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의 대화 -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새로 읽는 관계사 시리즈
김연철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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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이 쓴 "선을 넘어 생각한다"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다. 박한식은 북한을 바라보는 12가지 편견에 대해서 사실에 기반해서 반박하고 있다면, 이 책은 남북간에 이루어진 대화를 역사적 순서대로 서술하고 있다.

 

분단이 된 직후부터 이야기하지 않고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남북간에 어떤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세계적인 정세와 함께 분석하고 있다. 이렇듯 과거를 분석하는 이유는 과거에 매달리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나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앞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가자는 것, 그것은 대결 국면에서 평화 국면으로 전환하자는 것, 적대자에서 동반자 관계를 만들자는 것, 실질적인 섬나라에서 명실상부한 반도가 되자는 것, 그래서 우리가 평화를 배달하는 배달의 민족이 되자는 것이다.

 

이 책은 남북관계를 7개의 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후(1950년대와 제네바 회담) -> 대결의 시대(1960년대 제한전쟁과 푸에블로호 사건) -> 대화가 있는 대결의 시대(1970년대와 7·4남북공동성명) -> 합의의 시대(북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 -> 공백의 5년(김영삼 정부의 남북관계) -> 접촉의 시대(두번의 남북 정상회담) -> 제재의 시대(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남북관계)

 

이 책은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이루어진 일은 다루지 않고 있다. 책이 지닌 한계이리라. 이 책이 출판된 것이 2018년 1월이니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대화가 막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다. 그 뒤에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결성이 되어 감동을 주었고,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으며(그것도 두 번이나), 북미 정상회담까지 이루어졌다. 아마 증보판이 나온다면 '평화의 시대'라는 장이 하나 추가되지 않을까 한다.

 

남북 관계, 북미 관계가 급속도로 평화 분위기로 전환되었기에, 이 책에서 짚어온 남북 대화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안정적으로 생활을 하던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떤 상태를 추구해야 하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남북이 긴장관계, 대결관계에 있을 때 과연 우리 삶이 편안했던가. 안보를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이용한 집단들 때문에 우리는 불안에 휩싸인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반면에 남북이 서로 대화를 하는 국면에서는 갈등이 있더라도 곧 해결될 것이라는 안정감을 지니지 않았던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북한과 대화를 하고 있는 국면이기에 혹 북한과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잘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많이 사라져가고 있고. 이런 사라짐은 다른 분야에서 우리를 더 힘내게 한다.

 

따라서 지금 청년들은 안보 불안에 떨지 않는다. 이들은 적어도 남북관계에서만은 밝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이들 청년, 청소년들은 통일에 대해서도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통일은 정치적 의미보다는 자신 생활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온다.

 

"기차 타고 유럽 가자!"

 

얼마나 발랄한가. 이게 바로 통일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미래 세대에게는 우리나라가 섬나라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안보를 핑계 삼아 정권 유지를 할 집단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때, 그런 때가 바로 통일을 바라보게 되는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으로 무거웠던, 통일 하면 무언가 어려운 난제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있었음을, 지금 이렇게 밝은 분위기로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대화들이 오고가고, 멈추었다 다시 시작하고를 반복했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책이 시중에 나와 대중들이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북한 잘못으로 몰아가던 책들에서, 이제는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책들이 나왔으니 말이다.

 

이제 시작이다. 남북 평화 시대는. 제재의 시대를 넘어 다시 접촉, 상생의 시대, 평화의 시대로 가고 있다. 그렇다. 제재의 시대, 보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해서, 그 때 이룬 남북관계 성과들을 묻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은 상호불신밖에 없었다.

 

이 유산을 청산하고 다시 대화, 평화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제재의 시대에 멈추었던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철도 연결 사업, 각종 문화 교류, 이산가족 상봉 등 다양한 활동들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군사적 긴장도 다시 확성기가 철거되고 장성급 회담이 진행되는 등 완화되고 있으니 앞으로의 전망은 밝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보수-진보-보수-진보 정권을 거치면서 충분한 시행착오를 거쳤다.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운 점도 많다. 그러니 상생, 평화, 동반자 시대로 남북이 접어들 때도 되었다. 그 열쇠를 주변 강대국들에게 맡기지 말아야 한다.

