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 여성과 아동, 소수자를 외면하는 일상의 디자인을 고발하다
캐스린 H. 앤서니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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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책은 꼭 필요하다. 자칫하면 내 잘못이야 하고 개인의 잘못으로, 개인의 능력부족으로 여기고 좌절할 수 있는 문제를, 개인이 아니라 공간의 문제라고, 제도의 문제라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고 해도 지속적으로 내가 접하는 공간이 나에게 차별을 가한다면? 그때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능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간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이 책에는 왼손잡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다수 디자인된 것들이 오른손잡이를 대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왼손잡이들은 많은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이런 불편함이 학교에서는 학습능력 저하로도 연결될 수 있음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디자인의 문제... 그냥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처칠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꼭 처칠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미 몸으로 겪어서 알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건물을 빚고, 나중에는 우리가 만든 건물이 우리를 빚는다." (385쪽)

 

이런 사례로 여자 화장실 문제를 들 수 있다. 이 책에는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로 나와 토론회를 할 때를 들고 있다. 토론을 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어 각 후보들이 화장실에 갈 시간이 되었을 때, 꼭 늦게 나타나는 사람은 바로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이었다는 것.

 

왜냐, 남자 화장실보다 멀리에 배치되어 있었을 뿐더러, 여자 화장실은 멀고 찾기 힘들고 숫자가 적어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는 것.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것이 힐러리 클린턴의 게으름 때문일까? 이것은 디자인 문제다. 구조와 제도 문제인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여성에게도 이런 차별이 적용되고 말을 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한 차별을 받아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여성 화장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고치려고 실천해서 비율을 2:1로 하는 법안도 마련했다고 한다. 일률적인 비율이 아니라 수요에 따른 융통성 있는 비율로 역차별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디자인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고. 우리나라도 여성 화장실을 늘리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아직은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새로 짓는 건물들은 여성 화장실에 대해서 고려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① 공중화장실등은 남녀화장실을 구분하여야 하며, 여성화장실의 대변기 수는 남성화장실의 대ㆍ소변기 수의 합 이상이 되도록 설치하여야 한다. 다만, 행정안전부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개정 2013. 3. 23., 2014. 11. 19., 2017. 7. 26.>)

 

이 책은 그런 침묵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해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은 소수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대다수가 편리한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에 디자인의 함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디자인의 함정을 알고 고치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지적한 사항들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지 행동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우리의 권리를 알고 살자. 디자인은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지만 디자인에는 우리의 삶을 변질시킬 힘도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매일 디자인에 의해 차별당할 수도 우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디자인에 의해 정의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디자인은 변화를 만들지 않는다. 변화는 사람이 만든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장착한다면 변화는 우리 손에 있다. (386쪽)

 

참 많은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우리가 생활하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몇몇은 이미 심각성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 접하는 것들도 있었다.

 

가령 아동보호 차시트... 이것을 미국에서는(우리나라 사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좋은 제도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정면 충돌 시험만 한다고 한다. 차가 정면 충돌만 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를 차시트에 앉혀도 측면이나 좀더 빠른 속도에서 정면 충돌이 일어나면 아이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측면 충돌 실험도 해야 하고, 속도도 더 높인 실험을 통과한 차시트를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여기에 더해서 병원 문제를 짚고 있는데, 응급실, 노인을 위한 응급실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 병실의 개선도 필요하고, 이런 문제는 꼭 환자들만이 아니라 의사나 간호사들에게도 병원 디자인이 폭력이라는 것.

 

소방관들은 어떤가? 남성들이 대다수였기에 여성 소방관은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소방서 구조라는 것, 참... 반대로 남성 간호사들은 어떤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아, 그래 맞아 하고 맞장구를 치게 했던 지적... 연설할 때 원고를 올려놓는 연단. 세상에 무겁기는 왜 그리 무겁고 높기는 왜 그리 높고, 어떤 것은 사람을 가리기도 하는, 신체의 다양성을 완전히 무시한 연단의 획일성.

