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나온 시집이라 그런지 알라딘에서 찾을 수가 없다. 알라딘이 설립되기 전에 나온 책이니, 상품으로 등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지금은 절판이 되었을 것이고... 검색해 보니 알라딘 중고에는 한 권이 있다. 판매자 중고로 뜬다. 그런데 값이!


  지금 구할 수 없는 책들, 한때 사람들에게 사용가치로 다가왔던 책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교환가치가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책이 화폐처럼 교환가치가 우선이 되면, 책은 아무에게나 다가가지 못한다.


  이 정도로 세월이 흐른 책은 도서관에서도 퇴출이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만나기 힘들어지니, 사용가치는 줄어들지라도 교환가치는 높아지기 마련.


자본주의 사회의 희소성 원칙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시영이란 시인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 이시영 시인은 짧은 시들을 쓰는 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시집 역시 짧은 시들이 많다. 


그래 많지 않은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녹여내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 표현되지 않은 언어 사이에서 사람들이 상상의 날개를 펼치도록 하는 것. 그것도 시인이 할 역할이지 않을까 싶고. 그런 역할을 잘하는 시가 내게는 사용가치가 높은 시인데...


이 시집의 제목이 된 시는 '가을 꽃'(12쪽)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첫행에 '진리의 길은 멀다 친구여'라고 되어 있다. 그냥 길이 먼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이 먼데, 시인은 그런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이 시집에 시인에 관한 시는 두 편이 있다. 한 편은 한글로 '시인' 또다른 시는 한자어로 '詩人'. 그리고 '詩를 쓰려면'이란 시가 있다. 이 세 편의 시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겨울 나무'란 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우선 시인이란 시 두 편을 보자.


     시인


삶이 경이인 사람

언제나 새벽 바다에서 애기처럼 돌아오는 사람

돌아와 설레는 발자욱을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

해지는 저녁 바다가 밀물져 오면

쓰라린 갈매기 몇 마리와 함께  

다시 시작하는 사람

넘치는 밤 파도와 맞서 싸우는 사람

밤새워 늙은 섬처럼 일하는 사람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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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


일하는 사람만이 세계의 기쁨나무를 후려쳐

쫙 벌어진 기쁨의 알밤 열매 거둘 수 있고

일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한겨울 시린 노고목(老枯木)의 밑뿌리를 도타이 감싸

이듬해 봄

그 오랜 등걸에서도 어린 새순이 자라게 한다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31쪽


이런 사람이 시인이다. 어렵지 않은 말로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 시인 자신은 어떤 시를 쓰고 있나? 과연 자신이 시인이라고 정의하는 존재에 걸맞는 시를 쓰고 있나 반성하고 있다.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연상시키는 그런 시인데...


  詩를 쓰려면


시를 쓰려면

온몸에 저를 실어

산 같은 무게로 바위 같은 몸짓으로 활활 타오르는

넋의 푸른 숨결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느 날 만년필 끝에서 쉽게 풀어지고 씌어지는 나의 시여

너에게는 피의 냄새가 없다

말의 탐욕만이 있을 뿐

관념의 허상만이 있을 뿐

살아 있는 사람의 노여움 긴 긴 입맞춤이 없다

그 몰아치는 폭풍 속의 서늘한 눈빛이 없다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39쪽.


윤동주는 일제시대, 그 엄혹했던 시절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라고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 있는데... 


이시영 시인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시가 시대에 맞서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고 있다. 이 반성이 반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앞의 '시인'이란 두 시에서 말했듯이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인은 냉혹한 세상에 따스한 온기를 전달하려 한다.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그것을 버티고 새순을 내게 하는 일... 힘든 존재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것.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 시인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런 시인들이 있음은 당연하고...


하여 이 시집에서 '겨울 나무'란 시가 바로 이 세 시를 아우르지 않나 싶다. 


