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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시공 아크로 총서 6
브라이언 매기 지음, 박은미 옮김 / 시공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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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우리 인간은 철학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본다면 쉽사리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우리 인간의 사고와 관념, 그리고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매우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철학을 알고보면 그렇게 멀게만 혹은 어렵게만 볼 수 없는 것도 철학이다. 그 이유는 철학이란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써 최근 어려운 군사정치외교사항같은 거대한 사건 속에서 우리는 국가정책이나 외국의 반응을 두고 이것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혹은 이렇게 큰 일들이 아닌 작고 사소한 일들로도 철학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보편적인 부분으로서 인간의 가치와 사고, 그리고 이성과 감정을 얼마든지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언제나 철학적인 사항에 맞이하여 살고 있으나 본인 자체가 철학이란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연 지혜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은 문명을 가지게 되면서 인간 혼자가 아닌 여러 인간이 모여 사회, 조직, 국가 등의 다양한 단체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거대한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 그 자신마저도 깊이 생각하고 고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찰하여 지혜를 사랑한다는 그 철학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오늘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까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우리는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철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마 상당히 길고 긴 시간을 보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길고 긴 시간을 단번에 이해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무리다. 시간이 누적된 만큼의 여러 철학들이 누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이 누적되어 처음 철학을 접하는 사람들은 철학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할 지도 모른다. 그 시간에 비해 뭔가 흐름을 잡아 낼 수 있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브라이언 매기 교수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는 철학을 접근하고 또 어떤 철학자가 있는지 알기에 매우 좋은 서적이다.

대부분 철학도서들은 모든 내용이 문자텍스트로 이루어진 반면, 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에서는 말 그대로 사진과 그림으로 나와 있어 어려운 철학을 접하는 사람에게 다소 접근하게 쉽게금 작성하였다.

사진과 그림으로 당시 그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 그리고 현재 상태를 알려줌으로 우리가 상상을 유도할 수 있게금 해준다.. 우선 이 도서는 서양의 철학자인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집필했으므로 근본적으로 서양중심 철학역사이다.

모든 서양철학의 시작점은 고대 그리스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3명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전과 이후, 그리고 중세로 넘어가면서 교부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 중세로 넘어가면서 데카르트와 임마누엘 칸트, 근대로 넘어가면서 헤겔,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존 스튜어트 밀로 오고 현대로 오면서 아이슈타인, 슈뢰딩거, 메를리 퐁티와 같은 철학자가 나온다. 물론 여기에 언급한 철학자 아니더라도 수 많은 철학자들이 나오고 그 철학자들이 일꾸어낸 위대한 책과 이론들이 알기 쉽게금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서적에서 약간 아쉬운 부분은 철학사 대부분이 고대, 중세, 근대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현대철학에 대한 분량이 조금 적어 보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철학을 접하게 된 동기는 현대철학자이다. 특히 프랑스 후기구조주의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에 흥미가 생겨 이쪽에 발을 담구어 보았다.

물론 전체적으로 철학에 대한 이해능력이나 학습수준은 이제 걸음마에 불과한 단계다. 그러나 철학이란 것이 매우 고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일상적이기도 하다. 오늘날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삶과 가치 그리고 이상과 이념들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한번 생각하기 전에 이 책을 보는 것으로 하여 그 실마리를 찾아 보는 것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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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지도 - 세계지성사를 풍요롭고 활기차게 한 핵심 키워드 88
기다 켄 지음, 김신재.심정명.윤여일 옮김 / 산처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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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역사적인 사건과 혁명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 현대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당연히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적으로 전쟁에 휘말려 들어 많은 인간들이 죽고 많은 문명이 파괴되었다. 이렇게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매체들은 꾸준이 새롭게 변화가나 막상 문명사회에서 보이는 인간들은 여전히 과거 못지 않은 자기 모순과 굴레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지난 20세기에 걸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초까지 우리가 살아온 그 많고 많은 사건들과 그 사건에 따라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상들은 무엇들일까? 우리는 그런 큰 사건을 겪은 이후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는 분쟁과 갈등이 멈추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같은 나라와 지역까지도 분쟁과 갈등을 우리는 보고 있다. 아니 보고 있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고 있다. 어차피 인간은 모두 각각 다른 조건과 환경 그리고 상황에 놓이기 때문에 같은 사고와 행동을 보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격동의 세월을 보낸 20세기에는 이런 인간의 사고, 행동, 의식에 대한 담론들이 아주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그런 담론이 오가면서 기존에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누적된 문제, 그리고 지금 생긴 문제, 또한 앞으로 생겨서 발생될 문제 우리는 이런 다양한 문제와 거기에 대한 원인분석 및 대처방안에 대해 끝없이 사고하여 실마리를 풀어 해결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지난 20세기 100년 전후로 인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인 영역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가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와 담론 사이에는 다양한 관점으로 통해 현실세계를 보자고 했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본 현대사상지도는 그런 100전후의 근현대사에 등장한 철학, 사회학, 언어학, 문화학, 심리학, 정치학 등 각종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고 거기에 해당하는 학설과 이론을 소개했다.

