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 동양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4
주희 지음, 이기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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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들은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자랄 것이다. 남녀7세 부동석, 백이숙제 굶어주는 이야기들 등등 말이다. 예전에 소학(小學)에 대한 부분을 조광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면서 본 것 같다. 조광조는 소학군자로 불리는 자였고, 그의 제자와 제자의 후손은 소학을 토대로 실천주의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소학을 읽으면 정말 사소한 것에 대해 적어 놓았다. 솔직한 심정을 본다면 주희가 정리한 글이다. 소학을 보면 공자와 맹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특히 공자의 가르침이 많이 등장한다.

 

송나라가 거의 힘을 잃어 남송시대 등장한 주희가 주자학을 성립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주자의 유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주자의 소학을 보는 내내 평소 많이 듣던 말이나 내용이 많았다. 실제 아직까지 이루어지는 모습도 있다. 주자의 소학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다.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시작하여 정치권에서 높은 자는 낮은 자에게 경의를 받아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예전에 공자의 논어(論語)를 보면서 생각하나, 소학은 논어와 조금 차이점이 보인다. 공자의 논어는 소학과 다르게 실천도 있지만, 그 실천의 주체성에서 선비의 자격을 많이 따진다. 선비의 자격이 되는 것은 농민에게 즉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통치하는 방법론이다. 백성에게 농업기술을 잘 전파하는 게 아니라 농민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행정적인 절차를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마을을 형성하고, 마을을 형성하면 국가가 탄생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에서 인간의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칙이 필요하다.

 

게다가 규칙이 필요하려면 그 규칙을 만들 수 있는 자와 규칙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군주와 신하는 바로 이래서 필요하다. 군신 간의 관계성에서 충심이 중요하나 제일 필요한 부분은 민심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다. 공자의 논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소학이 역시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과정에 대한 설명은 현대사회와 많은 괴리감이 존재한다. 물론 소학에서 알려 주는 부분에서 공감대도 있다.

 

소학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와 닿은 문구는 풀이에서 나온 “부모의 나이를 알아야 하니, 한편으로 기쁜 마음으로 알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안다.”로 어린 아이거나 혹은 아직까지 청춘일 때는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부모의 나이가 인간 평균수명의 2/3 정도 지나치는 순간 문득 느낀다. 부모님이 늙어 가시고, 예전에 비해 몸이 많이 불편한 것을 말이다. 부모의 나이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인간의 수명은 어쩔 수 없는 천운일 때도 있다.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집안 내력에서 7대조 할아버지부터 증조부까지 외아들(3형제 중 맏형과 중형은 후사 없이 돌아가셨다.)이었고, 그나마 증조부는 장수했지만, 고조부는 일찍 돌아가셨다. 고조모가 힘들게 외아들 증조부를 키운 점에서 아비 없이 자라난 후레자식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두고 요새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나, 늙으신 부모님을 보는 순간, 언젠가 말없이 흙덩이 안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된다면 그 위의 조상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다.

 

소학에선 집안의 부모님에 대해 잘 모시라는 이야기와 제사를 통해 조상을 잘 모시라고 한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서구화되었지만, 한국인이란 문화적 정체성을 본다면 가족 간의 우애에서 나름 소학의 가르침은 유용하다. 하지만 소학의 한계점은 하층계급에 대해 너무 멸시한다는 점이다. 논어의 공자는 분명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고, 그 백성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학자의 의무다. 조선시대 유학자는 경구 문구에만 집착하다 전쟁의 화를 이길 수 없었고, 타국의 침략에 망했다. 진짜 공자의 가르침이라면 가렴주구의 비극을 제대로 해결해야만 했다.

 

조광조의 일화처럼 정암 선생이 도학을 실천하면서 소학을 중시한 이유는 국가의 대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하는 점이다. 선비 된 자는 청렴해야 하며, 이유 없이 소와 돼지를 죽여서는 안 되었다. 소학에서는 선비가 자애로우며 밑의 노복만이 아니라 말 하지 못하는 짐승까지 교화된다고 했다. 인간의 선한 가치가 인간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까지 덕이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 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면서 조선시대에 남자가 여러 여자에게 장가가는 일부다처제가 옳다고 했다. 나 역시 그래 여긴다. 지금 관점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워낙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남자들이 전쟁터에 가서 목숨을 많이 잃었다. 대부분 병졸은 양인이나 농민이었고, 장수나 무관들은 양반계급이 많았다. 전쟁에서 군사들이 한 부대에 최소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고 대군은 수만 내지 수십만까지 이른다. 이긴 전쟁이 아니라 대부분 패배한 전쟁에서 반 이상은 죽고, 그 반에 반은 후유증으로 죽고, 겨우 남은 자는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소학에서 내가 가장 우려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여성에 대한 인권이다. 죽은 남편에게 가족 중에 늙은 노모나 어린 아이 같이 부양해야할 식솔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사람도 없이 한 평생 혼자서 수절하라는 식은 심각한 병폐다. 과부는 다시 시집갈 수 없는데, 남자는 새장가를 드는 점에서 아무리 그 당시 전쟁에 의해 남정들이 많이 죽었다고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부들도 출가시켜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는 게 좋은 것 같았다.

 

소학은 좋은 가르침과 더불어 아쉬운 부조리가 많은 서적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소학의 가르침에 그대로 따라가라는 것이 아니다. 소학에 나온 이야기들이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흔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가 잘못된 게 있다고 그것을 비판할 수 있어도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과거의 인간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소학을 보면서 우리 시대를 다시 본다. 자본주의시장체계는 가족관계를 대가족에서 핵가족화 시켰다. 대가족 아래 시집온 여성에게 많은 멍에를 씌우는 것은 맞다. 하지만 굳이 대가족만이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는 생각해볼만 하다. 옛날 농사짓던 시기에 마을에 대부분 집성촌이 위치하여 어디의 누구 집은 촌수는 멀어도 일가집안이라 곤란한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그랬다. 요새는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시대가 오니 가슴 아픈 일이다.

