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적 조건 - 정보 사회에서의 지식의 위상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이현복 옮김 / 서광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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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동기는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철학사상 관련 도서였다. 기존의 모더니즘 이성에 의한 계몽주의보단 탈계몽주의 내지 탈근대적 사유로 통한 현대사회적 고찰과 흐름을 판단할 수 있었던 도서다. 다소 국내에서 흔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신기롭게 보였다. 그때 이 도서에서 리오타르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일본 인문학자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란 도서로 통해 다시 리오타르의 이름을 새겨들었다. 내가 우연히 리오타르에 대해 궁금해지게 만든 것은 다음의 지문이다.

 

‘커다란 이야기란’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근대국가에서는 성원들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한 여러 가지 시스템이 정비되고 그 작동을 전체로 사회가 운영되어왔다. 그 시스템은 예를 들어 사상적으로는 인간이나 이성의 이념으로,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나 혁명 이데올로기로, 경제적으로는 생산의 우위로 표출되어왔다. ‘커다란 이야기’란 그 시스템들의 총칭이다.

 

커다란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정확하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조금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2번 읽고 난 뒤에 그렇게 잘 이해한 편은 아니나 대략적인 흐름을 감을 잡았다. 그것은 1979년에 들어오면서 컴퓨터기술의 발달에서 시작된 담론인듯 하였다. 지금은 인터넷 세대라고 하여 가상의 인터넷으로 동네 시공간을 초월한 교류가 오고간다. 오히려 가상이란 시뮬라크르가 컴퓨터 모니터로 통해 진실의 영역을 침해한다.

 

예를 들어 나로호 발사와 관련하여 우리는 나로호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 보는 것은 근처에 발사하는 장면을 시각으로 직접 확인 가능한 거리정도이다. 아니라면 TV 영상으로 녹화되어 그대로 복사본이 다시 복사되어 원본도 없는 사본이 사본으로서 원본이 된다. 이것이 계속 시뮬라크르의 지속성으로 통해 시뮬라시옹이 된다. 물론 시뮬라시옹 개념은 장 보드리야르에 가까운 부분이나, 리오타르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담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것이 일련의 모던 사회의 계몽이라고 하는 억압성이다.

 

거대한 서사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통해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왜 리오타르의 연구가 아즈마 히로키의 오타쿠 연구도서에 나왔는가?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여 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유의 세계를 연구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다고 하여 안노 히데아키와 같은 애니메이션 감독 그 자신이 오타쿠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티로 불릴 수 있는 이유 역시 사유의 정리와 정의만이 아니라 사유에 대한 이미지 재생과 표현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읽으면서 다른 사상가의 이름이 생각났다. 그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많은 관련이 있는 발터 벤야민에 대해서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영화로 통해 글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혹은 복사된 신문으로 통해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의 전달력은 예전처럼 정보를 독점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이 한정적이기에 군중들은 듣는 것만으로 판단하기에 그들 스스로 이성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알게 할 수 있으나, 신문의 유통으로 따라 글의 보급은 신문이나 잡지라는 매체로 통해 글을 읽으면서 일방적인 정보가 마치 합당한 것처럼 여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성적 판단이 어긋나더라도 이성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부분은 신문이란 언론들이 공정성을 상실할 경우 매우 심각한 문제를 만든다. 이른바 프로파간다라는 대중심리를 이용한 공작행위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게다가 신문에서 기술복제로 통해 영상마저 복제되자, 영화는 곧 정치적 수단으로서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영상은 글자가 아니고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성되기에 그만큼 이해도가 높고 몰입도 역시 높다. 그렇기에 대중적인 영상 관람에서 파시즘이란 무서운 집단광기를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1979년의 리오타르가 저술했기에 지금 2013년 현실에서 보는 인터넷이란 새로운 광기의 시작이다. 정보의 벽이 없어진 만큼 정보의 신뢰성은 그다지 높지 못하다. 근거 없는 정보와 허위기사가 오히려 사실처럼 되어 거짓이 현실을 지배하는 구조에서 헤게모니의 정당성을 다시 발휘한다.

 

거대한 서사가 과학적 기술에 의해 신화적 요소를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바뀐 것이지 사람이 바뀐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리오타르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지식과 권력은 항상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통치기술, 공작기술, 산파술, 수사적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성경이 라틴어로 구성되어 있을 경우 성경에 적힌 본래의 의미는 모른 채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로서 오히려 대중들을 통치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컴퓨터가 기술을 보유하고, 대신 그 컴퓨터나 정보수단매체를 얼마나 잘 다루고 아는가에서 상품적 가치를 창출하는 점이다. 정보의 이용에서 특별히 남녀차별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일정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어린이나 청소년도 이용가능하다. 지식의 소유화에서 거대 서사로 보자면 남성중심 문화라고 볼 수 있으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바로 이런 부분을 제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실 지금 우리 일상생활을 들어다보아도 컴퓨터와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이가 제법 있으신 분들 일부를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인터넷을 이용하여 정보를 구하고 만들고 있다.

