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폴 르블랑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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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서비스가 저술한 <트로츠키>를 비판한 도서인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을 읽는 순간, 여러 가지 판단을 해보았다. 왜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의 인생에 대해 설명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면서 인용한 자료를 전부 사용하지 않고, 설사 인용하더라도 그 문구를 반 정도 잘라 먹는 것을 생각하면 객관적인 자료를 혼자서 너무 주관적인 사족으로 가득했다는 판단을 버릴 수가 없다. 우선 내가 트로츠키가 해낸 업적과 더불어 그가 실수한 부분을 다 본 만큼 그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분명히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실수로 가득했다고 해도 그의 실수는 자신의 이기심에 의한 실수보다는 자신의 완고한 타고난 성격에 의한 실수였다.

 

그런 실수라도 그 개인에게 책임이 부가된다고 해도 비판의 과정에서 그의 실수를 비판해야 할 것이지 그가 나쁜 의도로 했다는 비판은 도가 지나치다. 그 로버트 서비스의 책에서 비판은 정당해도 그 비판의 언사는 주관적인 사족이 지나치다 못해 너무 거슬렸다. 아이작 도이처 같이 차라리 공과 실을 다 다룬 것을 여기서는 트로츠키는 뛰어난 연설가 웅변가라도 결국 완고한 고집불통에 이기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웃긴 말이다.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한 평생 스탈린과 적대하며, 다른 강대국의 지배 권력조차 스탈린에 대한 비판적 언사를 함부로 날리지 못했지만, 트로츠키만 달랐다.

 

혼자 안위무사를 위해 꽁무니 빼는 것에서 비판의 대상에게 비판을 날리지 못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당시 유럽사회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은 그야말로 비겁하다고 여겼다. 유럽이 1930년대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들끓고 있었고,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여 많은 유대인을 고통스럽게 죽였으며, 프랑스에 침범하여 수많은 프랑스국민들을 괴롭혔고, 레지스탕스에 대한 응징 역시 잔혹했다. 제일 잔혹한 것은 아마 스페인 내전이었을 것이다. 프랑코가 지배하던 반민주세력이 독재 군부로 민주주의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파시스트들은 권력을 위해 다른 국가의 권력과 손을 잡아 무기를 도입하여 권력을 손에 넣었다. 독재자 프랑코와의 대전은 스페인내전에서 통일노동자당으로 참전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유명한 감독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란 영화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리아 찬가>를 보고 만든 영화라고 들었다. 스탈린과 GPU가 저지른 그 오만한 행동은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일국사회주의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가리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때 유일하게 계속 그 스탈린에게 비판을 멈추지 않은 자가 트로츠키다. 가진 것이라고 그의 입과 글이었다. 언어로서 폭력에 대항했던 자였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자유시장주의자들도 스탈린이 눈에 가시거리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트로츠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트로츠키의 글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세계에 파시스트가 넘쳐 결국 나치와 스탈린을 연합을 할 것이고, 그것이 일국사회주의 관료주의 체계가 되어 국민을 억압할 것이란 점이다. 왜 나는 로버트 서비스의 글을 보고 이렇게 비판하는 것일까? 트로츠키는 이런 글을 <배반당한 혁명>에서 남겼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오세아니아 국가에서 금지하던 그 책의 원조인 도서에서 말이다.

 

“관료 지배의 토대는 소비재의 빈곤과 이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있다. 상점에 물품이 충분히 있으면 구매자는 원할 때는 언제든지 상점에 들려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물품이 거의 없을 때는 줄을 서야 한다. 이 줄이 아주 길어지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관을 임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련 관료 집단이 누리는 권력의 출발점이다. 관료 집단은 누가 어떤 물품을 가져야 하고 누가 줄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이런 글은 딱히 트로츠키에 의해 만들어진 비판도, 트로츠키가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르크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닐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으면 이런 문제를 이해할 수 있으며, 루소 리옹에서 학술상으로 받은 논문인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이런 문구는 특히나 인상이 깊다. 루소의 사상이 결국 칸트로 이어져서 칸트도 이런 부분을 미학적인 요소로 받아들인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관료주의는 어떻게 보면 근대정치의 모순현상이나, 그런 요소가 이미 봉건사회에서 귀족에 의해 착취당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소수의 권력 특권층과 반대되는 시골 농민, 그 사이에 중간에 끼여 있는 관료집단들 어떻게 보면 트로츠키가 말한 것은 20세기만 아니라 21세기도 유효한 말이다. 관료집단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자만 아니라 다수의 국민조차도 희생되어야 할 때가 있다. 로버트 서비스가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은 그가 경솔한 실수를 해야 하는 것이지 트로츠키가 가지고 있던 큰 흐름은 제대로 봐주어야 했던 것이다.

 

자유주의 철학사상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는 인간이 비참한 경제적 상황에 놓이면 안 된다고 한다. 롤즈의 <정의론>에서도 인간이 정치적인 활동을 위해서 최소한의 경제적인 요건이 필요하고, 그들이 정치적 판단을 위해 문화적, 교육적인 혜택이 뒤를 따라야지 기회로서의 공정한 자유와 평등이 완수되는 것이다. 단지 개인주의적 자유시장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단지 그 개인의 이익에만 치중되기 때문에 공적영역에 대해 의미가 없으면 공적인 요소를 말하고자 하는 행위만큼 모순이 없다. 가령 인간은 개인 스스로 잘 살기 위해 노력하기에 타인의 이익에 누가 관여할 의미는 없다. 그러면서 그런 행위를 방해가 사회적인 악이라면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데 계속하여 사회적으로 경제사고가 터지면 누가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 것일까?

 

이들의 관점이 틀린 이유는 개인의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이 간섭을 배제하는 게 공정영역에 이롭다면 그 공적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어서 여기저기 모순이 터지면 그 개인에게 책임이라고 하여, 만약 그 개인들의 인생에 대한 파산선고로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놓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고 권리라고 주장하면 누가 어떻게 조율을 할 것인가? 난해한 담론이 아닐 수가 없다.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은 바로 이런 모순에서 답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개인성 추구하는 사람이다.

 

러시아혁명이 결국 모순으로 인해 냉전시대와 공포정치로 물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왜 그렇게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한 교훈을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대혁명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들은 인권의 자유라고 외치면서 왜 타인의 인권에서는 무지하고 야만스러운가? 자신들만의 자유만 있으면 모든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위적인 행동이야 말로 제일 위험하다. 왜냐하면 나치 역시 자신들의 민족의 영광과 자유만이 허락되었기에 범죄국가라는 낙인을 찍게 만들었다.

 

역사라는 교훈에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나 그 비판은 역사의 당시에서 벗어나 그 흐름에서 이어지는 현재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이다.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을 읽으면 로버트 서비스 당시 국제사회에서 일어난 끔찍한 전쟁과 파시스트들의 잔인함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는 점이다. 인간 자신은 개인이나, 그 개인은 국가와 사회 더 나아가 국제정세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관점이 생략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졸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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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2014-07-3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시대의 전반적 상황에 대해 정확한 판단과 날카로운 비평이 아주 탁월한 서평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31 16:12   좋아요 0 | URL
악! 감사합니다

NamGiKim 2018-09-07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점은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에서도 그러합니다. 내전시기 백군 반동들이 한 짓은 언급치 않으며 볼셰비키들의 잔인성만 강조하죠. 그게 바로 서비스 같은 우익들의 한계라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9-07 08:55   좋아요 0 | URL
백군 장교들의 잔혹성은 언급하지 않고 적군파의 무력충돌만 말하니 참 가소로운 글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