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외 - 법과 죽음에 대한 통찰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3
플라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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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록은 서양문명에서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그의 사상이 유럽을 지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플라톤의 이름과 함께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이름도 퍼져 나간다. 사실 생각해보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언제나 소크라테스의 옆에만 있었을 것은 아닐 것이다. 대화록은 결국 소크라테스를 앞을 내세우고,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많은 분량을 혼자서 다 기억하여 작성했을까? 아니라면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 정리하여 기록했을까? 여전히 그런 부분은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플라톤이 적은 글들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라고 믿을 수밖에 없고, 소크라테스가 발언한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2,600여 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은 이상 그것은 알 수 없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그는 초기, 중기, 후기 3단계로 구분되어 작성한다. <파이돈>이란 대화록은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소크라테스와 주변 친구들이 모여 대화를 나눈 것을 정리한 내용이다. 책에서는 플라톤은 등장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몸이 아파서 집에서 쉬고 있었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갔다.

 

<파이돈>을 읽으면서 생각할 점은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멜레토스라는 인물에 의해 무고를 당하면서부터다. 관아에서 자신이 고소당한 것을 안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관아로 가는 도중에 <에우티프론>이란 대화록이 시작되고, 다음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 사형선고 이후 감옥에서 친구 <크리톤>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파이돈>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니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안 상태에서 서사적 흐름으로 정리하자면 <에우티프론>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이란 사실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펠레폰네소스전쟁 패배 이후 라케다이몬이란 스파르타에 의한 과두정부가 수립되고, 30인으로 구성된 지도자들은 민주정 해체 이후 제대로 된 정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독재와 폭력을 일삼고, 수많은 시민을 처형하고 재산을 가로채었다. 그 중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있었고, 그들은 민주정 혁명 이후 권력을 잃고 도망치거나 처형당했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그들에 대한 분노를 참기 어려웠으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뭔가 하나의 사건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이유는 그런 분위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과두제의 위원에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가 평소 바른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민주정 정부 수립자들에게 상당히 비위가 거슬렸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에서 단순히 그의 제자들이 반역자라서 몰아넣기 식이 아니라, 단지 그가 없어지면 좋겠다는 심리적인 압박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적인 영감 그리고 지혜를 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아테네지역을 돌고 돌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평생 아테네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소크라테스로 봐서는 이 세상에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 줄 철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유명한 시인, 철학자, 정치가, 각계 인사들은 소크라테스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논리가 부족한 것이 들통 나고, 소크라테스 때문에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고, 그로 인해 마음속에 앙심을 품어버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에서 비롯되는 숙청보다는 사회적인 여론에 의한 숙청에 가까웠다. 단지 사회적 죽음에서 권력자들이 뒤에서 압박을 가했기에 그의 죽음은 마녀사냥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간에게 죽음과 삶은 무엇인가? 기존의 철학에 대한 역사에서 physics(물리학)는 과학적인 요소를 보았다. 지구는 무엇이고, 만물의 요소는 무엇인지,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고, 운동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탐구가 바로 과학적인 철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돌이 떨어지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라도 돌이 왜 떨어지고, 떨어지는 돌이 어느 경우로 떨어지며, 그것에 작용하는 힘은 무엇인지는 물리학적으로 시각적인 영역보단 비시각적인 수학적 영역으로 도달한다.

 

이런 인간의 사고방식이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 존재, 있지도 않은 어느 이미지가 구현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철인군주가 있어야 올바른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국가론>에서는 플라톤의 사상적 토대를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학을 모르면 안 되나, 또 하나가 중요한 학문으로 기하학이었다. 기하학은 일반적인 도형과 다르다. 그런 모양이 구상되는 이유는 인간의 뇌에서 사유할 수 있는 세계가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생각되는 Simulating하는 것은 곧 가상적인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 하나의 장치로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왜 기하학이 중요하고 수학이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전쟁을 하려는데, 적군의 수와 아군의 수를 파악하고, 군부대도 수군인지 육군의 형태로 보고, 전장의 지형과 지리 그리고 아군의 진형을 파악하여 적군하고 싸우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전쟁에서 이른바 지형과 지리를 보고 진형을 짜서 치는 것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흔히 사용하던 방법이다. 수전에서도 파도의 높이나 물의 흐름 그리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은 승부의 패배를 결정짓게 하는 요소다. 그런 점에서 현실이 아닌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에서 모방되어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기존의 physics에서 공간적 층위가 하나 더 올라간 Meta-physics라는 형이상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음이란 곧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되고, 현실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육체적인 조건보단 정신적인 조건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파이돈>을 읽을 때 바로 이런 점을 유념해야 하는 이유는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에 존재하는 것들을 모방했기에 진정한 진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이데아에 존재하는 그 개념만이 영원불멸할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인간에게 치환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보통 동물보다 오래 산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오래 사는 이유는 바로 다른 동물처럼 어릴 때부터 바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을 받는 기간이 길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자연세계의 야생동물은 태어나자말자 걸어야 하고, 새들은 수개월 안으로 날개를 펴고 날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자연의 세계는 잔혹하기에 그만큼 새끼들이 보호받는 기간이 짧아 충분히 성장해야 하는 기간이 짧다. 우리 인간이 사육하는 소들도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도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몸이 다른 동물보다 수명이 길어도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죽는 나이가 70이다.

 

지금의 70이란 수명에 죽는다면 그렇게 장수했다고 볼 수 없으나, 고대 사회에서 70이라면 상당히 장수한 나이다. 죽음이 다가온 나이에 조금이라도 더 살 것이라고 추태를 부리면 그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여겼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길목에서 왜 그래 두려워하지 않은 것일까? 현대사회는 물질적 요소가 중시되는 사회다. 즉 자본주의의 도래와 그로 인한 산업화, 인간이 하나의 존재론적인 가치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도구의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적인 가치에서 고대 사회에서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현대사회는 피지배계층이 계속 억눌러 사는 것이 부당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 가치적인 차이는 그 당시의 사회상인 것이다. 운명의 흐름에서 그리스에서 신의 존재를 믿었다. 결단코 제우스께! 라는 말과 여러 올림포스의 신을 입으로 내뱉는 행위는 신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기에 거짓을 일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세상이기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비장하게 끝낼 수 있다. 그에게 각종 신과 영웅 게다가 인간지성사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성현들을 하루라고 먼저 찾아가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았다.

 

죽음은 행복의 축복인가 불행의 저주인가? 실존주의자에 의한 판단에서는 삶과 죽음은 언제나 같이 붙어있고, 나누어지지 않으며, 살아있는 게 죽어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같이 있다고 한다면 죽음이야 말로 삶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바로 이런 정신적인 세계가 펼쳐진 영혼의 세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아래 무난히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이유는 인간은 죽는 것은 당연하고,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보이야 하는 것은 육체는 썩어서 없어지질 모르지만,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영원하지 못한 것이 있고, 좋은 게 있다면 좋지 못한 게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에서 찾아볼 점은 바로 대조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죽어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반대고, 삶은 죽음에서 나왔다면, 삶 이후에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단지 그가 죽음을 받아들인 과정에서 충분히 삶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그렇지 않은 이유는 <크리톤>을 더불어 참고하면 좋다. 소크라테스는 해외로 망명하거나 탈옥하면 삶을 영위하나, 그 이후 자신에게 떨어진 불명예, 주변에 친구와 가족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자신으로 하여금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없고,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당시의 권력에 소크라테스의 머리를 숙인다면, 소크라테스는 이때까지 거의 1/3에 해당되는 인생을 속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그동안 자신을 속이지 않고, 오로지 진실을 구하기 위해 재물과 권력을 멀리했다. 그런데 재물에 의지하여 탈옥하고, 권력에 머리 숙여 목숨을 구걸하면 자신을 고발하던 사람의 책략에 걸리는 것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없애고 싶은 마음보다 소크라테스의 비굴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의 권력에 의해 죽더라도 그들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신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에 위대한 인간을 없애버린 비극이 되었고, 후대 역사에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장본인들은 어리석고 비겁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진심 영혼이 있어 천국과 지옥의 세계에서 재판이 있다면, 소크라테스를 죽인 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죄로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점에서 자신은 그 영원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육체라는 일시적인 허물은 그저 스쳐가는 나그네인 것이다. 영혼의 불멸이 있으니 오히려 그 영혼을 갈고 닦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목적이다. 신의 분부를 따라 지혜를 갈구하는 인간이 결국 마지막에 신과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한 일은 남이 다 알 수 없다. 오로지 아는 자는 신이라면, 신이 눈앞에 보이지 않다면 영혼 즉 관념 속에 세계에 존재한다.