 

그래서 정보의 독점화란 이미 있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나, 아주 특수한 기밀 내지 혹은 국가적 업무가 아닌 이상 일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공개될 수 있다. 세사한 글자까지 전부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정보의 유무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은 진보적 사회인데, 그 진보라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진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하기술이다. 보수주의적 자유주의국가라도 과학기술은 보수적 이념이나 진보적 이념과는 상관없다.

 

단지 기술이 좀 더 발전하는가? 하지 않은가? 라는 선택점이다. 기술의 발달이야말로 리오타르가 보는 새로운 시대의 담론이다. 그것은 일부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에게 열린 민주주의적 방법이나, 토크빌이 지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곧 전체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부분에서 열린 정보의 공정성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아즈마 히로키에게 돌아가보자.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문화에 대해 포스트모던하다고 했다. 그들에게 그 조건이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영역이 필요하고 자신만의 섬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섬은 인터넷으로 직접적이지 않으나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이란 매체기술의 발달이다.

 

포스트모던한 이유는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공간, 즉 자신만의 정보를 수집하고 소비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동물화에서는 생산 대신 정보의 소비에 집착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황금만능주의라는 자본을 이용하여 goods의 구입에 정신을 팔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활동이 가능한 이유는 개인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서사에서는 전체적으로 거기에 따라야 하는 정당하지 않은 이유가 존재하므로 그것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상황을 비추어보자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이유는 정보의 집중화가 아니라 분산화다. 정보사회의 시대에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가능해진 이유 중에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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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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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는 흔히 생각하는 존재라고 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이성에 대해 육체와 감정을 분리하는 것은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혹은 어느 학자가 말하길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이 가진 욕망에서 가장 무엇이 떠오르는 것일까? 흔히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 생각을 한다고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표현과 느낌을 중시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생각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이성적, 감성적 영역이 연결된다. 현대사회처럼 표현력이 떨어지면 그만큼 인간의 소통과 공감이 떨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서도 듣고 싶어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동물을 좋아하나, 키울 생각은 별로 없다. 동물을 키우는 것은 자신이 사랑받고 싶다는 증거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애완동물은 그저 어떻게 해보아도 애완동물이다. 물론 인간의 마음의 치료가 되고 심적인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되겠으나, 그것은 인간이 가진 일방적인 요구사항이다. 진짜 애완동물을 사랑하면 아파트 건물에서 보이는 강아지들의 주인을 한 번 보아라. 소리 지른다고 강아지의 성대를 제거하거나 혹은 강아지의 성기까지 제거하는 것이다. 소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불쌍한데 하물며 우리 백성이랴 하시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애절양은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닌 것 같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과 남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은 점에서 자신에게 입맛을 맞추기를 바란다. 물론 그런 부분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모두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대중문화의 획일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개성과 그 개성 안에서 나오는 영역이 하나의 새로운 상상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는 것이라는 게 과연 놀고 있는 것인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산업에 대한 이론적 함의를 보면 우리는 결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계속 꾸준하게 노동을 하고 있고, 인간의 기계적인 요소에 계속 봉사하고 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대한뉘우스와 드라마를 봐라. 교묘한 드라마천국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분이 적으신 글도 봤으나, 또한 나 역시 그래 생각한 것이 있었다. 예전에 삼순이 신드롬이란 열광이 있었다. 못생기고 뚱뚱하고 성질도 더러운 노처녀가 잘생기고 돈 많고 핸섬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모토는 현대판 신데렐라 콤플렉스로 이어졌다.

 

주변에 가면 그런 일들은 전혀 없을 것이다. 드라마야 말로 오히려 리얼리티를 가장한 최고의 허구와 거짓말이다. 페르소나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현실의 인간에게 오히려 pata-physics로 만든다. pata-physics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아이콘이고 상상력이나 도리어 현실 자체가 pata-physics로 변한 것이다. 이런 것을 이미지가 매개로 된 사회로 볼 수 있고, 평소 내가 자주 사용하는 Guy Debord의 서적명인 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는 스펙타클이란 신화에서 계속 재생산과 전복과 대체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이미지로 매개로 하기에 그 이미지라는 것이 현실에서 존재하는가? 드라마나 뉴스를 봐도 그것이 진실한 사실인지 아닌지도 구분조차 하지 못하여 인간은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한다. 언론의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성보다는 공정성이라고 한다. 몽타주와 같은 편집기술은 언론의 제대로 된 기능보단 역기능이 도래할 수 있다.

 

그런 이데올로기의 합의 아래 만들어진 스펙타클한 미디어 세계에서 인간의 자신의 존재를 더욱 더 스펙타클화 시킨다. 세상이 스펙타클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넘어가는 당신네들이 스펙타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의 파괴가 곧 아방가르드라는 말에서 예술의 파괴가 다른 예술로 대체하는 점에서 스펙타클이란 끝없는 인간의 주인이다. 헤겔의 말대로 주인 없는 노예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스펙타클이 우리의 주인이고, 그 스펙타클은 헤게모니적인 요소가 들어간 이미지다.

 

Simulacre의 세계에서 인간은 사실과 허상의 구분 점은 없다. 인간은 사실 거짓말로 가득한 리얼리티의 사실만을 받아들이려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는 오히려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심오하면서도 재미있는 소설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오히려 우리 인간이 상상력과 허구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나, 현대사회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런다고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든 작가는 그 상상력의 원천을 발견했으나, 그것에 현실의 자신을 버린 자는 조금 다르게 봐야 한다.