 

뭐든지 옛날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고, 뭐든지 새로운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대한 판단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소학을 보며 조금 아쉬운 기분은 한국의 현실에서 나이가 어리거나 손아래의 사람을 보면 무조건 연장자 내지 윗사람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방식이 안타깝다. 소학에서는 그런 방식을 다소 인정하는 분위기가 깔려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위쪽에 있는 자라도 자신의 도리를 밝히지 않으면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부정부패가 있어도 그 문제를 제대로 왈가불가하지 못한 사회라면 제대로 굴러갈리 없다.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 좋은 얼굴로 건의하는 것 역시 한계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신하는 군주를 포기한다고 하나, 그 군주 아래 통치 받는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면 과연 옳은 말인가? 조선후기 주자학의 민폐는 바로 그런 점이다. 내가 누군데 감히 네가 그러느냐? 내가 누구의 측근인데 감히 어디서 무엄하게 말을 하느냐 등이다. 그런 꼰대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 아닌 어른은 한국에 너무 많이 있다.

 

한국에서 유학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선 소학의 가치는 조금 볼 필요는 있으나, 생각해보면 공자와 맹자 관련 도서 한권조차 보지 않은 이들이 어른의 도리를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아연해진다. 율곡 이이 선생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퇴계 이황에게 편지글로 토론을 하였다. 요새 같은 시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버릇장머리 없는 놈이라며 면박을 주었을 것이다. 소학은 어른의 입장에서 밑 사람이 의당 해야할 의무를 적어놓은 서적이다. 그런데 그 어른부터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누가 따라올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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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역시 만화애니비평님이 쓰시면 왠지 저걸 안 읽으면 큰 실수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ㅋ 유학은 루쉰선생이 워낙 강하게 까셔서 저도 좀체 읽어보지를 못 했어요 근데 이 글을보니 일본 사무라이처럼 우리 선비들 역시 자기수양에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점이에요 그런데 왜 그리 당쟁은 많은지 또 이해가 안 되기도 하구요 근데 전 십팔사략을 꼭 읽어보고 싶어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23 11:35   좋아요 0 | URL
루쉰P님의 약속을 위해 현재 박홍규 교수의 <자유인 루쉰>을 초반부 읽고 있습니다.

아무튼 선비정신이 나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덕일 선생이 무조건 옳은 게 아니라 우암 송시열과 그 일파들을 (노론세력) 엄청 비판하는데, 글자 하나 가지고 토달지 못하게 하고,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세도정치와 부정부패가 들끓게 되죠.

정약용 선생의 글들을 보면 당시 정치권의 비리와 부정이 얼마나 심하면 왕조차도 도저히 감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를 보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분들이 많으 것 같습니다. 당쟁만이 아니라 옥사나 사화를 보면 수많은 선비들이 목이 잘려나가고, 능지처참되고, 사약을 마시고, 고문을 당하고, 집안이 몰락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도 바른 말을 멈추지 않았기에 그런 과거를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 같네요. 남들에게 시대의 문제를 말하는 것조차 불편히 여기면서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답답하죠. 물론 그들은 나보고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냐고 하나, 결국 자신도 그 부조리에 갇혀 살아 답이 없는데 말이죠
 
마르크스의 『자본』 탄생의 역사 - 마르크스 40년 경제 이론 작업의 전모를 밝히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3
비탈리 비고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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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교수님의 이번 도서는 번역도서이군요.

마르크스 원전이 모두 번역하는 그날이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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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루이 알튀세르 자서전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이매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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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추후에 읽을 예정인 <알튀세르 효과>는 최근 출판된 도서이다. 아주 묵직한(870페이지 분량) 서적으로, 루이 알튀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제시한 연구내용에 대해 후세 학자들(프랑스 철학자들이 작성 한국 철학자가 번역 및 추가 작업)이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한 도서이다. 루이 알튀세르라는 학자를 내가 알게 된 동기는 이른바 사상관련 도서를 찾아보면서이다. 구조주의 4인방인 푸코, 레비스트로스, 라캉, 바르트 외에 추가적으로 구조주의에 들어 갈만한 인물이 바로 루이 알튀세르인 것이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루이 알튀세르와 저 위의 인물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거의 비슷하다. 푸코는 알튀세르의 지도받는 학생이었고, 라캉은 알튀세르 초빙으로 프랑스 최고의 교육기관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 외에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자크 데리다 등 프랑스 20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최고의 사상가들과 교류한 알튀세르는 프랑스 지성계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사실 20세기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에 세계적으로 철학과 사상의 조류는 프랑스 구조주의, 그리고 후기구조주의로 넘어간 것 같다.

 

20세기 나치만 아니라면 독일의 관념철학과 분석철학 그리고 독일에서 영국으로 추방된 마르크스주의까지가 독일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란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전쟁이 바로 알튀세르의 인생을 모든 것을 빼앗고, 그를 알튀세르로 만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읽은 알튀세르의 저서는 <재생산에 대하여>와 <철학에 관하여>이다. 재생산이란 자본주의사회구조에서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 사회적 토대를 유지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군중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연구하고, 철학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1990년 알튀세르가 죽을 해가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시기다. 그는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가톨릭신자였으며,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를 중심으로 홉스, 로크, 몽키스키외, 루소, 헤겔 등의 철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을 가게 된 동기 역시 전쟁이다. 전쟁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내가 <철학에 관하여>란 책을 읽을 때 그는 우연성에 초점을 맞추어 관념적인 사고와 유물론적인 현상이 부딪혀 새로운 현상을 보여준다는 충돌이론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주의에서 그런 이론을 제시했는가? 철학은 사실 철학이란 도서로 존재하여 교과서처럼 사람에게 오는 게 아니라 철학이란 하나의 실천적인 행위가 있어야 비로소 철학이 된다. 실천하지 않은 철학은 철학적 가치를 가진 게 아니라 그저 관념 안에서 흩어지는 안개일 뿐이다. 행동을 위한 사유, 사유로서 보여주는 철학적 가치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려운 말일 수 있고, 간단한 논리일 수 있다. 그가 왜 마키아벨리를 생각하는가? <군주론>이란 서적에서 군주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공포의 대상이 되더라도 증오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고 했다.

