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일제 침략사
임종국 지음 / 한빛문화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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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 선생은 "친일문학론"으로 내게 알려진 분이다. 다른 사람들이 연구를 등한시 하고 있을 때 그는 방대한 자료를 모아 친일행위를 한 문인들의 행적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아주 오래 전에.

 

그가 쓴 책이 밤의 일본 침략사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침략을 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어두운 면에서도 침략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술과 계집이다. 일본 군인들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일본 게이샤들까지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사실.

 

일본인들이 조선에 거주하는 시간과 인구가 늘수록 일본의 향락문화 역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것. 이들은 이러한 향락문화를 한껏 누리면서 그곳에서 조선 침략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는 것.

 

일본인들만이 이랬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함께 놀아났으니... 한 나라가 망해갈 때는 경제, 군사, 정치만이 아니라, 이렇게 문화적으로도 망해가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일제시대에 통감부터 시작하여 총독까지 시간 순서대로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여온 퇴폐문화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기생집부터 요정까지 이들 문화가 어떻게 기생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일제말기로 가면 우리나라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게 되는 그런 사실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책 하나만으로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조선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밤의 문화까지도 조선에 들여온 것이다.

 

일제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밤의 문화를 보면서도 과연 일제가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멀다면 먼 조선에서 자신들의 향락을 마음껏 누리면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런 권력과 향락의 면들이 조선에 온갖 밤의 문화로 나타났던 것이고...

 

정치, 경제, 군사적인 면만이 아니라 이렇듯 문화적인 면에서도 우리를 침략한 것이 일제라는 것,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단지 총만으로 한 민족을 정벌할 수는 없다. 그들은 퇴폐문화를 들여와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려 한 것이다.

 

조선을 거쳐간 총독들과 관료들이 어떻게 이런 밤의 문화를 즐기면서 조선에서 생활했는지, 이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았기에 일제시대가 끝나고도 일본인들이 기생관광이다 뭐다 해서 우리나라를 찾은 적이 있지 않은가. 또다시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한다.

 

알아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일본의 군사, 경제적 침략에 대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밤의 문화에 대해서도 알고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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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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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0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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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지 않을 편지

-길


  길이 사람들을 이어주고 있단 말을 보고 혈관을 떠올렸습니다. 목숨을 이어주고 있는. 그러다 ‘들’이란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들’이란 여럿이고, 둘만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의미하기에 함께 걸었던 길이 당신과 나만의 길이 아니라는 것, 당신 발자욱 위에 얹혀진 수많은 발자국들에 당신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 하여 사람들을 이어주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떠나가고 내가 떠나올 수 있고 그 사이에 섬을 만들어 우리만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함께 걷던 당신을 떠올립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그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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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장편동화 재미있다! 세계명작 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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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삐삐' 시리즈로 알게 된 작가다. 말괄량이 삐삐, 얼마나 우리의 동심을 자극했던지. 드라마로 보면서 삐삐의 행동에서 통쾌함을 느끼면서 어린 시절의 환상을 키워갈 수 있었다고나 할까. 보통 사람과는 다른, 독립해서 살아가는 그런 삐삐의 모습에서 말이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어린 시절에 읽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것이 1983년이라고 하니, 꽤 오래된 책임에도 말광량이 삐삐만큼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소년이 온다"의 작가 한강이 노르웨이에서 한 강연의 원고를 읽으며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한강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소설. 어쩌면 이 소설에 나오는 형제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소년은 통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

 

읽게 되자마자 한 순간에 책의 끝부분에 도달했다. 세상에 이승에서 저승에 해당하는 낭기열라까지 가는데 순식간에 가듯이, 또 낭기열라에서 또다른 세상인 낭길리마로 가는데 순식간이듯이, 소설 역시 순식간에 읽힌다.

 

그만큼 흥미진진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독재권력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자꾸 떠올리게 하고, 벚나무 골짜기 사람들과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이 함께 교류하며 잘 살다가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을 억압하는 텡일이라는 독재자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자꾸만 우리나라가 겹치게 되기도 한다.

 

자유를 다시 찾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 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거는 일, 두려운 일이다. 주인공인 동생 칼은 이런 두려움을 느낀다. 아니, 형인 요나탄도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두려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들은 나서야 했다. 특히 요나탄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맨 앞으로 나서야 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으므로.

