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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평점 :
pata-physics, 예전에 해운대구 문화회관에서 들은 강의 내용이 생각난다. 이때 이 주제에 대한 원래의 텍스트가 무엇인지 모른 채 재미있게 대략 90분을 강의를 듣고 진중권 교수에게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기술한 도서를 드디어 찾아내었다. icon, 일종의 상징 내지 혹은 윈도우에서 프로그램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보이도록 하여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다. 물론 과거 MS-DOS 체계에서는 인간이 모든 컴퓨터를 조작하기에 컴퓨터는 인간에 대해 종속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윈도우 3.1이 1990년대 나와도 그다지 효력이 없었다. 대부분 DOS 명령어 내지 M이라고 하여 디렉터리와 파일을 화면에 정렬시키는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 윈도우 95가 나오고, 그것은 너무 불안한 소프트웨어이었으나 점차 98과 최근 me 버전까지 나오면서 윈도우는 모든 컴퓨터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다. 특히 포스트모던 사회의 정보화 유출에서 네스케이프 대신 익스플로어의 대두는 자기에게 필요한 소재들은 인간의 손이 책으로 통해 찾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공간에서 찾는다.
덕분에 우리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해 분리될 수 없는 존재적 현실에 처해있다. 게다가 애플에서 만든 아이폰과 거기에 따른 삼성 갤럭시 시리즈의 도래는 우리 인간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지게 했다. 어느 사무실에 가더라도 네트워킹이 되지 않으면 업무를 수행할 수 없으며, 실제로 기계적으로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치 그것에 대해 다 알 수 있는 hyper-reality로 도래한다. 우리에게 가상이란 과연 가상으로 끝나는 것인가? 오히려 이젠 가상이야 말로 현실의 지배를 도래했다.
그런 것인가? 이 책에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나온다. 아나키스트처럼 정치와 상관없이 자유만 추구하기 보단 정치적 저항을 하는 이들에게 대중적 문화에서 자신들은 클래식적인 고급문화로 보여야 하고, 대신 부르주아 문화에서 속물적인 요소를 제거하기에 아방가르드는 이 이율배반 속에서 쇠퇴와 몰락을 거쳤다. 그럼에도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정치적 예술적 미학적 가치가 있는 이유는 기존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거나 혹은 볼 수 없거나 생각지도 못한 성과를 보여준다.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5월 혁명은 최후의 아방가르드들이 선두한 운동으로 물론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보헤미안, 페미니스트 등과 같은 사람들도 참여했지만, 이들 중에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행동이 독특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지칭한 기 드보르처럼 이제는 이 스펙타클이 하나의 삶이 되었다. 단지 스펙타클에 의해 슬라보예 지젝의 도서명처럼인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부정적 명제에서 오히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려고 합니다.”로 발전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은 바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어느 것이 진실 된 가치인지 혹은 거짓된 위선인지 모르는 상황이다. 절대적인 자신 주장 아래 상대방에 대한 상대적 배타적 태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흐리게 한다. 우리에게 정체성이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적 가치가 없다. 마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공격에도 무의식 내면 기저에 깔린 심연의 세계는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다. 다가가려면 끝없는 정신공격과 더불어 그 정신을 같이 공유하는 해방의식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전자에 모든 것을 치중한다.
계몽주의라는 상투적인 말에서 오히려 어느 틀에 메이게 한다. 물론 그런 건 많은 사람들에게 통용된다. 그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나 진중권 교수가 직접 겪은 일화로 본다면 그가 독일에 유학시절 독일 여대생과의 일화의 소개가 흥미롭다. 그 학생은 진중권 교수가 기독교인인데도 철학적 무신론자에서 혼란해지자 이에 대한 진중권 교수의 답변은 “종교적으로 기독교인이고, 철학적으로 무신론자이고, 윤리적으로 쾌락주의자이고, 논리적으로 금욕주의자이고,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자이고,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문화적으로 무정부주의자이다.”라고 말한다.
최근 간행된 <생각의 지도>에서 우리 인간들은 일정한 것에 매달려 있기에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약하다. 거대한 패거리 문화에서 발생되는 하나의 교조주의는 자유를 외치며 자유를 없애는 검열주의자로 변모한다. 독일 유학생이 만약 나에게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중권 교수님의 답변은 이율배반의 한도가 너무 높기에 이것은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다. 정체성이란 한 가지에 집착하는 뿌리가 존재하나 그것에 집착하면 모든 것을 망각하기에 그렇다.
일단 나는 “종교적으로 무(無)이고, 철학적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이 섞여 있으며, 윤리적으로는 현실적 이상을 추구하는 시민주의자이고, 논리적으로는 구조주의자에 가까우며, 경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가깝고,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문화적으로 오타쿠다.”라고 답을 할 것이다. 이미 이 모든 것에서 뒤섞임이라는 상대주의와 그 상대주의 하나에 올라간 절대적인 영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이상하게 보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서 나의 신념은 정치적 자유주의다. 우리나라처럼 자신에게 존재하고 타인을 인정하지 않은 배타적 내지 포괄적 자유주의에서 떨어져있다.
참고로 존 스튜어트 밀이 마르크스가 영국에 올 때 그가 하던 행동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자유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주의다. 내 자유가 남이 침해하지 않은 한 모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프랑스혁명에서 시민들이 외치는 중요한 미사어구다. 결국 그것을 무시한 혁명위원회가 스스로 언론을 압박하여 혁명은 말아먹었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이런 여러 가지 면은 인간 스스로 모순을 만들어 낸다.