 

자신의 삶에 후회 없는 삶을 사려면 신은 언제나 옆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이 있어 나를 알아주면 내가 현실에 죽어도 현실을 벗어난 다른 세계에서는 충분히 자신을 알아준다는 점이다. 오늘 현실에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면 자신의 착각이나 어리석음으로 주변에 얼마나 많은 민폐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모를 수 있다.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가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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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2 루소전집 1
장 자크 루소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책세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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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의 <고백> 2권을 읽으면서, 1권 부분은 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이라면 이제 시작된 2권은 루소가 세상에 비로소 드러내는 시기다. 1권의 루소는 바랑부인의 만남 그리고 어린 시절의 방황 등이 주요 이야기다. 루소가 바랑부인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음악에 열중하고, 그녀에게 빠졌으나, 이내 루소를 대신할 근육질의 남자가 바랑의 애인이 되어주었다. 루소는 바랑부인을 무척이나 사랑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누구에게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 같은 루소로서는 바랑부인에 대한 집착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교감이란 한 쪽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양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한 쪽은 상대방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하는 불편함에 불과하다.

 

루소는 바랑부인을 떠난 후에 파리와 프랑스를 돌고,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스페인의 대사관에서 일하기도 한다. 루소의 성격을 보자면 소심하나 자신의 양심적 틀에 벗어나면 참을 수 없는 성격이다. 그 성격이기에 남들에게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기도 하나, 다른 사람들이 루소에게 함부로 대하는 순간 루소는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성격에 의한 결벽증으로 타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우애를 보이면서도 그에 대한 배신을 느끼며 가차 없이 등을 돌린다. 보통 사람과 다르게 루소는 제 아무리 예전에 친한 자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위협하더라도 그들을 모함하거나 위협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고난으로 인해 그 고난의 출처에 대한 복수나 음모를 꾸미지 않은 점이다. 그가 계속 박해를 받는 이유는 루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물론 그 다른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루소의 가장 좋은 부분은 가장 최악의 부분이다. 그의 수줍고 양심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에게 2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믿을 수 있고 진심을 다해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는 그런 성격을 이용하여 이용해 먹거나 음모에 빠뜨리는 경우다. 인간의 사회는 온통 부조리만 가득한 이유는 인간의 문명이 바르지 못함이다.

 

왜 루소가 디종 아카데미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와 2번째 논문인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저술했을까? 인간사회에 보인 사회적 관계에서 오로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모습만 가득하다. 길가에 널린 불우하고 가난한 이들은 구걸과 좀도둑질로 하루를 연명하다 어느 순간 죄인으로 사로잡혀 형틀에 묶여 팔다리가 부러지는 비참한 죽음을 루소는 아주 강렬한 감정으로 담는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사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불우한 현실을 인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승냥이 같은 모습으로 남들을 공격한다. 나보다 약한 자들, 혹은 공격하기 좋은 자들을 말이다. 루소가 박해를 피해 온 섬에 주민들은 돌팔매질을 했고, 그 돌들은 유리창을 깨고, 벽을 부수었고, 루소의 눈 옆을 지나갈 정도로 흉폭했다.

 

그 현장을 보러 온 담당 관리는 이 장경을 보고 마치 채석장에 온 것 같다고 한다. 대낮에 산책하는 루소를 보고 돌을 던지고, 총을 가지고 와서 죽이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라면 루소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은 운명이다. 그가 운명의 비극에 빠진 것은 무엇이 시작인가? 루소는 <고백>을 1764년에 시작하여 1770년에 완성한다. <고백>을 완성한 시점에서 그가 그 책을 낭송하는 것조차 예전 친구들은 반대한다. 데피네 부인은 루소와 친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최고로 그를 억압하는 사람이 되었고, <고백> 최종본이 나온 다음해 1771년 낭송을 금지하도록 경찰에 요청했다.

 

루소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바로 그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인망과 질투에서 시작된 것이다. 루소는 상당히 천재적인 인물이다. 음악에 조예가 없다가 그가 만든 <마을의 점쟁이>는 아직까지 음악으로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음악이다. 그런데 그 음악을 만든 것을 주변에서 시기하고, 극장의 주인은 루소의 자유 입장권을 몰수하고, 게다가 그 저작권마저 가로챘다. <마을의 점쟁이> 성공으로 루소는 이때까지 손대지 못할 정도로 금전적으로 성공했지만, 그 명성만큼 주변에 귀찮은 인간들만 생겼다. 루소는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 대상을 넓히지 않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인간이기에 그가 느끼는 인간의 첫인상이 무척 중요했다. 그런 모습은 대부분 좋은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지만, 그를 속이는 인간도 만들었다. 인간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주변 인간들을 대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사회적 조건과 상황 그리고 주변 인물의 영향에 의해 바뀌기 때문이다. 루소의 가장 장단점은 남에게 거짓으로 아부를 하지 않는다. 누구를 억지로 찬양하거나 누구를 억지로 내려까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다른 사람의 호의조차 거부하는 일도 많다.

 

권력자의 눈에 루소가 하는 행동은 건방진 짓이며, 라이벌이나 먼 곳에서 시기하는 사람에게 보기엔 오만한 짓이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바보 같은 짓이다. 루소가 처세술에 빈약했기에 오직 그만의 정신적 가치로서 행동했기에 <고백>이 나온 것이다. <고백>을 보면 루소가 모두 다 잘했다고 할 수 없다. 그가 저지른 실수도 있고 과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루소가 저지르든,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가 적이 된 디드로조차도 인간이란 점이다.

 

자신들의 잘못은 스스로가 인정하기 어렵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히려 그런 지적을 하게 되는 순간, 상대방의 충고와 조언을 듣기보단 난폭한 비난과 비방으로 거부할 때가 많다. 루소의 현실적 처세술은 거의 낙점이다. 그러나 <고백>에서 나오는 그만의 처세술은 엄청난 수준이다. 그는 현실에서 처세술을 사용한 게 아니라 미래의 독자에게 처세술을 부린 것이다. 자신이 죽은 뒤에 보게 될 사람들을 말이다. 루소는 자신이 병약한 점에서 언제 병으로 쓰러질지 모른다고 여겼고, 게다가 박해를 가하는 정도가 심각하여 살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죽은 자의 명예를 죽은 자가 살릴 수 없다. 오직 그 명예는 살아있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고백>은 바로 그 시작이다. <고백>을 번역한 박아르마 교수의 말대로 루소의 필체는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나, 그 잘못을 두고 아무 근거도 없이 비난과 조롱을 삼가고, 루소 그 자체의 진실성을 봐달라고 강조한다. <고백>을 읽으면서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 프랑스대혁명에서 그 모든 시민들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이렇게도 한심한 적이 있었던가? 라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가질망정, 그 자체로 루소를 내려 까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루소가 자신 안의 신에게 맹세하고 적은 글이기 때문이다.