 

물론 인간은 모방에서 예술과 창조로 이어지나, 적어도 그것에서 한 발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거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가야 할 삶의 활력이다. 생각해보자. 우리 인간은 어떻게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노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교실 안에 앉아있는 학생들조차도 정신적 노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학업이고, 성과수단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표다. 그래서 공부는 결코 즐거울 수 없는 영역이다.

 

사람을 숫자로 대체해버리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란 존엄성이 아니라 숫자의 등급에 분류된다. 예전에 이런 영화가 생각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지금 이런 말을 하다가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를 정도로 삼엄한 세상이 되었다. 이래서는 상상력이란 멀고 먼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되어 버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정작 이상한 사람은 바로 그것을 읽으면 이상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진중권 교수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 이런 문구가 있다.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는 노동을 재치 있게 놀이로 바꿔 놓은 톰 소여를 생각해보라. ‘노동놀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을 정돈하는 노동도 이렇게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 하긴,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게 바로 카를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사회가 아니었던가. 그 사회로 가기 위해 꼭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노동이 유희가 되는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다. 그 유명한 포이어바흐의 테제를 슬쩍 바꾸어서,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어지럽혔을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정돈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술에 관심이 있지만, 일상생활의 예술도 관심이 많다. 길거리에 지나가는데 벽에 낙서가 그려져 있거나 혹은 삭막한 시멘트 블록으로 된 담벼락에 장난스러운 그림들도 좋아한다. 특히 봉하마을에 가면 동네주민들이 사는 그 장소에 해바라기를 비롯한 꽃과 장난스러운 아이들의 이미지는 상상력을 동원한 놀이로서의 노동이다. 놀이적 개념으로 본다면 그렇게 그린 미대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프로젝트나 장난을 표출한 것이고, 동네주민들은 흉물스럽고 무표정한 동네인상을 변화시킨 것이다.

 

물론 모든 삶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하나, 생각하면 분명히 그리는 사람도, 그것을 허락하는 사람도, 심지어 그것을 지나가다 구경하는 사람조차도 즐겁다. 즐거움이란 모두가 나누고 상상력이란 그것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것은 놀이로 통한 노동으로 가능한 것이다. 인간문명이 존재하기에 자연에서 문명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이 필수적이다. 당장 지금이라도 들판에 갔는데, 화장실 가고 싶거나 혹은 목이 말라 음료수를 먹고 싶다고 하자. 그러면 그건 들판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 그곳에 화장실과 편의점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주문하여 가지게 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직접 있는 곳까지 갈 것인가? 화장실과 편의점을 만드는 것도 노동이요, 주문을 시켜 종업원이 오는 것도 노동이고, 자신이 직접 가는 것도 노동이다. 아무 것도 없는 들판에 문명의 혜택을 받으려면 노동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면 여간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노동이란 매우 귀찮고도 짜증나는 인간의 활동이다. 그런 짜증난 활동을 재미난 놀이로 바꾼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예술은 나는 없어져야 생각한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딱 정해져있고, 예술장르가 너무 일반인들과 분리되어 있다. 예술을 없어지기 위해서는 예술이 너무 일상적으로 즐기고 넘쳐야 한다. 예술이 특정계층이 만들고 향유하는 것에서 놀이라는 것으로 통해 모두가 즐기는 것으로 말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없기에 다소 서로 간에 개성과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은 필수적이다. <망상대리인>처럼 피해의식과 가해의식이 이상하게 교합된 게 아니라 망상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 조차 찾을 수 없다면 조금 괴로울 것이다. 그것에 빠져 아무런 대책 없이 허우적거리는 것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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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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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a-physics, 예전에 해운대구 문화회관에서 들은 강의 내용이 생각난다. 이때 이 주제에 대한 원래의 텍스트가 무엇인지 모른 채 재미있게 대략 90분을 강의를 듣고 진중권 교수에게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기술한 도서를 드디어 찾아내었다. icon, 일종의 상징 내지 혹은 윈도우에서 프로그램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보이도록 하여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다. 물론 과거 MS-DOS 체계에서는 인간이 모든 컴퓨터를 조작하기에 컴퓨터는 인간에 대해 종속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윈도우 3.11990년대 나와도 그다지 효력이 없었다. 대부분 DOS 명령어 내지 M이라고 하여 디렉터리와 파일을 화면에 정렬시키는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 윈도우 95가 나오고, 그것은 너무 불안한 소프트웨어이었으나 점차 98과 최근 me 버전까지 나오면서 윈도우는 모든 컴퓨터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다. 특히 포스트모던 사회의 정보화 유출에서 네스케이프 대신 익스플로어의 대두는 자기에게 필요한 소재들은 인간의 손이 책으로 통해 찾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공간에서 찾는다.

 

덕분에 우리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해 분리될 수 없는 존재적 현실에 처해있다. 게다가 애플에서 만든 아이폰과 거기에 따른 삼성 갤럭시 시리즈의 도래는 우리 인간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지게 했다. 어느 사무실에 가더라도 네트워킹이 되지 않으면 업무를 수행할 수 없으며, 실제로 기계적으로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치 그것에 대해 다 알 수 있는 hyper-reality로 도래한다. 우리에게 가상이란 과연 가상으로 끝나는 것인가? 오히려 이젠 가상이야 말로 현실의 지배를 도래했다.

