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 - The King of Pigs
영화
평점 :
현재상영


 

 

돼지의 왕을 보면 3명의 친구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돼지들 무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 돼지들이 군림하는 공간에서 돼지의 왕이라는 것은 곧 돼지들이 우글거리는 그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지겠다는 의미이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돼지란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 인간의 단백질과 지방 등을 공급하는 식량원 중에 가장 중요한 가축이다.

그런 돼지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열심히 먹이를 먹고 먹어 언제나 살을 찌우기 바쁜 욕심이 많은 동물이다. 동물에겐 본능만 존재하고 있기에 언제나 그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런 돼지가 그것도 식탐이란 욕구에 충실한 돼지를 언급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존재가 과연 식탐에 빠져 허우적대는 돼지들의 천국이 아닌가 싶은가 라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이란 함은 정말 하늘나라 선녀님이나 천사들이 있는 천국이 아니라 온통 더럽고 추악하며 차마 옆에서 보는 것조차도 숨이 막히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그런 숨 막히는 공간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이다. 그런 더럽고 추악한 현실을 우리는 돼지의 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느 한 여인의 죽음부터이다. 그 여인은 주인공 중에 하나인 황경민의 아내였다. 작품 내의 대사를 들어보면 경민이가 대학을 다닐 시적에 만난 후배로 경민을 잘 따르던 여자인 모양이다. 그녀가 죽기 전의 정황으로 식탁위에는 음식이 차려진 것으로 보아 경민이 사업이 망해도 그녀는 경민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경민은 자신이 사랑하던 아내를 목을 졸라 교사시켰다. 그리고 집안 주변을 보니 가득하게 붙여진 붉은 딱지였다. 경민은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여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예전의 친구였던 정종석에게 전화를 한다. 15년 전에 중학교 다닐 때의 친구인 그에게 전화한 것이다. 왜 경민은 종석에게 전화를 하여 그를 불러내었을까?

모든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그런 의문을 뒤로한 채 경민은 샤워를 한 후에 자신의 몸을 검은 하늘이 보이는 창밖에 비추어본다. 거기에는 경민의 모습에서 어느덧 괴물처럼 보이는 돼지 한 마리가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한 마리의 추악하고 험상궂게 생긴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 추악한 것인가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내내 상영되면서 반전을 이룬다.
주인공 경민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이른바 왕따 혹은 학급 내의 불량하지 않은 불량아들에게 폭력과 횡포를 당하는 학생이다. 어느 중학교에서 흔히 보일 것 같은 아주 소심하고 약하고 비열하기도 한 인간이다. 그에겐 친구 한 명이 있다. 그의 이름은 종석이다. 종속은 경민과 달리 집안이 무척 가난하나 평소 학급 내의 통치자에게 그다지 눈에 걸리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학급 내의 분위기가 싫었다. 반에 반장이란 녀석은 겉으로는 학급을 잘 조절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는 사실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공부도 잘하였으며, 게다가 덩치도 좋았고 싸움도 조금 하는 편이었다. 그런 반장에게 반 전체 아이들은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런 반장에게 늘 경민은 수치스러운 장난을 당한다.

반장이 경민에게 다가와 경민의 바지에 손을 올린 후에 경민의 성기를 만지면서 조롱하듯이 약을 올린다. 그런 부당한 횡포에도 경민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당한다. 다른 날이었다. 3학년 중에 자신이 총학생회장 대표라고 하는 사람이 경민이 있는 반에 찾아와 자신을 뽑아달라며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때 경민은 숙제를 다시 정리한다고 연설을 듣지 않고 그냥 자기 숙제만 정리하고 있었다.

갈등의 발단을 지나 위기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이다. 경민은 연설을 제대로 듣지 않은 이유로 학급 내의 반장에게 모지게 폭행당한다. 이때 보고 있기 거북한 철이가 나와 반장을 엄청나게 때린다. 물론 이번 일만이 아니었다. 경민만 아니라 종석이까지 괴롭힘을 당해도 철이는 폭력으로 대처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불행의 시작과 종말을 동시에 알리는 비극이었다. 철이는 사실 인생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가진 비관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집을 버리고 나간 아버지를 증오하며,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바람에 철이의 어머니는 경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성인용)노래방에서 일을 한다. 철이에게 보이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이며,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부조리한 현실 안에서도 자신들을 억압하는 학교의 권력자들이었다. 


