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이어주는 표현을 만나게 된다. 그런 구절을 만나면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시의 내용이 아니라, 그 표현이 마음에 자리잡는다.


  가령 서정주 시 '푸르른 날'에 나오는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라는 표현... 단풍을 초록이 지쳤다고 표현할 수 있다니... 


  여기에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육사 시 '절정'에 나오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구절.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시 전체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구절때문에도 그 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말들이 나열될 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을 때, 이런 말을 어디서 찾아야 하지 할 때, 시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시가 이렇게 시인에게만 또 몇몇 비평가들에게만 통용되면 되는 존재일까 하는 생각. 시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시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시를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역할은 시인이 해야 한다.


시인, 그러니 시인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 또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알려준다. 시적 표현을 통해서. 그렇다면 시적 표현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몇 개의 징검다리가 있어야 한다.


징검다리 없이 강 건너편에 그냥 이것이 바로 시다라고 하면 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사람 몇 외에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강 건너에서 멀찍이 떨어져 시는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존재구나 하고 포기하게 된다. 그러면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문보영 시집을 산 이유는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집'이라는 제목이 있어서다. 김수영이 누군가? 시는 온몸으로 써 나가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 아닌가.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를 사람들에게 가져온 시인 아니던가. 그러니 그는 '폭포'를 쓰고 '풀'을 쓰고,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절규하지 않았는가. 


조그마한 일... 그래서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고.(인터넷을 찾아보면 적으냐와 작으냐가 혼재되어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 전집(시)에 보면 적으냐로 나와 있으니... 작다는 개념과 적다는 개념이 차이를 보이는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인은 언어를 통해 낯설게 하기를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시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았던 시인 아닌가. 그런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받았으면 이 시집 역시 무엇인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기대를 한다.


이 기대는 시인의 말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콘페니우르겐의 임신 기간은 / 사십 년으로 / 지구에서 가장 길다 그런데 / 콘페니우르겐의 평균수명이 / 이십칠 년인 것은 / 하나의 수수께끼다 (2017년 겨울 / 문보영)


콘페니우르겐... 동물이다. 임신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그런데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만들어낸 동물인데...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낸 동물인지 알 수가 없다. 시인의 말을 따라가보면 수명보다 긴 임신을 한다. 어떻게 출생을 하지? 조산? 그렇다면 콘페니우르겐이 '시'라면 모든 시는 자신의 수명 기간보다도 더 긴 세월을 지내다 사람들 곁으로 와야 하는데... 결국 모든 시는 '조산'이다. 그러니 그 '조산된' 시를 돌보고 보살펴서 성숙하게 하는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한다? 


40년을 지내야 온전하게 출생할 수 있는 콘페니우르겐이 멸종하지 않고 종족을 유지하려면 조산밖에는 없다. 조산한 콘페니우르겐이 죽지 않고 살아가게 하려면 다른 존재들이 보살펴야 한다. 그것도 기를 쓰고. 그만큼 시는 간단하지 않다. 어렵다. 살리기 어렵다. 그렇게 봐야 하나? 나, 참...


그래서 이 시집에 있는 '멀리서 온 책'을 생각한다. 그냥 내쳐버리고 싶은 생각. 하지만 아무리 내치려고 해도 없앨 수가 없다. 그렇게 꾸준히 살아남는다. 조산해서 도무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알게 되기까지 특별한 보살핌을 줘야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 '멀리서 온 책'을 보자. 그냥 이 시를 읽으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럼에도 왜 시들이 살아남는지, 마치 시인의 말에서 나온 '콘페니우르겐'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멀리서 온 책


  책을 펼치자 문장들이 이중 매듭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고 있다. 무의미한 움직임만을 수년간 반복하는, 바위에 깔린 벌레들처럼. 문장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주변을 신경 쓸 재간도 없이, 미래를 도모하지도 않고, 오직 한 자리에서 홈을 파며, 어쨌뜬, 바닥에 흔적을 내고, 그것을 위해 몸을 꼴 대로 꼬며 깊어지는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다.


  어린이는 책을 가져다준 어린이가 너무 멀리서 온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한다. 어린이는 이런 책은 필요치 않다. 어린이는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 고 외칠 수 있는 책이. 너무 멀리서 온 책은 세상에 없어도 된다고.


  멀리서 온 어린이는 모든 문장이 동일해 보이는, 똑같은 수준으로 몸을 비비 꼬고 있는 문장들 중 하나를 흰 손가락으로 콕 짚으며,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든다, 너는? 하고 묻는다. 그래, 이 문장은 다른 문장에 비해 더 오랜 기간 외롭게 매듭을 만들고 있으며 고유한 방식으로 몸을 꼬고 있는 것 같다, 고 어린이는 동조의 뜻을 가장한다.