 

그런 것인가? 이 책에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나온다. 아나키스트처럼 정치와 상관없이 자유만 추구하기 보단 정치적 저항을 하는 이들에게 대중적 문화에서 자신들은 클래식적인 고급문화로 보여야 하고, 대신 부르주아 문화에서 속물적인 요소를 제거하기에 아방가르드는 이 이율배반 속에서 쇠퇴와 몰락을 거쳤다. 그럼에도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정치적 예술적 미학적 가치가 있는 이유는 기존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거나 혹은 볼 수 없거나 생각지도 못한 성과를 보여준다.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5월 혁명은 최후의 아방가르드들이 선두한 운동으로 물론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보헤미안, 페미니스트 등과 같은 사람들도 참여했지만, 이들 중에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행동이 독특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지칭한 기 드보르처럼 이제는 이 스펙타클이 하나의 삶이 되었다. 단지 스펙타클에 의해 슬라보예 지젝의 도서명처럼인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부정적 명제에서 오히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려고 합니다.”로 발전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은 바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어느 것이 진실 된 가치인지 혹은 거짓된 위선인지 모르는 상황이다. 절대적인 자신 주장 아래 상대방에 대한 상대적 배타적 태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흐리게 한다. 우리에게 정체성이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적 가치가 없다. 마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공격에도 무의식 내면 기저에 깔린 심연의 세계는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다. 다가가려면 끝없는 정신공격과 더불어 그 정신을 같이 공유하는 해방의식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전자에 모든 것을 치중한다.

 

계몽주의라는 상투적인 말에서 오히려 어느 틀에 메이게 한다. 물론 그런 건 많은 사람들에게 통용된다. 그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나 진중권 교수가 직접 겪은 일화로 본다면 그가 독일에 유학시절 독일 여대생과의 일화의 소개가 흥미롭다. 그 학생은 진중권 교수가 기독교인인데도 철학적 무신론자에서 혼란해지자 이에 대한 진중권 교수의 답변은 종교적으로 기독교인이고, 철학적으로 무신론자이고, 윤리적으로 쾌락주의자이고, 논리적으로 금욕주의자이고,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자이고,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문화적으로 무정부주의자이다.”라고 말한다.

 

최근 간행된 <생각의 지도>에서 우리 인간들은 일정한 것에 매달려 있기에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약하다. 거대한 패거리 문화에서 발생되는 하나의 교조주의는 자유를 외치며 자유를 없애는 검열주의자로 변모한다. 독일 유학생이 만약 나에게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중권 교수님의 답변은 이율배반의 한도가 너무 높기에 이것은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다. 정체성이란 한 가지에 집착하는 뿌리가 존재하나 그것에 집착하면 모든 것을 망각하기에 그렇다.

 

일단 나는 종교적으로 무()이고, 철학적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이 섞여 있으며, 윤리적으로는 현실적 이상을 추구하는 시민주의자이고, 논리적으로는 구조주의자에 가까우며, 경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가깝고,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문화적으로 오타쿠다.”라고 답을 할 것이다. 이미 이 모든 것에서 뒤섞임이라는 상대주의와 그 상대주의 하나에 올라간 절대적인 영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이상하게 보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서 나의 신념은 정치적 자유주의다. 우리나라처럼 자신에게 존재하고 타인을 인정하지 않은 배타적 내지 포괄적 자유주의에서 떨어져있다.

 

참고로 존 스튜어트 밀이 마르크스가 영국에 올 때 그가 하던 행동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자유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주의다. 내 자유가 남이 침해하지 않은 한 모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프랑스혁명에서 시민들이 외치는 중요한 미사어구다. 결국 그것을 무시한 혁명위원회가 스스로 언론을 압박하여 혁명은 말아먹었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이런 여러 가지 면은 인간 스스로 모순을 만들어 낸다.

 

과거의 신화의 시대에서는 신화 그 자체가 하나의 절대적 도그마였으나, 그리스신화 유적지가 단순히 유적지 박물관이 된 것에서 신화의 시대는 결국 신화적 시대로 내려온다. 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가? 신화가 살아있는 사회에는 신화는 분리된 신적영역 믿음의 존재이기에 이른바 분리적 사고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리적 사고가 불가능하다. 왜 내가 처음부터 pata-physics에 모든 것을 보려 했을까?

 

이 글을 적는 나로서도 pata-physics에 갇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에 갇혔다고 부정하는 아방가르드 운동가들처럼 은둔생활하거나 혹은 자기의 심장에 겨누고 권총 쏘는 것도 제맛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용기는 나에게 없다는 점과 은둔생활을 하더라도 먹고는 살아야 하고, 환경공학자가 보기에 한국이 점차 오염되어 자급자족이 어려울 정도로 산림이 황폐하고, 설사 가능한 곳에 가도 국립 내지 시도에서 정한 생태보호구역이므로 들어가서 수렵과 사냥을 하면 법적으로 구속된다.