 

열쇠는 바로 우리가 쥐어야 한다. 그 열쇠로 전쟁으로 인해 막힌 자물쇠를 열어야 한다. 물론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한번에 열 수는 없다. 자물쇠가 많이 녹슬어 있을 테니. 천천히 계속 열쇠로 열려는 노력을 하면 자물쇠는 열린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한번에 자물쇠가 안 열린다고 포기하지 않는 자세다.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게 꼭 쥐고 계속 여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자물쇠는 열린다. 우리에게 평화의 시대가 펼쳐진다.

 

이렇게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꾸준히 노력할 때 우리 미래세대들은 기차 타고 유럽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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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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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1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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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변화한다 - 모옌 자전에세이
모옌 지음, 문현선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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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중국 작가로는 모옌과 위화가 있다. 둘은 다섯 살 차이다. 다섯 살 차이라 함은 동년배라 할 수 있단 얘기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작가인데 작품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영 다르다.

 

모옌이 1955년생, 위화가 1960년생. 이들은 중국을 공산당이 장악한 다음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항일전쟁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기를 겪었다. 그런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위화가 자기 수필집인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중국 현대사를 겪으면서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면, 모옌은 이 책 "모두 변화한다"에서 자신이 겪은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위화는 주로 문화대혁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위화에게는 문화대혁명이 성장함에 있어서 큰 충격으로 다가왔나 보다. 소설 '형제'를 보아도 문화대혁명기의 비극과 개혁개방기의 성장이 함께 나오고 있는데... 그래서 중국 현대사를 힘겹게 겪어 나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위화보다 다섯 살이 더 많은 모옌 역시 위화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기에 비슷한 경험을 했을텐데, 이 수필집의 분위기는 너무도 다르다.

 

이미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듯한 과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오면서도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심한 갈등을 겪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개인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차이가 모옌은 교육을 덜 받고 군인으로 입대해 생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당시 중국에서 군인은 당원만큼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계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목화가공 공장에서 군인이 된 모옌은 문학에 대한 꿈을 잊지 않고 결국 소설가가 된다. 그가 소설가가 되어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중국이 변해온 모습을 글로 담아낸 책이 바로 이 책인데...

 

이 책은 수필로 읽어야 하지만 읽다보면 이상하게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줄거리가 있고, 사건이 있고, 무엇보다 뚜렷한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모옌이 다녔던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동창. 루원리와 허즈우, 그리고 교사들 몇몇과 모옌. 이들의 삶을 통해 중국 현대사를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문화대혁명기는 살짝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수많은 사람이 수없이 고통을 당했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모옌은 빗겨가고 있다. 그 다음 개혁개방기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다.

 

국가, 지방, 인민 소유에서 개인 소유로 바뀌어 가는 과정,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허즈우가 돈을 벌게 되는 과정과 결혼 그리고 자식들 이야기, 루원리의 가정사와 개인적인 아픔이 시대의 변화와 잘 맞아떨어지면서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세 동창의 삶을 통해 중국 현대사를 살짝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좋은 책인데, 다른 무엇보다도 중국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모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가 초등학교 때는 어떠했고, 청년기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이 더 좋게 다가오는 책이다.

 

모옌,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어 '공리'란 여배우를 세계적인 여배우로 만들어낸 "붉은 수수밭"이란 영화를 떠올리면 된다. 그 영화의 원작이 되는 "홍까오량 가족"을 쓴 사람이 바로 모옌이니까.