과거의 신화의 시대에서는 신화 그 자체가 하나의 절대적 도그마였으나, 그리스신화 유적지가 단순히 유적지 박물관이 된 것에서 신화의 시대는 결국 신화적 시대로 내려온다. 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가? 신화가 살아있는 사회에는 신화는 분리된 신적영역 믿음의 존재이기에 이른바 분리적 사고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리적 사고가 불가능하다. 왜 내가 처음부터 pata-physics에 모든 것을 보려 했을까?
이 글을 적는 나로서도 pata-physics에 갇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에 갇혔다고 부정하는 아방가르드 운동가들처럼 은둔생활하거나 혹은 자기의 심장에 겨누고 권총 쏘는 것도 제맛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용기는 나에게 없다는 점과 은둔생활을 하더라도 먹고는 살아야 하고, 환경공학자가 보기에 한국이 점차 오염되어 자급자족이 어려울 정도로 산림이 황폐하고, 설사 가능한 곳에 가도 국립 내지 시도에서 정한 생태보호구역이므로 들어가서 수렵과 사냥을 하면 법적으로 구속된다.
권총은 한국에서 총기를 매매할 수 없기에 그것마저 불가능하다. 아쉽지만 아방가르드 운동가들 특히 상황주의자들의 용기와 상상력에 박수를 보낼 수 있어도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기와 똑같은 행복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pata-physics를 즐기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싶다. 앵프라맹스, 지각할 수 없는 무한소의 차이, 그 얇은 막을 드러내려는 시도 이것 어디서 많이 들어본 개념이 아닌가?
오타쿠라면 당연히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최근 개봉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한 AT-field 절대적으로 침투가 불가능한 영역,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다. a마음의 벽은 종이 한 장보다 가볍고, 베를린 장벽보다 높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도 여전히 “굿바이! 레닌”이란 영화에서 주인공 어머니는 서독에게 합병된 동독의 망념에 사라잡혀 그 사실조차 모른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정보의 과잉, 그리고 쉽게 말할 수 있는 현실 발터 벤야민이 언급했던가? 과거의 문맹인들은 글자를 모르지만 앞으로 영상을 모르면 문맹인이 되어야 하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영상의 문화가 넘쳐대면 이성과 논리의 사고 대신 감정과 무의식으로 대체되기 쉽다. 영화예술감독인 칸단스키가 영화에서 인간을 자극하는 것은 영상이 아니라 사운드다. 대략 70% 정도일까? 야한 비디오를 보면서 신음소리를 내는 남녀와 내지 않은 남녀에서 우리의 오감의 차이는 나는 이유는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라면 상상의 나래에서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결국 pata-physics의 성립은 가상의 현실화인데도, 진실은 오히려 사실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진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사실이라고 강조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가상이기에 사실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그런 공간이 되어주는 것이 인터넷이란 무한세계는 인간의 가면을 처음부터 제공하기에 진실된 모습을 보여준다. 예전에 발터 벤야민의 <괴테의 친화력>에서 본문 내용보단 머리말을 제공한 역자의 글이 인상이 갔는데,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id라는 메일이나 어드레스 주소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id는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이드(id)와 같이 간다. 또한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에서도 인터넷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본능적 욕망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라 한다. 눈에 실재하지 않은 2D 공간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분출한다. pata-physics란 그런 것이다. 단지 그것을 소비의 향락에서 스토리텔링과 콘텐츠의 개발로 가야 한다. 일본 닌텐도 wii게임이 상당한 소득을 올린다. 직접 게임을 즐기지 않았으나, 그 게임을 하면 테니스를 치지 않아도 테니스 라켓을 대체한 물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테니스를 치는데 테니스가 아니다.
르네 마끄리트가 파이프를 그려 놓았는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한다. 파이프 그림일뿐이지 파이프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이 그림의 대상이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율배반과 사실과 허구가 하나의 경계점을 혼돈하여 함열하는 것이야 말로 현대사회의 문화이다. 최근 나로서도 현실에서 페르소나라는 가식의 모습을 지닌 인간보다 오히려 인터넷이란 페르소나가 장착되어 있기에 진실적이란 인간상을 알게 되었다. 책이나 인터넷 투고기사를 봐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이다.
pata-physics는 바로 그런 인간들에게 가상의 이미지가 오히려 현실화하는 상상의 구체화다. 한국처럼 정해진 틀과 관념, 속박에선 인간의 상상력과 감성을 무뎌져 간다. 스펙타클의 지배는 퇴근 후에 TV 앞에서 노동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TV에서 보이는 상품과 광고들에서 인간은 욕망하게 되고, 또한 광고주들과 방송사들은 이익을 챙긴다. 단순히 TV수신료만 내고 보는 문화적 소비자가 아니라 문화적 착취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된다.
TV 앞에서 세상을 다 가진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한국이야 말로 드라마천국에서 현실적 상황과 드라마의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는 pata-physics로 넘쳐댄다.대중문화의 지나친 압도는 인간에게 상상력을 배제한다. 늘 같은 이야기가 다른 형태로 바뀌어가기에 권태감으로 가득한 그 권태로운 매체를 권태로운 것조차도 느끼지 못할 권태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논리의 이상이 pata-physics이니 TV의 세계는 이미 논리의 범주를 탈출했다. 최근에 들어서는 오히려 TV야 말로 조지 오웰의 소설인 <1984>의 전초전으로 보이니, 상상의 세계도 없는 가상에 빠진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위를 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자위만 해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