 

동생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너무도 어린 나이 아닌가. 죽음을 앞에 두고 자유를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것에는. 그럼에도 요나탄이나 칼은 이런 생각으로 싸움에 나서게 된다. 아니 자신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인데, 만일 그걸 하지 않으면 쓰레기처럼 하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230쪽)

 

그렇다. 사자왕 형제는 이런 생각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 이들은 하잘것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소년이 온다"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죽음 앞으로 다가간 사람들이 나온다. 주인공 소년인 동호 역시 마찬가지다. 왜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수가 없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영화 "화려한 휴가"를 다시 봤다. 도청에서 나갔다가 진압 전날 밤, 다시 도청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죽을 줄 알면서도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사람들. 남아야 했던 사람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고 절규하는 주인공.

 

그렇다, 이들이 남을 수밖에 없었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 폭도가 아니라고 절규하는 것,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죽어가는 것, 이들의 선택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용기다.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것.

 

이 소설의 주인공인 형제는 바로 이런 사람다움을 잃지 않으려 한다. 사람다움의 기본은 무엇인가. 바로 자유 아니던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 그 자유를 독재자가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해 침해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고 다시 되찾는 것. 되찾은 다음, 자신이 영웅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 아니던가.

 

사자왕 형제는 그래서 '낭기열라'에 남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낭길리마'다. 형제는 그곳에서 평온한 삶을,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그곳에는 독재자는 없으니까.

 

이 소설의 묘미는 우선 재미다. 재미있게 아이들이 읽을 수 있다. 읽으면서 두려움을 이겨나가는 칼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겪게 될 일을 미리 경험할 수 있다. 두려움 앞에서 누구나 떨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을 인정하고 앞으로 한 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용기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으면 앞으로 겪게 될 일에 해보지도 않고 미리 주저앉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이 용기인지 알 수 있게 되니까.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렵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그래야 쓰레기같은 하잘것없는 삶을 살지 않게 될 테니까.

 

한강 덕분에 좋은 작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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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니발은 예외다.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그것도 허용된 일탈.

 

무엇이든 통용되는 이런 일탈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아마 숨막혀 죽었을지도 모를 고대, 중세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이루어낸 축제가 바로 카니발이다.

 

그러나 이런 카니발은 일시적이어야 한다. 영속적이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축제가 아니라 혼돈만이 남게 된다.

 

조동범 시인은 자신의 시집 제목을 '카니발'이라고 했다. 카니발이라고 하면 흥분과 즐거움, 일탈 등이 시집 전면에 나타나야 할 것 같은데...

 

시집에 흐르고 있는 정조는 죽음이다. 죽음, 세계 곳곳에 넘쳐나는 죽음, 그것도 자연사라고 하기보다는 살육, 또는 사고사가 이 시집에 넘쳐난다.

 

어느 편을 보아도 죽음이다. 이렇게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 이것이 지금 우리의 세상이라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은 '카니발'처럼 일시적인 일탈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이 일상이 되는 순간, 인류는 멸종의 위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카니발'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은 축제의 밤이야 / 검은 피와 불꽃이 빛나는 / 불행한 장미의 밤이지' - 카니발의 첫 3행. (108쪽)

 

축제와 검은 피,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피는 붉은 피라는 표현이 더 어울려야 하는데, 검은 피라고 한 것은 이미 흘러 굳어진 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피들이 흘러 넘쳤는지, 우리는 이런 카니발을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렇게 세상의 어둠을, 죽음을 시로 썼다는 것은 세상에 절망하고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세상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알아야 하기 때문에, 애써 눈 감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인은 이렇게 '카니발'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에게 현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살육, 죽음의 세상이 '카니발'처럼 일시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 카니발이 영속된다면 무질서만 난무하는 세상이 되고, 오히려 즐거움이 아니라 두려움과 고통이 판치는 세상이 되듯이, 지금 죽음이 난무하는 이 세상은 곧 끝나야 한다.

 

우리 인류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도. 세계 각지에서 자행되고 있는 죽음의 행진들,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시인은 '카니발 너머에는 / 동굴처럼 길고 막막한 / 어둠이 기다리고 있지 / 어둠을 향하면서도 / 끊임없이 즐겁고 유쾌한 / 카니발의 행렬' (카니발 부분. 109쪽)라고 하고 있지만, 카니발 너머에 있는 것은 단지 어둠만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카니발은 그런 어둠을 잊기 위한 축제였다면, 지금 세상의 카니발은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카니발이다. 빛을 향해 우리가 나아가야만 하는, 끝내야만 하는 그런 카니발이다.

