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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18년 9월
평점 :
영화 <광해>를 본 후 사람들은 광해군에 대한 호감도가 많이 올라갔을 것이나, 사실 광해군이 보여준 선정은 진짜 광해군이 아니라 하선이란 불리는 놀기 좋아하고 재주 많은 사내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광해군이 보여준 장점과 단점은 분명 존재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려낸 박시백 화백이 말하길 자신이 좋아하는 조선임금 중에 광해군도 포함되어 있으며, 게다가 광해군이 조선임금 중에서 그나마 밥값을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실 광해군에 대한 논점은 역사학이나 일반 대중, 혹은 인터넷 공간에서 분분하다. 그러나 현실은 광해군에 유리한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에서 유교사상이 아직 내려있다. 하지만 공자의 유학보단 주자의 성리학에 의해 만들어진 유학이 강하다. 공자의 수사학적인 관점보단 주자학의 성리학적 멘탈리즘은 새로운 학문을 펼치기보단 꼰대주의적 방향으로 틀기도 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가? 그것은 향교에 배향된 유학자들의 위패를 보면 알 수 있다. 고려와 고려이전 시대는 둘째치더라도 조선의 인물을 보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김인후, 이황, 이이, 조헌,
성혼,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로 조광조까지 사림시대를 열어간 시대의 인물이다.
특히 조광조 선생의 기묘사화는 연산군 시대의 갑자사화와 다른 성격이다. 성리학의 세력이 중앙권력자인 훈구세력과 지방산림에 포진된 신생선비들의 대립에서 일어난 것이 기묘사화라면, 갑자사화는 연산군 시대의 폭정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조광조 이후는 조금 다르다. 명종이 죽고, 그의 종실인 하선군을 선조로 옹립한다. 선조는 당대 명재상 동고 이준경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고, 명종 때의 부패한 정치를 해결하려 했지만, 선조 역시 기축옥사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선조 시대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고, 서인은 추후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다.
동인과 서인의 분류에서 중요한 것은 동인에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서인에서 율곡학파로 이어지고, 동인은 퇴계학파가 남인이 되고 북인은 남명학파가 중심으로 올라간다. 이황과 이이를 제외한 후대의 성리학자를 보면 대부분 서인계통이다. 조헌과 성혼은 율곡 이이과 가까운 사이이고, 김장생, 김집 역시 조헌과 성혼의 뒤를 이은 서인의 영수이다. 더구나 이들은 광해군의 실정을 주도한 인조반정의 대표적 인물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노론의 대표적 인물이고, 박세채 역시 송시열과 혈족관계에 있는 점에서 조선의 유산인 향교의 반 이상의 서인계 인물이란 점이다.
향교의 인물에서 유학에 지대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해보면, 차라리 의병장 조헌보단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더 뛰어난 인물이고, 사상적 실학적 유학적 유산으로 보자면 송시열보단 백호 윤휴 쪽이 더 많은 서적을 남겼다. 조선실록에서 가장 많은 이름이 드러난 인물은 우암 송시열이다. 분명한 사실은 뛰어난 유학자이나, 그의 학문은 부드러움이 없었다. 광해군 시대에 처음 시작은 선혜지법은 대동법으로 이어지나, 산림의 거두였던 송시열은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대동법을 반대했다. 대동법은 농민의 부담을 줄기위한 도량화 작업이나, 그가 반대한 이유는 노론의 대부분은 농가의 대지주였던 점이다.
