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 1 -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1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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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하위문화에 대한 리뷰를 적으면서 아직까지 구색을 갖추기가 어려운 비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비평이란 것은 문학에서 다루는 분야이기도 하나 때로는 사회나, 정치 그리고 그것을 많은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영상매체 즉 미디어라는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비평이란 것을 다룬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혹은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가? 단순히 인상이나 상징적인 장면이나 행위, 단어나 사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판단력에 의해 사고하고 다시 언어로서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대부분을 글로 이루어진 활자본보다는 주로 영상매체, 거기다가 음향까지 입혀진 멀티미디어로 접촉한다. 물론 대부분 기사거리나 구경거리는 영상과 소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보단 영상에 더 큰 정보력을 보여줄 수 있다. TV에 나오는 뉴스앵커나 혹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 아가씨와 아줌마들이 열광하는 드라마조차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소리는 계속 이어지지 않으나 영상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소리로 전달되는 인간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질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으로 영상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 영상과 소리에서 영화감독 칸단스키는 인간의 감정을 좌우하는 것이 소리가 크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작용하는 소리로는 그 전달력의 지속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소리는 물리적 에너지를 가지는 파동이기 때문에 에너지의 파동이 멈추는 공간에서 소리라는 에너지는 사라지고, 인간의 청각에 의해 더 이상 소리는 에너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진 기억이란 공간 안에 저장된다. 물론 그 저장 공간이 디드로의 <백과사전> 전부를 들어갈 수 있는 용량이라고 해도, 결국 소리라는 에너지는 기억의 관념에서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망각의 동물이고, 방금까지 들은 소리의 강력함에도 어느 순간 망각하여 잊을 수 있다. 왜 그럴까? 당신이 운전대를 잡고 시내도로를 주행하는데, 뒤에 매너가 전혀 안 보이는 사람이 계속 경적 음을 울리기 시작한다. 분명 보통 사람들이라면 짜증이 밀려오고 때에 따라서 범죄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 차가 다른 길로 가거나 앞지르게 되어 다시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에 집중하면 그 소리에 의한 감정과 또는 그 일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게 된다. 마음 구석에는 분명 그렇게 시원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나, 적어도 소리라는 것은 우리의 정보력에서 계속 사라진다. 어떤 만화책을 매일 1번씩 읽다보면 지겨울 수 있겠지만, 같은 노래를 하루에 1번씩 듣는다고 하여 바로 지겨울 수가 없다.

 

그것이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차이다. 보는 것은 자신의 지식으로 이어지는 것과 동시에 본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에 대한 고찰에서 얼마만큼 알아보고, 그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인식하느냐의 차이는 결국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한 판단의 척도 내지 기준, 상황까지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내가 주로 감상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란 매체는 눈에 보이는 이미지세계의 향연이다. 이미지란 실재하지 않은 존재가 내 앞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로 통해 보는 세상에서 설사 애니메이션영상이 아니더라도 실사영상조차도 모두 허구이고 가상의 세계다. 그 진실은 1895년 뤼미에르형제가 제작한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라는 작품을 예를 들면 알 수 있다. 당시 흑백필름으로 보던 사람은 진짜 기차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 영화를 지금 우리가 본다면 가소로운 아이들의 장난으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라는 것은 거짓의 세계이지만 거짓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미지의 세계가 결국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처럼 이미지는 거짓이어야 하겠지만, 그 자체로서 사실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누가 봐도 하나의 새로운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미지의 이율배반에서 우리는 사진의 발명과 사진이 연속촬영이란 기계적 도구, 그리고 디지털시대라는 멀티미디어 공간 구축으로 인해 진실 그 자체는 미스터리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상의 이야기가 사실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 과정조차도 더 이상 우리 대중사회는 인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나의 가상세계가 하나의 진실세계에 반영된 세계처럼 말이다. 왜 내가 드라마와 뉴스를 두고 말하는가? 가령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 작품 내에서 죽게 되면 많은 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실존하는 인물은 죽지 않았지만, 왜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하지만 그 배우가 어느 행사장에 등장하면 전광석화처럼 팬들은 그 인물에게 모인다. 그의 연기에서 그는 죽었는가? 아니면 현실에서 살아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눈에 비추는 것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아있을 뿐이다.