 

권총은 한국에서 총기를 매매할 수 없기에 그것마저 불가능하다. 아쉽지만 아방가르드 운동가들 특히 상황주의자들의 용기와 상상력에 박수를 보낼 수 있어도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기와 똑같은 행복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pata-physics를 즐기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싶다. 앵프라맹스, 지각할 수 없는 무한소의 차이, 그 얇은 막을 드러내려는 시도 이것 어디서 많이 들어본 개념이 아닌가?

 

오타쿠라면 당연히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최근 개봉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한 AT-field 절대적으로 침투가 불가능한 영역,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다. a마음의 벽은 종이 한 장보다 가볍고, 베를린 장벽보다 높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도 여전히 굿바이! 레닌이란 영화에서 주인공 어머니는 서독에게 합병된 동독의 망념에 사라잡혀 그 사실조차 모른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정보의 과잉, 그리고 쉽게 말할 수 있는 현실 발터 벤야민이 언급했던가? 과거의 문맹인들은 글자를 모르지만 앞으로 영상을 모르면 문맹인이 되어야 하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영상의 문화가 넘쳐대면 이성과 논리의 사고 대신 감정과 무의식으로 대체되기 쉽다. 영화예술감독인 칸단스키가 영화에서 인간을 자극하는 것은 영상이 아니라 사운드다. 대략 70% 정도일까? 야한 비디오를 보면서 신음소리를 내는 남녀와 내지 않은 남녀에서 우리의 오감의 차이는 나는 이유는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라면 상상의 나래에서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결국 pata-physics의 성립은 가상의 현실화인데도, 진실은 오히려 사실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진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사실이라고 강조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가상이기에 사실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그런 공간이 되어주는 것이 인터넷이란 무한세계는 인간의 가면을 처음부터 제공하기에 진실된 모습을 보여준다. 예전에 발터 벤야민의 <괴테의 친화력>에서 본문 내용보단 머리말을 제공한 역자의 글이 인상이 갔는데,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id라는 메일이나 어드레스 주소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id는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이드(id)와 같이 간다. 또한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에서도 인터넷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본능적 욕망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라 한다. 눈에 실재하지 않은 2D 공간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분출한다. pata-physics란 그런 것이다. 단지 그것을 소비의 향락에서 스토리텔링과 콘텐츠의 개발로 가야 한다. 일본 닌텐도 wii게임이 상당한 소득을 올린다. 직접 게임을 즐기지 않았으나, 그 게임을 하면 테니스를 치지 않아도 테니스 라켓을 대체한 물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테니스를 치는데 테니스가 아니다.

 

르네 마끄리트가 파이프를 그려 놓았는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한다. 파이프 그림일뿐이지 파이프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이 그림의 대상이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율배반과 사실과 허구가 하나의 경계점을 혼돈하여 함열하는 것이야 말로 현대사회의 문화이다. 최근 나로서도 현실에서 페르소나라는 가식의 모습을 지닌 인간보다 오히려 인터넷이란 페르소나가 장착되어 있기에 진실적이란 인간상을 알게 되었다. 책이나 인터넷 투고기사를 봐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이다.

 

pata-physics는 바로 그런 인간들에게 가상의 이미지가 오히려 현실화하는 상상의 구체화다. 한국처럼 정해진 틀과 관념, 속박에선 인간의 상상력과 감성을 무뎌져 간다. 스펙타클의 지배는 퇴근 후에 TV 앞에서 노동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TV에서 보이는 상품과 광고들에서 인간은 욕망하게 되고, 또한 광고주들과 방송사들은 이익을 챙긴다. 단순히 TV수신료만 내고 보는 문화적 소비자가 아니라 문화적 착취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된다.

 

TV 앞에서 세상을 다 가진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한국이야 말로 드라마천국에서 현실적 상황과 드라마의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는 pata-physics로 넘쳐댄다.대중문화의 지나친 압도는 인간에게 상상력을 배제한다. 늘 같은 이야기가 다른 형태로 바뀌어가기에 권태감으로 가득한 그 권태로운 매체를 권태로운 것조차도 느끼지 못할 권태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논리의 이상이 pata-physics이니 TV의 세계는 이미 논리의 범주를 탈출했다. 최근에 들어서는 오히려 TV야 말로 조지 오웰의 소설인 <1984>의 전초전으로 보이니, 상상의 세계도 없는 가상에 빠진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위를 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자위만 해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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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줄이고 농촌을 살려라 - 변산농부 윤구병과의 대화 이슈북 4
윤구병.손석춘 지음 / 알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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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독특한 마초가 있었다. 마지막 변산농부 윤구병 전 교수와 손석춘 교수의 대담에서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예전에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처제로 넘어가면서 윤구변 선생님은 자기는 사랑이 최고라고, 욕망이 없는 그것이 사랑이냐는 말에 순간 망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단지 다부다처제라는 이야기에서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모든 것을 자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진정한 진보적인 것은 오히려 더 전통적인 영역에 있었다.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느끼라는 것이다.

 

도시에 살면서 은근히 도시화인간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윤구병 선생처럼 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이분처럼 살아야 하고, 따라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래도 이분의 생각에서 우리가 선을 긋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 아니 전통까지 담아가는 윤구병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물론 다소 도발적이고 위험한 발언도 있었다. 나 같은 경우 평소 독서생활을 하고 있기에 고전 문학이나 철학도서들을 읽는 경우가 있다.