대신 한양 중심에 있던 한당(漢黨)이란 불리는 서인계열은 대동법을 찬성했고, 김육이란 분은 대동법에 모든 것을 걸은 서인계 유학자이다. 광해군과 서인들의 대립은 이렇게 복잡하게 시작된다. 당쟁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광해군이란 그저 중립노선 외교주의자 또는 잔혹한 폐모살제를 저지른 인물에 불과하다. 한명기 교수가 저술한 <광해군>은 2000년 초판이 나왔고, 2018년 2판이 새로 나왔다. 그동안 반양장본을 나오다 아주 깔끔한 하드커버가 씌워진 도서로 제작되었다. 게다가 책을 사면(물론 5만 이상 소비해야 하나) 광해(光海)라는 한자가 찍한 머그컵까지 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고,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다. 그때나 지금의 특징은 당시에 북한의 권력자 김정일이 있었으나, 이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도 세월의 부침에 따라 세상을 떠나고,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 위원장으로 있다. 단순히 북한과 한국의 대립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시 외교적 정쟁에서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이 상당한 입김이 작용했다. 최근에 일본의 입김은 줄어들었다. G2에서 중국의 변화와 거기에 드러난 트럼프 정권은 새로운 권력구도를 만들어내었다.
중국을 두고 공산국가를 지향하는 사회주의국가라고 하나, 사실 그 속내는 상당히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도래했고, 중국은 사회주의적 노선보다 자본주의 노선에 가깝다. 사회주의란 단지 모택동이 중공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건국헤게모니에 불과하다. 중국의 개방화는 세계의 분쟁이 이념의 문제에서 점차 경제적으로 변모했다. 명분과 실리에서 실리로 가게 되면서 세계의 시장구도는 변모했다. 중국의 물품수입을 제대로 하지 않은 한국이 이제 중국에서 많은 물품을 수입하고, 공장도 세우고 사업도 연다. 이제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식량과 공업품이 우리 일상을 덮는다.
러시아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쟁에 뛰어들면서 북한은 20세기 중후반처럼 이데올로기만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최근 외교적인 모습이 불과 2년과 다르게 변모하는 것은 세계적인 강대국들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대략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광해군의 이름이 다시 불려나온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조선은 생각보다 평화로우면서도 아주 참혹했다. 한 국가가 600년이나 지속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드문 케이스며, 전쟁을 그래 겪고도 왕조가 존재하는 것조차 어렵다. 중국의 역사에서 큰 전쟁에 타격을 입으면 그 국가는 망한다. 조선의 역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도 살아났다.
대신 민중의 삶은 헐벗고 고통이었다. 전쟁의 피해는 곧 민중의 삶을 그대로 반영된다. 고대의 전쟁은 창과 칼이나 현재는 미사일과 첨단무기이다. 한사람이 한사람씩 죽이는 게 아니라 한사람이 수만 수십만의 인간을 죽일 수 있다. 광해군이 가진 장점이란 바로 그런 시기에 어떻게 하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다. 전쟁을 하려면 많은 장정이 필요하고, 임진왜란 후 인구가 반 정도 사라진 현실에서 수많은 장정을 내보내면 국가적으로 손실이고, 거기에 필요한 군수물자는 백성의 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장정들이 타국에서 죽으면 그 가족들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광해군 시대 삼하전투 희생자들의 부모는 다 임진왜란 당시 아비규환의 고통을 겪었다. 광해군 역시 자신도 피란의 고통을 당하고, 명나라 장수 앞에서 수모를 겪으며, 분조를 지휘하며 목숨을 잃을 뻔했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백성을 보며 그가 느낀 조선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성을 짓는데 정신이 팔리고, 개똥이란 궁녀에게 속임을 당해 왕위를 잃는다. 내정에 제대로 돌보지 못함은 실수였고, 남인과 서인을 제대로 다독이지 못한 것도 실수이다.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처럼 임진왜란 당시 같이 고통을 나누던 원로대신을 제대로 지켜주지 않음도 실수다.
권력의 정점에서 권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함은 책임이 크다. 그러나 이후는 그보다 못했다. 광해군 이후 밥값을 제대로 했던 임금은 누구인가? 생각하면 정조 이름을 빼면 그다지 나오기가 어렵다. 인조는 병자호란에서 임금의 자질을 이미 절실히 보여줬고, 폐모살제란 명분에서 인조 역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소현세자와 그 가족을 박대했고, 종실에서 반역의 기미가 보이면 그 역시 숙청했다. 숙종 때 이르러 삼복의 옥사는 가까운 집안 아저씨조차 사약을 내리는 비정한 임금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당쟁에 의한 무고와 정치적 전략이었다. 여전히 백성에 대한 학대는 심했고, 백골난징과 황구첨정은 계속 나온 말이다.