 겨울 나무


나무는 

겨울 나무는 옷 모두 벗고 아랫도리 벗고

영하 12도의 아파트 광장에 서서

아직도 제게 남은 온몸의 더운 기운을 

언 땅에 주고는

밤 하늘에 저렇듯 엄연하구나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20쪽


이런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존재를 작년 겨울(올 봄에)에 보았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날씨에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어주던 사람들을. 아스팔트에 있던, 광장에 있던 수많은 시인들을.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시였음을. 그런 시들을 통해 우리가 지금에 이르렀음을. 1988년에 발간된 시집. 1987년 민주화운동을 소환하고 있는 시들도 있는데, 그 시들과 작년(올초) 상황이 겹쳐지는데...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의 온기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듯, 87민주화운동을 거친 시대의 온기가 이싱영 시인을 통해서 전해지고, 그것이 2024년-2025년 광장의 수많은 사람들의 온기로 우리 사회를 따스하게 했다면, 그것이 지나친 억측일까?


이래저래 이 시집은 내게는 '교환가치'보다는 '사용가치'가 훨씬 높은 그런 시집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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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03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랫도리 벗고 영하 12도의 날씨에 광장에 서 있다는 표현이 정말 날카로운 시인의 시선입니다.

kinye91 2025-11-03 09:15   좋아요 0 | URL
네,맞아요. 이런 시인의 시선을 만날 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곤 합니다.
 
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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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다. 한 사람의 성장기. 물론 어른이 되었다고 세상 살기가 더 쉬워졌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는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그 힘듦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 그래서 계속 살아가려 한다.


장미숙. 학생 때 아이들은 '미숙아'라고 부른다. 이름 뒤에 호칭을 드러내는 조사 '-아'를 붙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미숙아'라는 명사로 부른다. 제대로 되지 않은 아이, 부족한 아이라는 뜻이다.


예쁘지도 그렇다고 특출나게 공부를 잘하지도 않는 아이. 이름으로 놀림을 받는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제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사람을 미숙아라고 하는 아이들, 자신들은 미숙하지 않다고, 잘살고 있다고, 너와 다르다는 의미에서 '미숙아'라고 부르면서 배제를 통하여 자신들끼리 어울린다.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들이 미숙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하지만 미숙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여기에 전학 온 친구와 가까워지지만 그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신의 가정사가 소설로 나타나자 더이상 친구 관계로 지낼 수가 없게 된다.


결국 미숙이와 가까웠던 친구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미숙을 이용한 꼴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미숙이의 부모를 생각할 수 있다. 분명 문학을 통해 만났을 남녀가 결혼을 한 다음 남자는 계속 문학활동을 하고, 여자는 그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문학을 포기하는 그런 모습이 미숙의 친구 모습에 겹쳐진다) 학교를 그만두고 독립 생활을 하는 미숙. 취직한 회사 역시 작은 회사다. 그렇게 미숙은 잘나간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잘나간다고 할 수 없지만 미숙이 여전히 미숙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나? 그건 아니다. 미숙은 관심에서 멀어졌던 개를 데리고 와 보살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방치된 자신을 보는 듯했을 터.


방치된 개는 똥도 먹고 지저분하게 지내게 되는데, 이는 가난한 집의 환경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기대에 차 온갖 관심을 받고 보살핌을 받던 존재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무시당하고 방치되는 생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 환경으로 인해 점점 더 힘들어지는 생활. 미숙의 생활도 그러했으리라. 그런데도 미숙은 이런 개에게 관심을 가져준다. 마찬가지로 미숙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나타난다.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 그런 존재와의 만남은 지금까지의 삶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미숙은 이제는 똥을 먹지 않는 개와 산책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개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미숙. 그 삶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라도 미숙은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고 있다.


가난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미숙의 아버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면, 그러한 가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미숙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삶에 미숙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처음 살아보는 삶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모두 '미숙아'인데 이런 '미숙아'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주변의 도움으로, 또 자신의 힘으로...