  어린이와 멀리서 온 어린이는 저녁놀이 비치는 창가에서 함께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사이 석양빛이 몸을 꼬는 벌레들의 잿빛 줄을 붉게 적셨다. 둘은 무릎을 꼭 붙이고, 책을 들여다본다. 어린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책과 멀리서 온 어린이를 창밖으로 던진다.


  나무로 된 현관문을 잠근다. 더 잠글 것이 필요해 머릿속으로 몇 개의 문을 상상해 낸다. 문을 하나하나 잠근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의, 아무도 모르는 나무 그늘에 뜻 모를 바위가 숨 쉬고 있으며, 그 바위는, 셀 때마다 다리의 개수가 달라지는 검정 벌레들을 키운다. 어린이는 그것을 잊기 위해 더 많은 문을 닫는다. 두개골의 작은 틈 사이, 불편하게 나앉은 바위 위로 벌레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보영, 책기둥, 민음사. 2018년 4쇄. 134-135쪽


이상하게 시인의 말에 나오는 '콘페니우르겐'이 이 시에서 '멀리서 온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버리고 싶은, 그러나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이미 내 뇌속에 자리를 잡은, 그런 존재... '콘페니우르겐'이나 '멀리서 온 책'이나 모두 '시'로 바꾸어도 말이 성립된다. 


문보영 시집 [책기둥]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콘페니우르겐들'을 만나는 일도 한번쯤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아직까지 나는 이런 시를 이해하려고 하면 김수영 말처럼 '얼마큼 적으냐'는 한탄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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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림 -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편지
존 버거.이브 버거 지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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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또는 어머니와 딸이 아니면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편지란 전화 통화와는 달리 즉각적인 반응보다는, 오고 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자신의 생각을 다듬고, 그 다듬은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더 내밀한 생각들이 담기게 되고, 그런 편지들을 주고받는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부모자식간에 주고받은 편지. 그것도 그림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화가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화가가 아니더라도 그림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관계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계속 더 좋은 관계를 맺어갈테고.


존 버거와 이브 버거가 쓴 편지들. 서로 내용을 주고받는데, 그림을 매개로, 또는 화가를 매개로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 그 중에서 몇몇 기억해 두고 싶은 구절들이 있다.


소음은 설명을 덮어버리고, 침묵은 계속해서 현재를 따져 묻는 질문들을 내놓지. 둘 다 온전히 살아 있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아.

무엇이 도움이 될까? 아마도 '질문하기'겠지. 그리고 질문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야. 그림을 그리는 것도 하나씩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거야. (41쪽)


그렇다. 좋은 그림은 우리에게 질문을 한다. 답을 찾아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 질문.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냥 그대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네가 보고, 경험한 일이 전부는 아니라고. 다른 모습도 있다고.


드로잉이라는 행위를 통해 들여다보면, 나무나 돌멩이, 꽃 한 송이는 우리가 읽으려는 텍스트임이 분명하지요. 알려지지 않은 언어, 말이 없는 언어로 쓰인 텍스트예요. 우리는 선과 명암과 색깔 들을 종이에 입히며 그것의 형태감을 만들려고 해요! 드로잉하는 사람은 이름 없는 것들의 통역자이고요…. (66쪽)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계속해서 질문한다. 이 질문은 이브 버거의 말처럼 통역에 해당할 수도 있다. 이렇게 화가가 통역한 결과를 가지고 그림을 보는 사람은 또다른 통역을 시도한다. 계속되는 질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화가의 질문과 보는 사람의 질문이 서로 교차하면서 그림은 말이 없는 존재들에게 말을 부여한다.


이렇게 그림을 통해서 나를 만나기도 하고, 다른 존재를 만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림을 통해서 질문을 하게 된다. 질문을 하면 대화를 하게 된다. 마치 존 버거와 이브 버거가 편지를 통해 대화를 하듯이 우리들도 그림을 통해서 다른 존재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림과도 대화를 하게 될테고.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서 그림에 대해서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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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스턴트 시대라고 한다. 또는 패스트푸드의 시대라고도 한다. 일회용이 넘치는 사회. 코로나19로 인해 일회용 사용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다.


  일회용 사용만큼이나 빨리빨리가 더 심해지고 있다. 배달이 많아지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참지 못한다. 더 빨리 배달해야 한다. 과속은 기본이다. 신호위반도 기본이다. 