 

국민과 혹은 국민이 존재하는 국가라는 하나의 사회에서 국가를 보는 관점이 현실적 조건 경제적 상황 등을 제대로 간파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토대와 상황적 조건에 의해 구성되어진다. 관념론적인 요소는 어떤 운동을 위한 하나의 지표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자체는 운동이 될 수 없다. 운동을 하기 위해 관념론적인 요소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만은 없다. 현실적 조건과 상황, 그리고 그 현실을 타파해 가야하는 주체들의 요건들이 바로 새로운 현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래 말하지 않았나? “철학자 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만 세계를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해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석을 한 후에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스피노자적인 가치관이란 자신의 틀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봐야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사상을 파고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나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은 연구라고 본다.

 

루이 알튀세르의 서적인 <철학에 관하여>는 1980년 알튀세르의 아내 엘렌느를 정산착란 상태에서 살해 후 후견인 보호 아래서 저술했던 도서이다.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인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이면서 교수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을까? 그런 자신이 자서전을 저술하면서 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하는 것일까? 상당히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일들이다. 보통 자서전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성장기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적고, 거기에 있었던 특별한 일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나 인물을 정리해간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적이나 이상을 제시하나, 알튀세르는 그런 식의 책은 아니다. 보통 나도 그렇지만, 대다수 지성인들은 자서전을 좋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자서전에 들어가는 내용을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도 살며시 보여주나, 마지막은 자화자찬으로 종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알튀세르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과 다른 책이라고 밝힌다. 루소의 <고백>은 인류 학문에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다 보여주고, 거기에 대한 자신과 반성과 성찰을 보여준 책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연구에서 <고백>의 영향은 엄청나다고 하다. 인간의 심리는 모순적이면서도 역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루소의 <고백>과 같은 자서전이 아닌 다른 식의 자서전으로 발간한다.

 

루소는 자신의 죄와 과오를 보여주고 성찰한다고 하겠지만, 알튀세르는 그것을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석하고자 하는 학문적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단순히 자서전으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로 본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자신이 어릴 시절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르기까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제3자의 관찰을 집어넣고, 자신을 어떻게 주변에서 대응이 이루어졌는지까지 나온다. 하지만 모든 시작점은 역시 전쟁이 문제인 것 같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운 점이나, 한국에서 정신병이나 우울증, 과대망상증 같은 심리적 혹은 정신적 증세를 가진 사람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바라본다. 한 마디로 무슨 정신과에 다니는 순간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 많이 줄어든 편이나, 솔직히 대규모 전쟁을 거친 국가로 본다면 한국인에 가해진 트라우마는 매우 심각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정신병원에 수감된 환자가 만일 다시 사회에 나가더라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더 이상 일상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도 1960년대 알튀세르가 정신병원에 입원할 때를 말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전쟁이 중요하다고 한 점은 세계 1차 및 2차 대전은 수많은 유럽인들을 충격과 공포로 밀어 넣었다. 기존의 전쟁의 백병전 중심으로 총과 칼, 그리고 대포로 이루어진 공격이나, 20세기부터는 폭격과 화학전이 도입되던 시기다. 총과 칼은 눈에 보이는 적만을 놀리지만, 폭격과 화학전은 눈에 보이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준다. 전쟁의 판도에 따라 달라진 전쟁에서 알튀세르의 아버지 샤를르는 자신의 동생 루이와 같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샤를르는 전쟁 중 잠시 휴가를 받아 돌아오나, 자신의 하나밖에 없던 동생 루이는 비행작전 중 공중에서 산화하고 만다. 문제는 루이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알튀세르의 삼촌 루이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삼촌 루이는 죽고, 샤를르만 돌아와 어머니와 혼약하고,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어머니는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던 루이의 죽음에 충격 받고, 그 와중에 샤를르와 결혼, 결혼식 후 첫날밤이 사랑이 아닌 강간처럼 이루어진 점, 자신이 이때까지 모은 재산을 그가 탕진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뒤틀어져 버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저자는 루이 알튀세르이고, 아버지 이름은 샤를르 알튀세르, 그리고 삼촌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이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죽은 삼촌의 이름 루이를 받아들인 어머니의 환상이 되어야 했던 아이다. 어머니가 바라본 알튀세르는 아들이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예전 연인이던 루이의 대체용으로 취급당해야 했다. 살아있는 2명과 죽은 1명의 계약 아래 알튀세르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머니의 과도한 집착은 결국 그의 우울증을 야기했다. 삼촌의 영향은 컸다. 파리고등사범학교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삼촌 루이는 학자 같은 인물이었고, 매우 감수성이 넘치던 청년이었다.

 

그런 요소를 조카에게 물려준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알튀세르에게 우울증이 되었고, 청년과 장년 그리고 노년까지 끝까지 놓지 않았던 평생의 굴레였다. 아내 엘렌느의 교살은 참으로 끔찍하기 보단 아련했다. 아내 역시 우울증에 시달렸다. 죽기 전 보름 넘게 집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누가 와도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있었다. 아내는 나치가 프랑스 점령할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그녀의 어린 시절 부모님은 병으로 둘 다 돌아갔다. 우울증에 걸린 부부, 게다가 자살할 충동을 느껴도 자살할 용기가 없던 엘렌느는 알튀세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내의 목과 어깨를 마사지를 하는 도중, 알튀세르는 아내의 목을 졸라 죽인다. 그런데 문제는 고의가 아니라, 안마 도중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의 동공은 풀어지고, 맥박이 없었다. 미친 듯이 당직의사실에 가서 이 사실을 고한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병원에 수용될 때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그때 알튀세르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도 몰랐다. 노년의 찾아온 불행, 그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우울증과 정신착란 증세였다. 어머니에게서 시작한 과오, 어머니를 벗어난 수용소 생활과 혹은 외할아버지와 함께한 농촌생활이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알튀세르, 물론 그 후로 활동하지만,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어떤 사회적으로나 신분에 대한 꼬리표가 달려 다녀야했다. 그의 자서전은 그런 기존의 자신이 마치 도처에 존재하는 쇠사슬에 묶여있는 인간이 아니라 본인 그 자신이고자 하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거기서 자신을 분석하여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22장을 보면 마지막 문단 쪽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한다. 그는 1918년생, 1980년대에 저술했다면 60이 넘은 노년이란 점에서 그의 새로운 시작은 나이보다는 그가 자신이란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시점에 스스로 선언을 한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가 상당히 겁이 많았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매력에 집착하면서도 한편으로 거기서 얽매이는 것을 싫다는 것도 나온다. 한 인간이 가족에서 시작된 편력이 이렇게도 지독한 것인가? 아내의 죽음에서 결국 아내를 죽이게 된 원인은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자살적 충동을 아내에게 이어진 것이다. 아내 역시 죽음을 생각했고, 그녀 역시 죽음으로 얼룩진 인생이다. 알튀세르의 삼촌 루이의 죽음, 그리고 엘렌느 역시 레지스탕스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조직의 오해로 추방된 사건 등등, 인간의 상처란 쉽게 아물지 못하는 것 같다.