 


학교가 비록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기관이라고 하나, 사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런 축소판 사회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암흑적인 면도 불합리적인 면이 많이 나온다. 철이는 자신이 겪은 사회적인 억압과 횡포에 직접 대항할 수 없으나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는 가능했다. 그는 돈도 많고, 권력을 가진 녀석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철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혜택이 없어서 무시당하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난하다는 게 죄라는 부분이 여실히 나타난다. 우선 철이는 아버지가 나간 것이 집안 가정경제가 엉망이 된 것이 원인이고, 어머니가 윤락녀가 되어 경민의 아버지에게 맞는 이유도 다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종석이의 누나가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이유도 다 가난해서이다.

왜 가난한 것이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영화 중간을 보면 가난하다는 것은 죄가 되고, 그것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가난한 자가 억압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모습은 종석이가 학급의 반장 일행에게 폭력을 당할 때이다. 그의 얼굴이 무참하게 신발에 밟히는 클로즈업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 폭력의 당사자의 신발을 잘 봐야 한다. 



그가 신고 있던 신발은 나이키 운동화이다. 나이키는 유명메이커 상품이다. 이것은 곧 상품이 기호이고, 기호가 곧 상품이라는 의미이다.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곧 종석의 얼굴을 무참하게 밟는 신발 가격이 10만원이라면 실제 그 신발의 기능할 수 있는 상품가격은 3만원이다. 나머지 7만원은 나이키의 상표가격이다. 그것은 곧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를 신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런 기호의 소비가 작용하고, 그런 점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또한 현대사회는 소비의 문화이기 때문에 결국 소비로 통하여 자신의 계급이나 위치를 나타낸다. 문화자본에서 소비경제능력은 문화의 지표를 나타나게 해준다. 그런 점은 무참히 얼굴을 밟히던 종석의 누나에서 알 수 있다. 종석의 누나는 집에 와서 청바지를 사달라고 졸라댄다.

친구들은 모두 그 청바지를 사서 입는데, 자기는 그 청바지가 없어서 애들이 무시당한다고 한다. 흔히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누구는 소유하고 있는 반면 누구는 소유하지 못한다. 소유하지 않음은 곧 도태로 치부되게 되고, 문화적 공유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덕분에 단칸방에 살아가는 종석의 가족은 누나의 응석에 결국 그 청바지인 guess 블랙진을 사게 된다. 단칸방에 식구 4명이나 자는데, 그 청바지를 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누나는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다.

누군가를 뒤쫓아 가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란 강박관념이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비로소 인간으로서 사회적인 존재로 부각 받는 것이다. 문제는 욕망은 욕구와 다른 점이다. 진짜 돼지는 먹기만 하면 배부르기만 하면 그 욕구는 다 한다. 인간의 욕구는 돼지와 처음에 같을지는 모르나 욕망은 다르다. 욕망은 욕구를 지나 인간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종석은 그런 누나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도 역시 소비사회의 인간으로서 욕망은 있었다. 학교에 갈 때 누나의 청바지를 입고 갔으나 문제는 여자청바지는 삼각형이 붉은색이라는 점이다. 그가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고 들어오니 학급반장과 그 일행들이 종석의 바지를 찢어 버려 칠판에 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종석이 입고 온 청바지가 여자용이니 그것을 여자가 마치 남자에게 성행위를 요구하여 하는 모욕적인 그림을 그린다.

가난하지만 어떻게든 몸부림을 쳐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오히려 묵살하고 놀리는 것이다. 그래서 종석은 돼지들의 세계인 자신의 학급과 학교를 저주한다. 그런 곳에 종석의 친구인 경민 역시 저주한다. 자신을 때리고 놀리고 조롱하는 학급을 말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우선시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시골에서 전학 온 안경잡이 녀석을 특히나 그랬다.