 

20세기의 영상장치의 발달이 중요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장치의 발달과 인터넷의 발달이다.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미디어를 제한적인 공간에서 이제는 제한을 넘어 그 제한 없는 오픈라인이 새로운 데드라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정보의 공유에서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정보가 어느 자리에서 쉽게 구하고 즐길 수 있다. 문제는 그 정보의 원전이 과연 사실과 거짓을 떠나 진실성을 가지는 것이다. 언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의 진실보다 공정성이라고 한다.

 

이제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지라는 매체를 공정성을 떠나 단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동물적인 반응은 이미지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단지 인간 그 자체가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에 읽어본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 인문학>은 바로 이미지에 대한 인간사회를 다루고 있다. 이미지라는 것이 예술과 기술, 그것을 미학적으로 보는 미학자의 견해에서 단순히 예술과 미학의 <이미지 인문학>은 예술을 넘어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인간의 현실까지 파고 들어간다.

 

처음에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란 단어를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지에 대해 우리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이미지가 가장 큰 파장을 준 것은 바로 사진기술의 발명과 발전과정이었다. 하지만 사진의 이미지가 리얼리즘이란 사실주의를 만들어낸 획기적인 도구라고 해도 사실 사진 이전의 이미지가 엄연히 존재했다. 사실이 인간의 초상화 대신 증명사진을 내놓게 되면서 화가는 사실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넘어 초현실적인 세계를 그리게 되었다.

 

하지만 사진기가 나오기 전에 분명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에 대해 카메라에 의해 뽑아진 사진이 아니라 화가의 손에서 태어난 그림이다. 역대 왕의 초상이나 귀족들의 모습들은 당시로는 예술적 기능보다는 차라리 역사적 기록을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작품이 되어야 했고, 루이16세의 목을 자른 후에 내보인 바스티유 광장의 그림과, 루이의 목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묘사한 그림은 이젠 예술품으로 남게 되었다. 그 그림이 루이의 모습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루이는 아니다. 그리고 사진기로 오드리 헵번을 촬영해도 그 사진 자체가 오드리 헵번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흑백사진으로 나온 그녀의 모습과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면서 여전히 그녀의 매력을 느낀다.

 

사진과 영화로 보는 오드리 헵번의 매력은 여전히 후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던진다. 얼마 전 내가 추억의 애니메이션으로 본 <무책임함장 테일러>의 OVA에서 라르고의 공주가 오드리 헵번이 나온 <로마의 휴일>을 계속 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고 말한다. 가상의 세계에 있는 존재가 실제의 있는 존재를 가상으로 만든 작품을 본 것을 두고 감상을 말하는 것을 보면서 가상의 세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가상은 현재 실존하는 우리나, 심지어 우리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공간조차도 또 다른 가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즉 이미지라는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구성되기에 이미지라는 것은 가상의 세계이나, 계속 이어지는 영원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연예인들이 육체는 늙어가지만, 우리의 기억이나 추억에는 나이라는 개념은 크게 다가오지 못한다. 예전의 팬조차도 자신이 늙어가는 것에 대해 인식하나, 그 예전의 자신이 좋아하던 연예인들은 아직까지 그 당시 그 모습의 영상으로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드리 헵번이 나이가 들어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우리의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의 공주님이어야 했다.

 

이미지의 모순이란 바로 우리 인간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인문학>에서 소개한 챕터 중에 최근 일어난 사회적 현상을 접목한다. 이미지가 이제는 가상으로 고정된 게 아니라 현실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은 다르게 보자면 우리가 관객이 되어 계속 구경해야 하는 하나의 매체다. 이와 달리 실시간적인 이미지의 연속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부여했다. 가령 시위현장에 대한 기사를 보다보면 최근의 큰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실제 그 공간에서 일어난 상황을 알리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규모를 축소하거나 또는 그 상황이 발발한 원인과 사건전개에 따른 결과론적인 견해조차도 왜곡하거나 축소한다. 이런 문제는 미디어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본력이 필요하고, 그 자본의 뒤에는 권력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라는 영상매체를 단순히 거대한 자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만든 새로운 매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팟캐스터나 아프리카 TV 내지 혹은 실시간 중계방송, 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정보가 수시로 올라오는 것을 우리는 항시 얻을 수 있다.