다소 마조히즘과 나르시시즘적인 모습은 루소 스스로가 자신을 채찍질을 하면서 그 채찍질이야말로 진실과 용기 있는 고백이란 점에서 자신의 숭고한 정신을 무시하지 마라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비웃되, 그 실수를 용기 내어 말하는 자신을 비웃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 관계에서 우리는 그를 이상하게 볼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이중성이다. 인간의 이중성이 왜 무서운가? 루소가 생피에르 섬에 갈 때 처음에 마을주민 전부가 아니어도 일부 환영을 받았고, 어느 사람들과는 좋은 이웃과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루소에게 가해진 박해에서 앞장 선 사람이 다름이 아닌 자신과 친하게 지낸 사람이란 점에서 루소는 충격을 받는다. 처음 초면에 다정한 얼굴로 착한 척하더니 뒤에 와서는 악의를 품고 공격을 가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라도 인간에 대한 공포와 비관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도 루소는 인간을 사랑했다. 단지 그 인간은 현실적 인간보단 자연에 있는 인간 혹은 이상적 인간이었다. 농촌에서 밭을 일구고 산에서 나무를 베는 농민들이 남을 헤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진정 자신의 이성과 올바른 판단력을 지닌 자라면 루소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올바른 감정과 이성이 있다면 그 누구에게나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나 혹은 지금이라도 그런 올바른 것들을 갖추기란 어렵다. 누군가 약점을 잡으면 거기를 잡고 무한히 늘어지는 자들, 저항할 힘이나 의지도 없는 자를 계속 공격하여 그를 궁지로 모는 자들, 그러면서 그 억압받고 박해받는 자가 어느 순간 그 마지막 모습을 드러낼 때 마치 불쌍하게 보는 눈빛, 인간이란 그런 이중적 잣대로 살아온 것이다. 루소가 느낀 그 사악한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정신마저 침식하여 결국 영국에 가서도 광기에 시달린다. 물론 <고백>의 마지막 부분은 생피에르 섬에서 나와 영국에 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데이비드 흄을 만나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도 루소는 자신을 괴롭히는 광기에 의해 모든 것을 의심한다.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것이란 정말 눈물 나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생명마저 빼앗으려고 든다면 더 무얼 말할까? <고백> 후반부에는 루소의 성공보단 오히려 고난과 박해의 시간만 이루어진 시간이다. 영광의 순간은 너무 짧고 빛이 났다. 불꽃이 가장 화려한 시기는 바로 소멸하기 전의 순간이다. <신 엘로이즈>의 발간은 온 유럽을 흔들었고, 모든 여성들의 마음을 훔쳤다. 책에 대한 인문도서를 알아보면 루소가 살던 시절, 책 1권이라면 일반 가정의 1~2주 정도 생계를 보낼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소설이 유럽을 강타했다. 물론 루소가 상대하던 여성들은 대부분 상류계급이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책 1권의 가격이 일반 민중들이 건들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것이 아닌 점, 또 다른 점은 소설은 문자로 이루어진 기록문학이다.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 역시 상류계급과 그들 옆에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신 엘로이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작품 주인공 생 프뢰는 높은 계급의 젊은이가 아니라 가난한 청년이다. 루소가 보던 파리, 그 파리의 모습은 루소에게 오로지 죄악과 모순 그리고 허영심으로 가득했다. 아마 그런 것을 느낀 이유는 루소가 상류계층과 어울리는 일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프랑스 파리에서 젊은 남자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귀족부인들과 친분을 쌓아야 했으며, 그 귀족부인들의 소개로 다른 귀족부인을 통해 권력과 부를 가질 수 있었다. 루소는 이미 충분히 상류계층에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루소 덕분에 다른 사람들조차 그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루소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루소이기에 높은 분들에게 아첨하지 않은 점에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마을의 점쟁이> 성공 때부터 왕으로부터 충분히 사례를 받을 수 있었고, 수많은 귀족들에게 출세의 길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도 루소는 거부했다.

 

그 거부는 본래 그가 몸이 허약하고, 특히나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에 없는 점에서 소변을 참을 수 없는 루소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복합적인 요소로 루소는 상류층에 있는 것보다 조용한 자연과 은신처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상을 그를 계속 세상으로 나오기를 원했고, 때로는 조롱을 퍼붓기도 했다. 적들은 자신들의 희생양인 루소를 향한 모순에서 언제나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 원했다. 루소가 나오지 않은 이유란 바로 그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 상황에서 테레즈와의 만남은 물론 중요하다. 다른 여인들과 다르게 수줍고 착실하며 거짓 없이 자신을 대해준 테레즈, 루소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남자구실을 하지 못해도 테레즈는 곁에 남아주었다고 한다.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쾌락과 욕망은 남성이 강할 뿐이지 여성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고백> 상권에서도 아직 성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루소는 어느 누군가의 침대에 잠을 잘 때 왜 밤마다 시끄러운지 이해하지 못한 점을 본다면 말이다. 테레즈가 예전보다 애정이 식은 것도 그녀와 성관계를 하지 못한 점에서도 나온다. 현대사회에서 부부사이에서 아내가 남편이 부부생활을 충실하지 못한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실제 이런 모티브로 황신혜 씨와 문성근 씨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이란 영화에 등장한다).

 

그래도 테레즈는 루소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그의 명예를 지키며, 마지막 가난과 빈곤에서 죽을 때까지 의리를 지켰다. 루소가 병으로 서거하여 사람들이 몰려오자 테레즈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만약 그가 성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성자라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루소의 박해는 곧 테레즈의 불운과 연결되었다. 테레즈는 평생 글자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검소하여도 숫자를 계산하지 못해 늘 살림이 빈곤했다. 게다가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 그리고 조카마저 테레즈를 괴롭히고 때로는 폭력과 협박까지 했다. 그런 테레즈였기에 루소의 옆에서 지켜주었을 것이다. 루소 역시 <고백>에서 테레즈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가득했다.

 

세상 그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도 오로지 테레즈만이 옆에 있을 것이란 점이다. 살아가다보면 가까운 친구조차도 사소한 갈등과 미묘한 오해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이익으로 인해 갈리는 경우가 다분하다. 하다못해 친구를 우정으로 대하지 않고, 손익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그 끝은 안 봐도 아는 이야기다. 루소는 손익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배신을 당했다.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의 인생에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라고 할까? <고백> 상권을 봐도 그렇지만, 우리 인간 모두는 그렇게 현명하고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사소한 이익에 단합하다가 어느 순간 서로를 향하여 으르렁거리며, 윤리적 가치가 사라진 무비판적 집착에 매달려 중요한 근본을 놓치는 경우가 다분하다. 물론 그런 것을 알고 인정하여 고치는 것이란 쉽지 않다. 그런 문제로 잘못은 일어나고, 인간은 잘못을 할 수밖에 없다. 단지 그 잘못을 이용하여 꼬리 잡아 공격하고 이용하는 부당함에 인간들은 잘못된 것으로 인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노리고 달려든다. 스스로 자신의 쇠사슬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내가 치졸하게 생각하는 인간들이란 자신의 사소한 이익에 대해 아무런 의심의 여지도 없이 윤리적 의식을 배제하면서 늘 남들에게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부류다. 아마 많은 인간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런다고 내가 그렇게 좋은 인간이라 자부하지 않으나, 그런 이익에 내 마음을 기울이는 게 내 자신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 세상을 알아가고, 사회를 이해할수록 어떻게 하면 이익이 되는지 알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남의 것을 빼앗아가고, 자신의 배불리는 게 하는 수단이 된다. 최후에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치명적인 덫이 된다.

 

<고백>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모순된 심리와 그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루소다. 적어도 바보 같이 오늘도 자신들의 이중성에 정의를 말하는 현실을 보며 그들에게 과연 스스로를 고백할 수 있을까? 인간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적당히 수치스러운 과거의 일도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서 흘러 보낸다. 하지만 정말 수치스러운 과거의 과오나 실수가 아니라, 정말 잘못된 것을 두고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손익을 따지고, 의미 없는 명예를 찾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조심해도 인간은 실수하게 마련이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것에 대해 단순히 나나 타인들이 비난하기보단 그것을 제대로 반성하고 인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닐까? 루소의 <고백>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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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1 루소전집 1
장 자크 루소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책세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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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지배계급에 의한 세계였다. 지배계급은 자신만의 지식과 권력, 그리고 무력을 이용하여 피지배계급을 지배했다. 철저한 지배계급 중심의 사상인 플라톤주의나 혹은 공자사상이 훌륭한 가르침이 있어도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플라톤주의나 공자사상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치와 지배를 하더라도 억압과 착취를 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계급의 능력으로 질서 그대로 유지하고, 그 질서 속에서 모순을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동안 정치사상에서 철학적인 요소는 배제된 채,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나마 조선의 유학은 공자의 철학이 아니라 주자의 유학이었다. 주자의 성리학으로 인해 공자의 정치사상의 기본적 토대를 버린 채 오로지 주자의 학술에만 주자의 주석에만 의존했다. 주자의 글자 하나 다르게 적거나 해석하면 멸문지화, 사문난적이 되어야 했다. 주자의 철학은 공자사상에서 종교적인 교리를 추가하여 만든 사상체계다. 그런 사상들이 계속 발달하면서 학문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으나 그 학문의 깊이를 두는 의미가 사유는 계속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학문과 사상을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인간은 본래 구석기 이전 시대에는 동물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었다. 인간은 단지 동물 포유류에서 2족 보행을 하는 종이었다. 침팬지나 원숭이와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미개한 족속이었다. 인간에게 자연이란 그저 자신에게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질서였다. 자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이 태어나고 죽고 살아가는 것이란 동물적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동물이란 것은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여도 그 죽음이 당연한 것이고 그 죽음조차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에게 이성적 판단력, 그리고 시간적 관념을 가지고 나서부터다.


