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참 좋게 읽었던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시도 꽤 있었고... 무엇보다 시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서 더 좋았고.

 

제목이 "시간의 그물"이다 보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는 이미 변해버린 고향, 즉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이야기와 변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 따라서 상실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들이 제법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릴 적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는데, 그 땐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월의 무게를 느끼는 나이가 되어가고, 세상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나 자신은 점점 더 작아지고... 꿈은 사라지고, 현실은 어두워지고, 갈 길은 먼데, 앞은 보이지 않는 듯하고...

 

시집을 넘기면 처음에 이런 시가 나온다.

 

신발

 

신발의 문수 바꾸지 앟아도 되던 날부터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간 친구여

하나 둘씩 내 곂을 떠나간 꿈이여

 

이재무,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년 초판. 11쪽

 

나이를 먹어감은 상실과 통하는 나이, 현실적이 되어갈수록 점점 자신의 꿈과는 멀어지는 나이. 어릴 적 자신을 잃어가는 나이. 그런 나이듦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신발의 문수.

 

신발의 문수를 바꾸지 않아도 되던 날, 이는 어른이 된 날이고, 어른이 되었음은 현실적이 되었음이고, 현실적이 되었음은 삶에 자신이 얽매이게 되었음이고, 삶에 얽매이게 되었음은 친구들과 만나는 횟수를 줄이는 나이가 되었음을, 많은 꿈들을 접고, 오로지 생활을 위해서 전념하는 나이가 되었음을, 씁쓸하지만.. 그런 나이듦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적인 나이는 먹을수록 꿈을 잃어가겠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먹어도 먹어도 꿈을 잃은 나이는 아닐터...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시대의 변함이 결코 좋은 쪽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 터이다.

 

하여 이런 나이듦에 대한 시가 한 편 더 있다.

 

마흔

 

몸에 난 상처조차 쉽게 아물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겪는 아픔이야 오죽하겠는가

유혹은 많고 녹스는 몸 무겁구나

 

이재무,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년 초판. 99쪽

 

불혹의 나이. 그러나 몸이 무거워지고, 미혹되지 않음은 어쩌면 도전하지 않음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시가 하게 한다. 그래, 나이듦은 어쩌면 안주일지도, 그 안주를 통해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정신은 도전을 포기하는, 하여 실패로 인한 마음의 아픔은 회복 불가능할 수준까지 이르는 그런 나이.

 

그렇다고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을 수만은 없는 일. 녹스는 몸, 무겁더라도 움직여야 한다. 움직임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이듦에 대한 시 속에서 요즘 정치 상황과 맞물려 내 눈에 쏙 들어온 시가 있었으니..

 

                        도배공

 

이미 벽과 한몸이 되어버린 낡은 벽지

벗겨내는 일 여간 고되지 않다

보라, 안간힘으로 버티는 저 완강한

기성의 아집과 집착을

그는 그만 이쯤에서 오래된 고집과 타협하고 싶어진다

갑자기 그는 일을 서두른다

낡은 벽지는 더 많이 아주 오래 살아남는다

 

이재무,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년 초판. 78쪽

 

우리들이 바로 이 도배공과 같지 않았을까... 낡은 벽지를 싹 걷어내고, 아주 말끔하게, 완전히 걷어내고, 그 자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그 다음에야 새 벽지를 발라야 하는데, 우리는 힘들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또다른 이유로 낡은 벽지를 완전히 걷어내지 않고, 그 위에 그냥 새 벽지를 덧붙이지 않았던가...

 

곰팡이가 슬어있는 벽지 위에 바른 새 벽지. 과연 새 벽지 역할을 할까. 지금까지 우리가 발랐던 벽지들은 이런 낡은 벽지 위에 발랐기에 이상하게도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하고, 낡은 느낌을, 곧 곰팡이가 스는, 쾨쾨한 냄새를 풍기는 벽지로 변하게 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정치가 이렇지 않았을까. 정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 우리는 정말로 새 벽지를 바를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가.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대충 더러운 것들이 보이지 않게만 가리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새 벽지 안 쪽에 얼마나 많은 낡은 벽지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 썩어버린 벽지들이 새 벽지까지 썩게 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뉴스를 보기가 싫어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꼴은 알아야지 하고 보다보면 낡은 벽지에서 스며나오는 그 더러움이 새 벽지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만들어버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눅눅해진다. 마음이... 그러면 안되는데... 이제는 정말로 깨끗이 긁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벽지를 발라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재무의 시집... 어쩌면 나이 들어감에 대하여 쓴 시들이기도 하겠지만, 낡음을 제거하지 않고, 낡음 위에 덧붙여진 새로움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보여주는 시들도 상당수 있으니... 세월은 우리 육체를 늙어가게 하겠지만, 반대로 우리의 정신은 더욱 젊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이 시집을 읽으며 그래야 한다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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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만드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상상력
조윤경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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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도로 변해가는 시대.