  그러나 사고가 나면 책임은 그렇게 만든 사회에 있지 않다. 책임은 오로지 개인이 져야 한다. 개인으로 하여금 빨리빨리, 늦으면 비난을 받고, 거기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하게 하면서, 혹 사고가 나면... 참.


  그런데 이런 모습이 사랑에서도 나타난다면... 우리 심장이 너무 빨리 뛰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심장은 적당한 속도로 뛰어야 한다. 왜 사랑하면서 심장? 우리는 사랑의 표시로 심장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표현도 있지만, 심장이 뛴다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심장이야 당연히 뛰는데,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당신을 보면서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든지, 심장이 뛴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사랑과 심장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심장이 울렁거린다. 심장이 뛴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심장은 마음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지는 일, 심장이 뛰는 일이다. 권혁웅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 제목은 '뛰다'가 아니라 '떨다'지만.


  떨다

        - 심장3


네모난 기름통 안에서 굳은 선지를 퍼내듯

마음을 덜어 내야 할 때가 있다네

떠낸 자리에 서둘러 모여드는 물도 없이

천천히 다독이는

저 수평의 손길도 없이

떼꾼한 구멍을 들여다봐야 할 때가 있다네

각 잡은 마음이 슬며시 갖다 댄 딜도처럼

부르르 흔들릴 때가 있다네

잘못 퍼다 준 숟가락이 있었나?

풀 죽은 우거지는 누구 얼굴이었나?

양철 판에 어룽대는 신열(身熱)은

지나는 발자국 소리에도 벌건 제 몸을 

바람벽에 기댄다네


권혁웅,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민음사. 2007년. 37쪽.


사랑은 떨림이다. 이 떨림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공명해 떨린다. 몸이 떨린다. 사랑이 마음의 일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몸이 떨린다. 마음 떨림이 몸의 떨림으로 이어진다. 바로 '마음을 덜어 내야 할 때'다.


내 마음을 덜어내야, 빈 곳이 있어야 다른 존재가 들어올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런 존재나 들어와서는 안 된다. 바로 내 마음 빈 곳에 딱 맞는 존재, 그 존재는 이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덜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각 잡은 마음이 ... 부르르 흔들릴 때가 있'고, '지나는 발자국 소리에도 벌건 제 몸을 / 바람벽에 기대'게 된다.


마음 떨림. 사랑의 울림이다. 심장이 뛴다. 심장이 떨린다. 떨림은 사랑이다. 일회용 시대에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그 마음과 함께 떨릴 수 있는 존재를 찾는 일. 그런 사랑을 하는 일.


하긴 사랑에 일회용이 어디 있는가? 모든 사랑은 이런 떨림을 받아들여 함께 떨 때 이루어지지 않나. 그 기간이 길고 짧음은 중요하지 않다. 함께 떨 수 있는 존재, 그런 사랑이니, 앞에서 언급한 일회용 사랑이라는 말은 취소하자.


사랑은 모두 떨림이고, 떨림의 시간과 상관없이 모두 소중한, 아름다운 사랑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종처럼 길게 그 떨림이 울림이 되는 그런 사랑이면 더 좋겠다. 떨림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함께 더 길게 울리는, 떨리는 그런 사랑이면 좋겠다. 권혁웅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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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자본주의자 -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발견한 단순하고 완전한 삶
박혜윤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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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이라는 말에서 자본주의를 벗어난 삶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의 저자는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긍정한다.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삶을 살려면 여로모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사람이 원하는 삶은 행복한 삶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사는 삶. 즉 무엇을 해야지에 매여 자신의 온 힘을 쏟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편하게 지내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니 도시를 완전히 떠나지도 않는다.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시에 살지도 않는다. 나름 시골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컴퓨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이 생활한다. 불편하지 않단다.


왜냐하면 버려야지 하고 결심한 다음에 결행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레 살면서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즉 결심이 앞서고 그 결심을 실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자신들이 살면서 그냥 편한 방향으로 실행을 한다.


그런 행복이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버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시장없이 살기는 힘들지 않은가. 시장은 자본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이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산다. 왜? 필요하니까. 다만 이 책을 쓴 사람이 살 때 고려하고 있는 사항은 참조할 만하다.


물건을 살 때 자신에게 필요없어질 때 어떻게 할까를 생각한다고 한다. 쓸 때가 아니라 버릴 때, 마치 '메멘토 모리'라는 말처럼 그 물건이 내게서 떠나가야 할 때 어떻게 할까 하면 함부로 물건을 사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떠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내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숲속의 자본주의자라고 제목을 붙인 까닭이 바로 숲속에 방점을 두지 않고 둘 다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내 삶은 다른 사람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오죽하면 감옥에서 독방에 가두는 일이 강한 처벌이 되겠는가.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감옥에서도 그런데, 사회 생활에서야 말해 무엇하리.


