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시선집을 읽다.


개천절, 우리 민족의 탄생을 알리는 날이 있는 달. 그렇게 하나의 민족으로 수천 년을 한반도에서 지내왔다. 하나의 민족, 이것이 꼭 하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민족이라는 개념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구성원이 된다. 그러니 하나의 민족이라는 말을 피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지 말자. 하나 속에 여럿이 속해 있다.


오히려 하나의 민족이란 피의 순수성이 아니라 서로 어울리면서 공통의 무엇을 지니고 살아온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혈통보다도 문화, 함께함 등등이 어우러진 공동체. 그래서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나의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탄압하고 쫓아낼 권리가 있는가?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배타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좀더 힘센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쫓아내면 안 된다. 민족끼리 이 작은 지구에서,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불리는 이 지구에서 어울리면서 평화롭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때 민족은 공동체로서 제대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배워왔다. 다른 민족을 침략한 경우가 거의 없다고... 그런 평화 민족이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런 우리 민족과 달리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이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억압을 멈추지 않고 있고, 세계는 그러한 억압을 멈추게 하는데 실패하고 있는데...


수천 년을 살아온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간신히 자치지구라고 해서 가자와 서안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도 가자지구는 봉쇄되어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가자에서 살아가기 더 힘들어진 사람들. 계속 죽어나가는 사람들.


그런 가자를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다른 민족, 자기들 말로는 선택받았다는 민족, 그 선택받았다는 민족이 수천 년 동안 다른 민족들에게 얼마나 탄압을 받아왔는지, 그런 역사적 경험을 한 민족이, 세상에 내가 당한 것 만큼 보복하겠다는 심정인지, 원.


가자지구에 구호물품을 전달하려는 사람, 단체들이 타고 있는 배를 나포해 사람들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떴다.


<신문기사 링크 > 또 막힌 가자구호선단…이스라엘, 툰베리 등 500명 연행


인도적 차원에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도 막는 민족, 그런 민족을 제재할 수 없는 세계. 이런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그들이 가자지구에 들어가려 노력하고, 가자지구의 참상을 알리고 있으니.


이때 팔레스타인을 응원하고 돕겠다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평화를 위한 움직임. 이는 이스라엘이 미워서가 아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평화를 깨고 있기 때문. 강자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정책에 따라서 가자지구에 평화가 오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는데... 열쇠를 쥐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세계는 여전히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고.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와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번역해서 펴낸 시집. [팔레스타인 시선집] 읽으면 슬프다. 마치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저항시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


번역해서 우리에게 팔레스타인 시들을 알려준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개천절에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오기를...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야말로 '푸른 지구'가 되기를... 개천절을 맞이하여 바라는 마음.


이 책에 실린 짧은 시. 그러나 마음에 파고드는 그런 시. 아아, 이런 바람이...


가자의 개구쟁이들아


가자의 개구쟁이들아

창가 아래서 비명을 질러 대

날 한시도 가만두지 않던 녀석들아.

우당탕탕 소란으로

매일 아침을 채우던 녀석들아.

내 화병을 깨 먹고

발코니의 홀로 핀 꽃을 슬쩍한 녀석들아.

돌아와,

마음껏 비명을 내지르고

화병이란 화병은 다 깨부수고

꽃이란 꽃은 다 슬쩍 챙겨가렴.

돌아와...

돌아만 와다오...


할레드 주마. 류송 번역.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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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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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을 보면 다윈을 떠올린다. 다윈이 진화론을 펼치게 만든 곳. 갈라파고스. 학교 다닐 때 핀치 새에 관하여 배운 적이 있다. 고립된 섬에서 다르게 진화한 새. 이 새를 통해 진화의 고리를 발견했다고. 


그럼 소설 제목이 갈라파고스면 뭘까? 이 섬에서 일어나는 일? 진화와 관련 있는 사건?


보니것의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풍자에 놀라기도 하는데, 이번에 그는 인간의 뇌가 일으키는 사건을 문제삼고 있다. 지나치게 큰 뇌라고 하는데, 이때 지나치게 크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조차도 위협할 만큼 인간을 지배하는 뇌라는 말로 해석하면 된다.


이 소설에서 갈라파고스로 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여행을 기획한 사람들도 있고, 화려한 유람선에 (군함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부유하거나 유명한 사람들을 태우고 갈라파고스를 여행하려는 계획.


그러나 세계는 인간의 통제불가능한 뇌로 인해 위험에 빠지게 되고, 원인 모를 질병으로 대다수의 사람이 불임이 된다. 여기에 경제난으로 세계는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하여 여행이 취소되고 폭동의 혼란 속에서 우연찮게 배에 탄 사람들이 갈라파고스 제도의 한 섬인 산타로살리아 섬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이제 이들은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된다. 새로운 인류로 진화하게 된다.