 

그 정보가 확실하든지 혹은 아니던지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우리 스스로가 미디어의 영상과 동화되어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저기에 있지 않으나 마치 저기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영상매체 중에 특히 컴퓨터의 기능은 우리가 정보를 받을 수 있는 만큼 역으로 되돌려 보낼 수도 있다. 실시간으로 마이크로 통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마이크가 없더라도 키보드와 마우스로 통해 상대방과 대화한다. 문제는 그 상황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관객은 자신이 마치 그 피사체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만약 그 대화가 연결되지 못한다고 느끼면 소외감에 따라 그 대화공간에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터넷 공간의 소통은 즉 오프라인이란 실존의 세계가 아니라 가상이란 온라인 세계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그 가상의 세계에 자신을 돋보이게 위해 혹은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처음 본 단어나 용어 그리고 개념이 많았으나 가장 인상남는 것은 게이미피케이션이란 단어다. 영상에서 보이는 대상과 그 대상이 보는 전경이 실시간으로 이어져서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낌을 받는 점이다. 역사라는 대상을 이제까지 우리는 TV라는 매체로 통해 일방적으로 전달 받는다면, 이제는 우리가 역사의 가운데 내지 만들어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문제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언론정보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진실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공정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진이란 영상과 그림이란 영상은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이나, 그 근본은 같아. 그것은 문자라는 텍스트가 지배하던 계몽가치관이 탈락하고, 계몽가치관 이전의 시대로 도래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늙어버린 것이 너무 세련되고 새로운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신화라는 mythos는 진실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다. 하지만 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시라는 것이 역사보다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도 그런 상황에 될 수 있다는 믿음 내지 가능성이다.

 

가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나오던 비너스는 당시 사람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여인의 몸이었을 것이다. 실재하지 않은 비너스를 한 폭의 그림에 담은 화가나 그것을 두고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이런 여자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런 욕망이 화가의 관념 안에서 꺼냈다면, 이제는 이미지의 재구성으로 통해 계속 역으로 인간에게 흘러간다. 가상의 이야기는 만들어진 이미지를 매개로 우리 인간들의 사고를 좌우한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제시된 이론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으나,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진이란 가상의 공간은 우리 인간이 그 사진이란 이야기에 빠지게 한다. 문제는 사진이란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느 각도와 방향, 조명과 배경을 두고 다른 식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최근 세월호 침몰사건이란 비극적인 사건을 보면서 희생자들의 죽음을 기리는 자리에 놓인 헌화가 인상적이다. 거기에는 대통령과 그 대통령의 이름이 있었다. 문제는 그 사고로 인해 희생자 가족들과 정부기관 사이에 분명한 괴리감이 자리 잡혀 있으나, 그 많고 많은 헌화에서 왜 대통령이름이 새겨진 헌화가 찍혀 있을까? 바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조차도 어떤 이미지화된 관념 아래 지배받는 것이다.

 

단순한 포착 역시 이미지를 보게 해주는 재미가 있으나, 그 이상의 이미지는 그 이미지 바탕이 되는 이미지가 인간의 관념 아래 자리잡혀 있기 때문이다. 진실과 현실적 조건보단 사실로서 만들어진 가상 뒤에 존재하는 커튼은, 오히려 커튼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거나 전혀 다른 것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스탈린이 폭력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정당한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볼셰비키혁명의 지도자이면서 소비에트연방 최고위원에 올라간 레닌은 처음에 스탈린을 인정하였으나, 스탈린이 교활하고 잔인한 인물을 알면서 정치적으로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레닌이 휴양지에서 쉬고 있을 때 스탈린과 사진촬영 했는데, 그 모습이 전혀 친밀하지 못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사진을 서로 자르고 붙여 마치 두 사람이 가까운 것처럼 보이게 했다. 레닌의 후계자가 바로 스탈린이기 위해서 다른 볼셰비키들을 제거하는 것처럼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 볼셰비키혁명의 새로운 신화가 되었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이 어둠>에서 나온 내용 중에 레닌(그 어른) 옆에 같이 촬영한 볼셰비키들의 사진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최후에는 레닌과 스탈린만 남는다. 거짓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실로 되어 신화적인 왜곡과 은폐를 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진리보다 예술이 우월하다고 했는가?