 

이것을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게 하고, 원고나 노트북을 놓을 수 있고, 또 여성들은 가방을 놓을 공간도 만들어 놓은 연단을 만들었다는 것. 작은 부분 같지만 이것들이 해결되면 성평등에 한발 또 신체 평등에 한발 더 다가가게 된다는 것. 그렇다. 평등은 큰부분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평등은 우리가 살아가는 아주 작은 부분들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화장실에 가방이나 물건을 놓을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 버스나 대중교통의 의자를 개선하는 것. 아이들이 자연을 쉽게 만날 수 있게 해주는 학교 건물을 디자인 하는 것,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도로 환경을 만들어놓는 것, 걷고 싶은 계단을 만드는 것.

 

계단을 이 책에서는 좋게 평가하고 있다. 사람들을 걷게 만들기 때문에 근력 운동에도, 또 비만을 줄이는 데도 기여를 한다고 한다. 다만, 계단을 사람들이 접근하기 편하게 또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에서.

 

어떤 계단은 오히려 관절에 무리를 주거나 넘어질 위험이 있다. 이런 계단을 정비하는 것도 소수를 배려하는 디자인일 것이다.

 

이 책이 지닌 장점은 문제점만 나열하지 않고, 대책을 제시하고, 이미 대책을 만든 곳이 있다면 소개해서 따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는 데 있다.

 

아무 생각없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이 여성과 아동, 또 신체가 보통에서 벗어난 사람들, 소수자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배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작은 부분, 그런 부분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디자인, 그런 디자인이 도입되도록 하는 것. 결국 모두 사람의 몫이다.

 

깨어있는 사람들. 나만 편하면 돼가 아니라, 어, 이건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겠네... 또 왜 이것이 나한테 불편하지? 나만 그런가? 나만이 아니라 누군가도 불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고쳐야지 하게 하는 책. 그런 책이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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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4: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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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3 1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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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36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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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이다. 몇몇 구절을 인용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살아온 삶을 정리해 주고 있는 구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 동안 나는 오직 하나의 길만이, 오름길만이 신에게로 이끌어 감을 분명히 알았다. 밑으로 내려가거나 평탄한 길이 아니라 오직 오름길만이. 사람들이 너무 자주 사용해서 더럽혀진 <신>이라는 어휘의 내용을 조금도 선명 선명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무능력 때문에 나는 자주 주저했지만 신에게로 올라가는 길, 그러니까 인간 욕망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향한 길에 대해서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나는 신의 세 가지 피조물인 나비가 되려는 벌레와, 본성을 초월하려고 물에서 뛰어오르며 나는 듯한 물고기와, 배 속에서 비단실을 뽑아내는 누에에게 늘 매혹되었다. 나는 항상 내 영혼이 가야 하는 길을 상징한다고 상상했던 그들과 언제나 신비로운 일치감을 느꼈다. (670-671쪽)

 

  우리들의 삶은 전체가 상승, 절벽, 고독이다. 우리들은 많은 동료 투쟁자와, 많은 사상과 거대한 일행과 함께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올라가도 정상이 이동하여 자꾸 멀어지면 다른 투쟁자들과, 희망과, 사상은 숨이 차서 더 높이 올라갈 마음이나 능력이 없어져, 우리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움직이는 정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우리들만 남았다. 우리들은 언젠가는 정상이 움직이지 않아서 우리들이 거기에 다다르게 되리라는 순진한 확신이나 교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그곳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높은 그곳에서 행복과, 구원과, 천국을 찾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들에게는 올라간다는 행위 바로 그 자체가 행복이요, 구원이요, 천국이기 때문에 올라갔다. (688-689쪽)

 

제목이 왜 '영혼의 자서전'인가 했더니, 그가 만나고 겪었던 일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견뎌왔는가를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권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젊은시절부터 계속 신을 추구하는데, 신에 대한 추구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밝히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서 니체로, 부처로 나아가지만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도달할 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다른 도달점으로 현실을 택하기도 하는데, 러시아혁명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러시아를 언급하기도 한다. 레닌이 또다른 신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카잔차키스가 도달해야 할 정점에 가는 하나의 길, 봉우리일 뿐이다.