 

알튀세르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의 탄생, 가족이 움직이는 형태, 그리고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아픔들, 자신은 살아있는 인간이나 죽은 인간을 대신해야 했던 존재, 처음부터 살아있던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자신,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분석했기에 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고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은 계속되어 그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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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2-14 2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하겠어요 ^^

만화애니비평 2016-02-15 08:44   좋아요 1 | URL
아~! 그렇습니까~~

보빠 2016-02-24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이신데 후기는 인물비평이시네요 저도 알튀세르 좋아하지만 저렇게 못느꼈는데 대단하십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24 09:25   좋아요 2 | URL
알튀세르를 읽기 전에 장 자크 루소의 <고백>을 읽었던 게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알튀세르와 루소의 글에서 역시 알튀세르의 의도처럼 그렇더군요.
알튀세르의 정신착란과 우울증에서 생각해보면 저도 엉뚱한 점이 많은(아마 이게 정신분석에서 과대망상이라 하겠죠) 사람인지라, 그런 점에서 염두하여 글을 적었죠.
일단 오타쿠인 이상 망상은 기본을 가지고 있다보니..
이번에 이책을 보면서 번역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철학을 자주 읽는 편인데, 번역이 친절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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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시작은 정말 최악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에서 이런 일까지 실제로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낸 동기친구가 우연한 사고라 하기에 너무 부조리한 비극을 맞이했다. 인간의 비극에서 최악의 상황은 살아있는 삶으로부터 박탈이다. 그 비극적인 슬픔을 내 친구에게 닥쳤다. 죽음이란 어둠, 사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관념적인 영역에서 매우 두려운 요소다. 동물은 죽음에 대한 예지는 하지 않는다. 단지 야생의 천적으로부터 잡혀 먹는 것을 두려워 순간 도망치다, 일정 안정권에 도달하면 긴장감이 풀린다. 물론 인간도 위기의 순간을 넘으면 안도의 여유를 보이나, 그런다고 죽음 그 자체를 잊지를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자기가 아닌 타인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간도 있다. 동물에게 그 정도의 트라우마가 있다면, 이미 야생의 모든 동물은 멸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서 죽음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혹은 환희를 느낀다.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충동적 욕망 타나토스는 우리 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다고 무의식적인 죽음충동이 온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이성에서 죽음은 언제나 두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막상 인간이 죽는 순간, 자신이 죽는 것을 미리 예견하는 것보다 불의의 순간들이 많다.

 

내 친구의 죽음이 불의의 비극인 이유는 그 친구는 산업재해로 죽었다. 미혼이고, 애인도 없기에 자신의 혈육을 남기지 못했다. 결혼한 여동생과 처남은 있어도 내 친구의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하다못해 이름을 어느 정도 알렸다면, 그를 기려주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그 친구에게 가족과 친척, 대학교 친구 정도였다. 친구의 관을 2016년 1월 1일 오전에 운구하면서 화장터까지 따라가고, 그의 육신 하얀 재로 변하는 것까지 본 후, 마지막에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 지켜보았다.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트라우마 중에 하나였다. 같이 운구행렬에 따라가던 친구와 추모공원에서 돌아와 시내로 돌아올 때 같이 소주 4병을 마셨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 않은 내 성격이나,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다. 이때 나에게 갑자기 생각나던 책 한 권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라고 말이다. 책 제목에 갑자기 내 심정을 이렇게도 잘 찔렀는지 생각지도 못했다. 원래 이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한 번 읽어보았다. 마르크스가 나오므로, 결론은 노동문제와 현실의 경제적 문제를 다룬 서적이었다. <자본>을 읽어봤다면, 혹은 더 앞서서 <국부론>을 읽어도 노동문제에 대한부분을 반드시 나온다. 왜 나오는가? 노동자에게 자신의 화폐를 유지할 수 없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하여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고용의 관계는 사회적인 관계, 즉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계약의 조건은 두 입장이 서로 공평하거나 대등해야 하나, 막상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친구가 근무한 곳은 분명 2인 1조야 하고, 사실 밀폐된 공간이라면 환기시설의 안정성은 물론 안전보호구를 완벽하게 지참해야 한다. 하지만 안전보호구는커녕 혼자 가서 일을 보고, 게다가 자신의 회사가 아닌 그 회사의 하도 받은 업체로 파견근무를 나갔다. 도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의문이다. 혹자라면 운이 없거나 혹은 그 사람의 어쩔 수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이때까지 겪어보지 못했고, 자신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기만적 사고가 바탕 되어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일이 터지면 뭔가 대안을 마련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혹은 이런 비극으로 상처받은 가족에게 진심의 위로를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친구가 평소 무슨 약을 먹는 이유로 배상비를 가지고 몇 십 %를 깎아보자는 식으로 나왔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도리어 돈으로 해결하고, 그 돈조차 아끼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돈의 가치 아래 절하된 사건을 옆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람이 소중하다면서 항상 돈을 택하는 게 이 사회다. 물론 자신과 가족이 당장 옆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런 비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인 개별의지, 그리고 회사나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의 이기심이 일치하는 전체의지,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우리에게 공공선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이성적 선택을 하는 일반의지는 증발된 게 아닌가 싶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보듯이 내가 아픈 것은 친구의 죽음도 그렇지만, 친구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병폐이기도하다. 친구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 내지 급성 종양이나 불치병이 아니다. 그저 우리 사회의 허술한 제도에 의해서였다. 산업재해는 기본적으로 안전사고이다. 안전이 미비하다는 점은 충분히 사전에 조치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200년 전의 마르크스가 살던 영국과 유럽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 의해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 본연의 인식과 존재적인 사유로서 파악하는 관념적인 영역만이 아니다. 그게 되는 것은 니체와 같은 사고를 지닌 자일 것이다. 니체가 아닌 다른 자는 니체주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다고 그 타인과는 무관한 존재는 아니다.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우리의 사회성이 구축된다.

