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이상 포항으로 간다
정보라.최의택 지음 / 요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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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내 뜻과 무관하게 당하는 사고. 그 사고를 해결하기 위한 포항가는 길에서 두 사람이 겪는 우여곡절. 그런 우여곡절 속에 관계를 맺어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아닌가 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듯 속도감 있게 읽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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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기계에 종속된 삶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녹색평론을 읽으면 마음이 답답해질 때가 많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과연 녹색평론에서 주장한 내용이 얼마나 받아들여졌을까 하면.


  거창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 삶을 바꾸는 생활을 하자고, 그것이 지구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이라고.


  그런데 우리 삶을 바꾼다는 것, 내가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것이야말로 가장 거창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단지 제도를 바꾼다든지, 법을 정비한다든지 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생활 자체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거창하고 힘든 일인가. 가장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크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삶을 바꾸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나만 해서는 안 되지만, 나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민주주의. 또 지역자치. 공생. 환대. 


좋은 말이다. 이 좋은 말들이 현실에서 실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쿠팡' 사태 아닌가 하는데...


기업이 이윤을 위해서 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편리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또 수많은 정보들이 유출되었을 때 대책이 별로 없다는 것도 문제고. 이렇게 많은 것이 하나로 통합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정보의 집적은 커다란 위험을 부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앙집권 역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고. 이런 문제점들을 잘 지적해주는 것이 녹색평론인데...


이번 호에서는 삶을 바꾸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이 해온 노력이 실려 있는 글이 있는데 살펴볼 만하다.


여기에 우리 삶에서 필수적인 '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글도 좋았는데, (강우정, 기후위기와 물의 공공성) 우리가 쉽게 사서 마시는 생수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계기도 되었다.


녹색평론의 외침이 외침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책의 끝부분에 보면 독자의 소리나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보면 나만이라도 실천하자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되니,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모여 우리 삶을 바꾸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한편 한편의 글이 소중해서 찬찬히 곱씹으면서 읽고, 내 삶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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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12-23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녹색평론》에서 다루는 줄거리가 우리 삶에서 피어나려면, ‘녹색평론부터 서울을 떠나서 시골이나 멧골에 깃들’면 된다고 봅니다. 《녹색평론》은 ‘시골에서 손수짓기를 하는 사람’하고는 먼, ‘서울·큰고장에서 인문소양 있는 사람’한테 읽을거리로 그치는 틀에서 맴돈다고 느낍니다. 시골에서 나고자라서 시골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킬 만한 줄거리와 글감을 스스로 찾아내고 살펴서 담는다면, 이러한 글줄로 이 나라와 온누리를 바꿀 만할 테고요.

kinye91 2025-12-23 14:06   좋아요 0 | URL
‘녹색평론부터 서울을 떠나서 시골이나 멧골에 깃들’면 된다고 봅니다. 《녹색평론》은 ‘시골에서 손수짓기를 하는 사람’하고는 먼, ‘서울·큰고장에서 인문소양 있는 사람’한테 읽을거리로 그치는 틀에서 맴돈다고 느낍니다.‘는 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님의 말씀처럼 녹색평론이 주장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고,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녹색평론도 노력해야겠고, 우선 저부터라도 제 생활을 돌아보고 바꾸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yamoo 2025-12-23 16:04   좋아요 0 | URL
음...제가 파란놀 님에게 바라는 책이네요...시골에서 나고자라서 시골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킬 만한 줄거리와 글감을 스스로 찾아내고 살펴서 담는 책을 제발 내주셔요~~
 
제사를 부탁해 소설x만화 : 보이는 이야기
박서련 지음, 정영롱 만화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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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 제사. 엄격한 형식을 고수한다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일. 부모의 제사만이 아니라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를 제사 지낸다는 종가집 맏며느리.


잊을 만하면 제사가 돌아오지 않을까? 부모의 제사를 함께 모셔도 명절 두 번에 네 번의 제사가 되는데, 부모를 따로 모시면 명절 두 번에 여덟 번의 제사. 그러면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때는 잊을 만한 시간도 없다.


간소하게 지내면 괜찮겠지만 어디 그런가? 특히 종갓집에서는 더 심하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콩 심어라 팥 심어라 한다면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못 견딜 일이 된다. 얼마나 부담이 많이 되면 제사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곤 할까?


하지만 제사가 지니는 긍정적인 역할도 있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또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것이 제사라고 한다면 형식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살아 생전 본인이 좋아하던 음식 중심으로, 또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시간도 조정하고 한다면 제사를 고인에 대한 애도 표현으로, 즉 고인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부담이 아니라 고인과 관계 맺었던 사람들이 고인과 자신들의 마음을 잇는 시간으로 제사를 활용한다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도 제사는 여전히 힘든 일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제사를 대행하는 사람이 나온다. 집안일을 대행하듯이, 제사 역시 집안일 중 하나니까 대행을 할 수 있다. 주관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니까.