그러니 이 책을 쓴 사람은 자신의 삶에 다른 사람의 삶을 연결짓는다. 다만 그 연결이 자신의 삶을 침해하지 않도록 하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침해하지 않도록 관계를 맺으면서.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기, 그냥 자신은 이런 삶이 좋고 편해서 살 뿐이다. 모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보여주기만 할 뿐. 선택은 어차피 개인이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책을 쓴 사람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있다. 사람 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행복이 있을테니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욕망을 파악하고 사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는 글쓴이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덩달아 편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을, 거창한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목표를 잡지 않아도 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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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 동서 미스터리 북스 4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강남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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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몇 있다. 사실 추리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서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코난 도일이 쓴 홈즈 시리즈는 어릴 적에 몇 권 읽었고, 르블랑이 쓴 루팡(또는 루팽) 시리즈도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아주 어렸을 때.


그리고 거의 읽지는 않았지만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애거서 크리스티였다. 이 작가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그때까지 번역된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모두 읽은 친구가 있었고...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도 살인사건이 주를 이루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이 있어서 결론은 범인이 잡히고 만다로 끝나는, 이미 결과를 알 수 있는, 그래서 추리의 과정을 좇아가는 재미로 읽어야 하는 소설인데,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에 선뜻 손에 잡지 않았던 소설들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처음부터는 아니고,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부분부터 봤는데... 어? 결과만으로 작품을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지니게 됐다. 


  소설을 찾아 읽어봐야지 했는데, 소설과 영화는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등장인물에서 차이가 있다. 역시 소설과 영화는 장르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형상화하는 인물도 약간씩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결말은 비슷하게 끝나는데, 영화의 결말이 더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둘 다 좋았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탐정 포아로의 내적 갈등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데, 영화에서는 포아로의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난다) 


  이 소설을 읽으면(또는 영화를 보면)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정의일까? 사적인 해결은 정의가 아닐까?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일은 정의가 아닐까? 정의 실현은 오로지 법을 통해서, 재판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할까? 그렇다면 재판은 과연 정의로울까? 우리나라 사법농단도 있었으니, 재판(사법)이 곧 정의라고 말하기도 참 그런데...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학창시절에 배운 내용이 생각났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 즉 행한대로 거두리라고 하는 법. 


가해자가 손에 상해를 입혔다면 가해자에게도 똑같이 손에 상해를 입도록 하는 법. 참 원시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법이 사적으로 지나치게 가해지는 보복을 막는 효율적인 법이었다니...


그렇다면 법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피해자가 받은 피해를 양적으로 계산해서 수치화해, 그 최대점을 넘지 않도록 판결하고 집행하는 일. 그렇다면 물리적인, 겉으로 표가 나는 일이야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받은 정신적인(심리적인) 고통은 어떻게 양적으로 나타내 결정을 하지? 아니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현재의 법으로 보면 살인죄에도 다양한 법 적용이 있다. 최대치가 사형일 뿐.(사형제도를 폐지한 나라도 많고,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으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말자)


피해자는 어쩌면 사형당하지 않고 풀려나는 가해자를 보면서 법이 미약하다고,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것도 증거불충분으로 나온다면? 이때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추리소설에서 이런 점을 생각하게 되다니...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살인을 당한 사람은 예전에 아이를 유괴해 죽였지만 풀려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죽인 사람들은? 그 아이, 그 가족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에게 죄가 있는가? 당신이 탐정이라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어떤 행동이 정의에 부합하는가?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물론 탐정 포아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한다. 그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 점이 좋은 소설이다. 법은 과연 만능인가? 법대로 하면 정의는 실현되는가? 그렇다고 살인자에게 살인으로 응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목숨을 목숨으로 갚게 하는 일이 정의로운가? 그런 질문도 하게 된다.


살인에 살인으로 대응한 사람들은 무죄인가? 그들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되는가? 아니면 그들에게도 똑같이 살인죄를 적용해야 하는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찾도록 한다. 물론 작가는 포아로를 통해 자신의 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작가의 답이고, 우리에게는 우리들의 답을 찾도록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문제 제기. 질문하는 책. 이렇게 질문을 머리 속에 남기는 소설과 영화는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단순히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만 매몰되지 않고, 결말을 통해서 우리라면 어떻게 결정할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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