특히 그 학설과 이론을 주장한 학자와 학파 그리고 그런 학자와 학파로 통해 어떤 영향을 주고 그 영향으로 인해 다른 분야에서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하나의 도식화된 표처럼 그려 나간다. 물론 아주 복잡하고 많은 학설과 이론을 단 몇 페이지로 요약하고 소개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책내용 자체로는 그 사상적인 부분을 알 수 있다고 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면서 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좋은 도서이다. 우리가 책을 본다는 것은 그저 막연하게 집어들어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흐름과 순서를 파악한 후에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르기 때문이다. 현대사상지도에서는 그런 흐름을 88가지 목록으로 정해 소개했다. 물론 그런 내용으로 통해 자신이 궁금한 점을 찾아 어떻게 봐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좋은 안내지침서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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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 문화교양 7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 현실문화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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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카페활동이나 사이트 활동하면서 제일 말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점에 대한 논의다. 어차피 TV, PC, PMP, i-pon, PSP 등 영상매체로 보고 있는 세계는 현실이 아니다. 물론 거기 원본의 이미지가 촬영된 곳이 현실이라 하지만, 그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그 것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TV 뉴스에서 어느 박사가 특수한 연구결과를 내놓아도 얼마 기간 후에 위조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해프닝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래서 TV라는 가상세계 매체에 통해 우리는 얼마나 현실성을 잊혀가는가?



애초부터 TV 드라마보면서 이것은 리얼리티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내 옆에 일어나고 있어라고 하는 것은 틀렸다. 드라마속의 아름답고 멋진 광경이 내 주변에 일어나는가? 아직도 TV속의 이쁜 바비인형처럼 꾸며진 세계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가? 현실의 좌절감을 가상세계로 통해 보상심리를 채울 수 있을 망정 왜곡된 사람들의 현실을 바꿀 수가 없다. 사랑이라는 판타지도 어째보면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드라마에선 사랑을 외치지만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인간들은 얼마나 있는가? 마치 드라마를 보면서 그 가상적인 사랑이 이루어진 것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은 낭만적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어이없는 농담따먹기도 아닌 그저 바보도 아닌 바보들이 헛소리를 하는 꼴과 같다. 본인들은 현실에서 모든 것을 가려가면서 왜 드라마에서는 그런 것을 따지는 인간을 욕할까? 자신들은 마치 안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 세계의 못된 인물을 욕해봤자 무엇이 달라진다고 그럴까? 드라마 속에 감추어진 작가와 시대의 흐름따위는 눈꼽만치 관심없다. 단지 흥행이나 신드룸이 될만한 요소만 귀를 기울린다. 드마라의 재미를 재미로 보는 것에 대해 나쁘지 않다. 물론 재미있으라고 만든 것이 드라마가 아닌가? 그런데 드라마 세계의 하이퍼리얼리티 세계는 대중들로 하여금 이상한 이념으로 가득차게 한다.