 

우리집 내방 책장에서 담겨있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과 <공산당선언>을 생각하면, 보통 옛날 분들이라면 분명 나를 두고 반국가단체라고 하겠으나, 막상 진실에서 그 반국가단체 조직과 단체로 간주한 자들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전혀 그런 조직과 단체와 관계없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사후 트로츠키가 정치적 패배로 인한 스탈린의 집권에서 찾아야 한다. 대부분 이를 알지 못하나 지식인들 사회 내지 인문학에 관심 있는 영역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윤구병 선생님이 자기는 스탈린이 좋지 못한 것까지는 알겠으나, 그녀석도 잘 한 것은 칭찬해야되! 라는 말에서 많은 지식인 사회에서 그를 스탈린주의로 보았다. 스탈린의 독재정치, 그리고 하다못해 이때까지 근현대사의 정치적 영역에서 독재자조차도 공과 실을 구분하고 단순히 한쪽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물론 그게 포용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내일도 어제 같은 지금까지도 계속 우리는 네편 내편으로 나누어 싸운다. 그 속에 나도 끼여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진정한 자유는 시골에 가서 농사짓는 이분에게 있는가 싶었다.

 

그런다고 농촌이 세상과는 자유롭게 본다는 것은 무리다. 도시화로 황폐한 농촌, 농사짓는 힘이 있다면 농촌에서는 젊은 축이라고 한다. 70~80세의 어르신들이 아직도 밭을 갈고 논을 일구고 있으나 그들이 노동이 중단되면 거기도 멸망이다. 윤구병 선생은 느린 세상을 원한다. 나도 느린 세상을 원한다. 각박하고 치열하고 경쟁만 존재하여 조금만 발이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지면 거기서 우리는 Game Over다. 아쉽게도 오락실의 게임은 100원 짜리 주화를 넣으면 Restart이나 현실은 Out이다. 즉 살 수가 없다.

 

모두 거기에 이를 악물고 서로 노릴 수밖에 없는 수라장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일하자고 발버둥 치면서 우리는 계속 우리는 착취한다. 자연이 왜 소중한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성적인 영역보다 무의식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이 강하다. 자연의 세계는 바로 인간 본성을 어울리게 하여 맑은 영혼을 유지하게 한다. 시끄러운 소음, 답답한 매연, 땅만 쳐다봐도 더러움으로 가득한 이 세계, 물론 감정으로 이루어졌기에 인간의 삶에 대한 열정을 찾을 수 있으나 진실한 삶의 여유는 없는 것인가?

 

내셔널 트러스트라고 영국의 환경주의자들에 대한 소개에서 인간이 가진 영혼이 자연과 맞닿으면 누구나 인격이 온순해진다고 한다. 맑은 숲속과 깨끗한 물을 말이다. 길가다가 오수와 폐기물로 가득한 냄새나는 하천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존재인가? 윤구병 선생은 우리에게 엉덩이를 의자에 앉기보단 들판에 나와 일하라고 한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인간성을 찾기 위해서는 직접 발로 뛰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억지스러운 지식보단 친근한 말투라고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제일 인상 깊은 것은 한국말이었다. 어려운 한자어나 영어로 도배하여 지식에 대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익숙한 한국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것이 발전을 저해되는 점이다. 나도 학교에 다니면서 왜 이렇게 어려운 영어원서를 읽으면 공학을 배울까라는 생각만 들었다. 한참 군복무 하면서 야간에 산업대학원을 다니면서 어려운 수학공식도 골치 아팠으나 영어번역은 더욱 난감했다. 좋은 책이란 권위도 필요하나 받아들이는 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도 중요하다.

 

전문적인 내용이기에 다소 전문성의 용어는 부득이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최대한 알기 쉽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다고 전달자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의식이 없다면 그 주체자도 문제다. 자신이 판단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에 집착하기에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는 이미 프랑스혁명부터 시작된 문제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그리고 늘 과거에 얽매이는 요소는 발목만 잡는 행위라는 것이다. 반면교사적인 역사관 대신 카르텔들의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신화적 요소에 우리는 지금도 넘어가는 점을 보면 근본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생각할 기회가 없다. 상상력이 없고 구체적인 부분을 다룰 수가 없다. 마치 공장에서 주어진 생산품처럼 정해진 틀에 매이고, 거기서 멀어지면 폐기처분되는 세상이다. 방학을 반년에 가깝게 하자라는 의미는 학교가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어떻게 보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 사회의 병든 사회인지는 그 어른들의 아이들인 학생들을 보면 안다. 우리 교육현실이 병든 것은 학생들의 책임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닐까?