 

보편성이라는 말보다는 개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대.

 

그래서 함께 한다기보다는 자신만의 무엇을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지금. 과거와는 분명 다른 모습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우리는 새로운 문화라고 하고, 또 그러한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새로운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과거와 단절을 해야 하지만, 또 그 단절이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단절이어서 그렇다.

 

그냥 허공에 붕 떠있는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에 받을 딛고 있는 그러나 눈을 하늘을 바라보는, 과거를 딛고 현재에서 미래를 실현하는 그러한 상상력.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하는 상상력. 하여 그것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되는 것이다. 물론 상상력은 늘 새롭다. 굳이 새롭다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지만, 새로운 문화를 강조하는 의미에서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이런 새로운 문화는 우선 혼종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문화를 창출해내고 있으며, 한 곳에 정착하는 정착민의 문화가 아닌,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목민의 문화를 생성해내고, 다양한 매체들을 십분 활용하여 그 매체에 맞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그런 문화들이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이 현재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나아가면 더 의미가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지구촌, 세계화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는 한 나라 안에서만 문화가 향유될 수 없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일이니, 이제 문화는 어느 한 곳에 머무는 문화가 아니라, 세계인들이 각자 따로따로 문화를 만들어내고 향유하고 있지만, 그것이 또한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 함께 하는 문화가 되는 시대.

 

그래서 문화는 유목민의 문화가 되는 시대다. 싸이의 노래를 보라.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그 노래는 우리말로 불려졌지만, 세계인들이 함께 즐기는 노래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따로 또 같이'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순수한 예술 장르에만 국한된 예술에 머무르지 않는다. 미술과 음악의 접합, 미술과 문학의 접합, 만화와 영화의 접합 등등 많은 장르들이 서로 넘나듦으로서 자신들의 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다.

 

이러한 풍요로움에는 매체의 발달, 과학기술의 발달이 한 몫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융합하려는 노력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4부에서는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해온 사람들과 한 인터뷰가 실려 있다.

 

고 장영희 교수에서부터 컬러리스트 한승희, 게임 아트디렉터 장홍주, 그래피티 아티스트 JNJCREW, 생태주의 뮤직 퍼포먼스 노리단, 아티스트 김치샐러드까지... 특이한 활동, 또는 정통적인 활동을 한 사람들과 한 이야기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이제는 기술의 시대를 넘어 문화의 시대가 되었다. 그것도 전세계가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의 시대. 그렇다고 자기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버려서는 안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

 

어쩌면 이 말이 지금 새로운 문화에 맞는 말이기도 하리라. 따로따로 가지만, 결국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문화. 그러한 문화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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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영화 찍자 - 청소년 감독이 씹어 먹어야 할 레알 real 130가지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2
안슬기 지음 / 다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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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관심있는 학생이 늘고 있다

 

영화를 전문적인 감독만이 만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자신들은 단지 영화관에서 이미 만들어진 영화만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청소년들이 줄고, 청소년들 자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직접 만들어보려고 시도하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세상의 어떤 일이 누구는 해도 되고, 누구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겠는가. 게다가 요즘처럼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서는 비싼 장비만을 이용해서 영화를 만들지 않고, 핸드폰으로도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 청소년들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나 시간이 적다보니, 이들은 주로 핸드폰이나 컴퓨터와 가까이 지내게 되는데,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이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일은 도를 깨우치는 일이다

 

도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 여행에는 필요한 것들이 많다. 그냥 무작정 떠났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되겠지 하고 영화에 달려들었다가는 시간과 돈을 허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사람도 잃고 또 자기가 그렇게 좋아했던 영화까지 잃게되는 경우가 있다.

 

영화를 만드는 일에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여기에 영화를 만드는데 필요한 130개의 지침이 있다.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기도 했고, 또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지니고 있으며(특이하게도 수학교사란다), 동아리 활동으로 영화를 만드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저자가 청소년들이 영화를 만들 때 명심해야 할 사항들을 교사답게 잘 정리해서 알려주고 있다.

 

도를 깨우치는데 스승이 필요하듯이 영화를 만드는데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역할을 이 책이 하기로 하고 있다.