우리 모두가 미숙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공유한다면, 미숙한 존재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도우면서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화에서 미숙은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려고 할 뿐이다.


그런 미숙이 성숙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미숙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 만화.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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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널로그 - 생존과 쾌락을 관장하는 놀라운 구멍, 항문 탐사기
이자벨 시몽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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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문에 얽힌 이야기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호사가들이나 심심풀이로 항문에 대해 탐색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을 읽어보면 아니다. 항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긴 항문이 없으면 사람이 배설을 하지 못하니, 살아가기 힘들겠지. 이 책에도 신체의 각 기관들이 서로 자기가 대장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항문이 자기 문을 꼭 닫아버리자 다른 신체기관들이 맥을 못 추는 장면, 그래서 항문을 대장으로 인정하자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문을 감추기기에 급급한다. 세상에 누가 항문을 내놓고 지내려 하겠는가. 현대에는 더더욱. 한데 이 책을 읽어보면 항문에 관한 많은 예술작품이 있으니, 꼭 감추려고만 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학적인 정보도 제공하고,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다른 동물들은 걸리지 않는 항문 관련 질병을 앓기도 하니, 여기에 태양왕이라고 불렸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치루로 고생을 했다는, 그의 수술에서 불렸던 노래가 영국에서 거의 국가 취급을 받는다는 내용도 실려 있고...


항문이 우리에게 주는 쾌락도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러니 프로이트도 '항문기'라는 특정한 시기를 언급하고 있겠지만, 단지 호사가의 취미라기보다는, 그동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신체기관이지만 잘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이 책이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항문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이 들어 있으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농담 식으로 했던 퀴즈가 생각났다.


'학문과 항문의 공통점을 세 단어로 말하면?'이라는. 답은 '넓힌다. 힘쓴다. 닦는다' 넓히고 힘쓰고 닦아야 하는 학문과 항문. 이렇게 보면 항문에 대해 아는 것도 학문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무튼 그냥 재미있게 읽어도 될 책이다. 물론 저자의 말을 다 믿고 따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명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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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25편의 단편소설들. 커트 보니것이 유명해지기 전에 쓴 소설들. 이미 그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되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소설들.


다양한 형식과 내용이 이 작품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보니것 특유의 유머와 풍자가 담겨 있고, 또 평화 사상이 담겨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기를 다룬 소설 '유인 미사일'을 보면 냉전시기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 대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소련과 미국의 조종사(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충돌해 죽은 다음, 그 아버지들이 편지로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소설. 전쟁광인 군인들이 아니라 냉전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다룸으로써 보니것은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반전-평화를 다루는 소설로는 '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가 있는데,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염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존재를 다룰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다른 나라의 무기를 파괴하는 쪽으로 사용할까? 그런데 왜 다른 나라의 무기를 파괴하려 하지? 그것은 다른 나라를 적국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평화를 위협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무기를 파괴하면 그 나라는 가만히 있는가? 그 나라는 침략받았다고 생각해 다른 보복 수단을 강구하지 않겠는가. 이러면 서로가 무기를 증대할 수밖에 없고, 서로서로 적대행위를 멈출 수 없게 된다.


끝없는 적대행위, 무기 개발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냉전시대 핵무기 개발의 역사 아니던가. 평화는 무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힘의 균형이라고 하지만, 그 균형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은 무기들을 개발하고, 거기에 많은 희생이 따른다. 보니것은 반하우스라는 초능력(염력)을 지닌 사람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이 전쟁을 위해 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 보니것 특유의 풍자를 보자. 특출한 능력을 지닌 반하우스 교수는 세계 평화를 위해 무기를 파괴하기로 한다.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의 무기를...