스펙타클이란 말은 그런 현실세계가 아닌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로 들어나는 현상이다. 태풍불어와 집들이 무너지고 길고 긴 장맛비가 내린 후에 하늘은 참 스펙타클하게 푸렇구나 하는 소리는 정말 스펙타클을 알고 하는 소리인가? 아닌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는 1967년 출판된 도서이다. 어느날 우연히 기 드보르를 검색하던 도중에 기 드보르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았다. 정말 횡재하였다. 1994년 자살을 한 영화감독 기 드보르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그가 주장하던 스펙터클의 사회라는 책을 영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좋으나 문제는 나는 불어를 알아 듣지 못한다. 불어대사와 함께 영어자막가 나오지만 나는 영어실력이 좋지 않아 언어적인 구조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영어단어 몇개와 영상이미지로 통해 뭔가 말하고 싶은가만 생각하고 있다. 다행히도 스펙타클이 사회란 책을 1번 읽어보아 대략적으로 감만 잡았다. 2번 3번 이상 봐야하겠지만, 한번 봤다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관점을 준 계기다. 먼저 기 드보르의 society of the spectacle를 보기 전에 Critique de la séparation (1961)를 보았다. 불어 글자철자도 모르겠는데, 불어로 말하는 나레이션은 더욱 더 미궁이다. 단지 눈에 가는 것은 이 영화도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나온 내용과 뭔가 중첩이 된다는 점이다.



평범한 어느 한 여성, 시위와 진압, 전쟁, 정치인들의 상황연출은 뭔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 수 없는 곳에서 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리는 듯 싶다. 실제는 존재하나 실제는 허구로 대중 눈앞을 가리는 느낌처럼 말이다. 위에 society of the spectacle 서적의 한 표지에 실린 그림이다. 눈앞에 선글라스를 끼고 앞을 보는 사람들 이게 진정한 스펙타클이라고 말하고픈 기 드보르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영화는 1973년에 나왔다. 도서가 나온지 5년 뒤다. 1968년 5월 프랑스 68혁명 후에 나온 영화다. 그가 이 영화로 전달하고자는 의미는 뭘까? 불어가 안통하는 나로서는 고민이 막중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을 본 직후의 이야기는 이데올로기 통한 국가대립이라는 것과 여성이 성적인 소비대상, 시위와 진압에서 보이는 불합리성,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정치활동,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흑백영상의 글자들의 나열은 도저히 개연성의 연계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전위예술적인 요소일까? society of the spectacle 영화에서 흑백으로 된 영상에 어느 한 남자의 나레이션이 계속된다. 이 남성의 음성 아래 하단에 찍히 영어로 읽어보면 스펙타클이 그래 좋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장된 세계의 이미지로 대중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으니깐.  제일 기억나는 장면은 파시즘과 나치즘이다. 광기에 가득찬 이 이념들은 인간을 하나로 만들지만 그런 하나가 타국에 대해서는 전쟁을 불러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란 상황이 그야말로 스펙타클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실이다. 문제는 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들은 뒤에서 가만히 앉아 구경하면서 막상 그 스펙타클한 세계에 휘말리는 것은 대중이란 점이다. 스펙타클은 대중들을 현혹하여 이념적 조장자로 하여금 꼭두각시처럼 행동하게금 한다. 전쟁에서 목숨걸고 싸우는 젊은이들이 전쟁을 만들었는가? 그들은 국가적인 이념아래 간다고 하지만, 자신의 목숨마져 날릴 수 있을 정도로 이념이란 것은 강력한 무기다.



이런 강력한 무기인 이념은 반드시 국가만이 아니다. 문화, 단체, 심지어는 개인들의 일상에서도 존재한다. 우리가 축구를 볼때 토탈사커라고 들어봤는가? 이 집단축구는 오렌지군단인 네덜란드에서 만든 축구전략이다. 물론 스펙타클한 전법이지만, 그렇게 해롭지는 않다. 문제는 이런 스펙타클한 전법을 보는 대중들이 걱정이다. 훌리건이라는 광적인 축구팬들은 자신들의 팀이나 국가가 지면 상대방에게 집단적인 행동으로 들어간다. 각 개인마다 독특한 개성과 인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축구팬 단체란 틀에서 그들은 집단적행위를 시작한다. 누구 하나의 생각도 아닌데, 이렇게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만까지 가는 사람들이 스펙타클한 축구전략이지만, 그 축구경기가 스펙타클하지 않은데도 자신들의 그 경기에 따라 스펙타클한 연출을 하기 시작한다. 



