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위의 소설들 - 소설과 영화 사이 사이 시리즈 5
송기정 지음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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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소설의 세기였고, 한 때는 영화의 세기였다. 소설이 많이 퇴조해서, 문자언어의 쇠퇴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소설은 문학 장르에서 대표적인 장르로 군림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영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소설을 축출해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텔레비전의 등장이 영화를 몰아내지 못했듯이 영화 역시 소설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요즘에는영화가 소설을 살려주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나온 영화와 소설의 관계만 보더라도, 박범신의 소설 "은교"는 영화로 만들어진 다음에 더 유명해졌으며,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영화로 만들어진 다음에더 유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영화가 소설의 판매를 촉진하는 경우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소설과 영화가 내용이 똑같지는 않더라도(사실 똑같으면 안된다. 영화나 소설이나 둘 다 서사장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표현방식에는 확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다가 영화를 망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바란다) 영화를 본 사람은 소설을 읽고 싶어 하며, 소설을 먼저 읽은 사람은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어떻게 변형되어 표현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테고, 나라면 저렇게 표현하지 않았을텐데, 또는 와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기회로 삼고 싶은 욕구도 있을테니 말이다.

 

하여 최근에는 영화와 소설이 서로 넘나들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추세를 기반으로 영화와 소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연구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서사장르라는 공통점에서 시작하여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소설은 설명이나 묘사가 충분히 작품을 이끌어간다면, 영화는 대사나 인물의 표정, 행동으로 작품을 이끌어나간다든지, 그런 차이에서 작품이 어떻게 변형이 되는지, 소설이 어떻게 영화로 창조적 탄생을 하는지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결과물이 책으로 나오는데... 이 책도 그 중의 하나다.

 

1부는 프랑스 소설을 중심으로 영화로 표현된 경우, 소설이 영화에 어떻게 변용되어 나타나는지, 또 같은 영화라고 하여도 감독에 따라서 나타나는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있다.

 

특히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라는 소설이 영화로 많이 창작되었는데, 그 중에서 외국영화 두 편과 우리나라 영화 "스캔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영화와 소설의 차이, 그리고 비슷한 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위험한 관계"란 소설이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세계 각국에서, 또 시대를 넘어서 영화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듯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담은 소설은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겠다.

 

즉, 소설은 소설로서 끝나지 않고 다른 장르로 변형, 변용되어 자신의 존재를 계속 확대재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면 특수한 경우를 통해서 인간 삶의 보편적인 면을 포착하고 표현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이청준의 소설을 예로 들고 있다. 이청준의 소설이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이어도","서편제","벌레 이야기"를 들고 있다.

 

이 중에 "벌레 이야기"가 "밀양"이라는 제목으로 바뀐 것 말고는 모두 이청준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여 영화를 만들어내었으며, 각 영화는 감독의 표현방식에 따라 조금씩 소설과 다른 모습을 지닌다고 한다.

 

물론 소설과 영화가 똑같을 수 없고, 또 똑같아서도 안된다. 하여 영화는 소설의 주제의식을 빌려온다든지, 인물들을 빌려온다든지, 갈등 상황을 빌려온다든지 하지만, 표현방식에서는 영화 장르의 특성과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살려 창조적 변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끔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려다 실패한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영화감독은 소설을 기반으로 하지만 영화라는 토대 위에 서 있기에 영화라는 장르를 늘 의식하면서 소설을 변형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소설도 살고 영화도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나라 소설인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잘 설명해내고 있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지금. 소설은 영화에 많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런 이야기 기러들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재구성, 창조적인 표현... 그것이 바로 소설과 영화의 관계가 아닌가 한다.

 

이런 창조적인 관계맺음이 잘 되었을 때 영화와 소설은 서로 상생하는 관계로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이 책에 예를 든 "서편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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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는 철학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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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철학이 없어." 또는 "그 사람은 철학이 있어." 또는 "그 정책에는 철학이 없어." 또는 "그 정책에는 철학이 있어."

 

흔히 하는 말이다. 여기서 쓰이는 철학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는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일관성으로, 어떤 경우에는 진리로 쓰이기도 한다.

 

일관성이나 진리, 같지 않을 것 같은 용어가 한 단어에서 쓰이는 것은 그만큼 철학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뜻이 단순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일관성이란 자신이 생각이나 행동을 변함없이 꾸준히 유지한다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무엇이 없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그것을 신념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신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옳다는 믿음에서 오지 않을까? 옳다는 믿음으 어디에서 오는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해보면 결국 일관성은 진리와 연결이 된다.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믿기에 일관성을 지니고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철학은 진리의 문제가 되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의식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남에 대한 질문도 하게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질문도 하게 된다.