'그날 이후, 당연히 반하우스 교수는 전 세계의 무기를 체계적으로 파괴해 오고 있고 급기야 지금은 돌멩이나 뾰족한 막대기 외에는 군대를 무장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의 활약이 정확히 평화로 귀결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폭로 전쟁'이라 불릴 수 있는 무혈의 재미있는 전쟁을 촉발시켰다. 모든 나라는 적국의 간첩들로 넘쳐 나고 있으며 이 간첩들의 유일한 임무는 군사 장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뒤 그 군사 장비를 언론에 보도해 반하우스 교수의 주의를 끌기만 하면 그 군사 장비는 즉각 파괴되었다.'('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272쪽.)


참 통쾌한 풍자다. '무혈의 재미 있는 전쟁'이라니... '폭로 전쟁'이라니... 마치 "쟤가 그랬어요."라고 일러바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 일반 시민들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 반하우스 교수의 행동.


그럼 세계 권력자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오히려 반하우스 교수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자신들이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든 반하우스 교수의 거처를 찾아내 그를 제거하려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보니것은 전쟁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평화를 위한 노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반하우스 교수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반하우스 효과는 아니다'('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275쪽)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겪은 작가인 보니것. 그는 평화를 염원한다.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전쟁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린아이들의 고통을 '난민'이라는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아이들. 자신의 아빠를 찾으려는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에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소설이 몇 편 있다. 미래를 살아갈 세대가 현재에 고통을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짓말'이란 소설을 보면 명문고 입학과 관련된 일들이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역시 '특목고'라고 해서 그러한 일을 겪고 있다. 여기에 소위 명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태. 하지만 보니것은 명문가 사람들도 염치가 있음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이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모습과, 어른들의 위선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염치 있는 명문가 사람의 모습인데... 우리는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에서 잘나간다고 하는 집안 사람들, 과연 염치가 있는가? 그들이 자식들을 위한답시고 한 행태들을 보라. 예의, 염치는 사전에만 존재한다. 적어도 보니것은 명문가라면 그래도 염치는 있어야 한다는 점을 등장인물인 리멘젤 박사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자식의 문제에 이성을 잃고 특별 입학을 부탁하는 그의 모습. 그러나 거절당하고서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그나마 염치가 있는 명문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그래서 '이제 우린 더 이상 여기에 오지 못할 것 같아요.'('거짓말'. 361쪽)라고 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있는 집안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태도를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또한 아이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세상에 문제아는 없다. 문제 어른, 문제 사회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또 최근에 나온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연상시키는 '아무도 다를 수 없던 아이'라는 소설도 많은 여운을 준다. 그 아이의 마음을 여는 것은 어른과 사회의 몫이라는 것을...


이밖에 다른 소설들도 좋다. 환상적인 내용의 소설도 있고, 일본 소설가인 가카야 미우가 쓴 [70세 사망법안, 가결]이란 소설을 연상시키는, 생명 연장으로 사회가 겪게 되는 모습을 그린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란 소설도 지금 현대 의료과학이 추구하는 현실에 비추어 읽어볼 만하다.


돈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사지는 못한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포스터의 포트폴리오'라는 소설도 돈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다양한 소설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들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으니... 보니것의 초기 단편들이지만 그의 소설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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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을 팝니다 - MBTI의 탄생과 이상한 역사
메르베 엠레 지음, 이주만 옮김 / 비잉(Being)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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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BTI


익숙한 언어다. 자신을 소개할 때 이 검사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0000라고, 네 알파벳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아, 그러시군요. 저는 0000이에요.'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통하는 이유가 네 개 중에 몇 개가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또는 맞지 않는 이유가 네 개 중에 몇 개가 맞지 않아서라고,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저렇게 행동한 이유가 이런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학교에서는 이 검사를 통해 학급을 나누어야 한다는 말도 한다. 적절한 검사를 통해 비슷한 성향의 학생들로 학급을 구성하면 학급 운영이 수월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런데 교육은 바로 다양성 아닌가?