안경잡이 우등생 천영이는 공부도 잘하였으며, 처음에 그를 달갑지 않은 반장과 일행에게 대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연히 함정에 걸려 그들에게 대항하려 했을 때 옆 반에 있던 학생회장 졸개 하나가 천영이를 무참하게 때린다. 그 후 천영이는 자신의 모습을 숨김며, 반장 친구녀석이 그의 바지 위에 손을 올려 성기를 만져도 오히려 웃어댄다. 폭력이란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었던 존재는 바로 철이였다. 철이는 경민과 준석이에게 모두 희망의 존재였다. 그는 패싸움을 하여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유명한 싸움꾼이 와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 모조리 이겨주었다. 학교 선생이 우연히 소식을 듣고 와서 철이를 때려도 철이는 학급반장과 옆 반 싸움꾼을 모조리 잡아 패버렸다.

철이는 유일한 돼지의 세계에서 군림하는 돼지의 왕, 아니 돼지의 왕을 능가하는 괴물이었다. 철이의 존재는 자신들만의 세계, 즉 안정화된 세계를 원하는 학급반장과 학생회장에겐 눈의 가시거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학생회장과 반장은 겉으론 학교 분위기를 위해서라고 하나 폭력과 협박으로 통치한다. 어떻게 본다면 정치란 인간들 사회에서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 라는 철학적인 질문보단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잘 눌려 자신들이 이익을 보는가이다.

정치라는 것에 철학보다는 사익이라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폭력은 거기에 동원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폭력 뒤에는 또 권력을 이용했다. 그것은 처벌이란 제도였다. 분명 잘못은 반장무리가 잘못하였으나, 모든 상황적인 최종 죄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철이었다. 정학을 당한 것도 심지어 퇴학을 당한 것도 말이다.

퇴학은 학생회장과 그 일당들이 단체로 경민과 종석을 붙잡아 가혹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자신의 방해물인 철이를 불러내어 굴복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철이는 굴복하기 보다는 떼로 덤벼드는 학생회장 일원들을 때려 눕혔으며, 최후에 자신의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될 때에는 나이프를 꺼내어 자신을 붙잡고 있던 녀석의 손등을 베었다. 



철이의 폭력은 권력을 잡기보다는 권력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파시즘으로 얼룩진 학교의 전체주의에 대항하던 철이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악은 죄가 되어버렸다. 중학교 1학년인 이제 퇴학을 당하고, 집안은 엉망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객지에서 자살하여 죽었다. 더는 철이에게 삶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 철이에게 한 가지 다른 희망이 생겼다. 철이의 어머니는 언제나 죽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희망이 잃은 채 살아간다. 그런 철이의 어머니가 좌절할 때 철이는 모든 분노와 좌절에 이성을 상실한다. 철이는 식칼을 들고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때마침 어머니는 노래방 사장인 경민의 아버지에게 모질게 혼나 그것이 서러워서 혼자서 울고 있었다.

게다가 가게 전화기로 자신의 언니에게 전화하여 사는 것이 어렵지만, 남편이 죽었지만 그래도 철이가 있어서 힘내서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철이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를 죽일 수가 없었다. 대신 어머니를 괴롭히는 경민의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우연히 마주친 경민이 때문에 노래방 사장이 경민이 아버지란 사실을 안 것이다.

철이에겐 더 이상 돼지의 왕으로 군림할 수 없었다. 그는 퇴학은 당했지만 그가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아버지가 객지에서 죽어 자신의 복수의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 모든 것을 버리려 했는데, 어머니까지 철이가 있어서 살아간다는 말에 죽을 이유도 없어졌다. 또한 학교에서 잘만 하면 퇴학에서 재입학이 가능하다고 한다.