 

따라서 이 자서전에서는 그리스와 세계 정치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정치인으로서 생활을 한 카잔차키스의 활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크레타인, 그리스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카프카스'에 흩어져서 고난을 받던 그리스인들을 조국으로 데려오는 행위만이 이 자서전에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그는 그리스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고 하겠는데... 하권에서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쓰게 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조르바가 카잔차키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잘 알 수가 있고. 이성적인 인간보다는 현실에 충실한 인간, 그런 인간에게서 불멸성을 보게 되는 순간, 깨달음이 조르바와 얽힌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 있다.

 

카잔차키스는 평생을 고뇌하며 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뇌가 극에 달할 때 그는 글쓰기로 빠져드는데, 그렇게 해서 많은 작품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만년에 '오디세우스'에 대해서 글을 쓰는데, 그만큼 그는 영혼의 항해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도달한 지점은 바로 정점이 아니라, 즉 '파우스트'에서처럼 정점에 도달해서 '멈춰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나아감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정점은 없다. 영혼에게 정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신을 추구했지만 어느 신에게도 자신을 내맡길 수가 없었다. 계속된 영혼의 여행, 오디세우스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도달해서도 안 된다. 그냥 도달하려고 가야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영혼의 여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작품을 남겨주고 있다. 작품으로 불멸성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카잔차키스의 고뇌, 영혼의 방황, 여행, 그리고 그가 도달한 지점까지 그가 쓴 '영혼의 자서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만, 구원은 멈춤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 구원은 우리가 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이 자서전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다고나 할까.

 

그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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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은 '봄'을 잉태하고 있다. 겨울의 혹독함 속에서 봄의 포근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봄은 오고 말 테니까.

 

  이번 호는 맨 뒤의 글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진경, 없어도 있는 동네의 아무것도 아닌 자들 이야기)

 

  제목에 나온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말에서 오디세우스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오디세우스... 과연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 꾀보라고 해도 좋겠고. 성공적으로 모험을 마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이 글에 나오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나 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면 '없어도 있는 동네'라는 말에 눈길이 간다. 재일 조선인들의 삶을 다룬 시"이카이노 시집"을 다루면서 쓴 글인데... 이 시집 첫째 시 첫구절이 바로 '없어도 있는 동네'라는 말로 시작한다. (132쪽)

 

'없어도 있는'과 '있어도 없는'을 대비시키면서 글이 전개되는데... 없어도 있는 자들은 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비록 현재는 없지만 미래를 만들어가는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진경은 이 글에서 '없어도 있는 것'에 속하는 인물로 카프카, 보들레르, 마르크스, 들뢰즈 같은 사람을 언급했는데(137쪽)...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박정희와 노무현으로 대변되지 않을까 한다. 상반되게 영향을 주고 있는 '없어도 있는 사람'으로서.

 

반면 있어도 없는 자들은 분명 현재에 존재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존재 여부가 불투명한 그런 존재들이다. 이진경은 '있어도 없는 것'은 있어도 존재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란 말(137쪽)이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있어도 없는 자'들은 사라져 가는 존재, 또는 사라져야 할 존재 취급을 받는 그런 부류들이란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며 이번 호 앞부분으로 돌아간다. (장영식, 영풍제련소와 민주주의, 일곱째별, 길 위의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그리고 정기석, 농업이 살아야 모두가 산다)

 

주류 언론에게서 이들은 철저하게 있어도 없는 자들 취급을 당한다. 이들은 관심 밖에 있다.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주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철저하게 없는 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진경의 논리를 따르면 주류 언론이 '있어도 없는 자' 취급을 해도 이들은 '없어도 있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들 앞으로 나선다. 탈핵희망도보국토순례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라. 이들은 거의 없는 자 취급을 받지만 있는 자로서 나선다. 행동한다. 그리고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분노로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 상처가 멍으로, 다시 치유될 수 있는, 자신을 더 강하게 해주는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없어도 있는' 사람으로 이들은 나선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는 잘알려져 있지 않다(? 알고도 모른 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만큼 농민들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 존재이면서도 '없는' 자 취급을 받았다.