교육을 받는 이유는 비슷한 것 속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름 속에서 함께 어울리는 법을 찾기 위해서 아닌가.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검사를 통해서 16가지 성격 유형을 비슷하게 섞어 놓은 학급을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이런 주장이 가능하려면 MBTI가 객관적이고 신뢰성이 있는 검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과학적으로 입증이 된 검사라는 확인을 하지 않으면, 이것을 통해 무엇을 하는 것은 믿음의 차원이지 과학의 차원은 아니다.


그렇다면 MBTI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재미로 MBTI 검사를 하고 진지함에 빠지지 않고 재미 삼아 MBTI 성격 유형을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MBTI 검사를 활용하려면 MBTI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이때 혼란은 MBTI로 모든 것을 수렴하는 것을 뜻한다. 바꾸려는 노력도 없이 '내 성격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하거나, 린 상극인 성격 유형이니 맞지 않는 게 당연해, 거리를 두자.'고 하는 태도들, 이것은 혼란이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방법을 공적인 영역에 도입해야 한다. 그러니 교육의 현장에 MBTI를 도입하는 것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 MBTI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방법이라고 하니까.


또한 상업적으로 너무 남용이 되고 있고, 검사 결과가 수시로 바뀌기도 한다고 하니,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몰라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 MBTI의 역사에 대해서 추적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사실 MBTI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MBTI에 관한 언급을 너무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재미로 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입시에, 취업에, 그리고 자신의 진로에 MBTI를 적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고, 또 그것을 굳게 신뢰하는 사람도 많다고 하니, MBTI의 역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MBTI.  영어가 아니라 우리말로 적어보면 마이어스-브릭스 성격 유형 탐구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서 마이어스와 브릭스는 사람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모녀지간이란다.


캐서린 브릭스와 이사벨 마이어스가 평생에 걸쳐서 연구하고 만들어낸 성격 검사. 그들은 사람들이 행복을 목적으로 이런 성격 유형 검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엄마인 캐서린 브릭스의 B가 앞에 오지 않은 이유가 재미 있는데... BM이라고 하면 배변(bowl movement로 책에 인쇄돼 있는데, 아마도 bowel movement의 오타일 것이다)을 연상시키기 쉬워서 딸의 이니셜인 M을 앞에 놓았다고 한다.(359쪽) 


자기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고통받지 않도록,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만나 힘들어 하지 않도록, 또한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MBTI를 만들었다고.


의도가 얼마나 좋은가? 사람들이 자괴감에 빠지지 않도록 더 많은 고통에 내몰리지 않도록,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성격 유형 검사. 이것이 긍정적인 작용을 한 경우가 많음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사람들은 마냥 부정의 늪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왜 그런지 설명할 도구가 있으니까. 그것을 합리화해 줄 성격 검사지가 있으니까. '나는 0000라서 그래'라고 하면 되니까.


이러한 긍정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에만 치우치면 그 속에서 자신을 잃게 된다. 자신의 다양함을 단순함으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인데... 캐서린과 이사벨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많은 과학기술이 그러하듯이 의도를 배반하는 경우도 많으니...


하지만 이 검사 유형을 만들기 위해 모녀가 한 노력은 인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 대해서 저자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의 선한 의도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고. 돈을 목적으로 만든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이것에 전적으로 매몰되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이 MBTI 검사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니까. 


다만, 자신을 긍정하고 더 나은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초석으로 삼을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MBTI가 만들어진 과정을 쓴 이 책을 읽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데... 저자 역시 이렇게 MBTI의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MBTI는 응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을 비정상이라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던 이들이 그 마음을 떨쳐 버리고 자기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얻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유사점들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차이점들은 격려할 수 있게 해주었다.' (403쪽)


이것이면 된다. 자신을 좀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디딤돌로 MBTI를 이용하는 것. MBTI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MBTI가 탄생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간 책이다. MBTI를 마냥 비판하지 않고, 긍정과 부정 사이의 균형을 잘 잡고 있다. MBTI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그 역사를 알려주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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