인간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시간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알게 된 것은 아마 신석기 시대부터가 아닐까 싶다. 그 이유는 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보거나 거대한 돌무덤을 본다면 자연 속의 미개인이던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아주 작은 이성적 능력이 있었기에 동물적인 본능으로 자연을 경험하는 게 아니다. 천둥번개를 보면 신의 분노이고, 가뭄과 홍수는 신의 재앙이며, 풍년과 수확은 신의 축복이다. 자연의 흐름은 과학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했고, 자연의 변화는 신의 능력이라 여겼다.


그런 시기에 인간은 신과 자신을 동일하게 보고, 점차 세력을 넓히고 무기를 들고 빼앗고 약탈했다. 힘으로 통치하던 지배자들은 더 이상 힘으로 지배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에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정치적 권력이고, 그 권력은 지식과 조직체계다. 인간의 집단적인 행동을 통제시키고, 그들이 자신의 권좌를 노릴지라도 그 권좌에 앉아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깨달게 만드는 것이다. 지식의 역사란 과연 인간을 위해 존재했는가? 아니라면 문명이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했는가? 물론 존재했을지 몰라도 보통 누리는 것보다 어느 특정 누군가가 훨씬 더 좋은 행복과 혜택을 누렸다.


이런 체계를 정당하게 해주는 것은 결국 지배계급의 정당화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나마 용인 받는 이유는 플라톤은 정치가에게 철저히 강인한 육체와 현명한 지혜를 갖추기를 원했다. 오로지 수련하고 검소한 행동으로 용기와 절제를 강요했다. 하지만 지배계급에 올라선 자들을 지켜보면 실제 그런 행동을 한 자는 거의 드물었다. 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이 용감했는가? 죽음이 바로 마주하는 전장에서 그들은 왜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을 따라 트로이아인들에게 돌격했는가? 그것은 식사시간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제사로 받친 고기를 모두 공평하게 배불리 먹게 해준 것이다. 왕이나 병사나 모두 같은 음식과 술을 마시고, 전리품은 왕보단 부하에게 나누어준다. 그래서 병사들은 용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공물을 위로 몰릴수록 병사들은 겁이 많아지고, 위에 있는 장수와 부장들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인간이 된다. 인간의 문명에서 과연 우린 문명인이라 볼 수 있을까? 분명 기술과 문명은 시대가 흘러갈수록 발전한다. 이런 인간의 문명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과 좋은 인생을 살아온 것인가?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이 바로 장 자크 루소다. 그의 서적은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의 모습은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이 내재되어 어느 편중된 시선에서 보는 것이란 불가능했다. 그런 만큼 루소의 인생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고 어느 한 가지로 정의내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루소의 인생은 과연 어떤 것인가? 사실 인간 스스로의 자서전이나 또는 그런 평전들은 문학소설(도서관 비치번호 800)이나 역사서(도서관 비치번호 900)에 올려놓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루소의 자서전이란 문학도 아니고 역사서도 아니다. 그의 서적은 100번대인 철학도서다.


처음 나온 자서전인 <고백>, 다음으로 나온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그가 죽기 전에 미완으로 끝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모두 철학도서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생각 그리고 그가 겪는 현실을 적는 것이 자서전이라면 분명 역사도서일 것이다. 하지만 루소의 자서전은 그의 역사만을 기록한 게 아니다. 인간이 가진 온갖 역설과 모순 그리고 비극과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통해 노래한다. 그것은 하나의 비극 시와 같고, 극단적이고 격정적인 글들이었다.


왜 그런가? 왜 루소의 서적이 이래 독특한가? 많은 역사적 인물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리한 부분을 적지만, 결국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의 영웅으로 남으려 한다. 그러나 루소는 전혀 영웅적으로 보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시절 영웅처럼 보이고 싶어 하다 곤란한 입장을 놓인 것을 적어 놓는다. 루소는 태어나면서 평범하지 못한 인생을 살았다. 그 동기는 어머니의 죽음이다. 어머니는 루소를 낳자말자 돌아가시고, 루소는 숙모의 손에 큰다. 어머니의 부재, 그 어머니의 산통으로 태어난 루소는 건강하지 못했다. 작은 키에 마른 체구, 체력도 약하고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다.


삶에 대한 회고에서 그는 분명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도 루소는 세상이 자신보고 불우하다 해도, 자신 스스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한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루소의 인생을 알려면 단순히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 같은 서적이 아니라 <고백>으로 통해 들어가야 한다. <고백>을 저술한 시기는 루소가 가장 인생에서 가장 불우한 시기에 적은 것이다. <사회계약론>이 왕권 절대주의에 큰 문제가 되는 책이었지만, 더 심각한 것은 <에밀>이었다. <에밀>을 읽게 되면, 신이란 우리 인간을 처음부터 만들고 모든 것을 결정짓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는 이미 신에 의해 완벽하게 태어났고 그 인간 스스로가 삶을 결정짓는 것이 바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과 마주하는 것은 그가 저승에 가면서부터다. 신은 그저 인간 스스로의 양심을 바라보는 이신론(理神論)적인 존재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진 것이라 말하는 기존 가톨릭교회로부터 루소는 악마적인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에밀>에서 더 위험한 말은 곧 유럽에서 혁명이 시작된다는 글이다. 실제 <에밀>은 1762년에 출간되고, 그로부터 27년 후 프랑스 바스티유광장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그의 끔찍한 예언은 루이16세의 목을 단두대의 칼로 분리시킨다. 루이16세는 자신의 왕국을 무너뜨린 자가 루소와 볼테르라고 한다. 하지만 볼테르보단 루소에게 더 많은 호응과 열의가 다가왔다.


루소가 살던 시절은 루소의 삶은 매우 불우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자 그는 프랑스의 신이 되었고, 세계 혁명가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좌우 이데올로기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그런 루소의 삶 자체가 엄청난 모순과 역설이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새로운 가치와 사유를 만들 수 있던 것은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른 삶과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보고 느낀다면 그 사회 자체를 읽을 수가 없다. 사회 테두리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낯선 나그네로서 바라보기에 세상을 알고 바꿀 수 있었다.


루소는 바로 그런 힘을 가졌던 것이다. <고백 1>을 보면 루소가 어머니의 부재에 콤플렉스를 가졌던 점, 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에게 관심 받는 것을 좋아했다. 고백 초반에 어린 시절 랑베르시에 양에게 교육을 맡길 때, 그녀에게 혼날 때 루소는 고통과 더불어 쾌락의 감정을 느꼈다. 흔히 말하여 상대 이성에게 성적이나 혹은 다른 식으로 학대받는 것에 성적 쾌락을 가졌다는 점이다. 루소의 성적인 증세는 마조히스트였다. 루소 시대 이후 후작이나 문제가 심각했던 사드는 사디즘을 만들데 한 장본인이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루소의 성적인 결벽증과 돌발적 행동은 그의 심리적 불안에서 기여된 것이다.


그의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행동은 인간에게 이성과 감정이란 세계 말고도 무의식이란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알리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준 것도 루소라고 한다면 근대사상에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가 중심이었다면 루소는 그들보다 이미 100년은 앞 선 것이다. 단지 루소는 자신의 분석이 자신의 역설적 요소라는 점이고, 그 치부를 그대로 드러낸다.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어두운 곳에 나와 여성이 있는 것을 목격하면 그녀들이 눈에 뛸만한 곳에 가서 자신의 코트를 열어 놓는다.