 

왜? 왜? 어떻게? 어떻게?

 

그러한 질문들이 앎으로 나아가고 앎은 다시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앎과 행동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알고도 행하지 않을 때 그를 철학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으니 말이다.

 

참 별거 아닌 거 같은 질문이 별거로 존재하게 되고, 누구나 질문하는 문제가 특정한 사람만이 질문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우리 교육이 그렇다. 도대체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던가? 아니 철학을 가르치려고 했던가?

 

철학이 우리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 교육에서 철학을 너무도 홀대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어쩌면 철학을 홀대했다고 하기보다는 철학을 너무도 위대한 그 무엇으로 인식해서 감히 가르치고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철학은 특정한 어떤 뛰어난 사람들만이 하는 학문으로.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갈까? 도대체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를 늘 고민한다. 이것이 철학이다. 좋은 삶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일테고, 그러한 진리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철학을 서양에 국한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동서양의 모든 철학을 아우르는 것은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하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동양철학에 대한 작업, 이슬람 철학에 대한 작업은 다른 사람들이 할 몫이라고 이해하면 이 책은 유럽 중심의 철학에 대해서 명료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책이다.

 

총 스무 명의 철학자가 나온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크레티우스, 스토아학파,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몽테뉴,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테르, 디드로, 루소, 흄, 칸트, 헤겔, 토크빌, 마르크스, 니체

 

이 중에 마키아벨리와 토크빌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평소에도 철학자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고, 이 둘도 이 책을 읽어보면 왜 철학자로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철학적 내용은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 언급은 삼가하고...

 

그들의 생애와 철학을 연결지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그를 알기 위한 책 소개와 그와 연결되는 다음 철학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책을 더 쉽게 읽게 하고 있다.

 

철학.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때 비록 서양철학자에 국한되었지만 그들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안다면 지금 여기서의 우리 고민을 우리 스스로 해결하는데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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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사회문화적 확장과 변용 - 텍스트와 이미지에서 문화교육으로 문화산업총서 4
김영순 지음 / 북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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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참 번역하기 힘든 말이다. 그냥 이야기하기로 하기도 모호하고.

 

하지만, 이야기가 있는 그 무엇, 또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 용어가 스토리텔링인데,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간, 단편적인 지식에, 단편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어서, 전체를 보기 힘들었고, 또한 이야기가 인간 삶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알게모르게 무시하고 지내왔던 시절이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니(아직도 절대 빈곤층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 전체적인 평균으로 보면... 이 평균이라는 것이 참...)이제는 문화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욕구, 그 중에서도 무언가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스토리텔링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싶은데, 이것을 아이들 학습에 이용하기까지 하니, 우리나라는 무언가 하나 유행하면 참...

 

스토리텔링에 대한 장단점을 논하기에 앞서, 아직 스토리텔링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그래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이는 게임에서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어떤 이는 영화나 만화 같은 예술에서, 어떤 이는 수학이나 과학 같은 학문에서, 어떤 이는 문학에서, 또 삶에서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스토리텔링을 도시에 적용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이 공간이 우리와 동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스토리텔링은 시작한다.

 

객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을 사람과 함께 하는 장소로서 존재하게 하는 요소,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고, 이러한 스토리텔링에 의해서 사람은 자신의 공간과 일체가 되는 모습을 보인다.

 

스토리텔링이 있는 도시 하면 우선 남원이 떠오르는데, 남원 하면 춘향이를 생각하고, 우리는 남원에서 춘향전을 읽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도시가 무언가와 연결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애향심뿐이 아니라, 관광 산업으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으며(오죽했으면 강원도의 어느 도시와 전라도의 어느 도시가 서로 자기네 고장이 홍길동의 고장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을 일으켰겠는가) 도시를 설계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여 이 책은 부천과 인천, 그리고 춘천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어떻게 도시에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만화도시로서의 부천, 개발되는 지역으로서의 인천에서도 검단 지역, 그리고 자연적 여가공간으로서의 춘천...

 

이 도시들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책에서 담아내고 있기에, 도시에 이야기를 입히고자 하는 사람들은 읽을 만한 책이다. 다만 도시 자체에서 어떤 스토리텔링을 찾아내고,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데, 도시와 스토리텔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들어서 아쉬웠다.

 

도시를 기획할 때 어떤 이야기를 그 도시에 담아내는 노력에도 중점을 두고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특히 검단에서는 이미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담으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으니, 그것보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담은, 그 이야기가 담긴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에서는 다양한 문화와 스토리텔링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스토리텔링이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서 작동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

 

이야기는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존재했던 것. 나에게 이야기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 마찬가지로 내가 살고 있고, 내가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스토리텔링이라는 외래어로 이야기를 하지만, 이미 스토리텔링은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책.