 

내가 만일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혹은 아프리카에 태어난다면, 혹은 거기서 중산층인지 빈곤층인지 아니라면 노예인지 주인인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흔히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한다는 발언에서 실효성은 있다. 어느 마을에 폭격기가 출몰하여 폭탄을 투하하여 10만 명 인구 중에 10명 살아도 살아남은 사람은 있다. 그런다고 그게 생존에 대한 사실성에 보편적인 관계성을 가지는가? 한국에서 아마 이런 보편적이지 못한 상황에 등장한 하나의 사례를 전체적으로 확장하는 논리오류가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 폭격기가 떨어지더라도 저 공격이 오는지, 와도 어디에 숨을 곳이 있는지를 알고 있는가? 혹은 숨으려 해도 그곳에 물리적으로 멀리 있든지 혹은 정원이 다 차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성공신화나 누군가의 잘난 이야기는 결국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만의 리그에 마치 자신들이 그 좌석에 배정받은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한국사회의 이런 착각, 그리고 노동문제 등등 우리는 언제나 좋은 자리에 앉아 편하게 갈 수 없다. 그럴 확률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나, 그것이 자신에게 올 것이란 착각을 그것을 향하여 무조건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있다. 게다가 자신과 무관해도 그 신화를 바라보면서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이상한 꼰대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적인 사고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미신 아닌 미신에 자신의 이성을 상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의견들은 모두 환상의 세계가 아니오, 망상의 약속도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마치 북한군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마법의 요술램프로 생각하던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오히려 한국전쟁에서 전쟁이라는 그 자체를 멈추게 하는 마법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아직도 마르크스하면 이상한 시선이 다가온다. 책에서 2011년 어느 해군 장교가 <헤겔 법철학 연구>라는 마르크스의 저작을 들고 있다는 이유로 군수사관으로부터 고소당한 일이 있다.

 

지금 도서관에서 유명한 서점에서 가도 <공산당 선언>이 버젓하게 팔리는 판국인데, 한국의 인식이 그런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재단인 유네스코에서도 마르크스의 <자본>을 인류가 보전하고 기려야 할 문화재산으로 올렸다. 우리는 세계의 변화에 따라 움직였지만, 세계의 흐름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게 오늘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항상 민생경제를 외친다. 민생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민생이 필요한 생활의 질을 올리는 것이다.

 

이미 트리클다운이란 낙수효과는 지나가버린 낡은 시대다. 유럽에서 경제공황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경제공황에 휘말린 이유는 생산은 언제나 과잉이나,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없다. 한국경제에서 시장소비 감축을 보면 알 수 있다. 늘 주머니의 지갑이 닫혀있다 혹은 잠겨있다고 한다. 돈의 유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중산층 아래에 위치한 대다수의 경제적 약자들은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최소한의 소비만 할뿐이다. 소비의 대상과 범주가 너무 단순하고 광범위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시대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이미 충분히 시중에 나와 있고, 단순히 자본력이나 노동력의 단위로 승부하는 과거 유럽의 19세기 자본주의는 한계라는 점이다. 어떤 상품을 소비하려면 다른 상품이 소비해야 하나, 어느 지정된 상품만 있다면 다른 상품이 팔려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전혀 다른 색다른 분야로 물꼬를 트는 것이다. 레드 오션에 치중한 한국 경제구조로서 기계의 발달, 기술의 발전은 10명의 노동자를 1명으로 대체가능한 시대가. 나머지 9명이 취업을 하지 않거나, 임금이 적으면 결국 인구 재생산이란 위기에 봉착한다.

 

한국에서 차후 경제적 총생산량이 축소 때문에 문제화 되고 있다. 인구의 감소는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결혼비율이 줄어든 것도 있으나, 결혼 후 출산이 1명 내외인 점이다. 한국의 재생산력을 유지하려면 부부마다 2명을 가져야 한다. 물론 모든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녀들이 태어나도 불운의 사고로 죽어도 수명의 연장으로 충분히 노동력이 유지된다. 하지만 생각하면 국가의 최고로 중요한 정책 중에 하나가 국방력에선 심각한 타격이 온다는 점이다. 징병제를 시행하는 한국에서 남성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전체 인구가 줄어드는 영향에서 시작된다.

 

현재의 인구감소속도, 노령화에 따라 한국은 2100년이 되면 과연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싶다고 한다. 미국처럼 다인종 국가가 아니라 한국은 단일민족이란 이름을 내세우는 국가다. 단일민족이란 이름은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 이용되기도 하나, 그만큼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쉽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의 존속조차 위협이 되는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말만으로 아이를 3명을 낳는 게 도리라 하나, 막상 중산층 이하의 많은 국민입장에서 결혼 자체가 부담스럽고, 출산조차 어렵다.