그런 설정, 지금 제사 대행업이 있는 줄은 모르겠는데, 음식은 해주는 업체가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직접 절까지는 아닐 테지만, 소설에서는 절까지도 하는 대행업을 하고 있다. 하긴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면야 뭐.


부정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 있겠지만, 제사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고, 이런 추세 속에서 가족들이 애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제사 대행업체를 통해 제사를 지내는 일도 생길 수 있겠다.


아이들 돌잔치, 부모님들 회갑잔치(요즘은 거의 하지 않지만 더 연세가 드시면 잔치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 팔순 또는 구순 잔치 등)와 각종 상조회를 보라. 많은 집안일이 대행으로 바뀌었지 않은가. 그러니 제사 역시 그렇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마음을 다해 제사를 치러주는 인물을 통해서 결국 제사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마음을 잇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앞부분이 '둘이 먹다 하나가'라는 박서련이 쓴 소설이고, 뒷부분이 '죽어도 모르는'이라는 정영롱이 그린 만화다. 소설은 제사 대행업을 하는 수현의 관점에서, 만화는 죽은 정서(이름을 바꾸기 전에는 영란)의 관점에서 전개가 된다. (소설에 나오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속담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같은 사건을 다른 두 화자가 서술하고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도 소설로 읽어도 좋고, 만화도 만화로만 봐도 좋다. 두 작품을 함께 보면 더욱 좋고. 물론 책의 순서대로 소설부터 읽어야 한다. 수현이 정서의 집으로 가고, 제사상을 차리는 장면까지가 소설이니까. 그 다음 부분이 만화에서 더 이어지니.


두 작가의 작업이 이렇게 잘 맞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설과 만화가 잘 연결이 된다. 그러면서 마음을 여는 장면을 만나면서 감동을 받게 된다. 제사 역시 그렇다. 제도와 형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애도하는 마음, 즉 마음을 잇는 일이라는 점을 소설과 만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여 작품은 제사의 문제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 죽은 사람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일, 그것은 또 산 사람들의 마음과도 잇는 일임을 생각하게 된다. 애도하고 추모하는 방식으로서의 제사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대행업체에 맡기든 본인들이 직접 하든지 간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제사가 되도록, 산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는 제사가 아니라 산 사람들의 마음도 풀어주는, 그래서 죽은 사람의 마음이 당연히 풀리는 그러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에서 더 좋은 것은 소설가와 만화가, 그리고 편집자가 이 작품을 위해서 주고받은 내용들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창작일지'라는 이름으로. 그것 역시 좋았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이.


짧지만 긴 울림을 주는 소설과 만화다. 좋았다. 이런 작품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 작품집 중 소설에 나오는 한 부분을 인용한다. 진정한 제사란 바로 이런 것. 화려하고 형식, 규격에 맞는 제사가 아니라. 하, 이런 제사. 누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제사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제사상 앞에 이부자리를 편 부부의 이야기다. 부부는 해도 지지 않은 초저녁에 상을 차리고 제사상을 받으실 시어미니 묘까지 산보를 다녀온다. 돌아온 후에는 상 앞에 자리를 갈고 잠깐 누웠다 다시 어머니 묘에 간다. 그렇게 날이 저물기도 전에 제사가 끝난다. 어느 해에 제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유식한 학자가 그 집 앞을 우연히 지나다 부부를 보고 무슨 짓이냐고 묻는다. 남편은 대답한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신 소원이, 내가 금슬 좋은 부부 사이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아내와 사이좋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마땅하고, 어머니는 눈이 어두워 밤길을 다니지 못하시니 모시러 갔다 다시 모셔다드리는 게 이치지요. 학자는 그들의 제사야말로 가장 훌륭한 제사임을 인정하고 만다. 

  제사란 그런 것이다. 결국은 마음이 으뜸이고 형식은 거들 뿐.'(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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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에는 없다.'


  '거기'는 어디인가? 또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제목이 된 시도 없다. 첫시가 '거기에서'다. 그렇다면 '거기'가 어디인지는 첫시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런데 알 수가 없다. 아, 이런...


  첫시에 나오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 하나의 죽음이 아니라 두 죽음이다. 두 죽음이 시집에 걸쳐 나온다. 아이의 죽음과 트럭운전사(?로 추정되는 인물)의 죽음. 