 

그런데 첫 장이 참 도발적이다. 영화 만드는 일, 힘들다. 그러니 포기하라고 한다. 자꾸 포기하라고 강조한다. 그만큼 영화를 만드는 일은 도를 깨우치는 일만큼 힘든 일이라는 거다.

 

도를 깨우치겠다고 출가하여 용맹정진하지만, 결국 깨우침까지 이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도 마찬가지리라.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청소년들에게 경고한다. 정말로 자신을 버리고 영화에 미치지 않겠다면 영화 만들 생각 아예 하지 마라고.

 

영화 감독은 가끔 프랑켄슈타인이 된다

 

사람들은 착각을 한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라고. 그러나 책을 읽어보면 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사실 괴물이라는 건 인간이 지닌 편견이다. 그는 창조물이다)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해낸 박사의 이름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해낸 인물에겐 이름이 없다. 그냥 그는 괴물로 우리에게 인식될 뿐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인간의 온갖 신체부위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켰다.

 

자, 보라. 영화 감독도 인간 세상의 온갖 일들을 모아 새로운 세상을 스크린 위에 만들어낸다. 그는 필름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인간을 창조해낸다.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이 창조한 생명체가 마음에 들었다면 이름을 붙였을 거고, 또다른 제2의 생명체를 자발적으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생명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생명체를 버려두고 도망친다.

 

즉 그는 창조는 했으나 그 창조물에 실망을 하고 도피를 하고 만다.

 

이런 경우를 편집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편집을 할 때 그간의 활동으로 절망하여 편집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래도 편집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얘기. 그것은 그동안 함께 해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며, 자신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면서 영화에 대한 예의라고.

 

하여 감독은 프랑켄슈타인이 되면 안된다.

 

감독은 조물주가 되어야 한다

 

조물주를 신이라고 해도 좋겠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면 신은 인간에게 많은 실망들을 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인간들에게 벌도 내렸지만 결국에는 인간을 사랑으로 감싸안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감독도 영화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는 영화에서는 조물주가 되는 것이다.

 

신도 인간에게 실망을 했듯이 감독도 자신의 작품에 실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도망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감독은 아무리 실망을 했어도 다음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인간에게 최후로 남은 것이 희망이라는 것은 고무적이다. 인간도 희망을 최후까지 지니고 있는데 하물려 신임에랴.) 갖고 창조물을 대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감독의 태도라는 것이다.

 

영화에 대해서 전지적인 관점을 지니고, 그러한 관점을 행동으로 옮기며, 끝까지 자신의 창조물을 책임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얘기가 이 책의 전반을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부터, 스탭 구성, 배우 선발, 촬영 준비, 촬영, 그리고 편집, 편집 이후에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알린 다음에 함께 나누기 등등 영화의 모든 것에 대해서 알기 쉽게 조목조목 알려주고 있다.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은 조물주의 위치에 올라야 하듯이, 이 책은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것들에 대해서 조물주처럼 알려주려고 하고 있다.

 

애정을 가지고, 앞에서는 영화 만들지 마라고 하지만, 사실 영화 만들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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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문학 동문선 현대신서 37
로버트 리처드슨 지음, 이형식 옮김 / 동문선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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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문학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단순하게 영화와 가장 가까운 문학이 소설이라고 생각해서 소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책들을 주로 읽었는데, 이처럼 영화와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이 있어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나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 읽게 되었다.

 

문학이라고 하지만, 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오기는 하지만, 주로 시와 영화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을 쓴 사람이 영화비평가도 아니고 영문학자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전공은 아무래도 영시인 것 같은데.. 영시 중에서도 모더니즘 영시 쪽이라고 한다.(옮긴이의 말 참조)

 

시와 영화라?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시를 영화의 중심 내용으로 삼아 영화를 만든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시"라는 영화가 있지만, 이것은 한 나이많은 여자가 시를 배워가고 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나타내는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시의 특성과 영화의 특성이 교차되고 융합되는 영화로 받아들이기는 좀 힘들었는데...(아직도 영화를 분석적으로 보는 능력이 부족하고, 그러한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른 장르의 예술들과 비교하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을 보면 시의 구성이나 표현 방법과 영화의 구성이나 표현 방법에서 많은 유사점을 찾아내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고 하여 새로운 경향을 실험하고, 새로운 유파를 형성해내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읽으면서 왜 영화나 시들이 다 오래된 것들이지 하는 의문이 들었었는데, 왜 그런지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60년대라는 것을. 그러니 작품들이 다들 20세기 초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감독도 영화도 마찬가지고.

