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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3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카잔차키스.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다. 그만큼 기억하기 힘든 이름이기도 하고. 러시아 사람 이름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러시아 이름이 자꾸만 카잔차키스 이름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자꾸만 카잔차키스라는 이름을 까먹고 '카잔키스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카, 러시아 이름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카잔차키스... 이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니)
그리스 사람. 그리스 문학자로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고대 작가들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대 작가들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현대 작가로 그리스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 카잔차키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비록 발음을 잘하지 못하지만.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아주 오래 전에는 '희랍인 조르바'라고 번역이 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소설 아니던가. 그만큼 유명한 작가인데...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사실 오래 전에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에 대해서 알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우리나라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인 "영혼의 자서전(상,하)'을 사 놓고, 읽지 못하고 망설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웬지 그의 삶이 내 삶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너무도 몰랐기 때문에 선뜻 손에 들기 망설여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책을 펼쳤는데... 한번 펼치자 책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삶을 살았구나.. 그가 얼마나 고뇌하는 삶을 살았는지, 격동의 시대를 거쳐왔는지를 알게 된다.
상권에서는 예루살렘에 간 카잔차키스까지다. 그의 삶을 추적하면 그는 이쪽과 저쪽, 즉 피안과 차안, 내세와 현세, 그리스와 터키, 그리스정교와 그리스 신화 사이에 놓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스라는 나라가 반도다. 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마주치는 곳이다. 잘하면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장소고, 잘못하면 어느 쪽에 점령당하는 운명에 처할 곳이다. 그러니 그리스 태생이라는 것이 이미 중간에 끼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 출신이다.
크레타 섬은 그가 태어나고 자랄 당시 터키의 지배에 있다가 그리스로 독립되었으며, 두 나라 사람들이 섞여 살던 곳이다. 그러니 그는 태생부터 경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너는 전투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나 크레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다른 방향에서 크레타 독립을, 그리스를 위해서 삶을 살아가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는 크레타인임이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
이런 그에게 종교와 상반되는 과학이 사춘기에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는 점점 자라면서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순례하고, 성지를 찾아가게 된다.
마음을 두지 못할 때, 고뇌에 시달릴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글쓰기다. 문학이다. 그는 문학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 그렇게 너무나도 힘이 들 때 그는 격정에 휩싸여 글을 쓰게 된다. 이것이 젊은 시절 카잔차키스의 모습이다.
절절한 고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지도 못하며 자신의 영혼이 진리를 향해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카잔차키스... 그에게 종교는 특정 민족의 종교가 아니다. 그에게 종교는 모든 사람의 종교다.
그는 크레타 섬 출신이지만, 그리스인이기도 하고 세계인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나사렛이라는 지방에, 예루살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도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상권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보다는, 부활한 예수에 대한 그의 소망이 더 잘 드러난다. 왜 예수의 고난만 강조하는가? 오히려 부활한 예수를 강조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이 세상에 평화와 사랑이 더 넘치지 않는가.
그런 관점들이 상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권에서는 젊은시절 예루살렘에서 시나이 산으로 가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의 영혼이 어떻게 정상을 향해 오르게 되는지... 살펴보아야겠다.