 

결혼의 조건은 경제적 기반이어야 하나, 그 경제적 기반이 무산되면 결혼을 해야 하는 젊은 사람들은 오직 좌절과 현실도피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현실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국가의 문제에 대해 다들 “문제네, 문제야”라고 말하지 실제로 현실에서는 그런 젊은이들을 궁지로 몰아간다. 마르크스가 목표인 세상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한 것을 좀 더 확장한 것이다. 루소는 모든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자신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을 판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넘어 그 사람의 인권과 삶의 가치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 문제를 노동이란 것을 본 이유는 많은 노동자들이 비참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문제점으로 모두가 대기업이나 판검사, 혹은 좋은 직장을 원하지만, 그런 자리는 솔직히 15% 내외이다. 그 외는 자영업, 중소기업 등과 같은 서민이다. 본인이 서민이고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의료비가 올라 병원에서 진료 받은 분들이 병원비가 오른 것은 병원 원무과 직원에게 항의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집에서 쉬어야 한다. 현실의 고통이 아프게 만들었지만, 현실은 그 아픔조차도 고통을 가하여 통증을 잊게 만든다. 어째보면 그것이 더 무서운 게 아닌가 싶다. 아픈데도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이제는 아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일 때 말이다. 누구나 태어날 때 사랑을 받기 위해라고 말하나, 왠지 그 사랑이란 이름은 가식과 허울 좋은 변명에 지나친 거짓인 것 같다. 마르크스가 다시 내게 물어본다. 아프냐고 말이다. 마음이 아파도 현실은 늘 냉정하다 못해 살벌하다.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사회계약론>에서 10만 명의 투표로 선출된 정치가는 막강한 힘을 가지나,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국민 1명의 존재는 겨우 1/100,000에 해당된다.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이 세상을 바꾸기란 어렵다. 단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거름이나 하나의 동기는 될 수 있다. 세상의 덕목에 대해 생각하자면, 겉으로는 인간의 도리를 말하면서 타인의 고통과 부조리 앞에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아마 홉스가 주장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삶의 지침을 여기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내 일상생활에서도 직장동료나 옛날 친구들도 그렇다. 나보고 미련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적으로 여기는 전체의지에서 그들조차도 그 안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뒤쳐진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자기 아이는 좋은 학교를 가서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제로섬 게임이다. 앞으로 더 심한 경쟁으로 모순과 부조리가 우리를 조우할 것이다. 그때 가서도 과연 지금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은 오만스러운 존재이다. 나 역시 가끔 내가 오만스럽다고 생각한 점이 많다. 하지만 그 오만함을 다시 돌아보고 거기서 또 시작하는 점에서 또 다른 나로서 성장할 수 있다.

 

현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누구나 알아주거나 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옆 사람은 그들만의 논리를 제시한다. 어느 부분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은 있지만, 적어도 정확히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해 다들 그 현실적 문제를 부정하는 게 보인다.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척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기심을 남들도 같다고 말하는 전체의지적인 발언에서 이 사회의 누군가는 희생되고 소외되어 간다. 문제는 본인 자신도 그런 희생과 소외의 대상이란 사실조차 각인하지 못하는 점이다. 어떻게 보자면,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본 후 내가 “그렇다”라고 말하는 편이 행복할 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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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2-0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 명복을 빕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01 22:05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2주 뒤면 49제이니 묘에나 가봐야겠네요

2016-02-01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01 22:05   좋아요 0 | URL
철수를 철수시켜야 합니다!!!

2016-02-01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02 09:08   좋아요 0 | URL
발인식 다음날 눈물이 계속 나오더군요....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허무하게 갔으니...
남은 건 분노더군요

2016-02-03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3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03 12:19   좋아요 0 | URL
님의 위로 감사합니다. 설연휴 지나 15일이 49제입니다. 영혼을 천도하는 날이라 하나, 사실 그게 쉽지만은 않죠.
그저 현실을 보면 이질감만 몰려옵니다.
설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회계약론 외 - 사회계약론.코르시카 헌법 구상.정치경제론.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발췌.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비판 루소전집 8
장 자크 루소 지음, 박호성 옮김 / 책세상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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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책을 항상 읽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그는 철학자, 문학가, 극작가, 음악가로 활동했지만, 점을 치는 예언자는 아니다. 그러나 루소의 책을 읽으면 그가 제시하는 의견과 예견이 그대로 적중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에밀>은 1762년에 제작된 도서이나, 거기서 말하기는 조만간 유럽은 혁명의 시기로 빠져든다고 하고,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상이 혁명가의 복음서가 되었다. 19세기 유럽은 에립 홉스봄의 서적 책제목인 <혁명의 시대>였다. 프랑스대혁명과 자본주의 시장 발달, 그리고 지나친 환경파괴와 인간성 상실에 따른 반계몽주의 내지 낭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의 투쟁이 있었다.

 

역사적 맥락에서 유럽은 18세기말부터 20세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전쟁과 혁명, 쿠데타와 사건의 연속이었다. 변화의 시기에 루소의 말이 소름 끼치는 것은 “러시아 제곡은 유럽을 정복하고 싶겠지만, 자기가 정복당할 것이다. 러시아의 신민 혹은 러시아의 이웃인 타타르인이 러시아와 우리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내게는 이런 혁명이 불가피해 보인다. 유럽의 모든 왕들이 힘을 합쳐 이런 혁명을 재촉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혁명은 1905년 러일전쟁에 따른 문제에서 시작했고, 1917년 2월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10월 혁명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일어났다.

 

러시아황제가 차르가 통치할 때 그의 무능함과 관료집단의 어리석음으로 러시아의 재정(財政) 상태는 파탄하고, 수많은 러시아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혁명 이후 러시아황제의 소속된 장교 백위군들은 유럽의 열강들의 지원 아래 소비에트연방과 내전을 벌였다. 러시아내전 역시 인류의 비극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런 비극조차 사실 볼셰비키와 유럽 제국주의 이해관계에서 얽힌 전쟁이다. 왜 이런 이해관계에 인간이 얽매이는 것인가? 장 자크 루소가 러시아에 대하여 지적한 말이 나온 도서는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은 이미 국내에서 발간되어 몇 십 년 동안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전 중에 고전이다. 하지만 그 고전은 낡은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도 살아있는 서적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가 만든 프랑스공화국 헌법의 토대가 되었고, 루소가 제시한 정치사회적인 관찰은 지금 헌법이나 법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은 토대가 되는 책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불평등을 어디서 시작하는지 찾기 위한 하나의 길라잡이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자연적, 신체적인 요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인 불평등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사회계약론>에서 과거 귀족정에 대한 원로들의 정치행위에서, 원로들은 그 지역에서 나이가 있는 노인 중에 학문과 덕성이 탁월한 자로 뽑다가 어느 순간 투표로 이어지고, 마지막 최악은 세습제로 가는 것이다. 세습제로 가면 나이가 스물도 안 된 자가 원로원에 참석한다. 나이가 젊어서 정치적인 참여를 하지 마라는 것은 아니나, 원로원이라는 것은 경험과 덕성이 있어야 한다. 세습제 정치와 사회적 권력은 그 사회에 불안한 요소만 안겨준다.