그 옷 속에 숨은 자신의 성기가 여자에게 보이게 되고, 루소는 부끄러움과 더불어 여자들의 비명과 시선에 쾌락을 느낀다. 이름 하여 바바리맨이 루소가 보인 행동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엄두도 못 낼 행동을 루소는 실천했고, 덕분에 어떤 건장한 남성에게 잡혀 봉변 당할 뻔도 했다. 루소가 가진 성적인 증세는 지나친 자위로 자신의 심신이 소모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무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다른 여자들을 육체적으로 취하지 않고, 정신적인 상상력과 자기 스스로의 해소는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루소는 수줍음이 너무 지나쳤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


아주 연약한 마을에 격렬한 감정, 도저히 자신을 자제할 수 없는 소용돌이는 누가 보더라도 루소를 이해가 불가능했다. 루소조차 당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기보단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을 뿐이다. 장점보다 단점이 너무 지나치게 편중된 점에서 루소는 자신을 학대하고 상처 주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려 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너무 학대하는 사람을 우리가 본다면 더 이상 다그칠 수 없는 것처럼, 루소의 자화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루소를 보고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루소는 자신의 <고백>에서 자신의 책을 읽는 대단한 사람들이란 문구가 있다.


이 문구를 읽어본다면 나나 다른 분들은 루소에게 있어서 대단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루소보다 대단할 수 없다. 그가 남긴 인간중심의 민주주의,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서 아니다. 루소보다 우리가 더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반성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도 자신보단 주변에 있는 불쌍한 이웃에 향한 루소의 연민에 대해서 말이다. 루소는 파리에 가면서 느낀 것은 거리에 비참한 사람이 넘쳐나고, 시골농촌의 농부는 과다한 세금착복에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이미 그런 비극은 계속된 현실이었고, 어느 그 누구도 그런 문제를 제기하려하지 않았다.


볼테르가 지적한 것은 무능한 정부이지, 무기력한 민중이 아니었다. 루소는 바로 그 민중을 향한 시선을 <고백>에서 처음 나타낸다. 이미 디종 아카데미에서 수상을 받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어본다면 루소가 바라보는 것이란 문명에 대한 인간의 모순이다. 곡학아세(曲學阿世), 학자로서 가장 피하여야 할 그 방식을 예나 지금이나 고수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루소를 보고 더럽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의 입으로 나의 더러움을 말하여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 그 누가 실천할 수 있는가? 이런 현실을 보면서도 아무런 외침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의 나약함에 실망과 좌절을 느끼지만, 루소에 비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한 존재다.


루소는 인간의 이중성을 제대로 고발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려 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자신은 그런 인간이 되길 거부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유산이나 연금을 주려해도 거절하고, 명예와 이름을 높이려 해도 거부했다. 자신의 힘으로 책을 저술하여 매출된 서적으로 돈을 받았고, 늙어서도 방에 홀로 앉아 악보를 뺏겨 쓰며 자신의 생계비를 충당했다. 우리의 주변을 보면 다소의 이익에 눈을 밝히며 덤벼드는 사람을 볼 때마다 참 난감하다.


작은 이익은 아니지만, 그 이익이 결국 타인의 주머니를 합법적으로 훔쳐가고, 타인에게 커다란 빚을 안겨준다. 그런 행동에 대해 자신의 양심에 일말 가책도 없고, 좋은 기회에 돈을 벌었다고 주변에 자랑하며, 그런 자신의 지혜로움을 자랑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힘들거나 방송에서 세상물정이 어려우면 남에 대해 걱정하는 척한다.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선량함을 동시에 추구하는 바보 같은 사기에 나는 그들을 비웃고 있는 것을 느낀다.


현실에서 바보처럼 내 이익에 밝지 못한 채, 그런 이익을 충실한 인간을 보며 비웃는 내 자신이 옳은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속에서 그들을 비웃는 내 모습이 있기에 그들처럼 살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나도 그러한데 모든 인간들은 역설적이지 못해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모순에 빠져드는 세상을 보면서 그들에게 과연 진정한 고백이 존재할까? 부끄러움 자신을 알고 반성하는 삶, 그것조차 없는 인생이라면 과연 그의 최후에 어떤 식으로 인생이 질문을 던질까? 차라리 스스로 인정하는 삶 그것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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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네 대화 편 -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3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엮어 옮김 / 서광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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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저술한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칠십 되는 나이 아테네 내에서 고발당하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그가 고발당한 이유는 젊은이들을 현혹하고 신을 모욕한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억지로 밀어붙인 고소는 소크라테스를 법정 앞에 세우게 만들고, 그를 유죄로 심판한다. 그의 유죄선고는 아테네 시민들이 법에 의해 살아가고, 모든 것은 법으로 복종해야 하나 법을 복종하지 않고 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소크라테스를 함정에 빠뜨린다.


그 함정에 의해 관아를 향하여 소크라테스는 발을 옮긴다. 가는 도중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한 에우티프론을 만나고, 그와 대화 후 법정에서 변론하는 소크라테스가 보인다. 플라톤의 대화록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은 말 그대로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것에서 시작하여 재판과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을 보여준 작품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무고한 죽음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정치인이란 꿈을 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리스철학의 중심이 되어 21세기까지 내려온다.


개인적으로 플라톤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플라톤의 사상에 다소 위화감을 느낀다. 플라톤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그의 철학에 중심 되는 인물은 소크라테스라고 해도,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분명 알 수 있다. 귀족적인 시민, 또는 더 나아가 철인(哲人)군주에 의한 통치다. 국내 플라톤과 그리스철학 대가인 박종현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중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환상은 우리의 현실을 옭아대는 병이다. 그런다고 철인이 나와 정치를 해도 다 되는 게 아니다. 이미 21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종현 교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한 점을 보고, 그가 1970년대 한참 교수에 있던 점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군사독재 시절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논하나, 사실 소크라테스가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그가 참주제 이후 민주제가 도래했을 때 어느 권력자에게 미움을 받아서이다. 2번째 변론의 해제부분에서 번역자가 당대 권력자인 아니토스에게 바른 말을 하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아니토스의 사주를 받은 밀레토스가 소크라테스를 공격한 것이다. 당대의 권력자와 그 법정에 나온 시민들은 권력의 흐름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가 일치된 전체의지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희생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철학사상에서 장 자크 루소는 기존 플라톤주의를 이어 받은 것 같으면서도 전도시켰는데, 루소는 플라톤이 주장한 국가관에서 시민에 의한 옳은 정치를 지지했다. <사회계약론>에서 제시한 이상적 국가정치관이 그리스로마의 공화제였다. 하지만 그 공화제에서 모든 것이 옳은 게 아니지만, 그 이후 인간의 역사에서 그 만큼 옳은 정치관이 없었다. 공공에 대한 이익을 지지하고, 개인의 이익을 뒤로 하는 일반의지는 시민정치에서 매우 소중한 정신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법이 아니 법을 이용하는 자를 따르게 되면 그 사회는 결국 독재자의 것이 되거나 바르지 않은 정치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은 보자면 바르지 못한 권력자에 향하여 옳은 이야기를 하다 화를 당한 것이다. 박종현 교수가 1972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했다면, 그가 한참 교수로 있던 시절은 군부독재권력이 판을 치는 시기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보면서 철학적 사유를 좋아하나, 번역자의 조언이나 사유를 볼 때마다 조금 불편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철학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고대그리스인에게 신에게 가장 접근하기 좋은 학문이고, 신에게 가장 근접하는 것은 육체를 벗어나 영혼의 영원성이다. 영혼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육체를 벗어나 초현실적 존재로 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에서 인간이 살아생전 얼마나 올바르게 살아오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그 자신도 올바른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잘못된 게 있다면 말해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용기란 바로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지혜다. 박종현 교수의 고대그리스철학 연구 분야는 한국에서 분명 최고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말하던 그 분은 전혀 본인 스스로 소크라테스처럼 살지 않았던 것이다. 실천적인 학문이 아니라 이론적인 영역에서 활동한 것이다. 한국 철학이 이렇게 풍부하지 못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행한 지(智)와 행(行)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단지 지(知)와 행(幸)만 추구했을 뿐이다. 자신의 지적인 능력과 그 능력을 토대로 권력과 이익만 탐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전혀 수업료도 받지 않고, 남에게 바른 말만 하던 남자였다. 그런 점에서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을 읽는 것은 모순적 상황에 놓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던 인생, 우리 같은 소시민 혹은 지혜와 용기가 부족한 이들에겐 엄두도 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신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신은 결국 자신에게 끊임없는 시험에 들게 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왜 신을 믿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제우스께 맹세코! 라는 그 강렬함을 말이다. 신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관념적인 영역이 있기에 죽음이란 세계를 두려워한다. 물론 죽음과 전혀 관계없는 나이나,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관계가 없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정 두려움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죽음 앞에서도 자신 안에 있는 신을 배신하는 게 더 두려운 것이다. 자신 안의 신이란 양심과 의지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이란 신에게 가장 근접한 이유는 인간으로서 일말 양심의 가책을 만든 짓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내린 배심원을 보면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죄인으로 심판했지만, 신의 심판은 그들에게 어리석고 한심한 존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신은 없다고 해도 후세의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바라보는 인류에겐 소크라테스는 불멸의 철학자고, 그를 죽도록 만든 시민들은 기회주의자로 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아도 죽음을 선택했다.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파이돈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고, 크리톤을 보면 탈옥하지 않고 사형일을 기다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가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구분되어 있고, 육체는 한시적이나 영혼은 영원한 점이고, 인간이 죽으면 명부에 있는 하데스의 궁에 초대된다. 그곳에 가면 신적인 존재, 위대한 서사 시인들을 만날 수 있어 소크라테스는 도리어 죽음을 기대한다. 그러나 알아야 할 점은 우리 인간이 선택하는 시점에서 이미 잘못된 것이라도 그 잘못된 몇 가지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국가를 배반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길러주고 먹여주며, 살아온 날을 보여준 아테네가 사형선고를 한다고 해도 아테네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당시 지식인이나 후대의 인간도 안다. 잘못된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로 모든 것을 배신할 수 없고, 오직 자신 안의 신에게 결백해도 분명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대그리스철학에서 중세를 지나 근대 계몽주의 사상이 도래하면서 시민의 의무란 바로 저런 부당한 사례를 없애는 것이 시민의 의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게 충실한 게 시민의 의무라면 그 국가는 관념적인 존재일 뿐이지, 국가란 결국 정부라는 기능이 필요하다. 정부에서 인간이 운영하는 순간부터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정부의 기능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탈옥과 망명을 선택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바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자신을 신용한 것인지? 그래도 지혜로 보자면 소크라테스가 가장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볼 수 있다. 지혜라는 것은 사소한 이익에 매달리지 않는다. 현대인들의 지혜를 보면 사소한 이익에 눈이 빠지도록 신경 쓰며, 결국 남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라도 당장 이익이 있고, 법적인 문제가 없어 보인다면(아니 있더라도) 기를 쓰고 덤벼든다.