 

여기엔 그 영화 "붉은 수수밭"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영화 촬영을 모옌의 고향에서 했다고 하고, 또 폭파되는 차가 이 책에 계속 나오는 '가즈51'이라는 차라고 하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모옌이라는 작가의 사적인 삶과 중국이 겪어온 역사를 함께 알 수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과거를 따뜻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어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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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1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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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1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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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 불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1
니콜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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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소설은 역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작가가 결론을 바꿀 수가 없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나 결론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읽는데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작가가 허구적인 상상력으로 메워넣기에 더 흥미롭고 재미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이 역사 소설이나 또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미 알고 있는 결과지만 그 과정을 채워넣는 작가나 감독의 상상력에 감탄하기 때문이다. 고골이 쓴 소설 '타라스 불바'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을 나는 지금까지 '대장 부리바'로 알고 있었다. '타라스'라는 말을 '대장'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던 것. (소설 시작 전에 있는 일러두기에 이런 말이 있다. [타라스 불바]는 [대장 불리바]로 번역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까지도 '타라스'에 '대장'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타라스는 인물의 이름이고, 불바는 인물의 성이다. 6쪽)   역시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한데, 대장 부리바로 알고 있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에 본 율 브린너가 부리바 역으로 나온 영화가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영화가 그래도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색을 해봤더니 1962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고, 이 소설의 말미에 번역자가 영화도 소개하면서 영화와 소설이 지닌 차이를 설명해 주고 있다. 눈이 부리부리한 율 브린너의 연기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데,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꾸 율 브린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영화를 먼저 본 나에게 불바는 율 브린너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불바의 이미지가 꼭 그렇게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소설과 영화의 차이다. 소설에서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많다. 특히 인물에 대해서는. 

 

자유를 추구하는 카자크 족. 그들은 이교도들, 특히 폴란드와 타타르인들을 싫어한다. 그리고 소설에 또 하나의 축 유대인이 나오는데, 어떤 식으로든 돈을 버는 그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세익스피어의 샤일록이 얀켄이라는 이름으로, 극한 상황에서도 돈을 생각하는 유대인으로 나오는데, 유대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끝없은 미움을 엿볼 수 있다.

 

영화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카자크 족은 야만인이었는데, 아니었다. 소설을 읽어보니 이들은 그리스정교를 독실하게 믿는 신앙인이었다. 마치 십자군 원정을 유럽 기사들이 떠났듯이 카자크 족은 그리스정교를 믿지 않는 가톨릭이나 이슬람교를 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과 공존하지 않으려 한다. 평화협정을 맺었음에도 자식들에게 카자크 족의 용맹을 일깨워주려는 불바. 결국 이들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전쟁을 하게 되는데, 전쟁 중에 아들들의 용맹을 확인하고 흐뭇해 하는 불바.

 

참 호전적이다. 이들에게 용서는 없다. 오로지 학살과 약탈뿐이다. 이런 그들이기에 평화로울 때는 먹고 마시고 논다. 그것이 다다. 미래를 위한 저축, 그런 것은 없다. 이상하게 그리스정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죽을 때 신에게 의탁하면서, 평소 생활은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같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 욕망에 충실한 자유인이다. 다만 그들 자유를 위해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라고 하고, 과거에 이런 전쟁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니, 꼭 이들을 탓할 것은 아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들은 결국 해체되고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이다. 이렇게 호전적인 집단이 계속 존재한다면 인류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이런 불행을 불바의 두 아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아버지와 똑 닮은 큰아들 오스타프는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하는데, 전사답게 당당하게 죽게 된다. 반면 둘째 아들 안드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져 카자크 족을 배신하고 폴란드 군에 서서 전투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 불바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불바는 두 아들을 모두 전쟁에서 잃는다. 이들이 아무리 전투를 좋아해도 자기보다 먼저 자식들이 죽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이미 이 사실을 예견하듯이 불바와 떠나는 두 아들을 눈물로 보내게 된다.

 

어떻든 전쟁은 비극이다. 전쟁은 눈물을 부른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무용담으로 남을지 모르겠찌만, 가족들에게는 비탄만 남기게 되는 행위이다. 