그런데 죽은 사람과 눈을 맞춘다는 말이 나온다. 죽은 사람들과의 눈맞춤. 그러나 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역시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고.


'거기'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으로 바꾸면 '거기'는 '과거'다. 언제? 그런 궁금증을 자아낸다. 시집을 계속 읽어간다. '거기'를 찾는 여정이다.


 읽을수록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연결이 된다. 죽음들이 나오고, 죽음을 바라보는 화자의 모습이 나오니... 여기에 시들의 제목에 '공간'이 들어간다. '공간'이라는 말에 시간을 더해서 '장소'라고 해도 좋겠다.


이 장소들은 시집의 화자가 나고 자라고 지내는 시공간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렇게 시는 그런 장소들에 화자를 데려다 놓는다. 이렇게 찾으면 거기는 두 곳으로 나뉜다. 과거의 거기는 전라도 지방이다. 현재의 거기는 서울 근교다.('내가 사는 수도권에'(84쪽) -'신도시' 중에서) 전라도 지방 중에서도 지명이 나오는데 '비아동'이 시에 호명되고 있다. 광주다. '마을에서'란 시와 '신도시에서'란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비아동, 하남공단, 수완지구.


'광주'가 호명된다. 5공 청문회 이야기도 시에 있다. 그렇다면 '거기'는 광주라고 할 수 있다. 이 광주에 없는 것이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그냥 추측을 하면 그때에 죽었던 사람이 이제는 거기에 없다고 해야 하나? 왜, 그는 나를 따라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함께 만나기 때문.


그렇다면 과거가 현재와 함께 존재하면서 현재의 삶 속으로 계속 들어온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러므로 거기에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여기에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 시집은 거기에서 떠나온 죽음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삶이 펼쳐진다. 거의 시간 순서로 읽을 수 있는, 화자의 어린시절부터 청소년, 청년,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과정이 모두 '~에서'라는 장소와 연결되어 시집을 구성한다.


그러니 '거기에는 없다'는 말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거기에 없는 존재는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과거와 현재의 공존. 거기와 여기의 공존. 이 시집은 그걸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집을 이해하는데 시집의ㅡ시인의 에세이 '거기에서 만난'이 도움이 된다. 이 글에서 두 죽음이 나온다. 광주민주화 운동 때 죽은 아이와 교통사고로 죽은 트럭운전사. 거의 동시대라고 할 수 있는 두 죽음. 시대는 다르지만 거기에서 나와 만난, 또는 나를 키운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와 5공청문회에 나온 사람들-전두환을 비롯한 세력이 아니라 당시 광주에 있던 사람들-, 또 자신의 아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럼 이제 거기에 그들은 없다. 시인의 아이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거기에 살고 있지 않으니 (화자가 살고 있는 수도권 도시는 거기가 아니다. 여기서 확정짓자. 거기는 광주다) 논외로 한다면, 시인의 에세이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제 거기에 없다. 그들은 없지만 기록은 남아 있다.


'트럭도 아이도 / 사라진 후였다'('마을에서' 중에서. 14쪽)고 하고 있으니, 거기에 그들은 없다. 그렇지만 5공청문회나 다른 일들을 통해서 또 화자의 기억 속에서 거기에 그들은 계속 된다. 이렇게 시인은 그들이 없지 않음을, 자신의 삶 속에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다만 /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 쓰면 쓸수록 어디까지가 나의 이야기인지 / 죽은 아이인지...'('신도시에서' 중 85쪽)


이 표현을 통해서 그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하여 거기에 있던 죽음이 나와 함께했기에, 거기에 없음을 첫시를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서


뒤집힌 차에 나는 

매달려 있었다

너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너는 뒤돌아 갔다

나는 너의 등에 업히기로 했다 등에서

등으로 어깨에서

어깨로 정수리에서

정수리로 너를 만나고 스치는 이들에게로


서효인, 거기에는 없다. 현대문학. 2022년. 9쪽.


이렇게 시집에 실린 시들을 통해 '거기'에서 떠나 화자가 만나는 '그들'을 찾게 되는데... 우리의 삶은 이렇게 과거의 죽음들을 딛고 서 있음을, 그것을 잊으면 안 됨을 시집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럼에도 '거기'가 어디고 '무엇이' 없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시집을 읽으면서 각자 찾을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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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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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主客顚倒)'와 '운칠기삼(運七技三)'


우리가 좀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개발한 기술이 오히려 우리를 종속시키고 있음을 개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기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미 개발된 기술,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또한 기술은 이상하게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개발했지만, 한번 개발이 되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객체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기술이 계속 발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그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 퇴보하지는 않는다. 특히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킨다면 더더욱.