우리의 지혜란 바로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지혜다. 물론 사소한 것이라 하여 액수나 권리가 사소한 것은 아니나, 지혜의 가치는 사소하다 못해 치졸한 것이다. 아마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던진 많은 사람 역시 그럴 것이다. 중우주의에 빠진 시민들, 그러나 그런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자 역시 그런 중우주의라는 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다 이제 와서 중우주의를 논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플라톤의 대화록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지 잘 보여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 하지만 나에게 철학은 나의 지혜를 사랑하기보단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공공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곳이 좋다. 물론 플라톤의 <국가>나 <향연>을 보면 아름다운 사람이 결국 아름다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 나온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아주 극소수인 점에서 현대에서 실현 불가하고, 다수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필요하다. 중의주의 요소가 그때보다 더 심한 현실에선 더 어렵고 난감한 일이다. 이미 중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 모순이 드러난 시점이다. 단지 그 현실적 문제는 민주주의 제도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민주주의적인 정신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 점에서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 서적 광고를 보니, 마녀사냥에 대한 인류역사를 다루었다. 그런데 책 처음에 등장한 사건이 소크라테스의 죽임이다. 소크라테스가 마녀사냥의 희생자인 점이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흐름이 태동하면 인간 역시 그런 시대를 따라 가야 하나, 자신의 이권은 과거를 지향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지점에 충돌이 발생하고, 희생자는 권력과 재력이 없는 사람이다. 15~17세기 마녀사냥이 광적으로 이루어진 유럽에선 그 희생자가 힘없는 여성이라면, 고대 사회는 지식인이다. 고대사회는 노예가 존재하고, 심각한 계급사회다. 물론 중세 이후의 유럽 역시 계급사회지만, 개인의 노예보단, 국가의 농노가 더 많은 시기다.

 

그리스의 노예들은 오히려 그리스 남자성인들 즉 시민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구가 전체 10%인 점에서 말이다. 발언권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점은 그 만큼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시민에게 보장되어 있고, 그 책임 역시 막중했다. 시민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통제하는 자다. 그리고 그것이 전도되는 이상 시민의 국가가 아니라 권력자의 국가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시절과 지금의 시절은 다르나, 소크라테스가 적어도 무엇을 위해 희생했는지 본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하늘을 보며 당당히 길을 걷을 수 있을까? 반성과 사유가 없는 인생은 그저 공허한 삶이다. 죽음은 물론 두렵지만, 공허한 인생을 산 자들은 죽음 앞에서 비굴해지고, 맹목적인 믿음과 광적인 언행을 보인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만큼 어려운 말은 없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관념을 생각해볼 점이 있다. 죽음을 한자어로 사망(死亡)이라 하고, 한국인은 귀천(歸天)이라 한다. 영어권에서 죽음이란 death이나, 소크라테스가 말한 죽음은 Thanatos이다. 타나토스는 죽음이기도 하나, Eros와 다르게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Eros는 삶에 대한 열망이란 정신분석적 용어처럼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왜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으로 가는지 생각하면 타나토스란 단어를 생각해 볼 점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고대그리스의 죽음에 대한 관념에서 윤회설은 없을 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으면 호메로스를 만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어도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 영혼의 삶, 내가 세상에 없어도 역사는 나를 기록한다. 소크라테스가 육체적으로 죽어도 정신적으로 살아있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거론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 역시 역사에 남겨질 것이고, 역사적 가치가 없다면 역사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족보에 내 이름이 올라가겠지만). 만약 내 이름이 후대에 간다면 어떻게 보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은근히 욕먹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 거기서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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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1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르스 발언 때문에 박원순 시장이 검찰 고소되었단 얘길 들었습니다. 법의 칼날이 - 그 속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 해괴망측하게 움직이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이재명 성남시장의 시원한 법적 맞대응 문화가 탄탄해졌으면 합니다. 좋게 좋게 처리하는 게 현명하다는 통념이 많이 깨졌으면 합니다. 돈 없어서 이마저도 못하는 억울함도 많지만...

만화애니비평 2015-06-15 08:27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면 먼저 법적으로 고소당할 자는 따로 있는데 말이죠. 자본이 지배한 세계에서 한계인 것 같습니다.

오쌩 2015-06-16 01:09   좋아요 0 | URL
도대체 어떤 근거로 고소를 한거죠.법에 처벌할 명문화된 조항이 없을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개판이네요.법에도 없는 유언비어 확산을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멍멍이들을 보면...

오쌩 2015-06-16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잘봤어요. 플라톤의 철학,저도 별로 좋아하지않아요.
70년대 철학자들이 플라톤의 철인을 박정희에 비유하는 헌사를 바치는것을 보고, 머리를 저었어요.
군국주의 ,반자유주의,전체주의 를 정당화하는 철학의 시초가 플라톤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6-16 08:52   좋아요 0 | URL
아 과연 70년대이군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현대철학자가 존 롤즈인데, 이 양반 밑에서 사사한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있습니다.
이 양반 1980년대 전후로 육군사관학교 철학과 교수에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더불어 존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번역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어쩌고 어쩌고 하나, 하는 짓거리가 가관이죠.

민주주의를 말하는 인간들이 과거 권력에 노예에서 이제 자유로우니 자신의 지위에 노예가 되는군요. 어째 루소의 가르침이 그대로 드러나는지.