광해군이 그렇게 무능했고, 성을 짓는 공사에 예산을 탕진했다면, 인조는 모문룡에 바친 것은 조선 전체예산의 30% 이상이라면 차라리 성을 짓는데 돈을 투자하는 게 나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행위를 문제 삼아 뒤집은 결과가 그 이상으로 되지 못했다면 의미 없는 행위일 것이다.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면, 주인공은 인조반정 당시 아버지가 반정세력에 의해 참수되는 장면을 본다. 그로부터 14년 후 어른이 된 주인공은 병자호란을 겪고 자신의 여동생과 매제가 청국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구하기 위해 싸운다.
이때 조선의 관군은 해결사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여진족에게 사냥대상에 불과하며, 조선민중은 포로로 끌려갔을 뿐이다. 병자호란이란 거대한 서사에서 이 영화는 병자호란의 정치적 색깔보단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쟁하던 남매와 소꿉친구를 보여준다. 물론 인조반정이 실패한 정치였다는 것은 영화 전체를 보면 알겠지만, 조선이란 국가의 운명도 중요하나 그보다는 나와 내 주변의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가 내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결국 내가 지킬 수밖에 없는 점이다.
조선의 향교에 배향된 인물은 병자호란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인조반정의 중심인물이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을 본 사람도 있다. 게다가 북벌을 주장하면서 말로만 그래하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인물도 있다. 청나라의 위세를 알면서도 내부적으로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청나라는 이중적인 잣대가 적용된다. 청나라에게 분명히 패배했지만, 조선은 청나라에게 패배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청나라 사신이 오면 은을 상당히 제공하고, 온갖 거드름에 비위를 맞추며, 청나라 편에서 통역사를 맡은 자는 과거 천인이었지만, 조선에서는 당상관보다 더 높은 권세를 보여줬다.
향교에서 임진왜란 전후의 인물로 조헌과 성혼이 있으나, 사실 임진왜란에서 더 높은 활약과 학문적으로 더 뛰어난 인물로 서애 유성룡이 있다. 향교에 퇴계 이황 이후로 남인계열 학자는 없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 같은 인물들은 역적 내지 사문난적, 천주학쟁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그 이전에 기축옥사에서 곤재 정개청이나 삼봉 최영경 등 같은 명유도 죽임을 당한다. 사실 퇴계와 남명 아래 수학 받은 유학자 중에 상당한 학문을 가진 자도 있었고, 연구자료도 남긴 것도 많다. 그러한데도 여전히 향교의 배향은 현재도 그러하다. 조선의 유학을 두고 세계 유학학회에서는 조선의 정약용을 빼놓지 않는다.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분명 명유는 존재하나, 향교는 그 명맥이 끊긴 점이다. 서인의 정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왕실과 혼인하고, 지방산림의 거대한 유학자를 올려 중앙집권에서 왕을 압력하고, 지방에서도 중앙으로 입김을 작용하여 권력의 카르텔을 완성했다. 광해군은 기축옥사가 일어날 때 일개 왕자였고,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가 반정에 의해 실각하자 여진족에 의해 조선이 치욕을 당했다. 그러나 당쟁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선조는 기축옥사로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세자거취로 서인을 견제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남인을 활용하면서도 끝이 나자 남인 대신 북인(이산해)을 불렀다.
말기에는 대북파 대신 소북파 유영경을 신임하다 세상을 떠났다. 선조가 저지른 붕당의 피는 광해군 시대에 대북파의 독주로 이어지고, 결국 서인에 의해 폐위된다. 광해군의 정치사는 단순히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구도가 외부의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점이다. 국내 정치에서 현재 대통령이 촛불에 의해 태어났지만, 최근에 촛불을 배신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광해군의 역사적 현실을 봤을 때, 광해군은 권력의 구도에 의해 정치권력을 추구하던 그들의 명분에 맞게 돌아갔기 때문에 성공했지만, 지금은 국민이 정치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이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게 아니다.