 

바로 은폐, 왜곡, 억압의 이야기가 왜 지금도 가상의 세계인 이미지로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다가오는 정보를 말이다. 정보의 거짓에 대해 의심하기 보다는 그 거짓에 대한 폭로 내지 비판이 음모론이 되고, 음모론 자체가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나는 꼼수다>에서 거짓과 사실을 떠나 절대 아니라고 하는 부정의 부정이 결국 대중에게 하나의 긍정이 되었다. 하지만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되어 계속 그 정보력의 가치가 긍정으로 갈수록 탈정치적인 놀이가 정치를 두고 놀았다면, 이제 그 놀이 자체가 정치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세계가 끝난 후에 이미지라는 가상의 이야기가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경우에 거짓임에도 알거나 혹은 거짓조차 몰라 가상의 영역이 현실로 침투할 경우 형이상학이란 meta-physics의 한 단계 위에 있는 pata-physics라는 형이상이상학으로 변모된다. 처음에 내가 제기한 만화와 애니메이션조차 생각하면 완벽한 pata-physics이다. 실사영상은 적어도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이 원본과 전혀 무관한 사본을 만듦으로서 파생실재로서 존재하나, 만화와 애니메이션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은 현실부재다.

 

pata-physics란 가치로 본다면 2013년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인 PISAF에서 가수 데프콘이 가이낙스와 카라에서 활동하던 사다모토 요시유키라는 만화가에게 장인어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맡은 사다모토 요시유키는 아스카라는 인물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나 가상으로 만들어내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그리고 게임으로 접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해준 셈에서 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아스카란 인물은 실존하지 않으나,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아스카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이른바 moe라고 하여 실존하지 않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캐릭터에게 마음이 끌리는 현상으로 실존하지 않아도 마치 존재하듯 대하는 것이야 말로 완벽한 pata-physics가 아닐까?

 

그렇다면 pata-physics 세계를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과 실사영상에 의해 조작된 정보가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과 무엇일까? 결국 우리 인간들은 이미지에 의해 구성받게 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점에 대해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부여하거나 그로테스크 요소보단 충격적인 사실을 가상의 사진으로 통해 세계에 알리기도 한다. 가령 베트남전쟁에서 <네이팜탄 소녀>이란 사진이 반전운동의 계기가 된 점에서 사진에서 보이는 사실적인 요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20세기 중반부터는 바로 이미지의 세계로 통해 우리의 인식과 삶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또한 사진이란 사실성에서 이제는 초현실주의적인 요소로 도입하여 사진이란 단순히 믿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왜곡과 조작의 영역으로 간 것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진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까지도 보게 해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우리 인간의 신체 안의 조직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으로 볼 수 없었지만, 현미경의 발명으로 미생물을 발견하고, 유전자구조까지 발견하여 유전자공학까지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전자구조를 발견해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아니라 현미경의 영상으로 보고, 그 유전자구조 조차도 가상의 이미지로 봐야 했다.

 

일상 자체가 이미지로 의해 현실적 조건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수술실의 bed 위로 메스를 대지 않으면 뼈의 골절을 제대로 찾지 못한 시절이 있는 반면 지금은 MRI나 CT 영상기기로 통해 뜯어보지 않은 채 영상으로 판독한다. 디지털기기의 이미지가 결국 우리 모든 것을 지배하고 존재해주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보다 “나는 가상이다. 고로 존재한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대사회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 그 자체만의 사실이란 점에서 <이미지인문학>은 미학적인 시선으로 단순히 예술을 넘어 사회라는 그 자체를 보게 해준다. 진실의 공간이 가상의 이야기로 변질될 때 예술이 될 수 있다. 예술이란 세상을 광학적으로 바라보니 말이다. 그 광학에는 사진기술이나 방법, 그리고 그 의도와 무의식적인 요건들이 끊임없이 생산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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