소크라테스는 시민으로서 아테네를 위해 살아온 점에서 아이러니하죠. 그가 전쟁 3번과 각종 지위를 맡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나, 그런 그가 민주정에 의해 희생당했죠.

아마 멍청한 중의주의에 의해 뽑힌 정치가보단 처음부터 정치가를 지도하여 양성하는 게 옳다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죠.
공부 잘하고 머리 좋아도 결국 양심이 문제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죠.
머리 좋은데 양심이 없는 자와 머리가 나쁜데 양심이 없는 자 중에서 누가 더 시민에게 악영향을 주는가에서 전자라고 하더군요. 후자는 고의보단 무의식적이 요소고 전자는 고의적으로 악질이니깐요. 박통 시절이 바로 그런 시대죠.

오쌩 2015-06-16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민주주의를 반대해 반민주주의를 추구했는데,그가 역설한 철인정치 아래였다면, 소크라테스는 더 빨리 처형당하지 않았을까요.

알옥 2016-05-15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법정에 고발당했다, 당시 정치인들의 음모에 의해서 였다, 박종현 교수에 대한 비판글 여기서 그냥 글 안읽고 내렸습니다. 플라톤 전집을 읽어보았다면 솔직히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할만 일들을 여럿 했습니다. 특히 초기와 중기 사이의 대화편을 보면 항상 젊은이들과 함께 있었고,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나 소피스트들이나 거기서 거기로 보였을텐데.. 초기나 중기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지인들 대표적으로 크리톤등이 소크라테스에게 경고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없는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없는 궤변론이네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5 22:39   좋아요 0 | URL
걱정마세요. 존 롤즈 번역자인 황경식 교수님은 더 깝니다.
정암학당 향연을 읽었지마는 개인적으로 천병희선생님이 마음이 가네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8 20:56   좋아요 0 | URL
그러면 그런 내용을 저에게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철학전공자도 아니고, 철학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독학했습니다.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 없는 궤변론 맞을지도 모릅니다. 공대 졸업하여 독학하면서 님의 그런 지칭 처음 들어봅니다. 답답하면 그렇게 알려주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비꼬는 말투에 대해 님 태도가 바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린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여러모로 성격이 강직한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단지 님만큼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아는데 남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에 대한 이해도에 부분에 대하여 님이 저보다 많이 알겠죠. 제가 박종현 교수를 겨냥한 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그래 말하면서 그의 지행일치를 논하면서 막상 본인은? 이런 겁니다. 오늘 518인데 황경식 교수는 그 사건을 두고 ˝사태˝라고 하더군요.

아직도 제글에서 플라톤만 잘 알고 모르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시고, 님의 기분이 좋지 못하면 제게 부족한 점을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런 양질의 도서를 소개해주면 되는 겁니다. 이 글이 플라톤만 적어내리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요. 만일 그게 아니라면 님은 오리지널 철학과 전공자가 왠지 허접하게 보이는 사람 잡고 궤변론자이니 답답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정도의 사람일 뿐입니다. 님의 덧글은 ˝내가 아는데 넌 왜 몰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비로그인 2018-05-1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이글을 읽에 되었습니만 꼭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는 징검다리를 건넘니다.
518이 사태 맞지 않습니까?
어찌 말은 잘 하는데 직시하지 못하는 행동은 어디에서 나오는건지
모택동도 스탈린도 정권을 잡은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말이 앞서기전에 사태의 공정함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차안대를 쓰고 어찌 주의를 바라볼수 있습니까

만화애니비평 2018-05-18 08:57   좋아요 0 | URL
일베하세요?
 
루소 사상의 이해
박호성 지음 / 인간사랑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예전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도시의 지식인으로 살아가던 토마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 자신에게 강요하면 그는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그래야만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최후에는 어느 농촌 시골에 가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도시에서 언제나 수많은 여자의 침대에서 화려한 바람둥이로 살아간 토마스, 하지만 시골에서 그런 모습은 없다. 농촌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트랙터를 고치는 농부로 살아간다.


본래 어릴 적에 토마스는 트럭을 수리해본 경험이 있었다. 다들 화려한 세계에 살아간 전(前) 외과의사인 토마스를 존경했지만, 토마스는 결국 시골생활에 만족했다. 토마스와 결혼한 테레사는 자신이 원하는 삶에 토마스를 이끌고 와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오히려 토마스는 시골생활에 만족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시작은 니체로 시작하는 것이 나온다. 프리드리히 니체, 모든 서양의 형이상학적 관념을 전복한 신을 죽인 남자, 그리고 인간의 관계성보단 실존적인 인간에서 이 소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따라간 토마스 모습에서 니체보단 오히려 루소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은가 싶다.


토마스의 모습에서 말년은 루소의 <에밀>이 보여주던 이야기와 흡사하다. 자신의 의지로 시골에서 살아가고, 다양한 시골사람들과 관계에서 토마스는 자신의 의지로서 사람들과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실존적인 요소에서 토마스는 그의 아들조차 아들이기보단 차라리 남으로서 대한다. 인간 그 자체로서 자신의 실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그 자체를 외면하고 여자의 품에서 방황한 토마스에게, 시골농촌이란 즉 자연이란 어머니의 품이었다. 자연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그 모든 것을 평등하게 해준다.


인간에게 자연성이 왜 중요한가? 루소의 사상을 생각하면 인간은 자유와 평등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도덕적 인간도 아니고, 정치적 인간도 아니었다. 그는 불륜에 빠졌고, 프라하에서 소비에트의 침공 이후 그들의 정치제에 반대하는 서명조차 거부한다. 그러나 그가 완성한 인간상은 자연적 인간상이다. 왜 루소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서로 대조했을까? 루소의 사상에서 인간의 시작은 자연적 인간 내지 도덕적 인간에서 또는 정치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제시한다.


<에밀>에서 제시한 인간상은 도덕적 인간이나 그 본래에 자연적 인간이 숨어있다. 왜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루소사상의 이해>에 연구한 내용을 본다면 인간은 자애심,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찾는다. 그게 바로 인간의 사랑에서 첫 번째 명제다. 내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애심에 만족하면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찾는다. 자연인들은 자신의 삶을 만족하면 타인에 대해 감정을 품게 된다. 혼자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타인과 교류하고, 그들의 입장을 동조한다.


누군가 아프고 괴로우면 자연인은 그것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괴로워한다. 자신이 가진 감정, 즉 연민이란 인간 순수한 감정을 루소는 발견한다. 왜 이런 인간의 자연성 감정, 연민이란 감정이 중요한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으면 루소가 보는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루소가 보는 사회란 오로지 악과 부패 그리고 착취와 억압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 속박하는 현실에서 <사회계약론>에서 억압이란 사슬을 다룬다. 나를 위한 사슬이 결국 자신을 속박하는 사슬이 되고, 그것은 새로운 사슬을 찾기 위해 도구로 이용되는 점이다.


인간에 대한 불평등에서 루소는 기존 서구와 다른 관점으로 제시했다. 루소는 분명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에서 최고 이상적 국가관은 스파르타와 로마였다. 특히 스파르타 남성에 대한 찬미는 대단했다. 모든 법적 제도나 생활습관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명료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서 살아간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플라톤의 <국가> 내지 다른 서적에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플라톤의 사상을 뛰어넘어 다른 식으로 물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책에서 1912년 루소 탄생 200주년에서 루소의 사상은 칸트와 연결하였다면, 1962년에 칸트 대신 마르크스가 그 자리로 들어간 점이다. 루소의 <에밀>은 칸트의 3대 비판서 토대가 되었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선험적 판단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인간 그 자체가 자연적인 존재, 즉 모든 경험과 파당적 사유로부터 멀어져야 가능했다. 그리고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선(善, goods)이란 바로 자신의 의지로서 실천한다. 하지만 인간이 타인에게 베푸는 선에서 2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근거하는지 혹은 감정이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점이다. 이성과 감성이 올바르게 정립되었다면 그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면서 또한 이성적 인간이다. 인간은 언제나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차라리 모순보다 역설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바로 루소의 사상이 위험하고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역설적인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도 그것에 반대(反對)하기도 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열렸을 때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모든 사회적 초점은 진보적 이성과 과학적 기술에 의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루소는 그것이 바르지 않음을 이미 예견했다. 이성의 발달과 더불어 감정이 중시되고, <신(新) 엘로이즈>와 같은 경우 데탕트 쥘리로 보는 인간이란 이성 이성의 자연스런 인간의 마음이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니체가 말한 인간상에서 진정한 강한 사람이 약한 자를 돕는 이유는 마음에 느끼는 약한 감정이나 또는 그 도움으로서 타인의 평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답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을 타고 올라가면 루소의 경우 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조하는가? 이유는 자신이 인간이고, 인간은 본래 선하기에 연민의 감정으로 타인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민에 자만이나 우월심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이 존재해도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연적 인간을 넘어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에밀>에서 에밀은 자신의 가정교사와 더불어 소피의 집으로 간다.