 

불바의 죽음으로 카자크 족은 더이상 호전적인 전투를 할 힘을 잃어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불바의 부대가 패배해 부하들이 간신히 도망가고 불바는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불바는 카자크 족 마지막 전사가 된다.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불바를 영웅으로 만든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에서 결국 불바의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을 보면서, 사람들은 전쟁이란 비극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럽에서는 고골이 죽은 다음에 더 큰 전쟁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또 종교로 인한 분쟁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타라스 불바도 전쟁을 벌이는 원인이 바로 종교 아니던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종교가 이편 저편을 가르고 그들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여기에 사랑은 끼어들 틈이 없음을 '타라스 불바'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평화에 도달하는 길은 여전히 멀다.

 

카자크 족 마지막 전사라 할 수 있는 불바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일으키는 비참함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카자크 족들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모습을 통해서도.

 

이 소설은 단순히 영웅소설로만 읽을 수는 없다. 오히려 전쟁의 비극을 알려주는 소설로 읽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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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는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기가 특집이다. 우리 인류가 처음 지구상에 나왔을 때 동물들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힘이 센 상태가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 쫓기면서 함께 살았겠지. 그러다가 집단생활을 하고, 도구를 이용하면서 이제는 동물들을 쫓으면서 살았을 테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동물들은 인간에게 쫓기고 죽임을 당하고, 멸종이 된 동물도 많아졌다. 이런 동물들과 달리 인간과 함께 살게 된 동물들이 있다.

 

  대표적인 동물이 개와 고양이인데... 예전에는 애완견, 애완묘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이제는 반려견, 반려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름이 바뀐 것은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려라는 말은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나선형 발전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다시 동물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되어서.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으니 그것에 대해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민들레 이번 호에서 이 점을 짚어주고 있는 것이고, 약한 존재를 돌보면서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몸으로 익힐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최훈이 쓴 '애완동물과 반려동물'이란 글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반려동물이라고 하면서 우리와 동등한 '반려'로 생각할까? '반려'라면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감을 의미할텐데, 과연 우리는 동물과 우리의 다름을 인정할까?

 

오히려 동물을 우리 인간 기준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 기준에 맞추기 위해 동물들의 습성을 바꾸고 있으면서 '반려'라는 말을 쓰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냥 '애완동물'이라고 하라고... 그것이 지금의 상황에 맞는 표현이라고.

 

그렇다면 그런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 최근에 동물 실험을 금지하고, 동물원들의 환경을 바꾸기도 하니 동물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하는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기는 하다. 여기에 윤리적, 철학적 관점을 확립해야 할 필요도 있고.

 

'민들레'에서 교육을 다루고 있는 글들이 빠질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세계의 교육을 돌아보면서 우리나라 교육 개혁에서 어떤 점을 다루어야 하는지를 짚어준 글도 의미가 있다.

 

이혜정이 쓴 '세계의 입시 패러다임과 한국 교육의 방향'이란 글인데, 대부분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취하고 있는 교육의 방향이 '꺼내는 교육'이라면, 우리나라의 교육은 '집어넣는 교육'이라고 한다.

 

교육의 패러다임을 '집어넣는 교육'에서 '꺼내는 교육'으로 바꾸지 않으면 대학입시에 관한 어떤 논의도 제자리 걸음을 할 뿐임일 잘 보여주고 있다.

 

언제까지 집어넣기만 할 것인가? 물론 집어넣는 단계도 필요하다. 무언가 있어야 꺼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마냥 집어넣기만 하면 안 된다. 들어간 것을 제대로 꺼낼 줄 알게 하는 교육, 그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제대로 꺼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집어 넣어야 하는지 고민할 테니까...

 

이런 저런 글들을 읽으며 제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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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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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 다섯 편이 묶여 있다. '코, 외투, 광인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라는 소설이다.

 

이 중에 '코와 외투'는 많이 들어봤다. 그렇지만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이 참에 읽어야지 하면서 읽었는데... 고골이 쓴 작품 중에 '감찰관'이 희곡으로서 지금 상황에도 잘 들어맞는다고 한다면, 이 소설집에 있는 소설들은 상당히 환상적이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소설로 쓰고 있는데, 소설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쓰는 이유는 현실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코'는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지 생각해야 하는데... 어느날 코가 없어진다. 그 코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 되어 나타나고, 코를 찾고자 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날 홀연히 사라졌던 코가 다시 돌아온다.