문제는 철이가 퇴학을 하고 나서이다. 철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퇴학을 당하여 미친 듯이 본드를 마시고, 세상을 저주할 때 그는 자살할 것이라 한다. 자살을 하여 자신과 자신의 친구를 괴롭히던 부와 권력을 지닌 반장과 학생회장, 그리고 안일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교장과 선생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그런 최고의 방법은 자신의 생명을 던져 모두를 절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거기서 인상 깊은 말은 철이가 만약 이들이 어린 시절 이후 어른이 되어도 이들은 과연 변하는가라는 것이다. 계속 이대로 계속 커서 어른이 되어도 그들은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축소판에 있던 자들이 사회로 가는 것은 확장되어 팽창되어 나갈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폭력과 압박이 강해질 뿐이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이 약한 자들은 발버둥 쳐도 그 자리에서 헤맬 뿐이다. 그 말은 남동생 종석에게 뺨을 맞은 종성의 누나가 한 이야기처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고등학교만 나오고, 결혼하여 자식을 놓아도 계속 가난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 열심히 할 필요 없이 그저 원하는 것을 억지로 손을 넣으려 한다. 그것이 비록 법적으로 틀려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뭔가 고칠 수 없을망정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와 울분 정도는 보여주어 파장을 줄 수 있다. 3친구의 대화에서 그 녀석들이 어른이 되어 중학교 시절이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좋은 추억으로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가이다. 반장과 학생회장과 싸우고 대들어서 퇴학당한 철이로서는 그것이 최고의 복수였다. 만약 그 복수가 통한다면 반장과 학생회장은 더 이상 자신들의 부당한 폭력정치로 이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한 월요일 조례시간 철이는 학교건물 옥상에 나타나고, 그대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즉사한다. 그 후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굳이 영화관의 스크린에 나오지 않아도 말이다. 그 뒤의 일로 종석과 경민은 평생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실 철이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사랑을 보고 다시 제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게다가 학교에 다시 오면 반장과 학생회장에게 더 이상 눈에 가시가 되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려 한다. 그것을 위해 철이는 경민에게 자신이 옥상에 올라가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면 비명을 질러달라고 한다. 만약 지르면 퇴학은 무효가 되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권력자들은 그렇게까지 괴롭히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날 철이는 떨어져서 죽는다. 그 죽음의 원인은 경민은 알고 있었다. 바로 뒤에서 종석이 밀었기 때문이다. 종석은 철이가 죽어야지 자신이 비로소 지긋지긋한 학급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밀을 풀기 전에 분명 경민의 행동들이 비겁하고 줏대가 없었다. 철이에게 붙다가 전학생에게 붙다가 이제 다시 철이에게 가다가, 옥상에서 학생회장 일당에게 맞을 때에는 철이를 불러 친구를 팔아먹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겁한 경민보다 더 비겁한 것은 종석이었다. 종석은 마치 옆에서 관찰하고 지켜보는 입장에 가깝다. 그는 물론 철이의 광기에 동의하여 고양이의 배에 나이프를 찔러 죽인다. 반장과 싸움꾼이 철이에게 맞을 때 반장 친구녀석이 교무실 가는 것마저 길을 막는다. 그런 그가 철이를 죽게 한 것이다. 그가 철이를 죽이게 한 것은 돼지의 왕이 필요해서이다. 왕은 모든 것을 통치하나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희생양이었다.

왕은 곧 지배자이며, 하나의 제물인 것이다. 철이는 돼지의 왕으로 되기를 종석이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기 때문에 종석은 억지로 철이를 돼지의 왕으로 만들었다. 그런 종석의 비밀을 알고 있던 경민은 15년 지난 후에 종석 앞에 그 비밀을 폭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민이 진정 자신이 돼지의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15년 전에 이루지 못한 철이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종석이 학교건물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이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돌아보니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15년 전의 바로 그 자리에 철이가 죽었던 자리에 경민이가 자살하여 차가운 시체로 변한 것이다. 그때 종석에게 걸려온 종석의 여자 친구 목소리에 종석은 아주 무서웠다고 눈물을 흘리면 절규한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로 지금 어디냐는 말에 그는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가 아니라 바로 이 현실이라고 한다. 그렇다. 돼지의 왕에서 돼지들은 이 현실에 살아가는 추악하고 비겁하고 치사한 인간들인 것이다. 마치 그것은 종석이 교실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주변 학급학우들이 무관심하게 외면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돼지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약자는 그저 밟힐 뿐이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손서진 2020-05-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돼지의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