 

영화가 막 중심 문화로 자리잡을 때 영화와 다른 예술을 비교 통합하는 책을 썼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잘 다루고 있지 않은 형태의 유사성, 표현의 유사성 등을 논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에 들어온 소설 기법이라든지, 시의 기법이라든지, 또는 영화로 인해 변한 소설, 시의 기법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세상은 어떤 것이든 홀로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섭' 또는 '융합'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요즘,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일들은 이루어져 왔고, 또 연구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영화를 영화만으로서 끝내지 말고 다른 것들과 연결해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또는 그러한 생각을 해야겠다는... 그것을 초기의 영화와 소설, 시에서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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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 장마란다. 어떤 곳은 비가 와서 농사가 안 되고, 어떤 곳은 지나친 가뭄이라서 농사가 안 되고...

 

이래저래 넓은 땅덩이를 자랑하는 나라다.

 

그러나 이 넓은(?) 땅덩이에서 겪는 기후로 인한 어려움보다는 농민들을 더 힘들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무얼까? 우리는 답을 알고 있지 않나? 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겉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왜? 농민들은 힘이 없으니까? 농업은 구시대의 산업이며, 누구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때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귀농을 하려는 이유가 땅과 더불어,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그리고 자신도 살리는 그러한 농업을 하러 가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도시의 삶에 지쳐서,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껴서 농촌으로 내려간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준비 없는 귀농 결과 어떤 사람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오고 말았다고도 하니...

 

농촌에 가도 먹고살 일이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농촌에 가도 자급자족하기 힘든 실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논보다는 과일 농사에 더 주력을 하고 있으며, 무슨 환금작물이라는 이름으로 돈이 되는 작물에, 축산에 몰려들고 있는 현실이니...

 

이게 농민탓이랴?

 

어떻게 농민을 탓할 수 있는가?

 

그동안 얼마나 농민을 홀대했는가?

 

신자유주의가 시작되기 전에도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농민을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정책을 펼쳤고, 굶주림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단일작물을 심게해 병충해에 취약하게 만들었으며, 외국 농산물의 수입을 개방해 농민들이 살기 더욱 힘들게 하지 않았던가.

 

며칠 전부터 이중기의 이 시집을 읽고 있었다. 내용이 어렵지 않은데, 이상하게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 자꾸 곱씹어야 한다. 물론 사투리가 있어서 낱말의 의미를 유추하는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그만큼 내가 농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리라.

 

또 이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시 '밥상 위의 안부'를 읽고 또 읽고 계속 곱씹어 읽는데, 의미가 확 하고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그렇다고 마음에 확 들지도 않는다. 시집 뒤에 있는 해설을 읽어도 이 시에 대한 언급은 없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을 시인데...

 

하여 전문적인 시평을 할 것도 아니고, 이 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시들로 넘어갔다. 다른 시들 중에 마음에 와닿은 시들이 제법 있다. 눈물겹도록 슬픈 시도 있고, 슬픈 상황에서도 해학이라고 해야 하나, 웃음을 머금게 하는 시도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가 명심해야 할 시.

 

비교우위론에 대한 경고

 

게릴라전을 펴는 비교우위론에서

쌀은 굶주린 자의 빛나는 희망이 아니라

살아남을 자의 생애를 대변합니다

 

소말리아의 죽음잔치는 인간의 예언입니다

 

이중기, 밥상 위의 안부, 창작과비평사, 2001년. 72쪽

(이 시집의 51쪽과 68쪽에 이러한 비교우위론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표현한 시가 있다. 이 세 시는 서로 연결된다.)

 

이중기는 시인이자 농민이다. 그는 농촌에 살면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이 어떻게 망가져가고 있는가를 목격했고, 경험했고, 저항한 사람이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저항이 처절하게 드러나 있다. 농촌의 실상이 진실되게 드러나 있다. 젊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 그리고 쌀이 아닌 과일을 재배하는 농민의 슬픔 등이.

 

그래서 슬프다. 우리는 밥상을 받으면서 안부를 묻고 있는지, 밥상에는 단순히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음식만이 있지 않고,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 미래가 있음을 이 시집을 읽으면서 깨우칠 수 있었는데...

 

농담식으로(사실은 진심이다) 앞으로 가장 유망한 직업은 농부라고 말하는데...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동물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고, 우주를 살릴 수 있는 직업, 그것은 직업이라기보다는 바로 우리의 삶 자체이다. 그것이 바로 농부의 삶이다.

 

돈을 추구하는 농부가 아닌, 삶을 추구하는 농부. 그리고 그런 농부들이 웃으며 살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내가 꿈꾸는 나라 아니던가.

 

그 때서야 농부는 미래의 가장 유망한 직업이 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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