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이어주는 표현을 만나게 된다. 그런 구절을 만나면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시의 내용이 아니라, 그 표현이 마음에 자리잡는다.


  가령 서정주 시 '푸르른 날'에 나오는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라는 표현... 단풍을 초록이 지쳤다고 표현할 수 있다니... 


  여기에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육사 시 '절정'에 나오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구절.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시 전체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구절때문에도 그 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말들이 나열될 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을 때, 이런 말을 어디서 찾아야 하지 할 때, 시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시가 이렇게 시인에게만 또 몇몇 비평가들에게만 통용되면 되는 존재일까 하는 생각. 시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시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시를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역할은 시인이 해야 한다.


시인, 그러니 시인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 또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알려준다. 시적 표현을 통해서. 그렇다면 시적 표현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몇 개의 징검다리가 있어야 한다.


징검다리 없이 강 건너편에 그냥 이것이 바로 시다라고 하면 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사람 몇 외에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강 건너에서 멀찍이 떨어져 시는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존재구나 하고 포기하게 된다. 그러면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문보영 시집을 산 이유는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집'이라는 제목이 있어서다. 김수영이 누군가? 시는 온몸으로 써 나가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 아닌가.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를 사람들에게 가져온 시인 아니던가. 그러니 그는 '폭포'를 쓰고 '풀'을 쓰고,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절규하지 않았는가. 


조그마한 일... 그래서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고.(인터넷을 찾아보면 적으냐와 작으냐가 혼재되어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 전집(시)에 보면 적으냐로 나와 있으니... 작다는 개념과 적다는 개념이 차이를 보이는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인은 언어를 통해 낯설게 하기를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시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았던 시인 아닌가. 그런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받았으면 이 시집 역시 무엇인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기대를 한다.


이 기대는 시인의 말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콘페니우르겐의 임신 기간은 / 사십 년으로 / 지구에서 가장 길다 그런데 / 콘페니우르겐의 평균수명이 / 이십칠 년인 것은 / 하나의 수수께끼다 (2017년 겨울 / 문보영)


콘페니우르겐... 동물이다. 임신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그런데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만들어낸 동물인데...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낸 동물인지 알 수가 없다. 시인의 말을 따라가보면 수명보다 긴 임신을 한다. 어떻게 출생을 하지? 조산? 그렇다면 콘페니우르겐이 '시'라면 모든 시는 자신의 수명 기간보다도 더 긴 세월을 지내다 사람들 곁으로 와야 하는데... 결국 모든 시는 '조산'이다. 그러니 그 '조산된' 시를 돌보고 보살펴서 성숙하게 하는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한다? 


40년을 지내야 온전하게 출생할 수 있는 콘페니우르겐이 멸종하지 않고 종족을 유지하려면 조산밖에는 없다. 조산한 콘페니우르겐이 죽지 않고 살아가게 하려면 다른 존재들이 보살펴야 한다. 그것도 기를 쓰고. 그만큼 시는 간단하지 않다. 어렵다. 살리기 어렵다. 그렇게 봐야 하나? 나, 참...


그래서 이 시집에 있는 '멀리서 온 책'을 생각한다. 그냥 내쳐버리고 싶은 생각. 하지만 아무리 내치려고 해도 없앨 수가 없다. 그렇게 꾸준히 살아남는다. 조산해서 도무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알게 되기까지 특별한 보살핌을 줘야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 '멀리서 온 책'을 보자. 그냥 이 시를 읽으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럼에도 왜 시들이 살아남는지, 마치 시인의 말에서 나온 '콘페니우르겐'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멀리서 온 책


  책을 펼치자 문장들이 이중 매듭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고 있다. 무의미한 움직임만을 수년간 반복하는, 바위에 깔린 벌레들처럼. 문장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주변을 신경 쓸 재간도 없이, 미래를 도모하지도 않고, 오직 한 자리에서 홈을 파며, 어쨌뜬, 바닥에 흔적을 내고, 그것을 위해 몸을 꼴 대로 꼬며 깊어지는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다.


  어린이는 책을 가져다준 어린이가 너무 멀리서 온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한다. 어린이는 이런 책은 필요치 않다. 어린이는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 고 외칠 수 있는 책이. 너무 멀리서 온 책은 세상에 없어도 된다고.


  멀리서 온 어린이는 모든 문장이 동일해 보이는, 똑같은 수준으로 몸을 비비 꼬고 있는 문장들 중 하나를 흰 손가락으로 콕 짚으며,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든다, 너는? 하고 묻는다. 그래, 이 문장은 다른 문장에 비해 더 오랜 기간 외롭게 매듭을 만들고 있으며 고유한 방식으로 몸을 꼬고 있는 것 같다, 고 어린이는 동조의 뜻을 가장한다.


  어린이와 멀리서 온 어린이는 저녁놀이 비치는 창가에서 함께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사이 석양빛이 몸을 꼬는 벌레들의 잿빛 줄을 붉게 적셨다. 둘은 무릎을 꼭 붙이고, 책을 들여다본다. 어린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책과 멀리서 온 어린이를 창밖으로 던진다.


  나무로 된 현관문을 잠근다. 더 잠글 것이 필요해 머릿속으로 몇 개의 문을 상상해 낸다. 문을 하나하나 잠근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의, 아무도 모르는 나무 그늘에 뜻 모를 바위가 숨 쉬고 있으며, 그 바위는, 셀 때마다 다리의 개수가 달라지는 검정 벌레들을 키운다. 어린이는 그것을 잊기 위해 더 많은 문을 닫는다. 두개골의 작은 틈 사이, 불편하게 나앉은 바위 위로 벌레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보영, 책기둥, 민음사. 2018년 4쇄. 134-135쪽


이상하게 시인의 말에 나오는 '콘페니우르겐'이 이 시에서 '멀리서 온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버리고 싶은, 그러나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이미 내 뇌속에 자리를 잡은, 그런 존재... '콘페니우르겐'이나 '멀리서 온 책'이나 모두 '시'로 바꾸어도 말이 성립된다. 


문보영 시집 [책기둥]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콘페니우르겐들'을 만나는 일도 한번쯤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아직까지 나는 이런 시를 이해하려고 하면 김수영 말처럼 '얼마큼 적으냐'는 한탄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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