 

한국에서 이런 것을 보면 정치적인 조건보단 정치적 입장을 좌우하는 경제적인 조건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루소가 정치철학자라고 하나, 그의 사유에서 경제적 요건을 제외하지 않았다. 루소는 부(富)라는 것은 매우 경계했다. 부자와 거지가 많은 세상은 결코 제대로 되지 않은 세상이고, 그곳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몸부림치는 곳이라 했다. 인간은 자신을 팔 만큼 가난해서 안 된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그러면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 정해져 버리고, 그 돈으로 매겨진 만큼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간의 목숨은 어느 순간 돈으로 변질되었다.

 

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거기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애도보다는 처음부터 보상이나 배상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 그런 관심을 보인자의 어리석음은 결국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면 자신과 그 가족조차 돈의 가치로 전락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어리석은 마치 그리스신화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 동굴에 갇히는 일화가 생각난다. 키클롭스는 하루에 사람 1명을 잡아먹는다. 눈이 1개인 이 괴물과 눈이 2개인 인간에서 누가 더 관찰을 잘하고 생각의 폭이 넓은가? 눈이 2개라는 점은 인간이 사물을 보고 판단을 훨씬 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인간들은 괴물에게 잡혀먹을 때까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 생활의 맛에 빠져 결국 괴물의 먹이가 되는 순간까지 그것을 간과한다. 마지막에 잡혀먹을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자기 차례가 아닌 남의 차례가 될 때까지 그 문제를 생각해 내지 못한 점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내가 바보인지 남이 바보인지 그것은 어느 기준에 맞추는 것인가?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에서 도덕이란 윤리적 가치와 멀다. 가령 조선시대 신분의 차이로 평민들이 착취당해야 했던 것이나, 유럽의 중세시대 여성들이 성적인 불평등을 겪는 것은 그 시대 자체에는 큰 모순이라 해도 그 자체가 당연한 시대인 것이다.

 

바로 현실에서 말하는 도덕적 가치가 때에 따라 얼마나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들이란 점을 우리는 가끔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시대에 하나의 법칙, 제도 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선(善, goods)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억압과 핍박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이 말이 나오지 않은가?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지만,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들보다 더한 노예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노예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흙수저,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온다.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사회적인 영역에서 매우 취약하다. 사회적 취약하므로 정치적인 입지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그 위에 누가 있는 것인가?

 

<사회계약론>에서 정말 놀란 말이 나온다. “외국의 지원과 귀화와 이민 없이 시민이 많이 거주하고 증가하는 정부야말로 의심의 여지없이 최선의 정부다. 인민의 수가 줄어들어 없어지는 정부는 최악의 정부다.” 통계적으로 한 나라의 강력함이란 그 나라에서 생산되는 총 생산력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생산력은 전체의 합이 아니라 균등적인 질에 의해서다. 한국의 노령화와 신생아 출산율의 저하는 여러 가지 단서를 보여준다. 한때는 인구가 너무 많아 문제여서 인구정책을 펼쳤으나, 그런 시대의 조건은 있었다. 바로 식량의 공급이다. 식량의 공급이 농촌에서 이루어진 점, 자급자족이 어느 가능했던 20세 중반 이후는 그렇다.

 

하지만 공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계가 발달하여 기술력과 상거래의 중심으로 이전되면서 농업사회는 퇴화할 수밖에 없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한국전쟁 이후 90% 이상이라면 지금은 10% 이하로 밑돌 것이다. 식량생산력이 증가하여 식량의 공급은 충분하다 해도, 그 외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음식이나, 인간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조건이다. 절망하는 청춘에게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없고, 그 능력조차 발휘할 수 없는 사회다. 최근 일본의 취업률이 증가했는데, 그것은 단카이 세대들의 장년들이 은퇴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속 순환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이 진입할 수 있는 빈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이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진 점이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행위와 사건들은 항상 어떤 이슈가 몰려있다. 누구의 이익이 되는가? 누구에게 어떤 인센티브가 있는가이다. 정치사회적인 관점이 결국 경제적 이익이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경제적 이익이란 단순히 화폐의 수입, 땅의 양도만이 아니라 어느 특정 인물이나 단체가 권력을 누리거나 지역적으로 전반적인 혜택을 볼 수 있는 것도 말한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일반의지다. 일반의지는 사적인 이익을 위한 개별적인 의지, 단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전체의지를 제외하고 마지막에 남은 최우의 공공선을 추구한다. 일반의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덕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의 사상을 20세기 미국 최고의 자유주의 사상가 존 롤즈의 사상이 토대가 된다. 존 롤즈의 <만민법>을 읽으면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면서 세계시민이란 사람은 어떤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peoples이란 단어는 사람들이란 말도 있으나, 사실은 시민, 인민, 만민 등의 의미로 불린다.

 

루소의 peoples이란 의미는 남들을 지배하지도 지배받지 않은 국가의 주권자를 의미한다. 문제는 루소가 잘 지적하다시피 모든 국민은 제대로 된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으로 지적 수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적인 수준만 아니라 지성에 걸맞은 덕성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월급으로 그 어떤 투자를 하지 않는다. 친구가 허무맹랑한 일확천금을 꿈꾸며 외국 로또복권을 살 때, 혼자하기 그래서 나보고 같이 하자 해서 한 달에 1~2만 원 정도만 지원한다. 물론 높은 금액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끽해야 9등 1달러 수준만 계속 될 것이란 점도 안다.