 

아무리 없는 자 취급을 해도 농민들은 있는 자로 우뚝 선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다. 비록 '있어도 없는 자' 취급을 하는 존재들이 있지만, 그런 취급을 받아도 당당하게 '없어도 있는 사람,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존재들을 '삶이 보이는 창'에서 보여주고 있다.  '있어도 없는 것' 취급을 받는 존재들에게 '없어도 있는 것'이라는 존재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또 결코 그들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을 볼 수 있는 창을 마련해 주는 것, 이것이 삶이 보이는 창이 하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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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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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다. 그만큼 기억하기 힘든 이름이기도 하고. 러시아 사람 이름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러시아 이름이 자꾸만 카잔차키스 이름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자꾸만 카잔차키스라는 이름을 까먹고 '카잔키스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카, 러시아 이름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카잔차키스... 이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니)

 

그리스 사람. 그리스 문학자로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고대 작가들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대 작가들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현대 작가로 그리스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 카잔차키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비록 발음을 잘하지 못하지만.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아주 오래 전에는 '희랍인 조르바'라고 번역이 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소설 아니던가. 그만큼 유명한 작가인데...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사실 오래 전에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에 대해서 알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우리나라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인 "영혼의 자서전(상,하)'을 사 놓고, 읽지 못하고 망설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웬지 그의 삶이 내 삶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너무도 몰랐기 때문에 선뜻 손에 들기 망설여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책을 펼쳤는데... 한번 펼치자 책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삶을 살았구나.. 그가 얼마나 고뇌하는 삶을 살았는지, 격동의 시대를 거쳐왔는지를 알게 된다.

 

상권에서는 예루살렘에 간 카잔차키스까지다. 그의 삶을 추적하면 그는 이쪽과 저쪽, 즉 피안과 차안, 내세와 현세, 그리스와 터키, 그리스정교와 그리스 신화 사이에 놓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스라는 나라가 반도다. 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마주치는 곳이다. 잘하면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장소고, 잘못하면 어느 쪽에 점령당하는 운명에 처할 곳이다. 그러니 그리스 태생이라는 것이 이미 중간에 끼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 출신이다.

 

크레타 섬은 그가 태어나고 자랄 당시 터키의 지배에 있다가 그리스로 독립되었으며, 두 나라 사람들이 섞여 살던 곳이다. 그러니 그는 태생부터 경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너는 전투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나 크레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다른 방향에서 크레타 독립을, 그리스를 위해서 삶을 살아가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는 크레타인임이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

 

이런 그에게 종교와 상반되는 과학이 사춘기에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는 점점 자라면서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순례하고, 성지를 찾아가게 된다.

 

마음을 두지 못할 때, 고뇌에 시달릴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글쓰기다. 문학이다. 그는 문학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 그렇게 너무나도 힘이 들 때 그는 격정에 휩싸여 글을 쓰게 된다. 이것이 젊은 시절 카잔차키스의 모습이다.

 

절절한 고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지도 못하며 자신의 영혼이 진리를 향해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카잔차키스... 그에게 종교는 특정 민족의 종교가 아니다. 그에게 종교는 모든 사람의 종교다.

 

그는 크레타 섬 출신이지만, 그리스인이기도 하고 세계인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나사렛이라는 지방에, 예루살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도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상권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보다는, 부활한 예수에 대한 그의 소망이 더 잘 드러난다. 왜 예수의 고난만 강조하는가? 오히려 부활한 예수를 강조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이 세상에 평화와 사랑이 더 넘치지 않는가.