물론 그 당시 외부의 조건, 내정의 여건, 이미 그 현실을 만들어낸 토대에 의해 움직인다. 선택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선택이란 몇 가지 갈림길만 두고, 그 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높은 언덕뿐이다. 언덕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어느 길이 답이라 말할 수 없지만, 답을 정해놓기 보단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결국 과거의 길을 다시금 밟아볼 수밖에 없다. 과거처럼 정권에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을 멋대로 감옥에 잡아와 장형으로 죽게 만들고, 가족들과 친구, 그 친구의 가족조차 잡아 죽일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오던 사람들을 역사책에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구루시마군을 울돌목에서 격파할 때, 자신의 수하 안위 장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위가 물러서면 군령에 의해 참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안위는 살아가기 힘든 여건에 있다. 안위의 삼촌뻘 되는 사람이 기축옥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정여립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위가 임진왜라에서 공을 세워도 추후 정묘호란이 일어날 때 기용하지 않는다. 그가 정여립의 조카라는 사실이다. 기축옥사가 1589년이고, 정묘호란이 1627년이다.
당장이라도 조선이 망할 위기인데도 당쟁의 관계성을 따진다. 광해군시절의 중요업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광해군 시대에 이순신의 사당이 제대로 생겨났고, 유성룡의 병산서원의 액자가 내려졌으며, 원균의 가족이 받던 녹봉을 중지했다는 점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원균의 가족에게 다시 곡식이 녹봉으로 내려졌다. 선조가 공신목록에서 1위 이순신의 옆자리에 원균과 권율을 올리는 것은 다소 과도한 처사이다. 차라리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순신 옆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아니면 진주성의 김시민 장군 정도면 말이다.
광해군은 위에 거론한 인물과 동시대에 살아간 인간이다. 권력의 최고점에도 있지만,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던 인물이다. 시대는 변화 하고, 전쟁의 상흔은 남아있다. 한국 역시 한국전쟁의 상처가 70년이 지나지 않았다. 전쟁의 비극, 배고픈 시대, 암울한 정치, 권력에 의해 숙청되는 지식인과 정치인, 외교적 갈등 등을 보면 400년 전에 혼란하던 광해군의 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향교와 관련하여 전주 경기전에 놀러간 적이 있다. 신혼여행 이후 데이트스냅을 찍으며 경기전과 전주향교를 거닐었다.
경기전을 재건한 인물이 광해군이고, 광해군이 폐위된 후 숙종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그곳에 모신다. 전주이씨 문중을 매년 일정한 시기가 되면 제사를 지낸다. 과거 조선시대의 의복을 입고, 한자어로 된 축문을 읽는 그들이 우리에겐 과거의 유산일까? 아니면 현재의 새로운 관광자원일까? 적어도 그들이 전주이씨 문중이면서도 과거의 광해군이란 먼 조상친척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복거리에 많은 여성들이 개량한복을 입고 셀카를 찍거나 아니면 추억을 기념할만한 인생사진을 남긴다. 이러나저러나 광해군은 문제가 많은 임금이나 밥값은 제대로 한 임금은 분명하다. 전주의 한복거리를 거닐며 수많은 인파가 즐거운 얼굴로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다.
광해군, 그도 사실은 한복거리처럼 수많은 한국인, 조선인의 후예들이 즐거운 삶을 살기를 바랐을까? 광해군이 다른 왕자와 같은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반찬이 뭐냐고 물었을 때 다른 왕자와 달리 지혜로운 답을 내놓았다. 소금이라 답을 했다. 소금이 있어야 음식의 맛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과 지금까지 지위와 계급, 부와 빈을 막론하고 한국과 동양에서 쌀과 소금은 모두가 공통으로 먹는 음식이다. 소금은 왕자인 본인도 물론이고, 길가의 봇짐장수조차 먹는 음식이다. 전쟁의 아픔과 당쟁의 피로는 스스로를 결국 몰아갔다. 그가 남긴 업적과 실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호불호가 갈린다. 하지만 적어도 100년 전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라면, 그가 남긴 업적이 우리에게 충분히 밥값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