원래 제 시간에 갈 수 있으나, 길가에 쓰러진 남자를 보고 그를 그의 집에 데려간다. 그리고 가정교사와 더불어 병자를 간호한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의사를 데려오고, 집 안의 식구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안정을 되찾아 준다. 하지만 현대인들 즉 문명인에서 타인의 고통은 그저 구경거리로 변한다. 길가에 누군가 쓰러지면 가서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경찰이나 소방서에 신고하여 어서 그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또는 길가에 싸움이 벌여지면 모두 구경하기 바쁘다.


루소는 길가의 신사들이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일 때 그들을 말리는 사람들이란 순박한 시장가의 사람인 점을 말했다. 그에게 이상적인 인간이 에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현실에 에밀이 없다면 어느 인간이 더 소중한가? 지식을 갖춘 높은 분보다 차라리 시골에서 농사짓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농민이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역시 인클로저 현상이 제법 지난 후에라 농민들이 집과 농지를 버리고 도시로 이주했다. 도시에 온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로 되어 비참한 노동으로 살아가거나 때로는 강도나 거지로 살아간다.


최후는 병에 걸려 죽거나 사형대에 죽어 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 루소가 지적한 인간을 타락하는 요소는 사회다. 루소의 사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 그리고 그 인간과 신에 대한 관계다. 신이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은 존재, 혹은 인간은 원초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난 순간부터 죄인이라는 관념을 바꾸었다. 오히려 인간이란 본성을 선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존재한 사회적 억압이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 것이다. 인간이 욕심이 생기고 고통이 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인 불평등이 강하고, 그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 즉 자신에게 돌아간 인간에게 탐욕의 손길을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오로지 자신에게 자신의 의지로서 행복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인간의 삶을 악덕으로 가득하게 한다. 루소의 이런 사상은 훗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의 토대가 된다.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서적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자코뱅당 좌파와 리카도학파 좌파로 이어진 것에 중점을 맞춘다.


특히 자코뱅당의 사상적 기반이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이고, 좌코뱅당의 대표적인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로, 당통, 마라 등은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다. 루소의 사상은 인간을 지배하는 신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원리로 바꾸었다. 신은 분명 존재하나, 그 신은 인간과 자연을 처음부터 만들 뿐이지 그 이상으로 관여하지 않은 이신론(理神論)을 제기한 것이다. 신의 의지란 바로 내가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신이 부여한 나란 존재가 스스로의 의지로서 살아간 것이다. 덕분에 루소는 자신이 저술한 <에밀>이 불태워져야 하는 비극을 겪고, 프랑스 파리 당국 경찰에 의해 추격당하는 신세가 된다.


평생 권력에 의해 억압과 탄압을 받고, 파리에 돌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야유와 조롱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루소는 인간에 대한 인류애를 포기하지 않았다. 루소의 생애를 보면 그가 시골에 은거할 때 처음 마을주민들은 마치 악마를 본 것처럼 깜짝 놀란다. 하지만 루소의 모습을 보고 안심하고, 루소는 마을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가진 의복이나 물건 등을 주었다. 그들은 권력자와 상위계급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루소는 산악지방이나 농촌지방에서 그들과 살면서 그들이 주로 먹는 음식을 즐겼다.


야생에서 나오는 과일과 채소, 그리고 강가에서 잡히는 생선, 투박한 맛이나 건강에 이로운 음식들, <에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이 나오는 곳은 농촌이었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은 자연의 공간에서 살 수 없는 것을 알았다. <에밀>에서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은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민에게 복종하는 것은 법이지 그 이상은 없다. 하지만 현실은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루소의 공화주의 국가관은 인간은 법 이외에 그 외는 절대 복종하면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이권에 개입되면 인간은 비참해진다. 인간이 평등해지기 위해선 오로지 법에만 복종하면 된다.


그런다고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에게 복종해도 평등해진다. 모두 다 억압과 압제의 희생자로서 말이다. 만일 그런 인간들만 존재한 나라에 자유가 돌아와도 인간은 살아가는 방식을 모르고, 난폭한 야만인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적 인간상 대신 남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 하는 난폭한 맹수가 된다는 점이다. 루소는 자애심은 인정하고 자신의 재산을 인정한다. 그것은 자신이 비참한 삶을 살면 안 되고, 자신의 쌓아온 성과를 무시당하면 안 된다. 그러나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반대했다.


지금 현실 자본주의에서 개인의 재산은 타인의 재산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루소는 시민들이 누구나 너무 부자가 되면 안 되고, 자신의 몸을 팔 만큼 너무 가난하면 안 된다고 했다. 만일 그 가난이 치중되면 인간은 비참해진다. 루소가 본 파리의 거리는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가 아니라 빈민과 거지의 소굴, 강도의 은거지, 창녀들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사람에 대해 손가락질하고 무시하고 천대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이렇게 되었고, 이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였다.


철학에서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경우 스승인 소크라테스로 통해 인간의 행복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갈 깊은 사고와 성찰로서 초연해질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니체가 말한 초인도 플라톤이 말한 철인적인 요소와 흡사할 것이다. 이에 반해 루소는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역으로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일반의지가 파괴될 수 없는 이유, 인간은 자연적 존재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루소의 역설적 요소는 바로 인간이 숲에서 곰처럼 살아갈 수 없는 점을 알기에 문명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은 자신의 세계에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약 거기에 초월한 인간이라면 완벽한 실존적인 자연인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느끼는 세상이란 자신 이외에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호수세계 파동을 느낄 것이다. 루소가 계몽주의만 아니라 자연주의자로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인간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역설적 요소는 책에서 최초의 칸트주의자,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처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아버지로 될 수 있다. 후대에 이르러 교육학의 거두인 존 듀이, 인류학의 거장 레비 스트로스, 그리고 많은 혁명가들의 우상이 되었다. 이 책을 보고 의아한 점은 쿠바혁명에서 체 게바라와 같이 활동했던 피델 카스트로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주의로 알고 있지만, 그는 <사회계약론>을 항상 가지고 다녔고, 피델 이전의 남미의 혁명가인 시몬 볼리바르의 경우 루소에게 영향을 받아 평생 혁명을 위해 살았다.


현대에서 큰 사회적 변동을 마르크스에서 찾지만, 사실 그 원류는 루소에게 있다. 루소가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은 없었다. 물론 프랑스국민들의 분노로 인한 반정이나 쿠데타 폭동, 혁명 등은 존재했어도 그것을 이끌어 주는 이데올로기는 루소의 사상이다. 그 에너지를 흐름을 타고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루소의 사상이란 점이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신은 오로지 자신의 양심과 의지를 알아주는 존재인 것처럼, 오늘 날 우리 인간은 스스로에게 떳떳한가? 약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어긋난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루소의 눈에서 오히려 그런 포악한 자는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 여긴다.


선악의 구분은 결국 인간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에서 힘의 대결이고, 그 선악이란 정의는 의미 없거나 비참한 결말로 이어진다. 더 많은 권력을 찾기 위해 권력에 아부하는 세상에서 루소의 자연성을 찾고, 시민의 의무를 생각하는 것은 그나마 우리 인간이 인간이란 이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진정한 자유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연성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만일 이 사회가 비참함과 분노로 가득하다면 그 사회는 자유의 참 된 의미를 상실했다. 진정한 자유가 없다면 그 나라의 시민들은 애국심도 없고, 올바른 판단도 없다. 오직 멸망이란 사슬로 인도될 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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