현대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을 개발한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을 보조하기 위해서 일 텐데... 오히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 아닌가.


현대 기술을 대표하는 것이 스마트폰이라고 하자.(인공지능은 지금 논외로 하고) 그런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 특정 연령 때까지는 금지한다는 법안을 제출한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도 학교에서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는 법을 제정한다고 하니까.


(제정이 되었나? 내년부터 학교에서 실시한다는 말이 있으니...그런데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업 중에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 아닌가.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수업 중이 아닌 다른 시간에는 사용해도 된다는 말인지.. 아니면 학교에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스마트폰을 쓸 수 없다는 말인지. 학교에 따라 교칙을 정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학생들에게 문제라면 성인들에게는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바로 시도때도 없이 연결되는 현실 때문 아닌가.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스마트폰으로 연결이 되는 것.


즉 장소성을 잃어버리고 대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우리 육체의 물질성이 약화되는 것. 또한 자신이 있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스마트폰 속의 공간이, 만남이 중요해지는 것. 


이는 바로 관계의 악화로 나타나고, 어디서 언제든 스마트폰을 하고 있으면 그것 자체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래저래 스마트폰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었는데... 이 스마트폰으로 경험하는 온갖 사이버 세상들을 스마트폰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대로 우리 인간의 경험을 없애는 데 스마트폰만큼 큰 역할을 하는 존재는 없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7장에 걸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미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는 현상도 있어서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런 주장이 아님에도 우리는 스마트폰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그 세계가 주는 편리함이 바로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는 주체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구현되는 기술의 세계가 주체인 것이다.


우리는 객체로 전락했다. 아니라고? 자신의 생활을 살펴보자. 운전을 하는 성인이라면 아마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하이패스를 장착하지 않은 차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빠름과 편리함. 최신 내비게이션으로 가장 빠른 길을 찾아 운전하는데, 그것을 누가 찾는가? 운전자? 아니다. 내비게이션이다.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곳으로 간다. 주객전도다.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왜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겠는가. 스마트폰을 허용하는 학교의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눈을 준 채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운동장에서 노는 극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이마저도 줄고 있는 현실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사회적관계서비스망을 이용하고 있다. 게다가 학습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시간을 갖기 싫어한다. 검색하면 금방 나오니까. 굳이 외울 필요도 없다. 지식을 암기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다림이 사라지고,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는 사회적관계서비스망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 많이 연결되는 현실. 그런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하는 경험은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로 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삶에서 만나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불확실성, 우연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두렵게 한다. 그래서 없애야 할 것으로 인식하고 기술을 통해서 이를 없애려 한다.


하지만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삶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 '운칠기삼' 아닌가 한다. 우리가 계획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30%정도라면,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이 70%라는 것. 그 70%가 바로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도 있는데, 기술시대에 우리는 그런 70%의 우연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 (운이라고 하지만 이 운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불확실한 삶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괴롭고 슬프고 힘들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주변 존재들과 관계맺으면서 자신이 살아갈 길들을 조심스레 나아가게 된다. 


이런 불확실성을 다 없앴을 때 과연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까?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삶이,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기술이 우리를 객체의 자리로 밀어넣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더 견뎌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기술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희망사항이다.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면 기술의 문제점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그런데 기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안을 마련하려면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편리와 빠름에 익숙해진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기술이 우리에게 주체로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만큼 힘든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기술을 기업들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고, 빠름과 편리함에 익숙해진 사람들 역시 그러한 삶을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미덕을 되찾고 가장 뿌리 깊은 인간의 경험을 멸종의 위기에서 구하려면 기술 예찬론자들이 제안하는 극단적인 변혁 프로젝트에 기꺼이 한계를 두어야 한다. 혁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한계 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육신이 있는, 기발하고 모순적이며 회복력 있고 창의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330-331쪽)는 말이 헛된 울림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봐야 한다.


거대한 기술관련 기업들에, 그러한 기업들을 지원하는 정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인간들의 관계가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은 이미 역사가 보여주고 있으니... 참.


우리의 삶이 '운칠기삼'이라는 것, 그래서 기술이 우리의 주체가 되는 '주객전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책을 학교에서부터 읽고 토론하게 하면 어떨까? 아래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니까...기후재앙에 대한 대응을 촉구하는 청소년들의 움직임 일어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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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19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질의 작품을 읽으면서 놀라운게....20세기 초에 이미 무질은 경혐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리뷰를 보니 그제 본 내용이 떠오르네요..ㅎㅎ

kinye91 2025-12-19 13:56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좋은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기도, 시대를 앞서가기도 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