 

이야기는 바로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삶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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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은 근본주의다.

 

이렇게 말하니 무언가 대단한 것 같다. 무서운 것도 같다. 타협을 모르는, 웬지 꽉 막힌 그러한 잡지 같다.

 

몽상가들의 모임 같기도 하고... 실현 불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동키호테들의 모임 같기도 하고, 또 그냥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이상주의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근본주의에는 원칙이 있다. 아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이 있다. 그래서 녹색평론은 근본주의를 포기하지 못한다. 이 때의 근본주의는 꽉 막힘이 아니라, 우리 삶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된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늘 앞서서 문제제기를 녹색평론이 해오지 않았던가.

 

환경이니 생태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도 녹색평론은 삶의 기본적인 모습에 대해서, 어떤 것이 사람다운 삶인지에 대해서, 공존하는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지 않았던가.

 

이제는 핵이니 생태니를 떠나서 우리 사람들이 존엄한 삶을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한 고민이 "기본소득"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의견. 얼핏보면 공상에 불과할 주장으로도 보인다. 노인들에게 기초연급을 20만원씩 주자는 공약을 내세우고도 재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이 현실에서, 노인도 아니고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돈을 주자고 하는 주장은 공허하게도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면 그 사람은 적어도 굶어죽을 걱정은 하지 않으니 자신의 삶을 충분히 누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돈이라는 것은 지금 모자라지 않는다. 넘치고 있는데, 그 넘침이 생산적이지 않은 부분으로 모여들어서 문제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처음에 무상급식도 무슨 무상급식이냐, 왜 부자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느냐, 무상급식을 하면 일하지 않고 얻어먹으려는 습성만 들게 된다는 둥 많은 반대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어떤가, 무상급식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이와 마찬가지로, 기본소득도 충분히 재원을 마련할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이 실현이 되면 삶의 질이 상당히 높아질 거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진보정당에서도 기본소득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이미 외국에서는 이런 주장으로 상당한 득표를 하고 있는 정당이 있음에도, 이상한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래, 녹색평론이 얼마 전부터 계속 기본소득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근본주의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은 되돌려지지 않고 앞으로 주욱 나아갈 것이다.

 

우리 사회에 기본소득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는 녹색평론. 이번 호 꼼꼼하게 읽으면 왜 기본소득이 도입되어야 하는지, 그것을 우리는 반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밀고 나가야 함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일리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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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아니라 우기다.

 

우기와 건기로 나뉘어지고 있는 건지.

 

한 달이 넘게 비가 내리다 그치다 하고 있다.

 

남부지방엔 비는 커녕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하던데, 중부지방엔 햇살을 보기 힘든 날이 한 달이 넘어갔으니...

 

그러한 장마가 잠시 주춤하더니 며칠 반짝 해가 났다.

 

밀린 빨래를 하고, 눅눅해진 집안도 보송보송하게 하고.

 

그것도 잠시 다시 비다.

 

와, 지겹게 비가 온다.

 

이런 날씨에 우리나라 정치를 대입시킨다.

 

누구는 햇볕 정책을 퍼주기 정책이라고, 우리나라를 망가뜨리는 정책이라고 했는데...

 

그 때 햇볕정책이 이루어졌을 때 과연 우리는 힘들었던가.

 

위기의식을 느꼈던가.

 

남북간의 갈등이 이리도 심했고, 긴장이 고조되었던가.

 

아니지. 그건 아니지.

 

그 때는 지금의 장마와는 달리 서로의 얼굴이 펴질 때였지.

 

남북에도 따스한 기운이 넘칠 때였지.

 

햇볕이 얼마나 고마운지, 얼마나 좋은지 그 땐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렇게 지리한 장마가 계속될 때 햇볕의 고마움은 마음에 다가온다.

 

한 번 경험한 햇볕.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게 해야지.

 

삶창 이번 호에서는 갑과 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동안 을에게는 이보다 더한 장마는 없었으리라.

 

장마에, 홍수에 온갖 피해를 보던 을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을도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 이제는 갑과 을이라는 말을 쓰지 않도록 한다고 하는데,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서 갑과 을이라는 관계가 존재하지 않게 해야지.

 

간신히 을에게 비치는 햇살들, 그들을 따스하게 해주는 햇볕들, 그것이 사라지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삶창, 지리한 장마를 녹이는 따스한 햇볕처럼 이 책, 그렇게 다가온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눅눅해진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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