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발은 예외다.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그것도 허용된 일탈.

 

무엇이든 통용되는 이런 일탈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아마 숨막혀 죽었을지도 모를 고대, 중세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이루어낸 축제가 바로 카니발이다.

 

그러나 이런 카니발은 일시적이어야 한다. 영속적이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축제가 아니라 혼돈만이 남게 된다.

 

조동범 시인은 자신의 시집 제목을 '카니발'이라고 했다. 카니발이라고 하면 흥분과 즐거움, 일탈 등이 시집 전면에 나타나야 할 것 같은데...

 

시집에 흐르고 있는 정조는 죽음이다. 죽음, 세계 곳곳에 넘쳐나는 죽음, 그것도 자연사라고 하기보다는 살육, 또는 사고사가 이 시집에 넘쳐난다.

 

어느 편을 보아도 죽음이다. 이렇게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 이것이 지금 우리의 세상이라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은 '카니발'처럼 일시적인 일탈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이 일상이 되는 순간, 인류는 멸종의 위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카니발'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은 축제의 밤이야 / 검은 피와 불꽃이 빛나는 / 불행한 장미의 밤이지' - 카니발의 첫 3행. (108쪽)

 

축제와 검은 피,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피는 붉은 피라는 표현이 더 어울려야 하는데, 검은 피라고 한 것은 이미 흘러 굳어진 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피들이 흘러 넘쳤는지, 우리는 이런 카니발을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렇게 세상의 어둠을, 죽음을 시로 썼다는 것은 세상에 절망하고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세상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알아야 하기 때문에, 애써 눈 감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인은 이렇게 '카니발'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에게 현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살육, 죽음의 세상이 '카니발'처럼 일시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 카니발이 영속된다면 무질서만 난무하는 세상이 되고, 오히려 즐거움이 아니라 두려움과 고통이 판치는 세상이 되듯이, 지금 죽음이 난무하는 이 세상은 곧 끝나야 한다.

 

우리 인류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도. 세계 각지에서 자행되고 있는 죽음의 행진들,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시인은 '카니발 너머에는 / 동굴처럼 길고 막막한 / 어둠이 기다리고 있지 / 어둠을 향하면서도 / 끊임없이 즐겁고 유쾌한 / 카니발의 행렬' (카니발 부분. 109쪽)라고 하고 있지만, 카니발 너머에 있는 것은 단지 어둠만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카니발은 그런 어둠을 잊기 위한 축제였다면, 지금 세상의 카니발은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카니발이다. 빛을 향해 우리가 나아가야만 하는, 끝내야만 하는 그런 카니발이다.

 

어둠을 잊기 위한 카니발도 순간이었듯이, 죽음이 판치는 카니발 역시 순간이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시집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죽음들이, 이 시 '카니발'을 민중들이 고통을 잊기 위해 즐기는 축제로 읽게 하는 대신,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을 카니발 식의 혼돈으로 읽게 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카니발은 끝나야 함을... 우리는 밝음을 향해, 이 카니발을 끝내야 함을, 그렇게 시집의 다른 시들과 연관지어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덧글

 

특별판을 중고서점을 통해 구입했는데... 책이 너무 크다. 시집은 한 손에 들 수 있고, 작은 가방에도 넣을 수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꺼내 읽어볼 수 있어야 하는데, 특별판은 너무도 커서 한 손으로 들고 읽을 수도 없고, 작은 가방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시집의 크기는 조금 작아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시집 크기는 작아도 그 시집 속 내용은 너무도 클텐데... 왜 책크기까지 이토록 커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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