 

그런 관점들이 상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권에서는 젊은시절 예루살렘에서 시나이 산으로 가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의 영혼이 어떻게 정상을 향해 오르게 되는지... 살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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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8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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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8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noent 2019-12-2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는 1월 말 개봉하는   영화 <카잔자키스>도 관심부탁드려요~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 - 인간은 언제 괴물이 될까
오노 슌타로 지음, 김정례 외 옮김 / 에스파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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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를 명확히 하고 넘어가자. 프랑켄슈타인은 분명 괴물이 아니다. 그는 괴물을 창조한 인물이다. 이렇게 지적을 하면 이상하다. 왜 괴물을 창조했을까? 괴물을 창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좋은, 훌륭한, 완벽한, 쓸모있는, 아름다운 등등의 수식어가 붙기를 원한다. 창조자는 결코 괴물이라는 이름이 붙는 피조물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더라도 태초에 인간을 창조한 신은 만족한다. 물론 그 다음에 인간이 창조자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성경은 그래서 이런 괴물에 대한 이야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성경을 건드리지 않는다. 성경에서 괴물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괴물을 이상한, 무섭고, 위험하고, 힘이 세고, 말이 안 통하는 등등의 수식어가 붙은 존재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괴물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 책에서는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괴물은 블랙박스와 같은 존재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존재.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을 본래 잘 알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인간이 아무리 괴물처럼 행동하더라도 괴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같은 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다. 그러니 논의를 인간을 제외하고 시작하도록 하자. 이 책은 그렇게 인간을 제외하고,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로부터 시작한다. 누구부터?

 

바로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피조물로부터 시작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또다른 인간을 만들어낼 욕심에 창조에 몰두한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자신이 흉측한 존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겉모습은 분명 흉측하다. 그런데 우리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도 되나?

 

겉모습을 그렇게 흉측하다고 표현한 것은 피조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신이 창조했지만 피조물은 자신과는 다른 존재,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여기에서 공포가 나타난다.

 

공포가 나타나면 내가 알 수 없는 존재는 괴물이 된다. 이제부터는 함께 할 수 없는 퇴치해야 할 존재다. 그런 존재가 이 책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피조물부터 시작해서, 하이드, 투명인간, 드라큘라 등이 등장한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또는 인간의 욕망이 극한으로 표현된 것이든 이들은 괴물로 등장하고, 이들은 퇴치의 대상이 된다.

 

결국 이런 인간의 행위들이 올더스 헉슬리가 쓴 역설적인 '멋진 신세계'에 이르게 된다. 완벽하게 통제된다고 여기는 사회, 이 사회에서 괴물은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괴물은 바로 인간이 된다. 인공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존재, 통제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괴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괴물을 안고 산다. 우리 인간 자체가 이미 통제를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노래 가사 또는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고 산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불안감이 생긴다. 이 불안감을 극도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가 괴물이 아닐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이런 심리적인 면을 넘어서 왜 괴물 이야기가 우리에게 나타났는가, 괴물이야기가 지닌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까지 추구하고 있다. 뒷부분에서는 스필버그의 영화까지 언급하면서 우리가 괴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러나 괴물에 대한 통제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을 괴물이라고 여기고 그 존재를 없애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 우리는 모르는 존재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우주인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적'들을 미지의 존재로 가정하고, 퇴치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행동하게 된다. 그들을 우리와 같은 존재로 여긴다면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그래서 '테러'에 대한 영화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온다. 다른 존재를 어쩌면 괴물로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보면 피조물은 감성이 풍부하고, 공감 능력도 있는 그런 존재다. 다만, 그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공감에서 배제된 존재, 그 존재는 괴물이 된다.

 

로봇... 복제인간... 자, 우리는 또다른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들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들을 괴물로 여기고 퇴치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을 계속 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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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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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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