 

이들에겐 자유로운 사고와 넓은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점수 1점과 등수 하나에 목숨을 버리는 비극이 오늘날의 한국이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느리게 가는 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경제적인 동물이다. 이기적인데 동물은 자신의 다가오는 불행에 대해 부정하고, 타인의 불행에서 안도감을 내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간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수라인가? 천국인가? 농촌에서 생명을 가꾸면 생명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다고 들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너무 경시하고 무시하는 세상이다. 아니 다르게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사회다. 죽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희망 잃은 영혼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바치면 그들의 영혼을 위로 할 수 있으리오? 각박한 세상에서 일에서 사람들에게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자연의 숨결과 인간미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미래를 위해서는 무조건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뒤도 옆도 위도 아래도 봐야 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서로간의 화합이다. 농촌에서 농사짓는 게 힘든 일이나 윤구병 선생님에게 행복이다. 오늘을 살아도 살고 오늘도 죽어도 살고, 자연이 있는데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태도에서 철학은 복잡한 머리만큼 단순한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안 되는 세상이니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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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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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것은 기술(記述)이 아니라 매핑(mapping)이다. 이번에 읽어 본 진중권 교수의 <생각의 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어제 책을 한참동안 읽으면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국제적 형상과 더불어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것을 매체할 수 있는 미디어 그리고 소통, 이 모든 것은 시시가각으로 변하고 있다. 진중권 교수의 에세이는 그런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딱히 이게 정답이다 내지 오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이 현재 이렇게 되었는데, 왜 그런 것일까? 라는 의문과 동시에 근본적 원인을 고찰한다. 다소 문학적인 서술보단 간단한 에세이로서 맺은 이 도서는 철학적 사유를 깊숙하게 들어가기 보다는 오히려 철학으로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노려한다. 만약 사회적 문제에 대해 우리가 받아들일 때 철학이란 도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어려워 접근하기 불가하다면 철학이 무슨 의미로서 작용하는가?

 

물론 심각한 것을 다루기에 가끔 어려운 내용과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지사한 일이다. 사람이란 정말이지 너무 간단한 존재이면서도 너무 난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눈은 너무 가까이 가서 볼 수도 멀리서 볼 수만은 없다. 외과의사가 환자의 몸에 박힌 유리파편을 꺼내려 하는데, 너무 멀리 있으면 그 위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고, 너무 가까이 들이대면 보이는 것은 유리파편이지 환자의 몸이 아니다.

 

환자의 몸에 있는 유리파편 제거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선을 두어야 한다. 만약 관찰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치료에서 너무 멀리 있다면 환부를 정확하게 메스를 댈 수 없을 것이고, 너무 앞에 있으면 메스를 가까이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메스가 환부에 닿기 전에 의사의 얼굴에 메스가 영광의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 기술(記述)이란 것은 글로서 나타내는 문자문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문자문화에 의거하여 살아갈 수 없다.

 

이른바 영상문화가 대두된 이미지의 세계가 출현했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신문이나 책에 의거하여 전달되기 보다는 오히려 TV나 컴퓨터로서 전달된다. 특히 내 손안의 정보매체인 스마트폰의 기술혁명은 우리에게 그 이전에 분리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화를 고정적인 주체에서 활동적인 주체로 변모했다. 진중권 교수가 언급한 영도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러하다.

 

이때까지 정해진 매체나 정보에 의존할 수 없던 대중이 이제는 대중들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여 공유하고 퍼뜨린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민주주의란 바로 소통을 향한 움직임이나 문제는 그 방향이 너무 일방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유용하게 먹힌다는 것이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안티 파시즘에 대한 테제에서 결국 안티 파시즘마저 강력한 파시즘으로 전도된다. 프랑스혁명에서 루이왕족을 단두대에 보내는 것과 각종 반란과 내란을 해결한 당통이 왜 자기 발 스스로 단두대에서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생각의 지도>에서 평소 내가 관심을 가진 인물 이름이 나온다. 레온 트로츠키, 대표적인 레닌을 이은 러시아 혁명가로서 191710월 볼셰비키혁명을 이끈 자다. 물론 추후에 관료주의적인 일국사회주의국가를 말한 스탈린에 의해 추방되고 암살되던 자가 초반에는 좌파혁명가에서 막상 정책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오는 우파적인 활동도 한다. 결국 지나친 극단은 해결하지 못함은 반증한다. <생각의 지도>에서 이런 현상과 오늘날의 매체와 대중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대에 살아가는 대중들은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어지게 된 의지로 살아간다. 왜일까? 다소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사는 나로서도 극단적 상황은 싫어한다.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중시해도 그것이 여론몰이와 더불어 판단해야 하는 사람에 대해 판단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지, 그 판단의 주체성을 컴퓨터 키보드의 Ctrl C + V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미 예전에도 진중권 교수도 지적한 조심해야할 신문사가 이미 모든 국민들의 눈을 자극하는 시점에서 괴벨스의 환상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신화처럼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색깔론에 대한 부분도 재미있다. 진중권 교수는 1989년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직접 경험하고, 그것이 유럽에 미친 영향까지 직접 본 사람이다. 답답하게 30일 휴가를 보내는 구공산권 노동자보다 오히려 좋은 차를 끌고 40일 동안 여행하는 서유럽 노동자에서 누가 행복해 보이는가?

 

물론 유럽의 경우 식민지라는 착취경제로 통해 이득을 봤기에 그것이 가능한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착취할 나라도 없으며, 평생 중국에게 착취당하다가 말년에 일본에 착취하다 이제는 자국민을 착취한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에 대한 착취 즉 노동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혁명이든 전쟁이든 쿠데타이든 어느 곳에서는 석탄과 석유가 나와야 했고, 빵과 포도주가 나와야 했다. 노동으로 이루어진 곳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현재 모습이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망가한 것은 인간이 자연만을 파괴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까지 파괴하고 착취한 점이다.