다윈이 갈라파고스에서 핀치 새를 보고 진화론을 생각했음에 소설은 갈라파고스의 한 섬인 산타로살리아 섬에 사람들을 떨쳐두게 된다. 남자 하나와 여자 여럿. 그리고 이들은 다시 대륙으로 나가지 못하는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니... 여기서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소설에서 보니것은 인류는 손이 퇴화하고 지느러미가 발달한 거의 어류와 비슷한 종으로 진화한다고 말하고 있다. 백만 년이 지난 후에 인류의 뇌는 아주 작아지고 손은 없어지고, 바다에 자신들의 생명을 맡기게 되는 종이 되는 것.


이런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이끌어가지 않는다. 백만 년 후라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인류가 이미 그렇게 변했다는 것을 유령이 된 서술자를 통해 말하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종횡무진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인류가 인류를 파멸에 이르는 무기들을 개발했고, 그것들이 우연히 사용될 수 있음을, 인류의 파멸이 어떤 큰 결심과 결정적인 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연찮게 일어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가 인류를 파멸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뇌가 하는 역할이고, 이러한 뇌를 잘못 사용하는 인간들이 있음을 냉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하여 그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쓰는 말을 이 소설에서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제5도살장]에서는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을 쓰고 있다면 이 소설에서는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그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제목은 아니었잖아.'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다른 지식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예로 들고 있다. 이는 그가 과학기술이 위험하고, 인류가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반전 사상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를 서술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해병대 출신의 서술자. 그는 스웨덴으로 망명해 배를 만들다 죽는다. 그리고 유령이 되어 인류가 파멸하고 새로운 인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백만 년을 통해 지켜본다.


이렇게 인류의 파멸과 새로운 인류로의 진화를 다루고 있지만 이 소설은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다. 가볍게 웃음을 유발하면서 우리를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이 풍자의 힘이다.


보니것 특유의 풍자. 반전 사상, 인류를 위협하는 과학기술 만능주의, 잘못된 지도자의 위험성 등을 날카로운 풍자, 그러나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웃음으로써 잘 비판하고 있다.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 '백만 년 전, 사람이 하던 일을 최대한 많이 기계에게 넘기려는 그 이해하기 힘든 열의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뇌가 전혀 쓸모없다고 다시 한번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49쪽)라는 말.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일을 모두(그렇다. 많이가 아니라 모두다) 넘기려고 하고 있다. 하다못해 인간의 독특한 영역이라는 예술까지도 넘기려 하고 있으니, 보니것이 오래 전에 비판한 모습, 우리의 뇌를 이렇게 스스로 쓸모없다고 인정하는 꼴이 아니겠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이런 뇌를 가진 인간들이 능력 없고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택하는 모습. 그것을 갈라파고스에 갈 선장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으니...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적용이 되는 말이다.


소설 속의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대로 가면 인류는 서로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반전, 평화주의자가 된 것도 그러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인데, 서술자 역시 베트남 전쟁을 겪은 인물로 설정해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인데...


그가 소설에서 '나는 이제 백만 년 전 내가 살았던 시대를 '바람직한 괴물들의 시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 시대를 살던 괴물 같은 인간들 대부분이 몸보다는 인격 면에서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이었기 때문이다'(94쪽)고 하고 있는데,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1986년이다. 과연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더 나아졌는가? 작가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한 때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 속처럼은 아니겠지만 인류 역시 파멸의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갈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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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한 말들 - 차별에서 고통까지, “어쩌라고”가 삼킨 것들
오찬호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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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인권, 공정, 연대.


참 좋은 말이다. 누구나 쓰는 말이고, 자신은 이것을 잘 지킨다고, 실천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


이 말들에서 하나의 연관 관계를 찾는다. 굳이 찾아야?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관통하는 네 단어를 고르라면 이 넷이기 때문에, 이 넷이 제목이 된 '납작한 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납작한 말들이라는 것은 입체적인 것을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적용을 하면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사람을 말을 통해서 하나로 규정해버린다는 뜻으로 쓸 수 있다.


하나로 규정된다는 것, 남에게 규정당하는 사람은 주로 배제의 대상이 되거나 무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권이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유, 인권, 공정, 연대를 끌어오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말들은 납작하게 눌려서는 안 되는 말이다. 이 말들은 우리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함께 사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말들이다. 아니, 말을 넘어서는 실천이다.