 

어둠을 잊기 위한 카니발도 순간이었듯이, 죽음이 판치는 카니발 역시 순간이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시집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죽음들이, 이 시 '카니발'을 민중들이 고통을 잊기 위해 즐기는 축제로 읽게 하는 대신,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을 카니발 식의 혼돈으로 읽게 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카니발은 끝나야 함을... 우리는 밝음을 향해, 이 카니발을 끝내야 함을, 그렇게 시집의 다른 시들과 연관지어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덧글

 

특별판을 중고서점을 통해 구입했는데... 책이 너무 크다. 시집은 한 손에 들 수 있고, 작은 가방에도 넣을 수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꺼내 읽어볼 수 있어야 하는데, 특별판은 너무도 커서 한 손으로 들고 읽을 수도 없고, 작은 가방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시집의 크기는 조금 작아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시집 크기는 작아도 그 시집 속 내용은 너무도 클텐데... 왜 책크기까지 이토록 커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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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반양장) 주니어 클래식 3
사계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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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잘 읽지 않는 책'(4쪽)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것이 고전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유명해서 그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래서 내용도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책. 그것이 바로 고전이라는 말이리라.

 

논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조선을 통해서 성리학 중심의 나라였고, 유교는 우리나라 핵심 사상을 이루고 있어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논어는 필독서였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지금 논어를 읽는다고 하면 왜? 그런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사상을 읽는다는 거지 하는 의아한 눈길을 받을 수가 있다. 또한 유교는 우리나라를 문약에 빠뜨린 사상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으니...

 

내게도 마찬가지다. 논어를 읽어본 적은 있다.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한글 번역본으로도 읽었고, 한문으로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해석도 하지 못했지만 읽으려 노력한 적이 있었다. 몇몇 구절은 머리 속에 박혀 나가지도 않고.

 

그 유명한 논어의 첫구절은 학창시절에 한문 시간에 배우고 외웠으니...더 말할 나위도 없고. 하지만 논어의 사상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게 논어는 조선시대 당파싸움이라는 색안경을 낀 눈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루한, 자기 사상에 갇혀 다른 사상을 전혀 용납하지 못한, 사상이 다르다고 사람까지 죽이는 그런 사상. 그렇게 유교는 편협한 사상으로 각인되어 있었고, 그런 사상의 출발점이 논어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녹색평론에 연재된 배병삼의 글을 읽으며 유교에 대해, 아니 공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조선시대 실학이 주자의 눈으로 본 공자가 아니라 공자의 저술을 통해 본 공자를 주장하기도 했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었다는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배병삼은 공자의 말로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논어를 정리해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논어가 총 20편인데, 그 20편을 한 편 한 편 분석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공자시대의 논리만 따라간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역시 배병삼의 눈으로 본 공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의할 점은 배병삼의 논리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고, 그 다음에 우리의 눈으로 논어를 읽는 것이다.

 

남의 말만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읽고 이해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논어의 첫번째 구절과 상통하는지도 모른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이와 더불어 논어를 함께 토론할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다. 역시 논어의 첫번째 장 두번째 구절이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그렇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전을 통해서 현재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다. 고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제목도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책을 통해 한 가지는 깨달았다.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 공자는 먼저 설명하지 않았다. 제자가 물어보았을 때 그 제자의 수준에 맞는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다. 질문이 없는 학교... 지금의 학교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교육이 얼마나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지식 전수만이 학교의 목표가 아니다. 학교는 사람의 길을 열어주는 곳이다. 그렇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교육이 살 수 있다.

 

질문이 없는 학교에서는 결국, 공자의 제자 중에 공자의 길을 배반한 염유와 같은 기술자들만 양산할 수밖에 없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이 이런 전문기술자로만 머무는 것을 반대했다. 전문가가 아니라 군자가 되기를, 자신을 바로 세워서 남도 바로 세우는, 나와 남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남을 통해서 내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관계가 중시되는 이 사회에서 공자의 이 논어는 마냥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관계맺어야 하는지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디딤돌로 해서 논어를 다시 읽는 그런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겠다. 다시 읽는 논어는 예전의 논어가 아니라 새로운 현대에 맞는 고전이 논어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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