통제가 따랐다. 그런데 이제 계급이 평균화되었다고 하면 계급을 정하는 것은 바로 재물의 차이다. 그래서 갖은 사치가 이루어지고, 그 사치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책에서도 그런 내용은 등장하고, 그런 그들이 누리는 교양이나 품격을 우습게 보는 모습이 나온다.

 

인간의 정신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탐구가 아닌 단순히 몸으로 둘러댄 모습에서 가식과 허위의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근대라는 공간은 인간에게 개인의 사유와 표현 그리고 의사에 대한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했다. 정작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도 사람들은 어떻게 활용해야할지를 몰랐다. 그렇다면 정말 필요한 것보다는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기준점이 필요했다. 과거에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그것을 누리는 자에 대한 욕망이 인간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런 세계에 대해 강상중 씨가 잘 보는 이유는 그는 예초부터 이방인이었고, 외부에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놓인 세계가 다른 이들과 놓인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를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사람이 거기에 속한 세계에 있으면 그 세계에 대한 문제와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다. 그저 돌고 돌아가는 다람쥐 쳇 바퀴처럼 뛰어갈 뿐이다. 하지만 그런 세계를 알아내고 본다는 것은 재미없고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한 것을 혼자만 알고, 뭔가 아니지만 그대로 흘러가는 모습을 말이다.

 

특히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으면 강상중 씨의 말대로 근대일본시대의 사람이나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매우 친근하고 전혀 남의 일이 아닌 이야기로 다가온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오히려 근대인보단 현대인에 더 어울리는 책인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저서가 근대문학이고,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사상은 거대한 것이 흘러가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현실에 그냥 지나쳐 가는 게 좋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돌아가 내 친구와 저녁 먹을 때 나눈 대화에서 나는 이 책에 대해 어떻게 보는 것인가? 남들에게 딱히 내가 가진 생각을 강조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계속 그런 생각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나라는 사람이 느끼는 무기력과 비관적 관념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점이다. 막스 베버나 나쓰메 소세키나 혹은 그들을 좋아하는 강상중 씨는 분명 이런 세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 염증을 느끼거나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말년의 나쓰메 소세키는 위궤양으로 죽고, 막스 베버는 폐렴으로 죽는다. 둘 다 60살도 채우지 못한 것에서 말이다.

 

지나친 스트레스와 우울증, 그리고 말년의 힘든 고통 속의 죽음, 그들의 인생에서 재미는 있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자신에 대해 자아성찰과 반성에서 그런 것조차 없는 것이 허무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쾌락과 향락도 좋은 재미는 분명하다. 인간은 즐거운 것을 좋아하니 말이다. 그런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을 모른 채 그저 그냥 살아가는 능숙한 모습에 우리는 진지하게 인생을 임하는 것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민하는 힘>에서 강상중 씨는 청춘에 대해 말한다. 청춘은 좋은 말이나, 그것은 정말 나이에 대한 생물학적 수치인가? 아니면 생물학적인 조건을 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인가? 그것을 결정은 자기 자신이나, 적어도 그런 계기라도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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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1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리뷰에 핵심을 찌르는 요약이 있군요. 이런 리뷰를 좀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할 터인데
일단 길면 안 읽더라고요...

만화애니비평 2014-02-10 17:47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곰곰발님이 알아주시면 그것으로 만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