저자는 그 점을 이 책을 통해 계속 말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이 말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쓰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이 말들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자고. 그래서 나만이 아니라 남도 판단할 수 있는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눈 앞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자고. 그것이 성숙한 사회고 문화 사회라고. 다양한 사례를 들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유, 인권, 공정, 연대에는 '관계'라는 공통점이 있다. 홀로가 아니라 관계다. 자유는 홀로와 연관이 깊을 것 같지만 아니다.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면 자유란 말조차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숨쉬는 것이 당연할 때 공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듯이.


그래서 자유란 말을 쓰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관계다. '자유는 '없는 자'만이 느낀다'(88쪽)고 했다. 없는 자가 있으면 있는 자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있는 자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자가 '자유, 자유'한다. 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혐오할 자유, 착취할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혐오고 착취다. 그것을 착각하면 안 된다. 따라서 '관계'를 망각하고 내뱉는 자유라는 말은 '자유'가 아니다.


인권 역시 마찬가지다. 인권은 상대적이 아니다. 절대적이다. 하지만 아직도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여러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인권 역시 '관계'에 해당한다. 이 관계들을 통해서 인권 개념도 다르게 쓰인다. 그러면 안 된다. 


'공정'이야 당연히 홀로가 아닌 상대를 전제하고서 하는 말인데, 이 공정을 시험으로 정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시험의 결과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공정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관계가 개입되어 있는지, 시험을 잘 본 것이 과연 나만의 능력일까? 시험 성적의 결과는 남과 관계없는 나만의 것일까? 아니다. 이 시험 결과에는 수 년에 걸친 관계들이 걸쳐 있다. 사회, 문화, 경제, 여기에 대인관계까지. 그러니 공정은 관계일 수밖에 없다. 내 결과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연결된 결과라는 것.


그러니 우리(이때 '우리'는 편가르기 하는, 내 편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내 편을 뜻하는 우리는 연대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동맹일 뿐이다. 이는 연대가 아니라 배제다. 배제를 통한 자신들의 연대라고 해야 하나. 그런 관계에는 연대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 그건 담합이다.)는 연대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바꾸기 위해서는 홀로가 아니라 함께여야 하기 때문에. 이때 연대는 다른 존재를 동등하게 여기는 동등한 관계의,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행위를 하기 위한 관계맺기이다. 이런 연대들이 있어야 사회가 변한다.


이렇게 이 책은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고 그들을 노력이 부족했다고, 또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사회를 돌아보고, 함께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납작한 말들이 판치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또한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자신도 납작한 말을 쓰고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자고, 그러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하여 저자의 말로 글을 맺는다. 이 말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좋은 사회란, 바늘구멍을 통과한 '누구에게만' 주목하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바늘구멍을 넓힐 지혜와 한쪽을 개천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 연대를 갖추는 동시에, 설사 개천일지라도 그게 개인의 굴레가 되지 않도록 편견을 깨야만 가능하다.'(188-189쪽)


'좋은 사회란 어떤 개인이 대단한 결심 없이 평범하게 살아도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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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김훈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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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수필집이다. 1948년에 태어났다고 하니 70을 훌쩍 넘어 곧 80이 되는 나이다. 예전에 60이 되면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귀가 순해진다고... 그리고 70을 고희(古稀)라고 해서, 귀한 나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70이면 노인이라고 명함 내밀기도 그렇다. 80넘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90에 고종명해도 좀 이른 나이라는 소리를 듣는 시대가 되었다. 8899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젠 100세 시대다. 그런 시대에 60이나 70은 청춘이다. 그래야 한다고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70-80대의 몸이 이렇게 많은 인구를 차지한 적은 최근의 일이다.


몸은 아직 예전의 상태를 이겨내지 못하니, 정신은 말짱한데, 몸은 여기저기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온다. 그렇다. 확실히 나이를 먹은 것이다. 몸이 그것을 일깨워준다. 아마 김훈도 그러리라.


이 책의 앞부분에서 자신이 아끼던 등산장비를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이야기가 있으니... 또한 병원에 가는 이야기, 친구들의 부음을 듣고 문상을 가는 이야기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오랜 이야기, 6.25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이 분이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이듦. 지혜로워짐. 나이든 사람의 말을 흘려듣지 말라고 했는데, 그만큼 살아오면서 몸으로 겪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나이쯤이면 말보다는 귀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순(耳順)이라는 말, 귀가 순해진다는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자신의 잣대로 구분하여 듣지 않는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줄 수 있는 귀를 지녔다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자신의 틀에 가두지 않고 그 사람 자체로 보고 듣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레 남과의 관계 정립에서 지혜로워진다. 또한 특정 경계에 매어 있기 보다는 경계를 허물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그것이 어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데... 요즘은 60-70대에도 어른스럽지 못한 나이든 사람이 많으니... 특히 정치권을 보라. 이들 대부분은 이순(耳順)인데도 귀가 순하기는커녕, 오히려 귀가 더 사나워졌다.