 

주변에서 보면 매일 로또 복권 당첨, 아파트 분양권을 위하여 총을 쏘는 이야기던가, 혹은 주식 등을 보면 조금 아연해진다. 사실 복권이야 지나치지 않을 정도라면 삶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주식시장은 어느 돈이 시장에 모이면 그 화폐의 총액이 증가하는 게 아니라 그 화폐의 모인 돈을 누가 가져가는가이다. 주식에서 모인 화폐가 상승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화폐가 모인 업체에 화폐가 들어와도 그 화폐는 그대로다. 결국 화폐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노동을 하여 생산력을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투자업체가 만약 아무런 성과를 내지 않고, 경영의 부실이 따라온다면 자신이 투자한 주식은 한 장의 메모지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청약통장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다. 나보고 300만원을 6개월 동안 입금하여 분양권이 나오면 응모하란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보통 천 만 원이고, 아마 서울경기 지역은 P가 붙으면 억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엄청 많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모두 한입으로 총 잘 쏴야 하는데 하면서 요새 먹기 살기 힘들다고 한다. 당연히 그렇다. 최근 홍대 주변에 상권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홍대에서 작은 점포 하나의 임대료가 천 만 원에 이르니 상인이 어찌 견딜 수 있을까? 임대료만 가게의 수입을 차지하는 돈을 차감하는 것이 아니다. 세금과 재료비, 그리고 인건비 등이 있다.

 

높은 임대료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품의 가치는 올라가고, 상품의 가치가 오르는 것은 결국 소비 물가를 상승하게 되는 원인이다. 그래서 나는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기만성을 깨닫는 일이라 생각했다. 모든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하고, 때로는 추악하고 어리석게 살아갈 수 있지만, 적어도 기만적인 삶은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한 장 차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사람을 살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더라도 그 죽음 직전까지의 인생의 즐거움이나 이익을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마지막 순간을 언제 닥칠지 모른다.

 

기만적인 삶을 살아온 자에게 인생의 마지막을 말해도 대충 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인간은 미련을 갖더라도 후회를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삶에 미련이란 더 하고 싶은 것들이 여전히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회는 다르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오점을 정리하지 않고, 그것을 계속 안고 살아온 점이다. 반성과 성찰 대신 이기심으로 은폐되거나 조작되었다면 마지막 순간 후회한다. 하지만 그런 후회를 반성하기보단 마지막까지 은폐하고 조작하려는 자의 말로는 더욱 비참하다. 역사적으로 독재자의 최후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약자를 괴롭히고 그들이 가진 것들은 더 빼앗으려고 했다. 결국 독재자의 최종목표는 부에 대한 집착이다.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재물로 대체하는 것이 재물이 있는 이유는 그 재물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나, 현실은 오히려 재물은 타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노예와 주인에서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자야말로 정신적으로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에 의해 노예의 삶을 사는 자는 비참하고, 가난한 자를 부리는 부자는 정신적으로 빈곤하다.

 

루소의 <정치경제론> 부분에서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나는 부유하고 당신은 가난하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서로 합의하자. 내가 당신에게 명령하는 수고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사소한 것을 내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섬기는 영예를 허락하노라.” 왠지 우리 한국사회의 직장이야기가 생각나는 것 같다. 아니라 최근에 논란되는 갑질행위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노동계약이나 업체 간의 업무는 정당한 계약에 의해 실시된다. 물론 서류의 외부로서는 그렇다. 하디만 내부로 들어가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약자는 비굴해지고, 강자는 비굴해진다. 그런 삶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에서 올바른 정치사회가 된다고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강자나 약자나 모두 한국에서 투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영국 잉글랜드 사람들은 투표하기 전에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 했다. 그 이후에는 사람들은 국가의 일에 관심이 없고, 국민이 국가에 무슨 일(문제)이 있는지 모르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했다. 폭군은 전제군주가 될 수 없더라도, 전제군주는 언제나 폭군이다. 그런 전제군주와 그 군주의 아래에서 개별의지와 전체의지를 발휘하는 자들이 있다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나라의 국민은 노예일 때가 가자 자유롭다고 한다.

 

“길게 보면 인민은 정부가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정부가 원한다면 전사, 시민, 인간 가운데 어느 것도 가능하며, 천민과 불량배가 좋다면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의 신민을 멸시하는 모든 군주는 자신이 그 신민을 존경받는 존재로 만들 줄 몰랐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게 만든다.”

 

루소의 정치사상을 본다면 그는 인간의 불평을 정치적 사회적 조건을 봤으나, 경제적 조건을 상당히 많이 보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빈곤함과 가난함이 그 사회의 악을 만드는 것이란 점을 알았다. 가난한 자가 빚에 허덕이는 가운데 차압이 들어와 그의 옷과 이불, 그리고 식기류까지 앗아간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 있는가? 루소가 지적한 불평등은 사회적 도덕적인 관계라고 하나, 그 사실의 근본에는 경제적 빈곤이 담겨있다. 루소의 경제사상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재화가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고, 당시 절대주의 왕정시대의 중상주의에 대해 비판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1776년에 발매되었다면, 루소가 제시한 <정치경제론>은 1755년에 발행된 책이다. 무려 20년 앞서서 루소는 스미스가 원하는 경제적인 목적을 제시한 것이다. 루소의 책을 농촌지역에 대한 찬미가 가득하다. 도시의 과다성장에 반발하여 농촌과 도시의 균등적인 발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조금 더 상공업을 중시했지만, 그도 역시 농촌경제가 도시의 이익으로 황폐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방법론적이나 기술적인 요소에서 스미스의 <국부론>은 이미 경제학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미스가 주장한 도덕 그 자체에 대한 경제적인 가치에서는 이미 루소는 20년 이전에 주장한 셈이다.

 

그 근본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다. <국부론> 역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해 서적을 작성했다. 권력층과 부유층만이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고, 물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나쁘나,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것은 여전히 큰 문제다. 인간의 목숨과 인권을 돈으로 주고 사는 것을 반대했던 루소의 사상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인간은 돈에 의해 죽고 사는 기로에 놓여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루소가 제기한 문제는 250년 전이나, 그가 의문을 품은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지혜와 등불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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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3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23 14:51   좋아요 0 | URL
이런 말하긴 그러나 그냥 그런 사람 죽으면 좋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1-23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소 전문 알라디너는 만애비 님이시죠. 알라딘 루소의 80%는 만애비 님이 장악하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23 14:51   좋아요 0 | URL
오덕게리온 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