 

참 별 내용 아니다. 코가 없어진 사람, 그리고 다시 코가 돌아온 사람. 무엇일까? 코가 하는 역할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코는 얼굴 중심에 있다. 코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무언가 허전할 것이다. 여기에 코는 냄새를 맡는 역할을 한다. 냄새만이 아니다. 코는 성기의 역할도 대신한다. 그렇다면 코는 욕망을 의미한다.

 

코가 사라졌다는 말은 하급관리가 자기 욕망을 추구하기가 힘들어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러시아가 근대화 되는 시기라고 하지만 여전히 고착된 신분 사회다. 그런 신분 사회에서 다른 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하려는 사람은 좌절할 수밖에 없음을 '코'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외투'도 마찬가지다. 외투는 겉옷이다. 겉옷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하급관리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새 외투를 장만했고 그것에 매우 만족하고 즐거워하지만 그는 곧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죽는다. 죽은 그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설정.

 

외투, 계급을 상승시키려는 욕망, 좌절. 코가 없어지고 외투를 빼앗기고. 하급관리들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다른 욕망을 품으면 죽거나 상실하고 만다.

 

아마도 코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그가 다른 계급을 욕망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테고, 외투를 빼앗긴 하급관리가 유령이 되어 다른 사람, 그것도 고급관리의 외투를 빼앗은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곪아버린 사회가 터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도 하지 못하는 하급관리는 미쳐버리고 만다. '광인일기'다. 그는 욕망을 실현할 수가 없다. 자신의 성적 욕망도 실현하지 못하고, 신분 상승이라는 욕망도 실현하지 못한다. 정신병원에 갇힐 수밖에 없다. 닫힌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골의 소설에서는 근대에 이른 러시아 사회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하급관리를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데, 주로 그들은 파멸한다. 그것이 당시 러시아 모습이기도 하리라. 이런 혼란의 상태, 부패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네프스끼 거리'란 소설이다.

 

네프스끼 거리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의 소재로 삼고 있는데, 창부에게 새로운 삶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자살한 화가와 독일인 유부녀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중위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아름다운 여자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일, 즉 젊은이들이 겪는 성에 대한 욕망, 여기에는 지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생각밖에 없다. 처녀든, 유부녀든 상관하지 않는다.

 

결국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하는 젊은이들이 개혁에 대한 열망이 좌절한 상태에서 육체적 욕망에 침잠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 소설에서 구한말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 일제 시대에 들어서 개인적인 욕망 추구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개혁이 좌절된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술과 여자 속으로 숨어든다. 그런 사회 모습을 고골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 성향이 다른 소설이 하나 '초상화'다. 인간이 지닌 욕망이 어떻게 작품에 나타나는가를 중심으로 소설을 읽을 수가 있는데,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2부를 읽으면 1부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기가 더 쉬운데...

 

어쩌면 고골은 자본이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이 환상적인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상화 주인공이 고리대금업자라는 사실이 2부에 나오니 말이다. 그리고 1부에서는 가난한 화가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서 얼마나 순수함에서 멀어지는지, 결국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지, '자본'에 종속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화가와 초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다. '카프카' 소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카프카 소설이 환상적이지만 거기서 우리가 끊임없이 현실을 불러낼 수 있듯이 고골의 소설들도 환상적이기에 읽으면서 오히려 현실을 환기할 수 있다.

 

현실과 멀어졌기에 현실을 바로볼 수 있게 한다고나 할까? 고골은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사람이다. 그런 그는 자본주의 초창기에, 신분제가 강력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신분제가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시대에 살았던 그가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소설 속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공고한 신분제 사회에서 좌절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두하는 자본의 횡포 앞에서 무력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 소설집에서 만날 수 있다. 소설의 생명은 그 시대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은 시대를 따라 유유히 우리 삶에 들어온다. 이것이 고골의 소설이 여전히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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