자신의 잣대를 굳건하게 지키고, 자기 틀을 절대로 깨지 않으려 하며, 남의 말도 자신의 틀에 끼워맞추는 듣기를 하는 경우, 그리고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물리적 시간이 몸을 채우고는 있으나, 현대 의학의 힘으로 과거 중년의 몸을 지니고, 정신은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필을 읽는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떤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면 읽으면서 그 선입견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으니까.


김훈이 한 이 말... 


'나는 공적 개방성을 갖춘 글 안에 많은 독자들을 맞아들이려는 소망을 갖지 못한다. 나는 나의 사적 내밀성의 순정으로 개별적 독자와 사귀고, 그 사귐으로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소망한다. 글을 써서 세상에 말을 걸 때 나의 독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2인칭(너)이다.' (331쪽)


그렇다. 이 책은 김훈이 내게 건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는다. 물론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김훈은 내 앞에 없으므로. 하지만 일방적이지는 않다. 내 앞에 없는 김훈에게 말을 건네면서 읽을 수 있으므로.


이렇게 나와 작가의 소통을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수필이다. 이런 수필을 읽을 때는 자신만의 틀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틀을 내려놓고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왜 그런지 생각해 보고. 속으로 반박도 해보고. 또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읽다보면 귀가 순해진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므로. 나 홀로만 세상에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홀로들이 모여 함께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므로. 


김훈의 사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 그러한 일들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데... 순한 귀를 갖기 힘들게 하는 상대를 어떻게든 추락시키려는 언어들.


그런 언어들이 판치는 사회는 견디기 힘든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이런 책을 읽으면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김훈이라는 작가가 '말-언어'에 대해서 얼마나 고심하고 고민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하는지 알아가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말,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말. 소통이 아니라 불통의 말. 그런 말들이 넘쳐나는 현실은 우리가 만들지 말아야 한다. 김훈의 이 말,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명화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창궐입니다. 지금, 언어는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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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헌책방에 간다. 알라딘에서 운영하는 헌책방을 중고서점이라고 하는데, 나에겐 중고서점이라는 말보다는 헌책방이라는 말이 더 정감있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의 손때가 묻은, 누군가가 한번은 읽은, 그런 사람을 거쳐서 다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결코 읽기를 마치지 않는, 계속 돌고돌아 읽어야 하는 그런 책들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곳.


  '헌'이라는 말이 낡았다는 말이 아니라, 내게는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친'이라는 뜻을,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준'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헌책방에 가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너무도 빨리 절판이 되고 품절이 되는 이 시대에, 조금 오래 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헌책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헌책방에서 시집이 꽂혀있는 서가를 훑어보다가 민영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어, 민영 시인에게 이런 시집이 있었나? 아니, 한길사에서 시집을 냈다고? 하는 의문. 반가움. 고민도 없이 손에 들었다. 


시들이 난해하지 않다. 시인이 50대 후반 들어 쓴 시들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과거 이야기도 실려 있고, 인디언들을 보고 난 마음을 담은 시들도 있고,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은 시들도 있다.


그 중에 제목이 된 시 '바람 부는 날'을 본다.


바람 부는 날


나무에 

물 오르는 것 보며

꽃 핀다

꽃 핀다 하는 사이에

어느덧 꽃은 피고,


가지에 

바람 부는 것 보며

꽃 진다

꽃 진다 하는 사이에

어느덧 꽃은 졌네.


소용돌이치는 탁류의 세월이여!


이마 위에 흩어진

서리 묻은 머리카락 걷어올리며

걷어올리며 애태우는

이 새벽,


꽃피는 것 애달파라

꽃지는 것 애달파라!


민영, 바람 부는 날. 한길사. 1991년. 11-12쪽



우리나라 현대사 탁류에 비교할 수 있다. 정말 거칠게 빠르게 험하게 흘러온 역사. 그 탁류에서 중심을 잡으며 살아온 사람들.


탁류를 맑은 물로 바꾸어간 사람들.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세월은 흘렸고,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다. 피고 지고의 의미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피고지고의 반복으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으니. 


이렇게 되기까지 지내온 세월에, 피었다 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애달플 수밖에 없다. 바람 부는 가을 날 민영 시집을 읽으며 지나온 세월을 생각한다. 최근까지도 우리는 이런 탁류의 세월을 견뎌왔던가. 아니, 이젠 탁류의 세월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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