각본도 감독도 없는 없는 훌리건에서 스펙타클이란 반드시 국가적인 이념만 아니라 이런 사소한 일상생활에서도 목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의 비일상적인 공간의 스펙타클은 이런 집단에서 나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집단을 대상으로 이념적인 행동들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만들게 하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 시위와 진압, 정치인들 활동, 일상생활, 시민들의 선동, 전쟁포로에 대한 억압, 여성의 가슴노출, 글자만 나오는 장면들을 어지렇게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는 점은 여자의 가슴노출에서 처음에 자본주의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는 수동적 존재로 만든 점에서 그런 의도인가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영화 후반에 어느 해변에 모든 여성들이 상의를 다 벗고 있었다. 누드해변인가? 소문으로 있다고 들어보았지만, 남자나 여자나 모두 상의를 탈의한 채 재밌게 놀고 있다.



최근에 매릴린 옐롬 교수의 서적을 구입하여 초반을 읽고 있다. 패미니스트 인문학자인 그녀는 여자의 가슴에 대해 서양철학 역사 2,500년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성이 보는 여성의 몸이란 섹시한 아이돌스타처럼 그저 보기 좋게 하려는 시각적인 소유물인가? 아니면 당당하게 권리를 누리는 자유인가? 영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듯하다. 처음에 마치 누드모델처럼 나오는 여자들의 영상이 어느순간 자유로운 누드해변가로 나온다. 영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가장 많이던 장면은 인간과 인간의 투쟁이다. 전쟁터에서 서로 총을 쏘우는 군인들, 시위자와 그 시위자를 진압하는 공권력, 투쟁의 역사는 좀 더 과학기술적으로 변모하여 항공모항 위로 이착륙하는 전투기들, 스펙타클한 사회란 그런 국가 내에서도 국가 외적으로도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이다.

 

 그의 작품 마지막에 1968년 이야기가 나온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일어나고 1969년 드골정부에서 다른 정부로 교체된다. 어째든 그가 보며준 영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는 전혀 맞지도 않은 서사구조에 전혀 맞지도 않은 이미지에 나레이션을 입혀 놓는다. 전위예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나로서는 전위예술적인 영화란 과연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기 드보르의 영화가 상영될 때 이상한 편집과 해괴한 연출에서 영화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도구를 위한 영화라는 말처럼 상영객들의 평가가 희비를 달리했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이미지가 매개로 하여 대중들이 그저 조장된 이미지로 탄생된 미디어 안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 그 자체로 능동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언제나 우리 주변은 스펙타클한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대중들이 말하고 있는 스펙타클하다는 그것들. 분명히 스펙타클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스펙타클한 것은 본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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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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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좌파와 우파에 대해 안 것은 중학교이었다. 당시 정인화 선생이 만든 영원한 제국에서 제시된 성호학파의 갈래에서 알았다. 성호학파는 조선시대 최고 학자 겸 사상가인 성호 이익 선생이 만든 도서로 다양한 학문과 사상 그리고 문화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중국에 선교온 마테오 리치 신부가 만든 천주실의에 대해 최초로 연구한 서적이라 한다.

이 천주실의라는 학문은 가톨릭신앙을 포교하기 위해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서적이나 그 내용은 동양의 사상과 문화에 맞추어서 적었으므로 당시 천주실의는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 교황청의 정치적인 체계가 바뀌면서 당시 제사를 지내야 마느냐에서 기존 천주실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당연하나 바뀐 가톨릭 포교에선 제사는 불가하다고 했다.