 

그러다보니 인간 내면에 쌓인 폭력적 기질은 당연히 성냥갑 옆의 다이너마이트처럼 위태롭다. 인간의 아이러니는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지식인들의 역할에서 대중들은 지식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자신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삼는다. 가령 가장 잘못된 정보가 과학과 공학을 배운 입장에서 여름철 녹조현상이 기온이 높아 생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대중들의 지식이다. 하지만 전공분야로 들어가면 수온보다는 하천에 유입된 영양염류인 질소와 인이 문제다.

 

만약 수온이 계속 높은 곳의 하천과 호수는 모두 녹조현상으로 인간이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어야 한다. 녹조의 성상은 질소, , 탄소. 산소, 수소 등으로 이루어진 유기복합체다. 유기물에서 수온의 역할은 반응을 빨리하게 만드는 하나의 기질역할을 한다. 구체적이거나 혹은 논리적인 사고와 좀 더 광범위한 시선을 가진 지식인이 대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은 좋으나 대중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 현대이다.

 

정보의 과잉에서 타격인가? 인간이 가진 지식과 판단력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라고 한다. 그런 것은 정치사회적 이야기를 하다보면 알 수 있다. 더 이상의 토론은 무의미 하리라는 사실을 책 본문에 나온다. “지금 군중이 지식인에게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차가운 관찰자의 측면이다. 자신을 이미 계몽된 존재로 여기는 군중은 공공연히 지식들의 그런 정서가 재수 없다.’고 말한다. 이 현상은 나에게 답하기 어려운 물음을 던진다. ‘만보객이라는 지식인상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그렇다고 지적 기회주의자가 되어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그들과 완벽히 한 몸이 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만보객을 대체할 새로운 지식인의 이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참고로 당통을 단두대에 보낸 인물은 프랑스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로베스피에르라는 법학자였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들고 혁명을 외친 그가 당통을 죽였을 때 가장 루소가 가르친 교훈을 배반했고, 결국 그도 혁명의 배반인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단두대 아래 사라졌다. 문제는 그가 사라지기 전의 대중의 모습이다. 1789년부터 1794년까지의 프랑스의 분위기는 군중들의 심리로 공격성이 엄청난 점이다.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빵과 포도주이겠으나,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시작보다는 단두대에 목을 죽음과 키스하게 하여 대중들의 분노를 거기에 몰리게 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피인가? 아니면 빵인가?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정의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n개의 정체성에 내가 가장 마음에 들고 내 스스로가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한 문구가 있다.

 

당신은 국가주의자인가? 민족주의자인가>? 페미니스트인가? 주체사상가인가? 신자유주의인가? 민주주의자인가? 사람에게 색깔을 입히고 딱지를 붙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빨간색이건 무지개빛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이 뱉은 말과 벌인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이다. 패거리라는 장벽 뒤에 숨는 비겁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문구다. 뒤에 숨어 치사하게 패거리를 이용하여 정의의 편인 듯 보이려는 속물적 근성은 그 누구라도 피해가기 어려운 치명적 매력이다. 사유와 사고는 유동적이야 하는가? <생각의 지도>는 바로 이런 극단적인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현상에서 사람이 변해가는 만큼 기본적인 부분을 망각하면 안되는 점이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한 개인이 조선총독부의 관리에서 해방 후의 미군정에서 전쟁에서는 북한군에서 전쟁 후에는 한국 정부에서 일한 사람이야기가 나오는데, 주인 없는 노예로 계속 살아가는 인간들의 한계성인가?

 

여전히 주인 없는 노예들에게 자신의 이성과 감정보다는 위의 패거리 장벽 뒤에 숨기가 가장 편하다. <생각의 지도>mapping에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가 어려울망정 자신이 살아가려고 하는 최소한의 일생생활의 변화 정도는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 교수의 보면 그는 진보적인 인물임에도 양쪽 라인에서 많은 공격을 받는다. 자기 스스로를 진보라고 외치는 자들이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유물론과 관념론을 계속 대립하여 충동한다면 조금이라도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까?

 

최근에 진중권 교수의 사상적 배경이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 쪽에 간다는 주변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인적으로 존 롤즈의 <정의론>, <만민법>,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읽어보면서 롤즈의 철학은 극단적 영역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여러 가지 공유하고 인정하는 정치적 자유를 중시했다.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추방되어 영국에 가서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퍼부어도 이성의 성인이라고 불린 밀은 마르크스에 대해 그런 발언에 대한 보복이나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했다. 자유주의자이면서 공리주의자고 경제학자이면서도 윤리학자 그리고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밀에서 보면 패거리처럼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패거리들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점이다.

 

생각의 자유로운 mapping이 가능하려면 어디에 갇혀있기만 해서는 안 되나 솔직히 말해 인간의 정체성에서 개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icon이 필요한 것은 필수불가결적인 요구사항이다. 추후 이것과 연계하여 icon을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인간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다고 거기에 머물 수만도 없다. 결론은 스스로 mapping을 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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