그런 갈등과 천주교라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성호학파가 2가지 갈래로 나눤다. 하나는 순암 안정복과 이삼환의 필두로 하는 성호우파, 또 하나는 만천 이승훈, 광암 이벽,  아우구스티노 장약종, 다산 정약용과 같은 남인 계통의 젊은 학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받아들인 좌파와 우파는 어느 일정한 사상과 철학에 관련하여 급진적인가 혹은 보수적인 태도인가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사상이나 철학, 학문 등이 좌우 관계없이 인간을 근본으로 하여 단지 그것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는 이런 관점이 무의미하게 사라져가는 추세인듯 하다. 정말 좌파와 우파의 차이는 그런 관점과 시선의 차이라기 보다는 단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당위성 내지 편가르기식으로 머물게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우파와 좌파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적인 노선이 문제가 근본 자체가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잘 지내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기본 중에 기본은 어디로 사라져 갔는지 이제는 상대방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게 되었다.

그것이 과연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 보다는 그 옳고 그름에 따라 정치적인 표명하기가 바쁜 것이다. 게다가 우리 나라 아직 민주주의라는 근현대적인 정치체계가 들어온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약 600년간의 사대부국가에서 약 50년동안의 일제 강점과 625전쟁으로 나라가 많이 혼돈되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전쟁으로 얼룩진 만큼 그 당시에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북한과 대치로 인한 이데올로기적인 군사외교 적대는 어두운 사회상을 반영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흔히 한국에서 좌파라고 하면 다들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수이다. 내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빨갱이 불온서적으로 마르크스 도서를 읽으면 안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어른이 되어 집근처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마르크스 서적이 주변에 넘치고 넘친다. 당시 내가 받아들인 시대상은 어떠한가? 우리는 좌파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를까? 기존 한국사회를 혼돈하게 하는 존재, 아니면 빨갱이? 사실 알고 보면 마르크스는 그런 유령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보다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냉철하게 바라보아 그 체계와 흐름을 분석하고자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마르크스라고 하면 모든 국가체계를 무너뜨릴 귀신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나도 인문학이란 세계에 발을 들인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거의 신입생급이다. 하지만 외국도서를 읽다보면 놀란다.

소련과 대치하던 미국, 영국은 물론이거니와 독일,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학문적인 업적을 여실하게 맺고 있던 것이다. 세계 학문체계에서 프랑스의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유명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들은 소비에트연방과 북한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에 대해 연구하고 정치에 활용하였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렇게 말하면 모두 좌빨 종북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옭아내지만, 막상 그렇게 했다면 서구사회는 모두 한통속이라는 인식 오류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좌파의 시초인 마르크스에 대한 내용으로부터 근현대 좌파지식인에 대한 내용과 간단한 소개로 통해 인문좌파이론이 뭐가 있는지 알려준다.

인문좌파는 정치적인 좌파가 아니다. 그런다고 우파도 아니다. 지금 뭐가 잘못된 현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이것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논하는 것이 인문좌파이다. 그래서 인문좌파에 거론되는 철학자는 대부분 근현대철학자들이 아주 많았다.

먼저 마르크스로 필두로 하여 마르크스 이전의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 뒤를 이은 엥겔스와 발터 벤야민, 알튀세르, 사르트르. 데리다, 자크 라캉, 미셀 푸코, 들뢰즈, 슬라보에 지젝 등, 솔직히 내가 여기서 거론된 학자들은 다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다. 단지 이름은 듣고 간단한 소개만 알지 실제 그 사람들이 무슨 내용을 말한지는 세세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이 좌파지식인이란 점에서 우리가 근현대를 지나온 점에서 새로운 철학이나 사상은 대부분 좌파적인 부분에서 많이 나온 점이다. 나는 이 책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며 생각한 점은 인문좌파는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보고 생각하여 지적하여 원인을 규명하자는 것이다.

예전에 한창 관심있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에서 이른바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처음으로 들었다. 물론 해체주의에서 거론하는 남녀차별, 인종차별 등과 같은 고질적인 문제는 해체하는 것이 옳으나 그런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해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해체라는 모더니즘의 틀을 반대로 보기보단 추가와 보완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추가와 보완으로 통해서 얼마든지 기존 사회 기반을 부정하기 보단 그것에 대한 기능을 좀 더 올린다면 그것이 진정한 인문좌파로서의 소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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